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해외 대법제자
[명혜망] 명혜망 기사 ‘박해받은 것이 밑천인가?’를 보고 나서, 이는 솔직하면서도 엄숙한 경고라는 느낌을 받았다. 수련자가 글에서 언급한 ‘악으로 악을 다스리려’ 하고, ‘누가 더 센지 겨루는’ 등의 현상은 확실히 비교적 흔한 편인데, 어떤 것은 일상 수련 중에, 어떤 것은 진상을 알리는 항목에서, 어떤 것은 수련자들이 션윈(神韻)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며, 어떤 경우에는 서로 간의 언어가 심지어 매우 무례하고, 악행과 포악함을 겨룬다. 정법 수련은 이미 최후의 최후에 이르렀는데 이런 현상들은 확실히 발생해서는 안 된다.
1999년 7.20 박해를 겪은 대다수 수련자들은 아마 많든 적든 사악한 당의 박해를 받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박해를 받은 것 자체가 분명히 밑천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박해받은 것이 밑천인가?’에서 경고한 것처럼 이 박해 자체가 사부님에 의해 철저히 부정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박해받은 것을 밑천으로 여긴다면 이는 구세력을 다른 형태로 승인하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의 법력은 무한하시다. 구세력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이 박해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사부님께서는 제자를 성취시킬 방법이 있으시다. 다만 구세력이 굳이 악행을 선택해서, 정법에서 근본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박해가 발생한 것이다. 이번 박해에 대해 사부님께서는 계속 장계취계(將計就計, 상대 계략을 역이용함)로 대응하시면서 반대로 이를 이용해 제자들을 성취시키고 계신다. 제자로서 우리는 사부님을 따라 박해를 부정하고 반(反)박해 중에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잘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정법제자의 위덕을 수립해야 한다.
99년부터 나와 가족 역시 모두 중공 악당의 박해를 여러 차례 받았는데, 여기에는 신체적 고문, 정신적 파괴, 경제적 갈취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그 힘든 세월을 돌이켜 보면, 만약 사부님의 자비로운 가지(加持)와 보호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정법 중에서 사부님을 따라 오늘날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며, 더구나 이렇게 자유로운 해외 환경에서 사부님의 정법을 도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박해받은 것은 모두 우리 자신의 집착과 업력 때문이었다.
사부님께서는 ‘험악(險惡)을 멀리하라’에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생생세세 진 빚(業債)의 채권자, 심지어 엄청난 빚의 피해자, 이들이 당신에게 반드시 갚으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 건가? 우주의 법리 또한 매 한 사람을 가늠하고 있기에, 수련 중에 마난(魔難)이 있을 수 있고 박해를 당할 수 있다.” “당신이 한 일체, 진상을 알리는 중에서 감당한 박해를 포함해, 그것은 수련의 과정이자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고, 구세력에 의해 강제로 박해당하는 것도 당신 자신이 지닌 업력 때문에 조성된 것이다. 이 일체가 대법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사부를 위해 한 것도 아니며, 당신에게 빚이 있기에 구세력에게 꼬투리를 잡힌 것이다.”
나는 2005년 이후에 해외로 온 수련자이다. 출국 후 나는 오랫동안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중국에서 나와 가족을 박해했던 경찰에 대한 원한, 생활이나 일에서 나에게 소위 ‘상처’를 준 속인들, 심지어 수련인들에 대한 원한이 포함되어 있었다. 단지 사람의 표면에 ‘함양(涵養)’의 베일로 가려져 있어서 이런 집착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표면에서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증오’는 사악한 영체로서 공산악령의 구성요소이며 악당 사회에서 고의로 주입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체내에서 좋지 않은 작용을 일으키고 개인수련에 영향을 주며, 수련자들 사이와 사회에서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고 동시에 중생들의 제도를 가로막는다….
이 몇 년간 법공부와 수련에서, 사부님의 거듭된 자비로운 일깨움 속에서, 박해자와 속인들을 향해 진상을 알리는 과정에서 나는 점차 ‘증오’, ‘악’ 등 좋지 않은 것들을 인식하게 됐고 계속 그것을 배척하고 노력하여 제거해 왔다. 서서히 나는 과거에 나를 박해했던 사람들을 용서했고 그들의 가련함과 불행을 느꼈다. 점차 나는 과거에 제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축복하는 법을 배웠다. 또한 점점 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미워하는 것보다 자신을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수련의 초심 아닌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서 시작해 먼저 더욱 선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유익한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 다만 때로는 왜 자신이 그 나쁜 것들을 더 일찍 깨닫지 못했는지, 왜 더 일찍 제거하지 않았는지 후회스러울 뿐이다.
