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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법 현상을 명확히 파악하자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작년에 주변의 한 수련생이 어느 사람을 숭배하고 어느 난법(亂法) 사이트를 전파하는 바람에 항목에서 큰 난에 부딪혔다. 이 수련생은 그것이 난법임을 깨닫지 못하고 좋은 일을 하는 줄 알았기에 처음에는 고통과 미혹에 빠졌다. 이후에 이 수련생은 난법에 관한 모든 대법 경문을 진지하게 배우고 나와 반복해서 교류하며 점차 깨닫고 난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이런 난법 현상에는 몇 가지 전형적인 공통점이 있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았다.

첫째, 어느 사람의 층차가 높다고 내세우다

이 사이트는 그 사람을 극력 띄워주며 수련생 위에 올려놓고 말도 매우 현란하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을 소위 “사부님께 가장 힘이 되는 세 제자 중 하나”라고 하거나 “사부님께서는 오직 그 사람만이 세간의 국면을 추진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다른 이는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어떤 생명이든 모두 무변(無邊)한 대법 중의 티끌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잘 수련한 사람은 모두 겸허하며 흔히 묵묵히 해내고 많은 일을 오로지 행할 뿐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극력 띄워주는 자는 무슨 사람일까? 심지어 감히 그를 사부님과 나란히 논하고 있다. 모두 구세력이 조종하는 난법하는 귀신이다.

둘째, 어느 사람이 한 말을 정리해 문자로 만들고 전파해 보다

추종자들이 정리한 그 사람의 ‘교류집’은 몇 권의 책만큼 두꺼우며, 또 “이는 평범한 교류가 아니라 대단한 것이며, 보면 얻은 것이고 널리 알리는 것은 더 많은 생명에게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행위는 겉으로는 ‘교류’ 같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 대단하다고 내세워 수련생들이 그에게 빠지게 만든다.

일찍이 1997년에 사부님께서는 경문 ‘영원히 기억하라’에서 이런 행위가 난법임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대법(大法) 각 지역 책임자 또는 어떤 제자가 한 말을 녹음하거나 비디오를 찍을 수 없으며, 더욱이 문자로 정리하거나 또는 서로 전하여 보게 할 수 없다. 이는 어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며 또 어느 한 사람을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대법(大法)을 수정(修正)하는 것이다. 대법(大法) 수련생의 법학습교류회와 총회(總會)에서 동의한 각지 총보도소의 활동을 제외하고, 대법(大法) 중에서 유전되고 있는 대법(大法)의 것이 아닌 어떠한 것도 모두 대법(大法)을 파괴하는 것임을 기억하라!”

만약 정말로 이 한 단락 법을 명심했다면 이처럼 뚜렷한 난법은 한눈에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사람을 배우게 하고 법을 배우지 않게 하여 사람을 그릇되게 하다

어떤 수련생은 심사를 거치지 않고 심지어 횡설수설하는 ‘교류’에 빠져 그 사람을 ‘제2의 사부님’처럼 숭배하며, 그 사람의 말은 많이 기억하지만 고비를 넘길 때 사부님 말씀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것이 교란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 대법서적이 51권이며 다른 새로운 경문까지 합쳐 모두 여러분의 수련을 지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기억했는가? 얼마나 깨달았는가? 또 법에 따라 얼마나 착실히 수련하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제자로서 마땅히 정성을 들여야 할 부분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권2)-불교 중의 교훈’에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가 한 말을 수불(修佛) 하는 사람이 믿게 된다면 그는 사람을 자신의 사상 틀 속으로 끌어들여 한정 짓게 된다. 이런 현상은 비록 그가 마치 여러 사람에게 부처를 배우라고 한 것과 같이, 표면적으로는 좋은 일인 것 같지만, 그것은 그가 불법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법을 파괴하는 데는 여러 가지 형식이 있다. 일부 파괴하는 사람은 불법을 좋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교란한다. 이러한 파괴야말로 가장 분별하기 어렵고 가장 간파하기 어려우며 가장 무서운 것이다.”

실제로 대법을 수련하는 시간과 기연은 제한적이다.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제도받을 길을 체계적으로 배치해주셨는데, 엄숙하고 질서 있으며 하나하나가 맞물려 있다. 어떤 교란도 추구해서는 안 되며 법을 스승으로 삼아 착실히 수련해야만 바른길을 걸을 수 있다. 중생을 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어려운데 거대한 난법의 죄업까지 더해진다면 고비를 어떻게 넘길 것인가?

반성: 왜 미혹됐을까?

난법에는 여러 형식이 있는데 이것은 ‘교류’의 면모로 나타나지만 실질적으로는 파괴하는 것으로, 이런 예도 하나뿐이 아니며 구세력의 함정 중 하나일 뿐이다. 전파해 보는 것은 남을 해치고 자신도 해치는 것이다. 명백해진 후에는 모두 통렬히 뉘우치지만 어쨌든 굽은 길을 걸은 것인데 왜 일찍 의식하지 못했을까?

우리는 이런 수련생들이 우선 법공부의 기초가 탄탄하지 않아 사부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했기에 분별력과 지혜가 부족했음을 발견했다. 법공부에서 양만 추구하고 형식에 치우쳤으며 특히 ‘정진요지’는 배우고 나서 잊어버리는데, 하나를 붙잡으면 만 개를 놓쳤다.

다음으로 높은 것과 신기한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어 조금 얻고 나서 또 환희심과 과시심이 생기는 것이다. 이 점이 가장 사악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이론 지식’을 알고 있어도 착실히 수련하지 않으면 그저 ‘큰 공기주머니’ 같을 뿐 법의 함의를 깨달을 수 없다. 이론을 많이 보고 아는 일이 많다고 해서 층차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지름길이 생긴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층차가 제고되려면 반드시 스스로 법공부나 착실한 수련 중에 깨달아야 한다.

또한 소위 ‘고도로 오묘한 깨달음을 얻은 자’는 스스로 자심생마(自心生魔)라는 이 고비는 넘기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간과했다. 조금이라도 집착이 있으면 가상을 보게 되고 일단 가상이 나타나면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므로 천목(天目)으로 자신이 얼마나 높은지 보는 것은 모두 진실이 아닐 수 있으니 다른 수련생도 부채질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이성적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중생과 법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우주는 모두 이 법이 만들어낸 것이며 어떤 생명이든 대법 앞에서는 모두 미미한 것이다. 어떤 생명은 특수한 능력을 지녔지만 그것 역시 모두 그가 잘했기에 대법이 준 것이다. 대법제자는 어떤 생명을 숭배한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만드셨고 대궁(大穹)에 법을 남겨주셨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오직 사부님과 대법뿐이다.

 

원문발표: 2024년 5월 1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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