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몽소(秦夢蘇)
[명혜망] 중국공산당(중공) 통치하에 중국에서는 10년에 한 번씩 정치운동이 일어났고 파룬궁 박해는 25년간 지속됐다. 이는 천리를 해치고 문화와 기타 측면에서도 단층을 만들어냈다. 이는 세계 그 어느 정상 국가나 민족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유의 세대 간 격차를 만들어냈다. 중공은 민족주의로 중국인을 세뇌시키는데 이는 우스꽝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민족주의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중국인 특유의 ’10년 세대차이’ 현상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세대차이’란 가치관, 사고방식, 생활태도, 취미 등에서 한 세대와 다른 세대 간의 견해 차이 또는 심리적 거리를 말한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자녀와 부모, 조부모 간에 심리적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현대사회에서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기란 불가능하기에 세대 간 격차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정상적인 세대차이는 두 세대 간 나이 차이에 비례한다. 부모와 자녀 간 나이 차이는 보통 20년 이상으로, 20년을 한 세대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차이일 뿐 모순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10년마다 큰 정치운동이 일어나 10년 미만의 세대차이를 만들어냈고, 이로 인해 세대 간 가치관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중국만 보더라도 1950년대생과 60년대생은 성장 배경이 판이하다. 심지어 1960년대 초반생과 후반생 사이에도 뚜렷한 격차가 있다. 1960년대생과 70년대생 사이에도 그렇고, 그 이후 세대 간에도 마찬가지다. 반면 중공이 정권을 찬탈하기 이전인 1900년대생과 1920년대생 사이에는 가치관 면에서 그렇게 큰 격차가 없다.
왜 중국의 ’10년 세대차이’가 중공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가?
이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통칭 ‘문화대혁명’, 줄여서 ‘문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중공이 정권 찬탈 후 일으킨 전국적 정치운동 중 하나로, 1966년 5월 16일 ‘5.16통지’ 발표로 시작돼 1976년 10월 6일 ‘4인방 분쇄’로 10년간 지속되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문혁이 막을 내린 1976년에 저우언라이, 주더가 사망했고 탕산 대지진이 발생했으며 마오쩌둥이 죽었다. 10월 6일엔 당내 쿠데타인 ‘4인방 숙청'(일명 회인당 사변)이 있었다. 이로써 공산당이 창당과 흥성, 정권 찬탈의 기반이 된 무산계급의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혁명은 일단락되었다. 문혁 전후인 1970년대 출생자들이 6, 7세 무렵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중국은 이미 80년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중국사회가 정상화되고 자유와 개방이 확대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천안문 사태가 발발하면서 중국은 다시 숨 막히는 억압의 시대로 돌아갔다. 따라서 70년대 중후반 출생자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독특한 환경에서 교육받고 성장했다. 문혁의 고통은 덜 받았지만 개혁개방에 따른 현대적 의식의 영향은 더 많이 받았다.
문혁이 한창이던 1966년 중후반 출생자들은 태어나서부터 초중고 교육까지 모두 문혁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들은 70년대생보다 문혁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지만 역시 한계가 있다. 비교 대상이 없었기에 변별력이 떨어졌다. 문혁 기간 내내 문혁 시기와 비문혁 시기를 비교할 만한 정보가 부족했던 탓이다. 문혁 속에서 성장한 이들은 무신론과 반(反)전통 사상에 물들 수밖에 없었다.
문혁 시기 중국은 인문학을 중시하지 않았고 전통 가치관 교육도 실종되었다. 대신 현대과학이 두드러지게 추앙받았다. ‘수학, 물리, 화학[數理化]만 잘하면 천하를 두려워할 것 없다’는 말이 유행했는데, 이는 생계 수단이자 피난처이기도 했다.
1966년 문혁 발발 시기와 비교해보면 60년대 초반 출생자들은 유아기 교육은 그런대로 정상적이었다. 그러나 6, 7세 무렵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는 이미 문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오늘은 스승의 권위를 부정하더니 내일은 린뱌오와 공자를 비판하는 운동(비림비공)이 벌어졌다. 정상적인 교육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이들이 고교에 진학할 무렵엔 대입시험 제도가 복원되었지만, 전통문화 학습 면에선 많은 부족함이 있었다.
