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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간 감옥에서 수련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나는 너무나 불행했다. 살인죄를 저질러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감옥에 갇혔고 인생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감옥에서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얻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살아났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23년간 겪은 일들이 너무나 많아 여기에 기억나는 것만 적으려 한다. 첫째는 사부님께서 구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둘째는 자신과 수련생들에게 좋은 환경에서 반드시 정진하고 착실히 수련하며 순식간에 지나갈 수 있는 수련의 기회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이다.

1. 감옥에서 법을 얻고 새로 태어나다

1997년, 나는 살인죄를 저질러 10개월 반 동안 구치소에 수감됐다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헤이룽장성 여자감옥으로 압송됐다. 그때 나는 절망적이었고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게다가 두통, 배탈, 심장병 등 여러 가지 질병을 앓고 있어서 누군가 약을 처방받으면 뺏어 먹었는데 정말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였다. 감옥에 가서 보름간 집단 훈련을 받은 후 1감구(監區)로 내려갔다. 병에 시달려 고통스럽고 무기수라 일을 할 수 없어 점수도 딸 수 없었다. 점수가 없으면 감형도 받을 수 없기에 희망 없이 질병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죄수 할머니가 날 불쌍히 여겨 말했다. “정(鄭) 아주머니에게 가서 파룬궁을 배워보세요. 그분은 17년간 반신불수였는데 나았어요.” 그때 나는 고통스러워 죽을 지경이라 그녀가 한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4일간 계속 말했고 4일째 되는 날에야 나는 알아들었다.

내가 정 아주머니를 찾아가서 파룬궁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그녀는 놀라고 기뻐하며 내게 연공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는 아직 파룬궁을 탄압하기 전이라 많은 형사범과 경찰들도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었다. 연공을 마치고 돌아오니 배가 고팠는데, 이미 식사 시간이 지나있었다. 옆자리 사람이 놀라며 말했다. “며칠 동안 음식을 잘 안 드셨잖아요. 찐빵을 가져다드릴게요.” 그녀가 찐빵을 가져왔는데 나는 몇 입 만에 다 먹었다. 다 먹고 배가 안 찼다고 하니 그녀는 하나 더 가져왔고 나는 또 반을 먹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일 정 아주머니와 함께 연공했다. 신기하게도 구결을 잘 외우지도 못했는데 연공은 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일하러 나갈 수 있게 됐고 몸의 병은 모두 사라졌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내 몸을 정화해주셨고 다시 태어나게 해주셨다.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어 단지 이번 생에 파룬궁을 잘 수련하고 싶었다.

당시 수십 명의 형사범들이 감옥에서 법을 얻어 우리는 수련생이 됐고, 다른 감구에서도 매일 수련생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아침 5시에 우리는 연공하러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진선인(真·善·忍)의 기준에 따라 엄격하게 행동했다. 경찰은 종종 다루기 힘든 형사범에게 파룬궁을 연마하라고 말했다. 그 당시 우리의 수련 환경은 정말 좋아서 대법서적도 볼 수 있고 전자책도 볼 수 있었다.

정 아주머니 얘기를 하자면, 그녀는 집에 있을 때 반신불수였다. 세 명의 자녀가 있었고 남편은 매일 술을 마시고는 아이들을 때리고 아내를 욕했다. 그녀는 항상 기어다니며 요리를 했고 심장병도 있어서 발작했을 때마다 여러 번 불에 타 죽을 뻔했는데 모두 이웃이 불을 꺼주었다. 한번은 남편이 술을 많이 마시고 칼을 들고 아이를 죽이려 하자 정 아주머니가 낫을 들고 남편을 끌어안으며 죽였다. 그래서 그녀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나중에 항소해 15년형으로 감형됐다. 감옥에 들어올 때 그녀는 바로 환자 구역으로 옮겨졌다. 나중에 그녀의 병이 심해져 일어나지 못하고 온몸이 부었다. 다른 사람들이 숨을 거두는 것을 보며 그녀는 말했다. “나는 언제 숨을 거둘까?”

어느 날, 보석으로 나갔다 돌아온 죄수가 파룬궁 수련서 ‘전법륜(轉法輪)’을 꺼내며 책이 좋다면서 정 아주머니에게 보여주었다. 정 아주머니는 책을 들기도 힘들어 100자 정도 읽고는 잠이 들어 4시간 만에 깨어나 계속 읽었다. ‘논어’ 300자를 보고 그녀는 세 번 잠들었는데 매번 4시간씩 잤다. 마지막으로 잠에서 깼을 때 그녀가 말했다. “아이고, 내 살은 어디로 갔지?” 그녀에게 책을 가져다준 죄수가 말했다. “정 언니, 다 나으셨어요. 몸의 부종이 사라졌어요.”

