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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나는 선량함을 찾았다

글/ 산둥성 대법제자

[명혜망] 나는 어려서부터 잘 울었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매일 같이 울었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세 살 무렵엔 제멋대로였는데, 어느 한밤중에는 얼니(二妮)네 집에 가서 놀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데려다주지 않자 바로 울음보를 터트렸다. 어머니는 날 너무 예뻐하신 나머지 한밤중에 울음보가 된 나를 안고서 얼니네 집 문을 두드리러 가셨다. 7살 때는 어머니가 내가 전염병에 걸릴까 봐 외할머니댁으로 보내 1년 동안 지내게 하셨다.

여덟 살이 되어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1학년을 다니기엔 늦은 나이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집에서 간단한 구구단을 가르쳐주셨고 나는 곧바로 2학년으로 진학했다. 처음에는 글자를 쓸 줄 몰라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5학년 때부터는 시험에서 1등을 할 수 있게 됐다. 선생님은 늘 나를 칭찬하셨고 어머니도 자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날 자랑하셨다. 그래서 나는 허영심이 매우 강해졌고 듣기 좋은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말이 조금이라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금세 화를 냈고, 화가 나면 배가 너무 아팠다. 나 역시 그렇게 되고 싶진 않았지만 마음이 좁아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상스러운 말을 내뱉진 않았고 갈등이 생기면 그저 속으로 참아냈다. 참을 수 없을 땐 울음으로 해소했다.

조금 더 자라서는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누가 내 진짜 어머니일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여름밤, 뜰의 돗자리에 누워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저 별들에서 온 걸까? 왜 다른 사람들은 참을성이 있는데 나는 화를 잘 낼까? 어떻게 해야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많은 책을 찾아보고 내 성격을 바꿀 수 있을 법한 좋은 글귀들을 베껴 적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상처받는 게 두려워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꺼려했다. ‘날 유리병 속에 넣어두면 사람들이 날 해치지 못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나는 매우 우울하고 사색에 잠기는 성격이 되어갔다.

법을 얻은 기연(機緣)

1993년, 동료의 소개로 나는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연마하고 있는 기공을 나에게 추천해주었다. 대학 시절 몇 번 특이공능(초능력) 공연을 본 적이 있어서 나 역시 기공에 관심이 많았다. 어떤 기공을 연마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파룬궁이라고 하며 ‘파룬궁(法輪功)’이라는 책을 건네주었다.

책을 받아들고 훑어보니 너무나 좋은 내용이었다. 누가 자신을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성격이 불같은 걸 알고 있었다. ‘화를 잘 내는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는 “당신은 책 읽는 목소리가 너무 좋아요. 읽어줘요”라고 말했다. 그가 나와 함께 배우고 싶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기분이 무척 좋았다. 간혹 보도소에서 학교 교실에 사존의 설법 녹음을 틀어줄 때면 나도 들으러 갔다. 그는 “읽을 수 있는 만큼 책을 읽어봐요. 읽지 않는 것보다는 낫잖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의 가족은 모두 수련하고 있었다. 그와 부모님과 누나는 1992년 11월에 이미 사존의 설법반에 참가한 바 있다. 1994년에는 그의 부모님과 누나, 남동생이 모두 정저우(鄭州)시에 열린 사존의 설법반에 참가한 뒤 곧장 지난(濟南)으로 가서 사부님의 설법을 또 들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자 그는 나까지 신청해주었다. 당시 그는 학교에서 담임을 맡고 있었고 여름방학을 앞둔 시험 기간이라 휴가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혼인 신고를 한 지 좀 되었기에 그는 학교에 결혼한다고 말하고 휴가를 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결혼 휴가를 이용해 지난에서 열린 사존의 제2기 설법반에 참가할 수 있었다.

출발 전날 나는 계속 설사를 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상황이 오면 심한 장염을 앓았겠지만 이번에는 지난에 도착하자마자 증상이 사라졌다. 그 후로 나는 다시는 병에 걸리지 않았고 약을 먹을 일도 없었다.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내가 설법반에 참가하기도 전에 미리 내 몸을 정화해주신 것이었다.

나에게는 또 다른 신기한 일도 일어났다. 대학 다닐 때 검사를 받아보니 의사는 내 자궁이 작아서 정상 크기의 2/3밖에 되지 않는데, 그래서 생리가 불순하다고 했다. 그런데 파룬궁을 수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생리가 매우 규칙적으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궁도 정상 크기로 돌아왔다. 지금 나는 50대 중반이 되었지만 아직도 생리가 매우 정상적이다.