제 마음속의 ‘증오’가 점차 ‘사랑’으로 대체됐을 때, 사부님께서는 거듭 제자에게 대법의 홍은(洪恩)을 느끼게 해주셨다. 수련 중에 보기에 깎아낼 수 없는 큰 산들이 옮겨졌고 과거에 자신을 괴롭혔던 관문과 난관들이 연기처럼 사라졌으며, 과거에 풀 수 없어 보였던 갈등들이 선해(善解)됐고 개변시키기 불가능해 보였던 중생들이 주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을 선택했다…. 비록 사부님과 대법의 요구에는 아직 많이 미치지 못하지만 방향은 맞았고 나는 반드시 더욱 잘 수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사실 수련인의 마음속에 ‘악’, ‘증오’ 등 좋지 않은 물질을 품고 있으면 정법 중에서 자신의 서약을 이행하기 어렵다. ‘박해받은 것이 밑천인가?’에서 언급했듯이 “그러나 많은 이들은 여전히 그 악함과 독함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 해외에 나온 후에도 노동수용소에서 배운 그런 것들을 습관처럼 다른 대법제자들에게 사용했다. 언행이 거칠고, 횡포하며, 쟁투심이 강하고, ‘악으로 악을 다스리려’ 하고, ‘누가 더 센지 겨루는’ 식으로 표현되어 해외 환경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개인적 느낌으로는 이는 매우 가슴 아픈 현상이다. 우리가 다른 수련생에게 악하게 구는 순간, 우리가 ‘악으로 악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수련생을 대할 때 잠깐 생각해 보자. 그때 우리는 악당의 일원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많은 수련자들이 아마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더 무서운 것 아닌가? 왜냐하면 그 사악한 요소가 이미 수련인을 통제할 만큼 크기 때문이다. 만약 오랫동안 이렇게 통제당하면서 그렇게 비이성적으로 행동한다면 정법 수련 중에서 도대체 무슨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인가?
개인적 체득으로는 수련인으로서 수련의 최후의 순간에 가서야 비로소 표준에 도달할 수 있는지 없는지 가늠 받는 것이 아니라, 긴 수련과정 내내 끊임없이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만약 주동적으로 ‘악’, ‘증오’, ‘포악’, ‘쟁투’ 등 좋지 않은 것들을 제거하지 않고 늘 그것들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면 이 길에서 그것들의 추동 하에 수많은 잘못된 일을 저지르게 되어 수련과 정법에 만회할 수 없는 손실을 초래할 것인데, 최후에 가서 자신은 또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대법수련의 표준은 매우 엄격하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걸어 나올 수 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정으로 대법제자의 원만표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사부는 어떤 때에 정말로 매우 낙관적이지 못하다. 정법은 반드시 성공한다. 이는 틀림없다. 대법제자의 수련원만 이 역시 틀림없다. 그러나 얼마만큼의 사람인가? 나는 지금, 정말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각지 설법13-2015년 미국서부법회 설법)
사부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지도 이미 9년 넘게 지났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9년 전과 비교해서 심성이 더 좋아졌는가? 각종 집착과 욕망이 더 옅어졌는가? 내심의 ‘악’, ‘증오’ 등 좋지 않은 물질들을 더 제거했는가?
물론 대법제자나 수련생으로서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신을 잘 수련하여 원만에 이르러 사부님과 함께 천상의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과연 원만에 이를 수 있을까?
사부님께서는 ‘오스트레일리아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늘 나에게 묻는데, 선생님, 제가 원만을 이룰 수 있나요?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내가 바로 당신에게 묻겠는데 당신은 내가 방금 말한 대로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없는가. 사실 이 말은 마땅히 자신에게 원만을 이룰 수 있는가 없는가, 하고 물어봐야 한다.”
오늘 가부좌 중에 마음 깊은 곳에서 한 생각이 솟구쳐 올랐다. ‘증오’는 ‘저주(咒)’이다. 내가 진심으로 이 점을 의식했을 때 순간 몸의 깊은 층의 일부 음성적인 것들이 밀려 나왔고 이후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느꼈다. 그러고는 명혜망을 열어 보니 수련자의 교류문장 ‘박해받은 것이 밑천인가?’가 보였다. 정법의 진행이 매우 빠르고 사부님께서 제자들이 빨리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심을 느꼈다. 제자로서 많은 좋지 않은 마음과 행위를 시급히 바로잡아야 하기에 느낀 바가 있어 이 글을 썼다. 이것이 수련자들과 자신에 대한 경고가 되기를 바란다.
이상의 내용은 개인의 일부 깨달음으로서 층차가 제한적이라 부족한 점이 있다면 수련자 여러분의 자비로운 지적을 청한다.
원문발표: 2024년 5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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