문혁 당시 사회상을 말하자면 1966년 5월 16일, 베이징시 지도부가 ‘반당집단’으로 몰려 해임되면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여름, 베이징 명문학교들에서 잇따라 홍위병 조직이 결성되어 학계 권위를 부정하고 파사구(破四舊-낡은 사상, 문화, 풍속, 습관을 파괴) 운동이 절정에 달했다. 마오쩌둥은 천안문광장에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1100만 명의 홍위병을 접견했다. 8월 5일, 마오는 ‘사령부를 향해 포화를 집중하라 – 나의 대자보’를 발표했다. 8월 8일, 중공 중앙은 문혁에 관한 결정을 내리고 당내 ‘자본주의 길로 가는 실권파’를 겨냥했다. 늦가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조반파(造反派) 조직이 만들어졌고, 노동자계급도 참여해 ‘인민문화대혁명’으로 발전했다.
당시 마오쩌둥이 수시로 내린 ‘최신 지시’가 한 마디라도 발표되면, 초등학교 저학년생을 포함한 ‘군중’이 한밤중에 집에서 불려 나와 천안문광장에 집결해 구호를 외치고 광란의 춤을 춘 뒤에야 새벽 3, 4시쯤 집으로 돌아가 쉴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베이징 천안문에서 8차례나 홍위병을 접견하며 그들을 열광케 했다. ‘노(老)홍위병’은 주로 중공 당정 고위간부 자제들이었고, ‘보황파(保皇派) 홍위병’은 이들의 추종자로서 대부분 출신 좋기로 소문난 ‘홍오류(紅五類)’ 집안 자녀들, 즉 인민해방군, 노동자, 빈농과 하층중농, 혁명간부, 혁명선열의 자녀들이었다. 이들은 ‘가장 믿음직한 프롤레타리아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당시는 전통윤리를 쓸어버리고 인륜을 파괴하며 사람을 늦가을 매미(寒蟬, 늦가을 매미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다는 뜻)나 기계로 만들던 광기의 시대였다. 1950년대 후반 출생자들은 문혁이 발발한 1966년, 6세 반에서 7세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나이였다. 학교에선 제대로 된 지식을 배울 수 없었고, 부모는 간부학교나 오지로 보내져 가정과 자녀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모든 중국인이 중공의 놀잇감이 되었다.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불량배, 우파로 분류된 ‘흑오류(黑五類)’와 그 자녀만 빼고 말이다. 이들은 투쟁 대상으로, ‘백번 죽어 마땅한’ 이들로 규정되었다. “지식인일수록 반동적”이라 외치던 그 사회에서 누가 감히 자녀를 우파나 반혁명으로 몰리게 하겠는가. 그래서 모두가 노동자계급과 빈농에게 기웃거렸고, 연줄 있는 자는 군대에 의지했다. 그래서 50년대 출생 중국인들 대부분은 중국 노동자계급 특유의 습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그들이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고 유학을 떠나기 전 삶의 경험으로, 그 시대가 그들에게 남긴 낙인이나 다름없다.