정 아주머니는 “너무 신기해요. 이것은 신의 책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의 몸은 조금씩 좋아졌다. 나중에는 일어나 앉을 수 있게 되고 조금씩 다리를 꼬아 앉아보려 했다. 그녀의 다리는 곧아서 구부릴 수 없었다. 처음에 조금 구부렸을 때 콩알만한 땀방울이 떨어졌지만 그녀는 계속 노력했다. 나중에는 일어나서 연공할 수 있었고 그 후에는 걸을 수 있게 됐다. 경찰은 그녀가 나은 것을 보고 큰 감구로, 즉 내가 있는 이 1감구로 보냈다. 나와 그녀는 이렇게 인연을 맺었고 나도 대법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녀가 날 데리고 법공부를 하고 연공을 했다.

정 아주머니는 10여 년간 반신불수였기에 처음에 감옥에 누워서 들어왔지만, 감옥에서 법을 얻고 수련한 후 스스로 감옥 대문을 걸어 나갔다.

2. 거대한 난관에서 초심을 굳게 지키다

1) 수련 환경이 간고해지다

어느 날 밤, 우리가 작업장에서 야근하고 있을 때 갑자기 파룬궁수련생이 ‘톈안먼 광장에서 분신했다’는 방송을 들었다. 당시 어떤 수련생은 불가능하다며 연공하는 사람이 어떻게 분신을 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모함한 것이었다. 그래도 경찰은 우리를 상관하지 않았다. 우리가 좋은 일만 하고 일도 많이 한다는 것을 경찰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찰들은 연공하지 않는 죄수들에게 빨리 파룬궁을 배우라고 했다.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항상 좋은 일만 하고 싸우지도 않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말했다.

2003년 이후부터 밖에서 파룬궁수련생들을 납치해 들여보내기 시작했고, 납치된 사람들은 여러 감구로 보내져 일을 하게 됐다. 2004년 이후부터는 체포된 파룬궁수련생들에게 ‘전향(수련 포기)’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잠을 못 자게 하고 구타하고 밤새 외부 심문을 하며 계속 괴롭혔다. 어떤 사람은 아침에 돌아와서 울며 ‘전향서’를 썼고, ‘전향’하지 않은 수련생은 독방에 가두었다.

나중에 독방에 갇힌 파룬궁수련생이 많아지자 우리는 경찰에게 그들을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풀어주지 않으면 단식을 하겠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5일간 단식했다. 그때의 상태는 매우 좋아서 5일간 밥도 안 먹고 물도 마시지 않았지만 여전히 일할 수 있었고, 밖에 나가 눈도 치우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경찰이 5일간 내 뒤를 따라다녔다. 그때만 해도 우리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두려워했다. 나중에 박해가 오래되고 익숙해지면서 우리를 무시하게 됐고 문제가 생겨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2) ‘작은 베이징’

감옥에서 법을 얻은 우리 수련생들은 모두 담이 컸다. 우리는 밖의 수련생들이 모두 베이징에 가서 법을 수호하고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갈 수 없으니 아침 5시에 깃대 밑에서 연공을 했고 우리는 모두 그곳을 ‘작은 베이징’이라고 불렀다. 경찰은 우리를 독방에 가두고 때리고 욕했다. 방화 훈련 때는 7~8m 길이의 진상 현수막을 걸기도 했는데 우리는 독방에 갇혔고 수갑과 족쇄가 채워졌다.

이후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어떤 감구에서는 겨울 눈이 많이 오는 날씨에 파룬궁수련생들의 옷을 벗기고 눈 위에 엎드리게 해 얼리기도 했는데, 손이 얼어 새까맣게 됐다. 또 몇 시간씩 서 있게 하는 등 각종 잔인한 방법으로 박해했다. 나중에는 우리에게 점수를 주지 않아 형기를 줄일 수 없게 됐다. 어느 날 우리는 다음 날 일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다음 날 모두 다시 기계로 가서 일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나는 수련생들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진(眞)을 수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면 하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내가 사용하는 기계와 일거리를 3일간 그대로 두었다. 4일째 되는 날 대대장이 와서 물었다. “정말 일하지 않을 건가요?” 나는 대대장에게 “월급을 주지 않으면 당신도 출근하지 않겠죠?”라고 물었다. “그건 그렇죠. 그런데 몇백 명이 당신이 일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렇게 되면 다들 일하지 않을 텐데요. 당신을 독방에 보낼 수밖에 없겠어요.” 다른 감구에서도 일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독방에 갇혀 있었다.

