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촨성 대법제자 양범(揚帆)
[명혜망] 나는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한 지 20년이 넘었다. 사부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모든 일을 정념으로 대하라고 당부하셨고, 나도 늘 입에 달고 다녔지만 많은 때와 많은 일에서 정념으로 대하지 못했다. 최근 명혜편집부의 ‘정념과 사람의 정(情)’을 반복해서 배운 후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다.
첫째, 정념은 법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마음속에 법이 있어야만 정념이 생겨날 수 있다. 그렇다면 법공부할 때 절대 형식에 흐르거나, 진도를 서두르거나, 수련생과 공부 시간이나 암기한 강의 수를 비교해선 안 된다. 관건은 법에 대해 얼마나 깨달았고 또 얼마나 실천했느냐에 있다. 단지 깨달았을 뿐 실천하지 않는다면 안 된다. 최근 나는 법공부나 법 암기 중에 졸음이 오거나 마음에 들어가지 않았고, 때로는 깨달아도 실천하지 못했다.
둘째, 관건적인 순간에 법으로 사물을 보고 자신을 가늠해야만 정념이 생겨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몸에 갑자기 불편함이 생기거나 예전에 앓았던 병 증상이 다시 나타나는 듯할 때, 나는 오랫동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막지 못했고, 첫 번째 생각에 사부님과 대법을 떠올리지 못했으며, 수련하게 되어야만 이런 일을 만나는 것이고, 수련 중에 만나는 모든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이 좋다고 여기는 일이든 나쁘다고 여기는 일이든 수련자에게는 모두 좋은 일이다. 만약 관(關)이라면 한 번 넘기면 그만큼 줄어들 것이고, 만약 업력이라면 조금 없애면 그만큼 줄어들 것이며, 만약 빚진 것이라면 갚고 나면 한결 가벼워질 것이고, 만약 시험이라면 뚫고 나가면 제고될 것이며, 만약 박해 요소라면 바로 우리가 없애야 할 것 아닌가?
나는 예전에 학교에 다닐 때 성적이 우수해서 남의 칭찬을 듣고는 속으로 뿌듯해했다. 이렇게 수련한 지 많은 해가 지났지만 이 마음이 때로는 여전히 뚜렷하게 있었고, 법으로 늘 자신을 경계하지 않았는데, 이는 명예욕이 작용한 것이며 정(情)의 표현 형식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간 나는 늘 제고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구체적으로는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모두 잘하지 못하고 처음 수련할 때의 느낌이 없어졌다. 이는 사람의 관념이 너무 무거워 정념이 없어진 탓이다.
셋째, 조건 없이 안으로 찾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늘 안으로 찾지 않고 “옳은 것은 그이고 잘못된 건 나이니”(홍음3-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떠올리지 못하고 제고될 기회를 밀쳐냈다. 예를 들어 가족이 계속 내가 일을 잘하지 못한다거나 물건을 깨끗이 씻지 못한다고 말할 때, 나는 입으로는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억울함을 느꼈고, 내가 하기는 했으니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으며, 정말로 정성 들여 하지 않았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했다. 지금 나는 깨달았다. 대법제자는 어떤 일을 하든 정성을 들여 해야 한다. 대법제자는 어떤 것이든 모두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직 정성을 다해 대하고 선한 마음으로 대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그것을 위하는 것이다.
넷째, 예를 들어 가족은 내가 늘 건성건성 일한다고 하는데, 나는 지금에야 사부님께서 가족의 입을 빌려 날 깨우쳐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련에는 작은 일이 없다. 사부님께서는 자비롭게 모든 중생을 구하시는데,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대법제자가 어찌 모든 것에 책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지금 깨달았다. 속인 속의 일을 잘하는 것(하되 추구하지 않음)은 대법제자의 풍모를 체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법제자는 먼저 좋은 사람,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만약 정말로 수련생을 거울로 여길 수 있다면 나는 이것이 정념이라고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지난 몇 년간 오랫동안 이 점을 해내지 못했고, 어떤 수련생의 표현이 좋지 않거나 하는 것이 좋지 않을 때 늘 자신은 그런대로 괜찮다고 느꼈으며, 수련생의 좋지 않은 표현이 바로 자신이 닦아야 할 부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했다. 사실 대법제자로서 다른 수련생을 평가할 자격이 없으며 오직 사부님만이 아실 뿐이다. 수련생은 하나의 정체(整體)이며 서로 장단점을 보완하고 상대방의 좋지 않은 표현으로 자신의 좋지 않은 것을 닦아내며, 서로 함께 제고되는 것이 바로 정념이다. 상대방 입장에서 문제를 보아야만 정념이 생겨날 수 있다.
여섯째, 속인 중의 사람과 일을 선하게 대하고, 진정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세인을 가족으로 여겨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 정으로 대해서는 안 되며 그들을 겹겹의 고난을 겪고 세상에 내려와 대법의 제도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 “그가 나에게 잘해주니 나도 그가 좋다”는 관점으로 대해서는 절대 안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사람마음이며 바로 속인이다.
일곱째, 나는 예전에 늘 이런 생각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릴 때, 진지하게 듣고 믿어준 사람은 좋다고 여기고, 안 듣거나 반대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좋지 않다고 여겼다. 나는 이것이 사람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치 자신의 말을 들으면 기쁘고 안 들으면 기쁘지 않은 것 같은데, 이 역시 명예욕이 작용하는 것 아닌가! 나는 지금 깨달았다. 우리가 진상을 알리는 대상이 진상을 받아들이는지는 대법제자가 진상을 알리는 기점, 방법 및 마음가짐과 모두 관계가 있으며, 또한 진상을 듣는 사람의 근기와도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에서 벗어나야만 정념이 생겨날 수 있으며, 수련 중 어떤 문제에 부딪히든 첫 생각에 사부님과 대법을 떠올리고, 사람의 마음(人心), 사람의 생각(人念), 사람의 정(人情)을 닦아내야만 정념이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오직 정념정행(正念正行)해야만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만약 법에 맞지 않는 곳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원문발표: 2024년 5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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