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랴오닝성 대법제자 요원(了願)
[명혜망] 나는 1997년에 운 좋게 대법 수련을 시작해 20년 넘게 대법의 은혜를 입었다.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는 날 환골탈태하게 했고 그 고마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파룬궁 수련으로 환골탈태해 시어머니와 화해하다
나는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셨고 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하셨다. 내가 기억하는 한 부모님은 매일 크고 작은 다툼을 벌이셨고, 명절마다 큰 다툼이 있었다. 집안에 곡물 가공공장이 있어서 우리 가족의 생활 수준은 마을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나는 결혼 적령기에 열댓 가구밖에 없는 가난한 산골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형제가 하나 있는 소박하고 순박한 사람이었다. 시아버지는 철면피로 유명했고, 시어머니는 만두를 삶을 때 삶은 물도 버리지 않으실 정도로 구두쇠셨으며, 시누이는 집을 나갔다. 시댁 식구들은 날 많이 사랑했지만 나는 감사할 줄 몰랐고, 심지어 남편에게 마작을 권하기도 했다.
나는 돈을 아끼지 않고 쓰고 곡식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이 태어나면서 시댁 생활이 얼마나 가난한지 알게 되었다. 가을에는 볶은 배추를 한 냄비 끓여 이삼 일을, 겨울에는 무와 두부 조림을 한 냄비 끓여 사오 일을 먹었다. 그때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무슨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 가족의 생활을 개선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나중에 부모님이 가공공장을 우리에게 맡기셨지만 이삼 년을 운영해도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몰래 시아버지께 내가 돈을 함부로 쓰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크게 싸웠다. 시어머니는 너무 화가 나서 온몸이 아파 설날 저녁 식사도 거르셨다. 그 뒤로 나는 시부모님께 다시는 아무것도 사 드리지 않았다. 시부모님이 싫었고 남편도 싫었다. 우리는 가공공장 운영을 그만두고 부모님께 돌려드렸다.
이듬해 봄, 나는 시부모님과 함께 경작하던 땅을 되찾아와 직접 경작했고, 친정 마을에서도 1천 평 정도의 땅을 임대했으며, 암퇘지 두 마리와 비육돈 여섯 마리도 키웠다. 그러나 남편은 타지로 일하러 가겠다고 했고, 시부모님은 아들이 외지에서 단련을 쌓는 것이 좋겠다며 적극 지지하셨다. 그때는 노동자들이 품삯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나는 남편이 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화가 나서 “돈을 벌지 못하면 돌아오지 마”라고 했다. 추수가 끝날 무렵 남편은 500위안(한화 약 10만 원)도 안 되는 돈을 갖고 돌아왔고 나머지는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해 우리집 수입은 8천 위안이었다. 나는 다섯 살 된 아이를 혼자 키우며 집안일과 농사일을 모두 혼자 감당했다. 시댁에서는 풀 한 포기 뽑는 것조차 도와주지 않았다. 입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화가 치밀었고 원망이 쌓여갔다. 한번은 사소한 일로 남편과 싸웠는데 다른 사람이 남편을 말리며 데려갔다. 나는 화가 풀리지 않아 곡괭이를 들고 남편을 때리려 했다. 한 구경꾼이 “그냥 좋게 지내요, 싸워서 뭐 합니까?”라고 해서 곡괭이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속에 맺힌 한을 풀 길이 없어 집에 들어가 제일 비싼 컬러TV를 마당 한가운데 내던지고 발로 걷어찼다. 친척 한 분이 “아이고, 일 년에 TV를 몇 대 값이나 벌길래 그래?”라고 하자 나는 멍해졌다. 그 후로 어떤 이는 내가 미쳤다고 하고 어떤 이는 정신병에 걸렸다고 했다. 며칠 동안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일만 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는 일도 할 수 없었고 밤에 자지도 않고 낮에는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어머니가 날 데리고 여기저기 치료를 받아봤지만 차도가 없자 정신병원에 보내려고 하셨다.