그곳의 박해는 매우 가혹했다. 수갑과 족쇄를 채우고 낮에도 밤에도 열어주지 않았으며 한 번 들어가면 두 달이 넘었다. 우리는 거의 일 년 내내 독방에 갇혀 있었고 매번 두 달 넘게 갇혀 있다가 감방에 돌아오는 날은 하루 이틀밖에 안 됐다. 그리고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우리를 다시 가두었다.

3) 독극물 주사 맞는 것을 폭로하다

언제 우리가 독주사를 맞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첫날에 1병을 맞고, 다음날 2병을 맞아 조금 혼미해졌다. 3일째 되는 날 3병을 맞고 우리에게 푸이빈(傅怡彬) 살인 등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오랫동안 보고 나서야 날 데려와 독방에 가두었다.

그때 나는 이미 정신이 혼미해져서 코에서 피가 나고 입이 말라 가시가 돋았다. 나중에 나는 기절했고 수련생들이 사람을 불러 수갑을 풀어주었다. 한참 후에 깨어났다. 며칠 후 점검이 온다고 했는데 어느 날 오후에 오늘 ‘우차(五査)'(경찰 전문 수사관)가 온다며 독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일찍 돌아오게 하고 이따 점검하러 온다고 했다. 저녁 5시, 6시쯤 경찰이 와서 점검하러 오니 연공하지 말라고 했다.

본래 나는 연공할 생각이 없었다. 우리를 며칠 동안이나 묶어놓아서 독방에서는 아무도 감히 연공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말하니 오히려 나에게 연공하라고 상기시켜 준 것 같았다. 오늘은 이것을 돌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8시가 넘어 우리는 모두 침대에 있었는데 침대에 고리가 있어 수갑을 고리에 걸고 우리 손을 수갑에 채워 움직일 수 없게 했다. 이후 우리 수갑을 풀어주어 바닥에 내려갈 수 있었다. 나와 같은 방에 리(李) 수련생 한 명이 있었다. 그녀에게 연공하자고 하니 그녀는 “당신은 하세요”라고 했다. 나는 바닥에 내려가 연공을 시작했다. 아무도 들어와 날 막지 않았다. 사무실에 CCTV가 있어서 감시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4세트 공법을 할 때 이 수련생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보고 함께 연공했다.

연공을 마치고 거의 자정이 되어 침대에 누웠는데 잠시 후 계단 소리가 들려 경찰이 온 것을 알고 일어났다. 과연 경찰이 왔고 나는 “보고합니다”라고 외쳤다. 왕 감옥장이 ‘우차’를 데리고 올라왔다. 한 명은 나이가 많고 다른 한 명은 젊었다. 철문이라 작은 구멍 하나로만 우리를 볼 수 있었다. 내가 “보고합니다”라고 하자 그 두 명의 ‘우차’가 문을 열라고 말했다.

왕 감옥장이 문을 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왜 우리에게 독주사를 놓느냐고 물었다. 감옥장은 그것은 독주사가 아니라고 말했다. ‘우차’가 계속 감옥장을 주시하자 감옥장은 놀라서 그것은 의논해서 특별히 우리를 위해 만든 영양제라고 말했다. 내가 “독주사가 아니라면 왜 당신들은 맞지 않나요? 그리고 맞고 나면 코와 입에서 피가 나요”라고 말했다. 감옥장은 계속 ‘우차’에게 독주사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우차’는 걸어가면서 날 돌아보았고 그 이후로 나는 그 감옥장을 본 적이 없다.

4) 먹구름은 태양을 가리지 못해

나중에 수련을 고수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었다. 우리를 계속 박해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경찰들도 배웠는데 탄압이 시작된 후에는 그들도 배우지 않았다. 또 한번은 2004년쯤 우리 수련생들을 모두 한 사무실에 앉혀놓고 죄수가 우리를 감시하게 했다.

어느 날 오후 누군가 화장실에 가려고 했는데 죄수가 가지 못하게 하자 수련생이 죄수복을 벗었고 우리도 모두 벗었다. 죄수는 겁을 먹고 경찰을 찾아갔다. 경찰이 와서 우리에게 죄수복을 입으라고 했는데 벗은 것을 누가 다시 입고 싶겠는가.

그들은 우리를 박해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다음날부터 우리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사무실에 보내지 않고 우리를 모두 침대 가장 높은 곳에 매달아 놓았는데 발이 바닥에서 한 자(30cm) 높이에 있었고 각 방에 파룬궁수련생이 매달려 있었다. 밤에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면 감방마다 파룬궁수련생이 매달려 있어서 어떤 죄수는 울면서 “이게 무슨 짓이에요?”라고 말했다. 어떤 왕 수련생은 6층에서 몇 시간 동안 매달려 있어 하체가 감각이 없어졌는데 5층으로 끌고 가서 다시 매달아 놓았다. 이틀 동안 매달아 놓자 죄수복을 입는 사람이 생겼다.