지난시 설법반에 다녀온 후 내 사상과 행동에는 하늘과 땅이 뒤바뀐 듯한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깨달았다. “사부님 찾은 지 몇몇 해인가 하루아침 친히 뵈옵게 되었구나 법 얻어 되돌아 수련하나니 원만 이루어 사부님 따라 돌아가리라.”(홍음-연귀성과)

나는 예전에는 믿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사존의 지난 설법반에 참가한 후 사존께서는 내 몸을 정화해주시고 좋지 않은 생각을 제거해주셨다. 그제야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좋은 사람, 수련하는 사람이 되어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것을 이루려면 단순히 동작만 익히는 게 아니라 법공부도 해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단체 연공에 참가하고 법공부 시간도 따로 마련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허리 통증 때문에 두 시간 이상 서 있거나 앉아있기 힘들었다. 그런데 대법 수련을 시작한 후, 처음에는 정공(靜功)을 할 때 다리가 아팠지만 허리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허리 통증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야외로 나가 단체 연공을 꾸준히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 통증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또 점차 반가부좌에서 결가부좌를 할 수 있게 됐다.

남을 위해 생각하는 법을 배우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떻게 남을 위해 생각해야 하는지 몰랐다. 자아가 너무 강해서 오로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만 알 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법공부를 통해서 좋은 사람, 더 좋은 사람이 되려면 먼저 타인을 위해 생각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떻게 해야 할까? 너무나 감사하게도 사존의 자비로운 안배로 시댁 식구들이 수련을 하고 나서 보여준 언행을 통해 서서히 터득할 수 있었다.

나는 우선 미소를 지으며 “좋아요”,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와서 도움을 청할 때 바로 거절하지 말고 상대방 입장에서 그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가져야 했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는 먼저 ‘괜찮아, 사부님이 계시고 법이 있으니 난 분명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시아버지는 사범대학 교장이시고 시어머니는 거기서 교편을 잡고 계셨다. 지식이 매우 해박하실 뿐만 아니라 부지런하고 선량한 분들이었다. 내가 퇴근할 때쯤이면 시부모님은 내가 도착하기 5분 전에 식사를 준비해 놓으셨고, 내가 집에 도착하면 온도가 딱 알맞았다. 식사를 마치면 그분들은 내게 낮잠을 자라고 하시며, 손주를 보면서도 소리를 낮추고 될 수 있으면 밖으로 나가셨다. 내가 과일을 좋아하는 걸 아시고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자주 사 오셨다. 한번은 내가 사과를 먹다 말고 반쪽을 남긴 후 집으로 돌아간 적이 있는데, 시어머니께서 남은 반쪽을 다 드셨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부터 나는 음식을 남기기가 민망해졌다.

어느 날 직장 동료가 물었다. “시어머니 댁에서 식사하는데 한 달에 얼마를 내요?”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라 퇴근 후 시부모님께 여쭤보았더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우리집 밥상이 남들처럼 풍성한 건 아니지만 너희가 와서 같이 먹으면 우린 그저 기쁘단다.” 시부모님은 우리에게 식사비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 우리 부부의 수도세, 전기세, 전화요금까지 다 내주셨다.

1995년, 우리는 ‘전법륜(轉法輪, 파룬궁 수련서)’을 구해 시어머니 댁에서 30여 명이 모이는 법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나와 남편, 그리고 몇몇 젊은 수련생들은 따로 다른 법공부 모임에 참가했는데, 우리는 법을 암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법공부 전에는 낮에 암기한 것을 먼저 한 번 복습한 뒤 이어서 법공부를 했다.

시간이 지나 법공부가 깊어지고 수련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배우게 된 것들 덕분에, 나는 점차 어떻게 남을 위해 생각해야 하는지 알게 됐고, 많은 좋지 않은 생각들도 제거할 수 있었다. 한번은 젊은 수련생 한 명이 우리집에 와서 식사를 같이하게 됐는데, 그가 하필 맛이 많이 떨어지는 만두, 냄비에서 여러 번 데웠던 만두를 집어 들었다. 나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전까지 항상 맛있는 것만 골라 먹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작은 일에서부터 잘 해나가야 한다는 깨달음이 왔다. 또한 많이 부끄러웠다. 내가 아무리 이기적이었어도 시댁 식구들은 단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늘 묵묵히 날 잘 대해주고 법리에 따라 자신을 엄격히 다스리며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바로 그분들이 너무나 잘해주셨기에 내가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법에서 나 자신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쉽게 상처받는 마음을 없애다

나는 예전에 악당 문화에 세뇌당해, 비록 학업 성적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악당의 선전에서는 농촌 사람들을 심하게 차별했기에 자주 열등감에 시달렸고, 도시 사람들을 몹시 부러워하곤 했다. 하지만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하고 시어머니 가족의 도움으로 법공부를 많이 하면서 나는 매우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들이 보내준 존중 속에서, 끊임없이 법을 암기하는 과정에서 나는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되찾았고, 열등감을 떨쳐버리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이는 이후 박해에 저항할 수 있는 든든한 기초가 되어주었다.

예전에는 자주 우는 편이었던 내가 시댁에서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한 후로는 쉽게 상처받지 않고 웃음소리가 가득 찬 사람이 되었다.

남동생은 이전에 항상 내가 성격이 나빠서 사람들, 특히 시댁 식구들과 잘 지내지 못할까 봐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내가 대법을 수련한 뒤에 달라진 모습을 보고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다고 한다. “누나가 이렇게 크게 변할 줄은, 이렇게 좋아질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시댁 식구들과도 이렇게 잘 지내다니 놀라워요.”

