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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우리 둘은 이제 수련생이에요!”

글/ 중국 대법제자(수련생 정리)

[명혜망] 저는 1998년에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파룬따파가 박해받은 20여 년간, 제 아들은 차별, 학교 중퇴, 혼자 살아가야 하는 등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제 아들은 행운아입니다. 그는 혼란과 물질적 욕망이 가득한 사회에서 길을 잃지 않았고, 대법 법리에 이끌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법선(法船)에 올랐습니다.

배움의 길

저는 파룬따파를 계속 수련한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여러 차례 납치돼 박해받았습니다. 2002년에만 두 번이나 납치됐는데 그때 아들은 아직 초등학생이었습니다. 경찰들이 집안을 샅샅이 뒤져 대법 자료를 찾을 때 아들은 이불 속에 숨어 덜덜 떨고 있었는데, 아이의 공포에 질린 그 눈동자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 기간에 경찰은 저를 찾지 못하자 분노에 차서 아들을 겁주고 위협하며 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려 했습니다. 이웃집 아이들은 그를 때리고 욕하면서 다른 아이들을 부추겨 그를 괴롭혔습니다. 심지어 한번은 아이들이 제 아들을 모래 더미 속에 파묻었는데, 어른들이 알고 달려갔을 때는 아들의 작은 머리만 바깥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아들은 바로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 아들이 다니는 반의 학습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고 그도 더 이상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이 상황을 발견한 후, 아들의 공부를 일대일로 지도해줄 사교육 선생님을 구했지만 소용없었고 그는 전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자주 공부하지 않는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빼먹고,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고, 교외에서 약한 학생들을 괴롭히고 돈을 빼앗았습니다. 그때 저는 아직 수련인의 마음가짐으로 이 문제를 대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대법 법리로 아이와 소통하는 방법을 몰랐으며, 체벌과 회초리 교육을 사용했습니다. 결과는 좋지 못했고 아이는 저를 노려보며 강한 반항심을 보였습니다.

아들의 미래가 대법과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고 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언니(수련생)와 상의하며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아이를 돌봐달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외지에 있는 언니 집 근처 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습니다. 언니는 법리가 명확했고 법 중에서 닦아낸 지혜로 아이를 교육했으며,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인도하고 격려했으며, 아이가 자신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보게 하고, 타인의 헌신을 이해하며, 일을 처리할 때 다른 사람을 많이 배려하고, 진선인(真·善·忍)의 법리에 따라 처신하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이전에 대법을 배웠던 아들의 선량한 본성이 점차 깨어났습니다.

아들은 돌아온 후 변화가 매우 컸는데 선생님께 예의 바르게 대할 수 있게 됐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융합이 잘 됐으며, 마음을 다해 공부하는 법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의 기초 실력은 너무 부족했고 비록 성적 순위가 100등 정도 올라갔지만, 담임 선생님은 그가 여전히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저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법공부와 심성 수련이 깊어짐에 따라 법 중에서 닦아낸 ‘선(善)’은 저의 초조한 마음을 없애주었습니다. 저는 대법제자 가정의 아이들은 사부님께서 보호해주고 계시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노력해야 하고 결과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제가 해야 할 일만 잘하고, 아들을 때리거나 소리 지르지 않으며, 그에게 법리를 알려주고 자비롭게 대했습니다. 아들 스스로도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 때 아들의 학교가 승격되어 모집을 확대하고 입학 점수 기준을 낮추었는데, 마침 제 아들의 중학교 졸업시험 점수선까지 내려갔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은 모두 “당신은 집에서는 얼마나 많은 향을 피웠나요!”라며 감탄했습니다.

대학 입학시험이 되자 기적이 다시 한번 나타났습니다. 제 아들은 최저 입학 점수선보다 100여 점이 낮은 성적으로 한 2등급 대학에 추가 모집되어 들어갔습니다. 겨우 3등급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아이였는데 지원서를 작성할 때 담임 선생님이 도와주셔서 아무도 감히 지원하지 않는 변방의 학교를 지원하게 했고, 해당 학교가 이번에 추가 모집할 때 우리 성에서는 남학생 한 명만 뽑았는데 아들이 합격한 것이었습니다.