또 한번은 우리가 세수하고 있는데 종이 울려 점호를 했다. 우리는 모두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겉옷만 입고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줄을 서서 점호를 시작했다. 이름을 부르면 쪼그려 앉으라고 했는데 우리는 쪼그려 앉지 않았다. 우리를 감시하던 죄수가 뒤에서 우리를 넘어뜨렸다. 죄수가 이렇게 우리를 박해할 줄은 몰랐다. 누가 감옥장을 불렀는지 모르지만 감옥장이 오는 것을 보고 우리는 모두 옆으로 섰다. 감옥장이 내게 다가오자 경찰이 감옥장에게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형사범인데도 쪼그려 앉지 않습니다.” 감옥장이 날 독방에 가두라고 해서 죄수가 날 독방으로 끌고 갔다.

독방은 5개가 있는데 1, 5번 방은 철문이고 2, 3, 4번 방은 철제 난간이다. 나는 4번 방에 갇혔다. 4월 중순인데도 날씨가 아직 추웠다. 그날 밤 나에게 이불을 주려고 했는데 감옥장이 이불을 주지 말라고 해서 다시 가져갔다. 각 독방에는 기본적으로 파룬궁수련생이 있었다. 이튿날 오전에 류 감옥장이 와서 나를 5번 방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5번 방은 춥고 물이 떨어졌다. 류 감옥장은 자신은 때리지도 욕하지도 않고 학대만 한다고 말하고 우리를 매달아 놓고 가버렸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게 됐다. 날 독방에 가둔 그날 밤 수련생들을 모두 데려가 고문을 했고 그 후에 수련생들은 점호에 응했다. 그날 밤 내가 독방에 갇힌 것은 내가 부족한 점이 있어서라는 것을 알았다. ‘사부님, 제가 부족한 점이 있어 독방에 갇혔지만 이 고비를 잘 넘기겠습니다.’ 매일 1번 방부터 밥을 주는데 한 방씩 먹고 아래로 줄을 서서 먹는다. 처음에는 밥이 따뜻하다가 나중에는 밥이 다 식어 차가워진다.

내가 5번 방에 갇힌 다음 날부터 5번 방부터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옷을 적게 입어서 매일 추워 벌벌 떨었다. 낮에는 뒤로 수갑을 채우고 밤에는 앞으로 수갑을 채워 누울 수 있게 했다. 4일째 되는 날, 경찰이 교대하며 집에 돌아가기 전에 담당 경찰관을 불러 이야기해보겠냐고 물었다. “그들은 저와 얘기하지 않을 거예요. 퇴근하세요.” 이 당직 경찰은 날 잘 대해주었다. 내가 “먹구름은 태양을 가릴 수 없어요”라고 하자 경찰은 “누가 먹구름이고 태양은 누구인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라고 했고 경찰은 갔다.

그 경찰은 3일에 한 번 근무한다. 그녀가 퇴근한 다음 날 저녁에 날 얼게 했다. ‘사부님, 밥도 차고 방도 춥고 침대도 춥고 모든 것이 다 춥지만 제 마음만은 춥지 않습니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얼어 죽을 것 같은가, 뭘 떨고 있어?’ 그렇게 누워 있다가 곧 잠이 들었다. 나의 원신(元神)이 나와 누워 있는 나 자신을 보았는데 몸에서 김이 나고 있었다! 수련생 두 명이 내 옆에서 괜찮다고 말해주며 조금 있으면 나아질 거라고 했다. 3일째 되는 날 아침, 감옥장이 와서 경찰에게 이불을 주라고 했다. 감구에서 이불을 가져다주었고 드디어 이 고비를 넘겼다.

날씨가 점점 더워져 이미 5월 1일이 됐다. 이때 나는 이미 20일 넘게 독방에 갇혀 있었고 몸에서 냄새가 났다. 어느 날 감옥장이 와서 어떻게 지냈냐고 물었다. 나는 “여기는 호텔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감옥장이 경찰에게 상부에 전화해 날 데려가라고 했다. 연락이 되지 않자 감옥장은 경찰에게 직접 데려가라고 했다. 작업장으로 돌아오니 저녁이 됐다. 경찰이 그들에게 뜨거운 물을 준비하게 해 나에게 목욕하라고 했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올라가 보니 발바닥 껍질이 통째로 벗겨져 있었다. 죄수가 “돌아왔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녀는 믿지 않아 경찰에게 가서 물어보았다.