나는 내가 아직 많이 모자란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대법의 위력 속에서, 시댁 식구들이 베풀어준 관용과 인내 덕분에 비로소 나는 진선인(真·善·忍) 법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반드시 사존의 자비로운 배려와 세심한 보호에 보답하고, 대법 수련에서 더욱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그때는 마음이 너무 편안해서 매일 바라보는 하늘마저 찬란한 햇살로 빛나는 듯했다. 직장에서 만난 한 동료의 아내 역시 우리 직장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혼 후 그 남자와 재혼한 사이였다. 어느 날 내가 근무 중일 때, 그녀가 갑자기 달려와 날 30여 분 동안 욕했다. 내용인즉 내가 그녀의 남편을 빼앗아 갔다는 식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에 가지를 물고 있는 것처럼 도무지 입을 벌릴 수 없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사존께서 내게 고비를 넘기라고 하시는 거구나.’

예전에는 화가 나면 늘 배 아팠던 내가 그 순간만큼은 오히려 몹시 평온했고 속으로 그녀에게 오히려 감사하기까지 했다. 스스로 빚을 청산한 기분에 무척 기뻤다. 나중에 동료들은 모두 내가 아주 도량이 크다고들 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대법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어찌 그렇게 해낼 수 있었겠는가.

경지가 높은 사람이 되다

그 당시에는 환자들이 식사 대접을 자주 했는데, 병원장은 거듭 식사 초대를 받지 말라고 했지만 환자 가족들은 여전히 초대를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한 환자 가족이 식사 초대를 했는데 나는 거절했다. 첫째는 내가 수련을 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시어머니가 집에서 밥을 차려놓고 날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환자의 가족은 당서기의 친한 지인이었다. 당서기가 이 일을 알고 나서 식사하러 갔던 동료의 근무를 무려 반년이나 중단시켰다.

1998년경에 우리 병원에서는 주택 개혁이 시행됐다. 병원에 있던 내 단층집 한 채도 개혁 대상이 됐다. 2000년경에 새로 부임한 원장은 그 단층집들을 허물고 아파트를 짓겠다고 했다. 나는 이미 남편 직장에서 아파트를 샀기에 병원 쪽에서 받을 필요가 없었다. 병원 규정상 누구의 집을 허물면 그 사람이 먼저 아파트 호수를 고를 권리가 있었다. 관례상 아파트를 받지 않기로 한 사람은 자기 차례의 호수를 팔 수도 있었는데, 한 호수가 몇천 위안(수백만 원)의 값어치가 있었다. 누군가 내 차례의 호수를 사겠다고 했을 때 나는 거절했다. 나는 수련인이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원장이 주임 회의를 열었을 때 공개석상에서 나를 표창했다. “보세요, 파룬궁 수련생인 C는 아파트도 사지 않았고 호수도 팔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만약 내가 수련하지 않았다면 이 기회에 돈을 벌었을 것이고, 아파트를 사지 않더라도 호수를 남에게 팔아넘겼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던 것은 모두 파룬따파의 위덕 때문임을 나는 안다. 사부님의 가르침 덕분에 나는 욕심 없고 남을 위하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남편은 학급 담임을 맡은 선생님이었다. 그는 대법을 수련한 이후로 다시는 학부모들에게 촌지를 받지 않았고, 초과 납부된 학비도 착복하지 않았다. 그가 맡은 학년에는 12개 반이 있었는데, 자매 학생이 같은 학년에 있어 한 명은 남편 반에, 다른 한 명은 다른 반에 배정되어 있었다. 남편은 초과 납부된 학비를 돌려줬지만 다른 반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한번은 우리가 막 퇴근하려는데 비가 오고 있었다.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남편이 나와 내 동료 대여섯 명에게 우산을 하나씩 가져다준 것이었다. 동료들은 모두 감동했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이렇게 세심하게 배려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직장 동료, 친척, 이웃들은 모두 “저런 사람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어.” “파룬궁을 배우는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지난 일들을 되새겨보면 내 마음은 감사함으로 가득 차오른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가족 수련생들의 아낌없는 도움에도 감사드린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은 생명의 승화 과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서 시작해 점차적으로 더욱 좋은 사람, 속인을 초월한 고상한 생명이 되어, 더욱 높게 되는 것이다.”(베트남 수련생들에게)

나는 우리가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건 모두 파룬따파를 수련했기 때문임을 느꼈다. 31년간의 수련 속에서 대법의 법리 지도 하에 나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서 출발해 더 좋은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는 고상한 경지의 수련인으로 승화했다. 우리는 이익을 담담히 보고 모든 일에서 타인을 위해 생각한다. 이는 사부님의 자비이고 파룬따파의 위대함이며 사부님의 가르침이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명혜망 5·13 세계 파룬따파의 날 응모작)

 

원문발표: 2024년 5월 1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5/13/47595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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