아이 할아버지는 가족 모임에서 흥분하며 “이것은 며느리가 대법을 수련한 결과야, 파룬따파는 좋구나!”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이후로 다른 사람 앞에서 손자 얘기가 나오면 할아버지는 기쁨에 겨워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며느리의 공로이며 며느리가 대법을 수련했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내 손자는 어떻게 됐을지 몰라!”

구직하는 길

비록 아들이 상당히 오랜 기간 저와 함께 법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그가 어렸을 때 들은 법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갖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제가 평소에 대법 법리로 그를 이끌었기에 점차 아들의 훌륭한 품행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손해 볼 때, 대가 없이 베풀 때, 바보 취급을 당할 때, 그는 수련인의 마음가짐으로 이 모든 것을 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대법제자가 해야 할 세 가지 일을 하고 있어서, 때로는 경찰의 괴롭힘과 박해를 받았기에 안정적인 직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정적인 수입도 없었고 남편의 건강도 좋지 않아 가정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아들은 대학에 진학한 후 가정의 부담을 줄이고 싶어 했고, 거기에 전공이 국제경제무역이었기에 재학 중에 직업 기술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학장을 도와 한 가게를 관리하면서 반년 넘게 일했는데, 학장은 처음에 약속했던 현금 보수 대신에 가치에 맞지 않는 한 무더기 물품을 주었습니다. 아들은 비록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아들 마음속 불만을 보고 타일렀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득을 좋아하는구나. 아마도 이전에 우리가 그에게 빚진 것일 거야. 이제 갚은 거니까 좋은 일이야.” 아들의 답답했던 마음의 매듭은 곧 풀렸습니다.

매번 그와 전화로 교류할 때마다 저는 모두 진심으로 대했고, 점차 아들은 마음으로 소통하는 좋은 친구가 됐으며, 일이 생기면 모두 저와 논의했습니다. 그도 사물을 대할 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사람의 이치로 일을 처리하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곤란해지지만, 대법 법리에 따라 처신하면 마음이 밝아지고 길이 점점 넓어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학교는 어떤 해안 대도시에 있는 오성급 호화호텔과 협력해 학생들을 실습 보내고 있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눈에 띄는 일을 하기 위해 다투었는데, 예를 들면 공항에 가서 연예인을 마중하거나, 호텔에 묵으러 오는 각국 고위층 인사들을 맞이하는 일 등이었습니다. 그러면 많은 팁을 받기에 돈벌이가 빨랐습니다. 그러나 제 아들은 기술을 배우고 싶어 했고 한창때에 돈벌이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안내원을 해보기도 하고, 음식을 나르기도 하고, 학교를 대신해 후배들을 교육시키기도 했습니다. 실습하는 여학생들은 근무할 때 외모가 중요해 화장을 해야 했는데, 그들이 쓰는 저렴한 화장품은 피부에 매우 해로워 그들은 모두 야간 근무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제 아들에게 자기 대신 근무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마치 잔심부름하는 사람처럼 매우 힘들었습니다. 요즘같이 편안한 삶에 익숙한 이 아이들 중에는 이런 노동 강도를 견딜 수 있는 아이가 많지 않았지만, 제 아들은 이를 악물고 견뎠습니다. 호텔 사장은 그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 것을 보고 그를 매우 좋아했으며, 그에게 발전 전망이 있다고 여겨 실습이 끝난 후에도 제 아들을 호텔에 남기고 싶어 했습니다.