내가 독방에 간 후, 감방 수련생들은 그들에게 고문당해 점호에 응하게 됐다. 어떤 수련생은 점호하는 것이 달갑지 않지만 매일 따라서 점호를 했다고 한다. 이후 때로는 쪼그려 앉고 때로는 쪼그려 앉지 않다가 나중에는 우리 모두 쪼그려 앉지 않았다. 경찰은 죄수에게 우리를 박해하라고 했다. 죄수는 뒤에서 우리를 넘어뜨려 쪼그려 앉게 했다. 쪼그려 앉다 보니 다리가 아파 화장실에 갈 수도 없을 정도가 됐다. 이는 경찰 샤펑잉(夏鳳英)이 죄수를 시켜 한 짓이다.

내가 작업장에 돌아간 후 어느 날 점호 때 우리는 모두 쪼그려 앉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러자 죄수들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했다. 나는 첫 줄에 서 있었는데 그들은 여전히 그렇게 했다. 그들은 뒷줄의 장(張) 수련생을 넘어뜨려 기절시켰고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당시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경찰은 겁을 먹고 죄수를 꾸짖으며 점수를 주지 않고 감형도 해주지 않겠다고 했다. 죄수들은 “하라고 해서 했는데 일이 생기니 우리에게 점수도 주지 않고 감형도 시켜주지 않겠다니요”라며 울며 소리쳤다.

그 후로 우리는 점호에 나가지 않았다. 죄수들도 모두 우리를 따라 각자 감방에서 점호했고 쪼그려 앉지도 않았다. 우리의 환경은 점점 좋아졌고 모두 자유로워졌다. 함께 법공부를 하고 정념을 발하고 조금씩 연공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연공도 잘하지 못하게 했지만 조금씩 돌파해 나중에는 모두 연공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구수란(顧舒蘭)이라는 죄수가 10개월 남겨두고 출소하는데 제때 보고하지 않아 감형받지 못했다. 그녀는 작업장에서 일하지 않고 감방으로 돌아갔다. 감방에 많은 파룬궁수련생이 법공부하고 연공하고 정념을 발하고 있었다. 구수란은 매일 수련생이 법공부하는 것을 들었고 나중에는 함께 연공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그녀는 수련생에게 자신의 몸에서 커다란 검은 공이 나가는 꿈을 꿨다고 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수련생은 그녀의 곱사등이가 사라졌고 가슴과 옆구리가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예전에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가슴과 옆구리를 볼 수 없었다.

가족이 그녀를 면회 왔을 때 아버지가 “왜 키가 더 컸어? 얼굴도 하얗고 예뻐졌네”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등의 곱사등이가 없어진 것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놀라며 어떻게 나았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파룬궁을 수련해서 나았다고 말했다. 이곳저곳에서 고치지 못한 병이 파룬궁을 수련해서 나았다. 두 사람은 매우 기뻐했다. 그녀는 감옥에 들어올 때는 까맣고 곱사등이에 볼품없었는데 감옥에서 나가는 날 예쁜 아가씨로 변해 나갔다. 당시 죄수, 경찰, 그녀의 가족 모두가 대법의 기적을 목격했다!

5) ‘6불허’를 뜯다

몇 년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계속 독방에 갇혀 있다가 이틀이 지나면 설날이라 그제야 감방으로 보내줬다. 나는 감방문 옆에 파룬궁의 이것저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6불허’ 전단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30일에 뜯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30일, 즉 설날이 됐다. 내가 위층 침대에 있을 때 나는 사부님께 드릴 과일을 침대에 놓았다. 아무것도 없고 과일 몇 개만 있었다.

감시팀 사람, 즉 나와 같은 조의 5명 중 한 명이 “사부님께 올리는 것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조장이 “사진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잠시 후 그 중 한 사람이 “괜찮을까요? 경찰이 보면 우리를 꾸짖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죄수 두목 류다샤(劉大霞)가 경찰을 찾아갔더니 경찰이 류에게 올라가서 과일을 치우라고 했다. 류다샤가 올라와 과일을 치우려고 하자 내가 그녀에게 치우면 벌을 받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는 듣지 않고 치워버렸다.

경찰이 나더러 사무실로 오라고 해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나는 ‘6불허’ 전단을 단번에 뜯어버렸다. 그들이 소리쳤다. “그건 감옥관리국에서 붙인 거야!” 경찰이 대대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대대장은 날 독방에 가두라고 했다. 그들 몇 명이 날 독방으로 끌고 갔다. 나는 솜바지를 입지 않았는데 죄수 두목 류다샤가 입지 못하게 하며 말했다. “당신들은 공력이 있다며?” 그들은 날 마당까지 끌고 가서 독방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소리치려고 하자 내 입을 막아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했다. 입에서 피가 났는데도 그렇게 날 독방에 가두었다.

