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에서 색욕심에 대해 별도로 언급하시며 매우 상세히 설명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다른 설법에서도 여러 차례 이 방면의 문제를 언급하셨고 심지어 구세력도 색욕심을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 물론 도덕에 어긋나는 부적절한 남녀 관계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수치스럽게 여기며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오늘 이야기하지 않겠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재 일부 부부 대법제자들(신혼부부가 아닌)이 이 방면에서 보이는 일부 정진하지 않는 표현, 심지어 대법에 대한 왜곡된 해석이다.
오늘 한 여성 수련생이 날 찾아와 이 방면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가족 전체가 수련하고 있다. 남편은 줄곧 이 방면의 마음이 매우 강했는데 나중에 감옥에서 3년간 박해를 받았다. 이 3년간 그에게 색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매우 분명한 암시가 있었지만, 3년 후 집에 돌아와서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마음은 건드릴 수 없어서 일단 그의 집착에 부응하지 않으면 화를 내고 삐치며, 심지어 한번 다투면 며칠씩 가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일부 이해를 내세운다. ‘부부 사이에 이것은 정당한 관계이므로 집착심을 버리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으며, 조화를 이루기 위해 아내에게 자신에게 협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많은 이론을 늘어놓으며 아내는 남편에게 백 번 순종해야 하고, 남편에게 의지해야 하며, 남편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아내로서의 본분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이 말을 듣고 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글픔을 느꼈다. 10여 년간 수련한 오래된 제자가 수련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아직도 대법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니 말이다.
이러한 색욕심, 또는 단순히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사람들이 입에 올리기를 꺼리는 것이다. 있든 없든, 강하든 약하든,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깊이 묻어두고 있다. 쟁투심, 명예욕, 이익심, 질투심은 하나하나 드러낼 수 있지만 이 색욕심은 당당하게 직시할 수 없다. 이 여성 수련생도 극도로 고민하는 상황에서 비로소 내게 말한 것이다. 사실 이것도 일종 관념이 가로막고 있어 교류의 금기 영역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많은 부부 수련생이 이런 문제를 갖고 있을 것으로 생각해 이 글을 쓰기로 결정했다. 이는 아직도 색욕에 빠져 있는 수련생들을 일깨워 정체(整體)적으로 제고하고,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부응하여 원만에 이르러 사부님을 따라 돌아가기 위함이다.
내 생각에 이러한 색욕심은 다른 사람마음과 마찬가지로 직시해야 하며, 모두 버려야 할 사람의 마음이다. 부부 사이는 정당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명확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정(情) 중에서 파생되어 나온 많은 집착심을 우리는 그것을 담담히 보아야 하며 최후에는 완전히 내려놓아야 한다. 욕(慾)과 색(色), 이런 것은 모두 사람의 집착심에 속하기에 이런 것들을 마땅히 모두 제거해야 한다.“
그렇다면 법에서는 부부간의 조화를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전법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난번에 나는 불광이 널리 비치니 예의가 원만하고도 밝다(佛光普照, 禮義圓明)고 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신체가 발산하는 에너지는 일체 바르지 않은 상태를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러면 이 장의 작용하에서 당신이 이런 일을 생각하지 않을 때, 모르는 가운데 당신의 배우자도 제약하게 된다. 당신이 생각이 없으면, 당신은 역시 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그도 역시 생각나지 않는다.” “장래에 고층차에서 수련하게 되면 내가 당신에게 알려 줄 필요도 없이, 당신 자신이 곧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것이며, 그때 가서는 다른 상태가 있어 조화로운 생활을 유지하게 된다.” 사부님께서는 매우 분명하게 우리에게 색욕심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고 요구하셨다. 이러한 ‘조화’는 색욕심을 담담히 본 후에 법에서 요구하는 청정한 마음의 표현에 도달하는 것이지, 속인 생활에서 조화를 찾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사람이 아닌가?
대법은 각종 집착, 각종 사람의 관념에서 벗어나야만 원만에 이를 수 있다고 요구한다. 사람의 정에 빠져 사람의 정을 즐기는 것이 수련인가? 수련했는데도 여전히 사람의 이치에 국한되어 수련인의 더 높은 표준으로 자신의 행위를 지도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 사실 어떤 말을 하든 모두 자신의 집착을 놓지 않으려는 변명일 뿐이다.
내가 알기로는 상당수 수련생들도 열심히 대법 일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변명으로 자신이 버리기 싫어하는 사람마음에 대해 합리화하고 있다. 심지어 법리를 매우 명확히 알면서도 이른바 쾌락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몇 년 전 한 자료에서 말하길, 한 노년 수련생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 매우 정진하는 것 같았지만 갑자기 목숨을 잃어 가족들이 대법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나중에 그의 배우자가 진실한 이유를 말했다. 대법이 그의 생명을 연장시킨 것은 완전히 수련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가 부부생활을 하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며칠 전, 우리 근처의 한 수련생이 전에 납치됐다가 정념으로 탈출한 후 유랑생활을 하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두 아이가 있는 아내가 임신을 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 파출소에 호적 신고를 하러 갔다가 다시 납치돼 큰 손실을 입었다. 이러한 교훈들은 너무나 많고 깊다.
수련은 극히 엄숙한 것이다. 특히 대법 수련은 사람의 심성이 절대적으로 표준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사람마음도 천국에 갖고 갈 수 없으며, 어떤 사람마음도 당신을 순식간에 망치게 할 수 있다. 게다가 색욕심은 수련에서 넘어야 할 첫 번째 큰 관문인데 수련이 끝나갈 무렵에도 여전히 처음 상태라면 될 수 있겠는가? 단지 대법제자 중에 있을 뿐 법 안에 있지 않다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법이 널리 전해지는데 몇 사람이나 얻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 만고의 기연을 소중히 여겨야 하며 절대 자신의 정진하지 않음으로 인해 대법과 스쳐 지나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법 수련의 시간이 이제 많지 않다. 집착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련해야만 원만에 이를 수 있다. 색욕 문제를 중시하지 않는 수련생들이 빨리 마음을 가라앉히고 법공부를 해서 집착을 버리고, 놓치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이번 기회를 붙잡아 빨리 잘하길 바란다. 항상 법 속에 있는 수련인, 항상 중생을 구하는 것을 생각하는 신은 여유롭게 사람의 정을 즐길 겨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진흙탕에 빠지는 것과 다름없다! 빨리 사람에서 벗어나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
개인적인 얕은 깨달음이니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면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원문발표: 2007년 2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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