이 기간에 아들은 공산당 고위층 집안의 동갑내기 한 명과 친분을 쌓았는데, 그는 장기간 이 호텔에 묵고 있었습니다. 서로 알게 되면서 둘은 친해졌습니다. 그는 제 아들이 성실하고 본분에 충실하며 탐욕스럽지 않고 어느 정도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고, 아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사업을 돕게 하고 싶어 했습니다. 아들이 저에게 의견을 물어왔고 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 일해선 안 된다. 그들의 돈은 출처가 분명치 않고 돈세탁을 하고 있어. 그들의 돈 대부분은 서민들을 착취해서 번 거야. 엄마는 이렇게 많은 고생 끝에 널 키웠는데 네가 그들과 한통속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아. 우리는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해.”

그리고 자신의 복을 돈과 바꾸면 안 되고 사람이 덕을 잃으면 복도 없어진다고 말해줬습니다. 결국 정말로 일이 그렇게 됐는데, 그 아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부패 축재로 이후 모두 잡혀 들어갔습니다.

아들은 대학 졸업 후 유럽의 한 글로벌 대기업 브랜드의 중국 총대리점에 입사했습니다. 채용 담당자는 제 아들의 이력서를 보고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면접 때 나온 시험 문제는 놀랍게도 모두 아들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들려준 각국의 풍물과 유명인의 출생지 및 취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20가지 문제를 아들은 거의 전부 맞혔습니다.

시험관이 지원자들에게 연봉에 대한 요구사항을 물었을 때, 그 유명 대학 출신 구직자들은 모두 자신만만하게 구체적인 금액을 제시했습니다. 제 아들 차례가 되자 그는 “저는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없습니다. 제가 회사에 창출하는 가치를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저에게 얼마를 주시든 제가 하는 일은 여러분을 만족시킬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 아들은 명문대 지원자들 속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보수는 그 사람들보다 적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자신의 기대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학교 때의 단련 덕분에 아들은 일을 시작하자마자 금방 적응했습니다. 부지런하고 세심하게 일해 매장에서 곧 혼자 힘으로 일을 해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일하고 있는데 중국어를 할 줄 아는 한 외국 여성이 매장을 어슬렁어슬렁 둘러보며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는데, 물건을 사려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제 아들은 평소 모든 고객을 대하듯이 끈기 있고 친절하게 그녀에게 상품을 소개했습니다. 이 여성은 골치 아프고 기묘한 질문들을 던졌는데, 아들은 아는 것이라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고 모르는 것이라면 선의로 설명했습니다. 마지막에 그녀는 그 상품을 샀습니다.

갑자기 그 여성이 얼굴을 찌푸리며 제 아들에게 “당신 여기서 일하지 마세요. 매장에서 당신 해고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제 아들은 매우 놀랐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랐습니다. 이 여성은 제 아들이 매우 담담하게 반응하고 분노의 감정이 없는 것을 보고 다시 물었습니다. “매장에서 당신을 해고했는데 아무 생각이 없나요? 그들을 미워하지 않나요?” 제 아들은 내심 동요가 있었지만 여전히 미소를 띠며 “저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회사가 그렇게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분명 제가 어딘가 잘하지 못한 게 있겠죠”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이 여성은 표정이 누그러지더니 제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젊은이, 저는 본사에서 파견한 미스터리 쇼퍼(손님으로 가장해 고객서비스에 대한 평가를 조사하는 사람)예요. 전 세계 몇 개국을 다녔는데 이렇게 오랜 세월 저를 설득해서 제품을 사게 만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당신이 처음이에요.” 이어서 또 “방금 제 말들은 모두 당신을 시험하는 거였어요. 당신의 태도가 매우 마음에 듭니다. 당신의 소양, 순발력, 감성지능 등 각 방면이 모두 매우 훌륭해요. 저는 당신을 본사로 데려가서 잘 키워 승진시키기로 결정했어요”라고 했습니다.