당시 당직 경찰이 설을 쇠려고 하는데 내가 독방에 있는 것이 귀찮아서 감옥장에게 돌려보내달라고 하겠다고 했다. 감옥장이 술을 마시고 있어서 조금 있다 돌려보내 주겠다며 난방이 되는 방으로 가라고 했다. 잠시 후 독방을 관리하는 대대장이 와서 난방이 없는 방으로 가라고 했다. 나는 솜바지를 입지 않았고 게다가 앞으로 수갑까지 채웠다. 날 가장 추운 방으로 집어넣어 얼리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나에겐 그 방이 마치 찜질방처럼 덥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솜옷을 입고도 난방이 있는 방에 가서 몸을 데우고 있었다.

나는 죄수에게 “빨리 단추를 풀어줘요. 솜옷을 벗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이렇게 추운데 당신은 왜 솜옷을 벗으려고 해요?”라고 물었다. “땀이 나요”라고 대답했다. 그녀가 단추를 풀어주자 솜옷을 벗고 뒤로 수갑을 찬 채 누워 잠이 들었다. 저녁 8시까지 잤는데 감옥장이 아직 술을 다 마시지 않았다. 8시 30분에 우리 감구에서 경찰 두 명이 왔다. 감옥장이 그들을 보내 날 감방으로 데려가라고 한 것이다. 두 사람은 내게 돌아가서 이런저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내가 끝까지 말하지 않자 그들은 그냥 날 데리고 돌아갔다.

돌아가니 이미 저녁 9시가 다 되어 그들은 이미 만두를 다 먹었다. 리씨 성을 가진 죄수가 내게 간장과 만두를 가져다주러 갔는데 간부가 그녀를 더 괴롭히지 말라고 말하고 갔다. 내 생각에 감옥장이 전한 말 같았다. 간부가 나간 후 죄수 우두머리 류다샤가 간장과 만두를 가져다준 리 씨를 화장실로 불러내 때렸다. 이튿날 누군가가 류다샤가 머리가 아픈데 감히 약도 먹지 못한다고 알려줬다. 그녀는 내가 응보라고 말할까 봐 두려워했다.

6) 병업관을 넘기다

2011년 9월 20일, 갑자기 오른쪽 몸이 움직이지 않아 경찰이 병보석으로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처음에는 가지 않았는데 다음날 경찰이 또 나를 찾아와 병보석으로 진료를 받았다. 뇌경색이라고 했다. 돌아와서 주사를 놓으려고 했는데 2, 3일 동안 주삿바늘이 들어가지 않았다. 4일째 되는 날, 이 주사만 맞고 맞지 않기로 했다. 3일 후 침대를 짚고 조금씩 옮기며 걸을 수 있게 됐다. 옆 수련생이 “손을 떼고 걸을 수 있나 해봐요”라고 말했다. 과연 손을 떼고도 걸을 수 있었다. 죄수들은 모두 “아, 대법을 헛되게 믿지 않았네요”라고 말했다.

2007년쯤 감옥장이 바뀌었고 감방에 사람을 남겨두지 말라고 해서 처음에 나를 환자 감구로 보냈다. 환자 감구에 가서 나는 위층 침대에 있었는데 내려와 연공을 하려고 하자 그들이 못하게 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3일 동안 머물다가 5감구로 보내졌다. 환자 감구의 파룬궁수련생은 기본적으로 모두 전향했기 때문에 날 거기에 두지 않았다. 5감구에는 날 포함해 두 사람만 수련생이었다. 천(陳) 수련생도 감옥에서 법을 얻었다.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내 입과 눈이 삐뚤어지는 현상이 다시 나타났다. 또 병보석으로 입원해 치료받았는데 보름이 넘도록 치료해도 효과가 없어 돌아왔다. 돌아온 후 나는 매일 밤 연공을 했다. 연공은 두 개의 침대 시트 사이에서 했다. 날 감시하던 죄수가 말했다. “연공하세요, 괜찮아요. 당신 얼굴이 나날이 좋아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이 공법은 정말 좋아요. 입원해도 소용이 없었잖아요.” 대대장은 내가 나은 것을 보고 감옥장에게 식당 감구로 보내라고 했는데, 그곳은 처음에는 아주 좋아서 법공부도 하고 연공도 할 수 있었다.