그때 이모가 ‘출가 제자의 원칙’이라는 사부님의 신경문을 가져와 읽어보라고 했다. 읽고 나서 나는 이 글이 날 위해 쓰인 것 같다고 말했다. 잠자리에 들 때 어머니가 사부님 설법 녹음을 틀어주셨는데, 나는 큰 소리로 듣기 싫다고 하며 녹음기를 부수려 했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 녹음기를 껐다가 내가 잠들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켜셨다. 나는 다시 부수고 싶었지만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사부님께서 ‘업력(業力)의 전화(轉化)’에서 백색물질과 흑색물질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나는 수련하고 싶었고 사부님의 제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수련이 무엇인지,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는지, 심지어 어떻게 사람이 되는지조차 몰랐다. 그저 대법서적을 좋아해 사부님의 ‘미국법회 설법’을 단숨에 읽었고 당시 출간된 사부님의 모든 설법을 며칠 만에 다 읽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시어머니도 법을 얻으셨고 시아버지도 대법 책을 보셨으며 집에서 법공부 모임이 생겼다. 남편은 가끔 사부님 설법 녹화를 틀어주는 것을 도왔다. 그때 나는 사부님 말씀을 기억했다. “당신은 연공하지만, 당신의 배우자는 연공하지 않을 수 있는데, 연공 때문에 부부가 이혼해서는 안 된다.”(전법륜) 나는 법리를 깨닫고 남편과 이혼하지 않고 화목하게 살기로 했다. 시어머니는 밥을 하시면 내가 불을 땠고, 시부모님이 농사일을 하시면 나도 함께 일했다. 남편은 돈을 벌면 모두 시어머니께 드렸고, 내가 산나물을 팔아 번 돈도 모두 시어머니께 드렸다. 설에 친정에 갈 때만 시어머니가 약간의 돈을 주셨는데, 나는 그것으로 친척들에게 줄 선물을 샀고, 아들에게 세뱃돈을 달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이기심이 강하고 거친 여자에서 명예와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 현명하고 선량한 여인으로 변했다. 시아버지는 사람들 앞에서 늘 날 자랑스러워하셨고, 마을 부녀회장은 “이 집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우리가 중재해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파룬궁 수련으로 화해했어요”라고 말했다. 파룬따파는 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대법을 지지한 마을이 홍수에서 살아남다
1999년 7월, 중공의 사악한 파룬궁 박해가 시작됐고 나는 여러 차례 납치돼 감옥에서 거의 7년을 보냈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은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나의 확고한 믿음을 바꾸지 못했고, 날 묵묵히 지지하는 부모님에게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2011년, 아버지는 97세 된 할머니를 모시고 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우게 하셨다. 할머니는 순순히 큰 소리로 자주 외우셨다. 2013년 4월, 조카가 태어나 4대가 한집에서 살게 됐고, 할머니는 100세가 되어 평온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2013년 8월, 꿈에서 먹구름이 아버지를 덮치려는 것을 보고 무의식중에 손을 뻗자 먹구름이 사라졌다. 며칠 후 천년만의 대홍수가 우리 산골 마을을 덮쳤다. 홍수가 지나간 후 아버지 집과 주변 몇 집만 물에 잠기지 않았다. 홍수에 휩쓸린 곳은 순식간에 집이 무너지고 수많은 마을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마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한복판에 홍수가 패어 놓은 도랑은 집만 한 깊이였고, 도로 양쪽 가게들은 문턱까지 진흙에 잠겼다. 마을 어귀의 이층집은 홍수에 휩쓸려 무너졌고 지붕에 있던 24명이 모두 사망했다. 다음날 이웃 마을 주민들은 산에 셀 수 없이 많은 시신을 묻었다고 했다. TV 기자가 재난 현장에 와서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다고 보도했다가 분노한 마을 주민들에게 쫓겨났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사시던 마을 주민들은 모두 구조되었다. 시어머니가 파룬궁 수련 때문에 중국공산당에 의해 4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셨을 때, 이 마을의 두 집을 제외한 모든 주민이 시어머니의 석방을 요구하는 청원서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홍수 때 이 마을 집들은 하나도 무너지지 않았고 약간의 땅만 침수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선행으로 큰 복을 받은 것이다. 시어머니 댁에는 물이 들어오지도 않았고 땅도 200평 정도만 떠내려갔는데, 시아버지는 그해 곡식 수확량이 전년보다 거의 1만 근이나 늘었다고 하셨다.
내 사촌 중 한 명은 진상을 명백히 알고 늘 호신부(護身符)를 지니고 다녔다. 그는 홍수가 날 때 이웃 주민 10여 명과 함께 지붕 위에 올라가 하룻밤을 보냈고, 물이 지붕에 닿기 직전 홍수가 서서히 물러갔다.
파룬따파는 사람을 구원하는 희망이다!
원문발표: 2024년 3월 2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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