외국계 기업은 인성화된 경영을 하며, 우수 직원을 양성하는 데 거금을 아끼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교육을 받은 후 각 방면의 업무 능력이 크게 향상됐습니다. 어떤 이들은 높은 연봉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회사로 옮겨 가며 고위직을 추구하지만 회사에서도 이를 막지는 않았습니다. 아들도 1년여의 엄격한 훈련을 받고 막 발령을 받으려던 참이었습니다. 아들이 저에게 “엄마, 같이 훈련받은 많은 사람이 다른 회사에서 주는 연봉이 높다고 옮겨갔어요. 저도 가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얘야, 그러면 안 된다. 회사에서 너를 양성해줬는데 너는 아직 회사에 가치를 창출해주지 않았잖니. 어떻게 은혜를 저버릴 수 있니? 우리는 수련인으로서 세상 흐름에 휩쓸려서는 안 되고 모든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단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회사의 중요한 자리에 배치됐는데 매일 근면하고 착실하게 일했습니다. 상사에게는 아부하지 않았고, 하급자를 차별하지 않았으며 분별심이 없었습니다. 아들은 좋은 사람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했습니다. 회사 행사에서 아들이 기획한 프로그램이 상을 탔을 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개인 보너스를 동료들과 나누었습니다. 일할 때는 규정된 보수만 받았고, 합법적이라도 합리적이지 않은 돈은 절대 받지 않았습니다. 그의 직위라면 외국계 기업의 허점을 이용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고, 1년만 일해도 이 도시에서 아파트를 살 수 있을 정도였지만 아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두드러진 실적 때문에 회사 본사에서는 사람을 파견해 그의 입사, 성장, 발전의 업무 경력을 상세히 취재해 한 권의 책에 수록했습니다. 아들은 3년 만에 이 외국계 기업에서 부서 경영진급까지 승진했고, 거대한 매장 두 곳을 관리하게 됐습니다.

“우리 둘은 이제 수련생이에요!”

1998년 제가 대법을 수련하기 시작한 후, 집에서 법을 읽고 사부님의 설법 녹음테이프를 들을 때 제 아들은 겨우 몇 살밖에 안 됐지만 그도 함께 들었습니다. 1999년 ‘7.20’ 이후 제가 밖에 나가 진상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 현수막을 걸 때, 아들을 돌볼 사람이 없어 데리고 다녔습니다. 길을 많이 걷다 보면 아들은 피곤해했고 그러면 길가 난간 아래에 내려놓았는데, 그는 기대어 비몽사몽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제가 현수막 걸기를 마치고 돌아오면 다시 아들을 업고 집으로 갔습니다. 아들은 매번 울거나 떼쓰지 않고 엄마가 가장 신성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은 제가 대법을 수련하고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들은 늘 제 편에 서서 저를 지지해주었습니다. 그의 성적으로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으리라고는 온 가족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들도 만약 신비로운 힘이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이 그렇게 순조롭게 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둘이 교류할 때 그는 늘 “우리 가족, 우리 가족”이라고 대법제자들을 칭했는데 저는 매우 흐뭇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들이 늘 자신을 진정한 대법제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들이 외국계 기업에서 일한 지 3년째 되던 해, 그는 마케팅 분야에서 한계를 느끼고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지인의 소개로 그는 가장 좋아하고 가장 가고 싶어 했지만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던(그가 다녔던 대학이 유명하지 않았기에) 또 다른 외국계 대기업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이 회사의 디자인 전임자가 퇴직해 마침 공석이 생겼기 때문이었는데, 그는 여기서 디자인 쪽으로 발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디자인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배우기 시작했지만 디자인은 하루이틀 만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우선 영어라는 관문부터 통과하기 어려웠습니다. 상사는 제 아들을 배려해서 원래 영어로 해야 할 아침 회의를 중국어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들은 미안한 마음에 자신의 영어 실력을 높이기 위해 매일 영어책을 붙들고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 어느 날 밤 아들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속에서 한 선생님이 칠판 앞에서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았고, 의식 중에 이 선생님이 바로 대법 사부님임을 알았습니다. 잠에서 깼지만 꿈은 매우 생생했습니다.