중국인의 ’10년 세대차이’는 보통의 세대 간 격차가 아니다. 중공이 만들어낸 비정상적 성장 환경 속에서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가치관이 억압받고 세뇌당한 결과물이다. 특히 ‘6.4(89년 천안문사태)’ 이후 장쩌민은 정권을 잡고 “조용히 큰돈을 벌자”며 부패와 부정이 만연한 통치를 했다. 2001년, 중국은 성공적인 로비로 파룬궁 박해를 벌이는 한편 WTO 가입을 이뤄냈고, 20여 년간 엄청난 부를 쌓았다. 파룬궁 박해에 써 댈 자금이 충분해졌을 뿐 아니라 급기야 문명고국(文明古國) 중국마저 ‘금전지상주의’인 현대사회로 만들어버렸다. 정경유착과 부패가 만연했고 모든 사람이 오로지 이익만을 추구하게 했다. TV 예능은 역사를 날조하고 문화를 곡해하기 일쑤였다. ‘만리방화벽’ 안의 젊은이들은 역사의 진실과 문화의 참뜻이 어디에 있는지 독립적으로 생각해볼 기회조차 없었다. 1990년대 출생 중국인 다수는 돈을 물 쓰듯 하는 금전지상인, ‘자기를 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는 극도로 이기심을 조장하는 환경에서 자랐다. 현대 관념, 무신론, 공산당 문화, 반미, 반일 사상에 물들었다. 중공은 ‘어릴 때부터 손을 써야 한다’며 세뇌교육을 강화해 왔다. 그 결과 많은 90년대생이 자유사회에 몸담고 있어도 사상의식은 여전히 중공 치하에 머물러 있다. ‘나’를 기준으로 삼고 ‘위대한 나의 조국’이 가르친 것을 기준 삼으며 이러한 사고를 해외로 가져가고 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중국 아줌마(中國大媽”, Chinese Dama)’라는 영어 단어의 뜻도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다마(大媽)’는 ‘아주머니’를 뜻하는 단어로 40~60대 기혼 여성을 가리켰다. 이 단어는 원래 중립적이고 심지어 긍정적인 의미로, 겸손하고 사랑이 많은 주부들을 부르는 애칭이었다. ‘다마’들은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겪었다. 이 시기는 기아와 물자 부족, 인재(人災)가 극심했던 암흑기였다. 그래서 ‘다마’들도 검소하고 강인하며 생존 위기감이 강한 이들로 그려졌다. 문혁은 중국인의 노인 공경 의식을 약화시키고 청년에 대한 관심을 키웠으며 ‘역효도(주: 노인들이 아이를 섬기는)’ 풍조를 낳기도 했다. ‘다마’들은 이런 중국 특색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매개체와도 같이 가족과 자녀에 대한 사랑, 육아에 대한 무지와 오해가 뒤섞여 있다.
2019년 말 시작된 이번 전염병 사태에서 ‘다마’들은 다시 한번 강한 생존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전염병 이후에는 중공의 세뇌로 심하게 중독된 ‘애국 청년’들처럼 국제사회에서 자신과 중국인의 추한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고 이기적이며 거칠고 거만하다. 다른 이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횡포와 다툼을 자랑으로 여긴다. 크게 틀어놓은 스피커에 맞춰 길거리에서 춤을 추고, 다투고 밀치고 시끄럽게 떠들며 제멋대로 행동한다. 이는 그들이 가는 곳마다 반복된다. 이런 행태 때문에 ‘중국 아줌마’라는 말은 뚜렷한 부정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다마’들은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중공의 세뇌 피해자일 뿐 가해자는 아니다. 그들의 그런 결점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된 후까지 공산당의 교육과 강요로 만들어진 것 아닌가. 중공은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기에 공산당식으로 배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글에서 언급한 것은 가장 보편적이고 두드러진 현상일 뿐이다. 가족과 개인마다 역사와 배경, 업(業)이 다르다. 많은 집안에는 스스로 귀중히 여기는 전통문화의 일부를 보호하려 애쓰는 이들도 있다.
따라서 중국의 샤오펀훙(小粉紅, 공산당을 극단적이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젊은이들)이든 ‘다마’든 비록 혐오스럽게 보일지 모르나 그들 역시 불쌍한 사람들일 뿐이다. 어린 묘목은 연둣빛을 띠며 여린 법이다. 그런데 중공은 비용을 아끼지 않고 이 거대한 중화문명이라는 고결한 인재의 모판을 늑대와 양이 어우러진 세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정부와 국민의 관계를 낫과 부추 관계로 만들어 선량한 이들이 버텨내기 힘들게 했다.
하지만 우리는 다행히도 수련하고 있고 대법이 있다. 수련자는 어느 세대에 태어났든 중공이 강요한 더러움과 비루함, 악습을 차츰 떨쳐낼 수 있다. 자신의 소우주를 맑고 깨끗하게 가꿀 수 있는 것이다. 대법 수련으로 얻은 순수함과 자비는 나약함이나 어리석음이 아니라 진정한 힘과 지혜다.
원문발표: 2024년 5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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