7) 감옥에서 정행(正行)하는 수련생들

1감구에서 한번은 대법제자 관수링(關素玲)이 죄수복을 벗었고, 그 후 장샤오보(張曉波)도 죄수복을 벗자 이들을 독방에 가두고 매달아 놓았다. 결국 장샤오보는 죄수복을 입었다. 며칠 후 관수링을 감방에 데려가 매달아 놓았는데 그녀가 기절했다. 송곳으로 인중을 찌르고 깨어난 후에도 또 매달아 놓고 여러 번 매달았다. 돌아온 후 그녀에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

장수펀(張淑芬)이 밤에 일어나 발정념을 하자 다음 날 오후 1시에 죄수가 경찰이 이야기를 나누자며 그녀를 불렀다고 전했다. 하지만 전혀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장수펀을 전기실로 끌고 가서 힘센 죄수 5명이 그녀의 입을 테이프로 붙이고 눈을 가리고 손을 뒤로 묶었다. 5명이 오후 1시부터 3시 30분까지 그녀를 구타했다. 그런 후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녀의 얼굴은 구타당해 일그러졌고 온몸에 ‘범(犯)’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셋째 날, 감옥장이 작업장에 왔을 때 내가 보고했다. 감옥장에게 누가 죄수에게 권리를 줘 마음대로 사람을 때리게 하냐고 물었더니 감옥장은 경찰을 찾아가 날 처리하라고 했다. 그런 후 몇 명의 죄수가 날 사무실로 끌고 갔고 밧줄, 자물쇠, 몽둥이, 전기 충격기를 사무실 탁자에 던졌다. 전기 충격기에서 불꽃이 튀었다. 밖에 있던 파룬궁수련생 장롄원(張連文)과 왕리원(王立文)이 “파룬따파는 좋습니다(法輪大法好)”라고 외치자 그녀들 둘도 전기실로 끌려갔다.

죄수는 경찰 샤펑잉에게 내가 불의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감옥장이 떠날 때 그들에게 우리를 때리지 말라고 말을 남기고 간 것 같았다. 5시에 일을 마치고 그녀들 둘을 전기실에서 데려오고 우리는 함께 일을 마쳤다. 날 죄수들 사이에 끼워 놓았고 죄수가 내게 몰래 말했다. “감옥장이 말하기를, 50명이 넘는 파룬궁수련생이 파룬따파가 좋다고 외치면 경찰이 해고된대요.” 그 이후로 우리는 맞지 않았다.

한번은 우리가 바구니를 만들지 않자 침대에 수갑을 채우고 방석도 못 앉게 하며 밤새 바닥에 앉아 있게 했다. 우리가 명찰을 달지 않아도 수갑을 채웠다.

어느 새해 밤, 감방 벽에 물이 흘러서 경찰이 우리에게 얼굴을 벽에 붙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수도실에서 하룻밤 서 있게 했고 날이 밝아서야 감방으로 돌아가게 했다.

수련생 말에 따르면 포장 작업장에서 일하는 수련생들은 모두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일하게 하고 하루에 찐빵 반 개를 주며 며칠 동안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처음에 가장 심하게 박해한 곳은 2감구였다. 정제(鄭傑)는 돈을 벌려고 전향하기 좋은 수련생을 2감구로 데려갔다. 한 명 전향시키면 500위안을 받았다. 그녀는 많은 사람을 전향시켰다. 수련생을 묶어 바닥에 눕히고 죄수들에게 밟게 하고 무릎을 말굽 못으로 찌르게 했다.

또 한 번은 죄수 뉴위훙(牛宇紅)이 몽둥이로 수련생의 다리를 부러뜨려 작은 방에 갇혔다. 며칠이 지나도 나오지 못하게 하자 대법제자들이 자비롭게 뉴위훙을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후로 그녀는 파룬궁 박해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모두 2감구에 있었던 수련생이 내게 말해준 것이다.

1감구에 있었던 후아이윈(胡愛雲)은 5~6년 동안 단식했다. 하루에 3번 음식물을 주입당했고 3번 관을 삽입당했다. 나중에 환자 감구로 갔다. 장옌팡(張豔芳)은 박해당해 사망했다. 왕잉(王影)도 사망했는데 죽기 전에 그녀에게 ‘전향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죄수 류다샤는 대신 써주기까지 했다. 옷 위로 우리에게 주사를 놓고 우리를 짓누르고 피를 뽑았다. 우리 10여 명의 수련생이 한 방에 앉아 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한 무리 죄수들이 들어와 우리를 짓누르고 수갑을 채웠다.

9감구 파룬궁수련생 쑹잉제(宋英傑)가 연공을 해서 도장(道長)과 팀장 단헝(段恒)과 쑨즈잉(孫志英), 장젠(張健), 장야쥔(張亞軍) 등에게 구타당해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음날 작은 방에 가두고 15일 후 돌아왔다. 돌아와서도 계속 연공하자 10여 명이 그녀를 누르고 때려 얼굴이 멍이 들어 판다처럼 됐다. 처음 맞았을 때 경찰 샤오수펀(肖淑芬)이 화장실 걸레를 가져와 입을 막으라고 소리쳤다.