그날 출근해서 아침 회의를 하는데 모두가 타원형 회의 탁자 앞에 둘러앉아 있었고, 상사가 우호적으로 제 아들에게 영어로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주위 직원들이 모두 그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일어나더니 유창하고 매끄럽게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표현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그를 쳐다보며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영어를 배웠지?’ 저녁에 아들은 신이 나서 저에게 이 일을 얘기하며 “엄마, 대법 사부님께서 저를 도와주셨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이 그 회사에 온 것은 디자인을 하고 싶어서였지만, 매일 협조나 잡일만 했고 핵심은 배우지 못하고 겉핥기식으로만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본래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아들은 그 회사를 떠나기 아쉬워했지만 디자인 기술직으로 나아가기 위해 4년째에 또 다른 한 아시아 회사로 갔습니다. 제 아들이 속한 팀의 제품은 전체 제품 시리즈의 대표 상품이라 매우 중요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사람을 파견해 그에게 직접 기술을 전수했고 그도 계속 노력해서 배웠습니다. 퇴근 시간을 늦추고 숙소에 돌아가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이 일상다반사가 됐습니다.

회사에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려 했고, 팀의 각 구성원들은 모두 설계 방안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아들은 중도에 합류한 터라 기초가 약했지만 그는 자주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염했고, 중요한 순간에는 사부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번에 그에게는 두 가지 설계 방안의 구상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모두의 일치된 인정을 받았고 모두들 너무 좋다고 하며 그에게 “당신은 어느 학교 출신이에요?”라고 물었습니다. 동료들이 제 아들의 학교를 알게 되자 머리를 긁적이며 “그 학교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좋은 설계를 내놓을 수 있었어요? 어디서 영감을 얻은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지혜롭게 그들에게 “우주에서 온 겁니다!”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이 제품이 시장에 나온 후 사용자 평가가 높았고 판매 실적도 매우 좋았으며, 회사는 규정에 따라 아들에게 매우 높은 보너스를 주었습니다.

3년간의 중공 바이러스(우한 폐렴) 봉쇄로 인해 제 아들이 있는 도시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외국 기업들은 모두 철수했습니다. 중공 악당이 국민을 속이고 국가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간파한 식자층들도 모두 해외로 떠났습니다. 제 아들은 그 태자당(공산당 원로 자제들)들이 돈을 물쓰듯 하며 ‘검은 카드’를 들고 호텔이나 공항 같은 곳을 드나드는 것을 보았는데, 카드를 받는 사람들은 마치 고위층을 접대하듯 그들을 공손하고 정중하게 대했습니다. 그가 보니 중국에서는 나쁜 사람들만 대접받고, 좋은 사람인 어머니는 부당한 박해를 받고 있었기에 해외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지운동(역주: 2022년 11월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봉쇄에 대한 항의 시위)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중공 악당은 겁에 질려 봉쇄를 지속할 수 없었지만, 사회 안정 유지에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지하철에서 직접 목격했는데, 한 무리 사복경찰들이 달려와 열차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움직이지 마. 모두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열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다음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을 일렬로 세워 차례로 조사했는데, 휴대폰에 VPN 앱(인터넷 차단 우회 앱)이 있는 사람들을 즉시 끌고 갔습니다. 해외에서 출국할 때 공항에서 안전검사를 받는데, 안전검사원이 출국자들에게 “해외로 뭘 하러 가시나요?”라고 묻는 것을 보았는데, 만약 약간이라도 주저하면 즉시 여권을 잘라버렸습니다. 항의하면 검사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위에 가서 따지세요. 위에서 이렇게 하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엉망진창인 중국의 상황을 보고 아들은 유학을 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하지만 해외로 나가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 IELTS 시험(역주: 비영어권 국가 학생들의 영어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국제 시험)을 봤지만, 매번 몇 점이 모자라서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아들이 평소 지녔던 태도와 업무 실적이 그에게 보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앞의 두 회사를 그만둘 때 사장과 상사들은 모두 그를 붙잡으려 애썼습니다. 이 두 회사의 사장이 그가 해외로 유학을 가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모두 추천서를 써주고 보증을 서주었습니다. 아들은 마지막 회사에서 1년도 채우지 못했는데 사장은 그에게 보너스를 주며 졸업 후에 다시 회사로 돌아와 일하라고 초청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들은 더 이상 IELTS 시험을 볼 필요가 없이 유럽의 한 도시에 있는 대학에 직접 입학할 수 있게 됐습니다.

요즘 비자 수속을 밟기가 매우 어려운데, 어떤 전공은 아예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습니다. 수속을 밟을 때는 한 장 한 장 심사했는데 자격 미달 항목이 하나라도 있으면 반려시켰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네가 돈을 벌려고 하는 거라면 그렇게 순조롭지 않을 거고, 만약 대법 수련으로 빨리 돌아가려는 거라면 네 소원대로 될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아들이 비자를 신청하러 갔을 때 영사관 직원은 아이의 전공이 마침 그 당시 인기였기에 매우 기뻐하며 그와 한참 얘기했고, 가져온 자료도 별로 안 보고 매우 순조롭게 비자를 발급해주었습니다.

온 가족이 모두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그의 길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라는 것을요. 그동안 저는 늘 그에게 “대법 책을 봐라, 얘야”라고 채근했지만 그는 끝내 대법 책을 집어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진선인에 따라 처신했고, 자비로운 사부님께서도 계속 지난날 어린 제자를 보살펴주고 계셨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이 있을 때마다 안으로 찾으라고 하셨는데, 저는 제 마음에 사심이 있는지, 즉 그가 제 아들이기에 제가 이렇게 신경을 쓰고 독촉하는 건지, 아니면 법에 입각해 생명에 대해 책임지는 것인지 진지하게 살폈습니다. 이를 생각하자 눈물이 저절로 흘렀습니다. 저는 마치 제가 내려올 때 이런 약속에 서명한 것 같았습니다. ‘반드시 그를 일깨워 함께 천국으로 돌아가리라.’ 어떤 수련생은 이 연령대 아이 중 많은 수가 대법을 얻기 위해 왔기 때문에 제게 발정념을 해서 지난날 어린 제자가 대법 수련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로막는 일체 사악을 제거하고, 그가 층층이 내려올 때 구세력과 맺은 약속도 제거하라고 알려준 적이 있습니다.

해외로 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들이 저와 영상통화를 하며 살며시 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둘은 이제 수련생이에요!” 아들은 매우 기뻐했는데, 저는 아들이 그렇게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션윈예술단이 그가 있던 도시로 공연을 왔는데 그 도시에는 처음 오는 거였습니다. 제 아들은 션윈이 이곳에서 공연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기 인생을 바꿀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날 그가 극장에 와서 보니 공연을 보러 온 남성들은 양복을 입고, 여성들은 예복을 입고 있었는데, 온 극장의 분위기가 우아하고 신성해서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사람들이 션윈 공연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첫 공연을 본 후, 아들은 극장 로비를 서성이며 떠나기 아쉬워했고, 이어서 두 번째 공연도 보았습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번 공연은 엄마를 위해 보는 거야. 엄마는 현장에 오실 수 없으니까. 내가 엄마를 대신해서, 중국 수련생들을 대신해서 보는 거야.’ 현장에 있던 공연 스태프들(수련생)은 그가 서성이는 것을 보고 그를 불러 홍보물을 가져가게 했는데, 제 아들은 “저희 집에 수련하는 분이 계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부님께서는 떨어져 나갔던 지난날의 어린 제자가 이국땅에서 다시 법연(法緣)을 맺게 해주셨습니다.

여기까지 쓰자 이미 제 눈에는 눈물이 가득합니다. 인연 있는 생명을 하나하나 포기하지 않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명혜망 5.13 세계 파룬따파의 날 응모작)

 

원문발표: 2024년 5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5/10/475904.html
简体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5/10/4759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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