파룬궁수련생 량수룽(梁舒榮)이 9감구에 있을 때 죄수들이 밥을 바닥에 쏟고 먹으라고 했다. 장밍추(江明秋)와 또 다른 죄수들이 그녀를 들어 바닥에 쪼그려 앉게 해서 허리가 망가졌다. 그녀는 70세가 넘었다. 내가 이 글을 쓸 때도 그녀는 석방되지 않았다.

취(曲) 수련생이 경찰과 대화를 나눈 후 경찰이 떠나자 죄수 징샤오친(井少琴) 등이 문을 닫고 취 수련생의 얼굴을 망가뜨렸다. 무엇으로 때렸는지 모른다. 또 한번은 아침에 기상 명령이 없었는데 취 수련생이 막 일어나 앉았을 때 죄수들이 그녀를 화장실로 끌고 가서 구타했다. 그녀를 때린 사람 중에는 위톈자오(於天驕), 단헝(段恒) 등이 있었다. 그들 둘은 아직 출소하지 못했다.

1감구 대대장 추이훙메이(崔紅梅)와 부대장 샤펑잉은 우리에게 매일 이쑤시개를 두 상자씩 골라 담게 했다. 우리가 다 고르지 못하면 책임자는 추이와 샤를 찾아가 우리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대장이 한 명씩 물어보았다. 어떤 수련생은 고르지 않겠다고 하면 독방에 가두고, 어떤 이는 감방으로 돌려보내고, 어떤 이는 죄수를 시켜 밧줄로 묶게 하고, 어떤 이는 쪼그려 앉게 했다. 내 차례가 되어 물어보길래 고를 수 없다고 말했다. 대대장은 날 독방에 가두지 않고 감방으로 돌려보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이쑤시개를 골라 담는 일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매번 독방에 들어가면 두 달이 넘게 있었다. 우리에게 옥수수 국물과 굵은 소금으로 버무린 배추를 주었다. 우리는 굵은 소금을 골라 창틀에 올려놓고 배가 고프면 소금 한 알을 입에 물고 있었고 목이 마르면 찬물을 마셨다. 겨울에 독방에 들어갈 때 우리가 옷을 많이 입고 있으면 그들이 우리의 옷과 양말을 벗겼다. 문과 창문을 열어 우리를 얼게 하고 배불리 먹이지도 않았다. 한번은 우리에게 옥수수 국물을 하루에 두 번 주었는데 수련생들이 배가 고파 넘어져 코가 깨지고 뒤통수에 혹이 생겼다. 정 아주머니도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어서 다리를 위로 당겼는데, 한참 동안 끌어당겨 올린 후 기절했다.

수련생들이 소리치자 이때 웨이(魏) 감옥장이 왔다. 그때 그녀는 독방을 관리했는데 매우 놀랐다. 사람이 죽으면 그녀도 책임지지 못했다. 수련생들은 정 아주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를 고소하겠다고 말했다. 정 아주머니는 한참 후에 깨어났다.

한번은 남자 경찰들이 많이 왔는데 각 감구의 파룬궁수련생을 한 감구씩 끌고 나왔다. 죄수와 의료팀을 데리고 나가 수련생들을 박해했다. 전기 충격기와 플라스틱 막대기를 들고 뛰지 않으면 때렸다. 우리는 창문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저녁에 박해를 마치고 돌아오니 우리는 수련생들을 알아볼 수 없었다. 얼굴이 모두 변형됐기 때문이다. 우리 1감구 수련생들은 끌려나가지 않았다. 어떤 수련생이 항상 대대장에게 진상을 알렸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와서 “당신들 감구의 파룬궁수련생들은 우리가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대대장은 “우리가 직접 관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끌려나가 박해받지 않았다.

2020년 7월 25일, 나는 출소해 집으로 돌아왔다.

맺음말

오직 사부님에 대한 믿음으로,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가지(加持)해주시고 보호해주셔서 오늘에 이르렀다. 정말 곡예사처럼 이리저리 넘어지면서 여기까지 왔다. 죄송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 어떤 시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고난 중에는 우리가 생생세세 지은 업력이 있고, 사부님께서 이미 많이 없애주셨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다 갚아야 한다면 어떻게 갚을 수 있겠는가? 박해의 요소도 있지만 우리가 사부님을 믿기만 하면 넘어갈 수 있다. 우리 모두 이 만고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사부님을 굳게 믿으며, 대법을 굳건히 수련하여 원만에 이르러 사부님을 따라 돌아가기를 바란다.

사존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4년 6월 2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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