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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기 끔찍한 나날들 (하)

글/ 리원밍(李文明)

[명혜망]

편집자의 말: 지난 2002년 8월, 파룬궁수련자 리원밍(李文明)은 칭하이와 간쑤 등 지역의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에 관한 진상을 알리는 비디오 삽입방송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그는 20년 형을 선고받고, 2003년 란저우 감옥에 수감됐다. 이후 그는 사존의 보호 아래, 대법(파룬궁) 수련으로 얻은 굳건한 의지로 갖은 고문을 견뎌내고 2021년 8월, 마침내 풀려나 험악한 박해에서 벗어났다.

* * *

나는 지금도 ‘진선인(真·善·忍)’이란 보편적 가치에 따라 착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가혹한 탄압과 박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그들은 국가와 사회에 수많은 이로움만 있을 뿐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일은 중국에서 일어났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전편에 이어)

4) TV 삽입방송으로 20년간 옥고 치러

정신병원 탈출에 성공한 후 나는 대법 자료점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 수련생과 함께 자료를 만들고 CD를 구워 배포하면서 조사정법(助師正法)의 대열에 합류했다.

2002년 8월 17일과 18일 이틀 동안, 나는 파룬궁 진상 비디오 TV 삽입방송에 참여했다. 우리는 2인 1조로 칭하이성 두 곳과 간쑤성 다섯 곳, 총 일곱 곳에 진상 영상을 성공적으로 방송했다.

간쑤성 칭양(慶陽)시의 경우, 매우 은폐된 곳에서 삽입방송을 해서 경찰은 찾아내기 쉽지 않았다. 특히 우리는 여러 곳에서 돌아가며 방송을 해서 더욱 수색이 어려웠다. 칭양시 당국은 다급한 나머지 도시 전체에 3일간 정전 조치까지 단행했다.

우리의 진상 비디오는 장쩌민이 공식 은퇴하는 16차 당대회를 앞둔 시점에서, 그것도 저녁 7시 황금 시간대에 방송되어 공산당 고위층과 공안부에 큰 충격을 줬다. 그들은 즉시 이른바 전문가들을 파견해 대대적인 수색 및 체포 작전을 펼쳤는데, 광우먼(廣武門) 일대에만 200명 이상의 경찰력이 배치됐다.

결국 나는 삽입방송 후 12일 만인 8월 30일 다시 납치됐다. 악독한 경찰 웨이둥(魏東) 등은 나를 마구 폭행한 후 경찰차 안으로 밀어 넣고 옌탄(雁灘)으로 갔다. 거기서 그들은 내 양손과 양 발꿈치에 수갑을 하나씩 채운 다음, 7층에 있는 란저우시 공안국 1처로 끌고 갔다.

(1) 고문으로 자백 강요

허보, 웨이둥 등 경찰은 상체와 손발을 고정하는 고문도구 ‘호랑이 의자’에 날 앉히고, 머리에 헬멧까지 씌웠다. 그리고 밤새도록 내 손목 옆에 있는 나사를 4, 5분 간격으로 조였다. 나는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온몸이 떨리고 대소변 실금이 오며 실신할 지경이었다.

날이 밝자 그들은 날 시궈위안 구치소로 보냈다가, 다시 화린핑에 있는 란저우시 제2구치소로 이송했다. 그 후에도 나는 여러 차례 ‘호랑이 의자’에서 밤새도록 심문을 당했다.

한 번은 경찰들이 나를 ‘호랑이 의자’에 앉혀놓고 나사를 조인 후 옆 방에서 밥을 먹으면서 카드놀이를 했다. 그때 한 경찰이 나무 몽둥이를 들고 들어왔다. 나는 처음엔 좀 불안했는데, 의외로 그는 몽둥이로 나사를 힘껏 후려쳐 나사가 풀리게 했다. 그는 한참 후려치다가 나사가 확실히 풀린 것을 확인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경찰 허보는 한참 지나도 내가 조용히 있자 이쪽 방으로 왔다. 그는 나사가 풀린 것을 보고 내부에 첩자가 있다고 화를 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그 자식들은 욕먹을 일은 다 우리에게 시키고, 월말엔 우리랑 똑같이 보너스를 받아!”

그래서 나는 란저우시 공안국 1처의 일부 경찰이 대법제자를 박해하라는 상급의 지시를 따르기 싫어하고, 그들과 한 무리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방금 나사를 풀어준 경찰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대법제자를 도와줬으니 반드시 복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화가 잔뜩 난 허보는 광기가 올라와 죽어라고 나사를 조였다. 그 때문에 내 몸은 통증으로 떨렸고, 이빨까지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그 후 내 손목은 1년 넘게 마비됐다.

(2) 여러 차례 폐쇄식 감방에 감금돼

1차 감금: 수갑과 10kg짜리 족쇄에 묶여

구치소에 1년간 수감된 후 2003년 9월, 악당들은 날 란저우 감옥으로 이송했다. 그곳에 들어간 첫날, 나와 칭양 수련생 류즈룽(劉志榮, 나중에 톈수이 감옥에서 박해로 사망)은 조사에 불응하고, 그들이 다른 수련생을 욕하고 구타하는 것을 제지하다 폐쇄식 감방에 갇혔다.

폐쇄식 감방은 3평 크기였고 밖에는 2평짜리 밀폐된 마당이 있었다. 감방 안에는 벽돌을 쌓아 만든 시멘트 침대가 있었고, 침대 앞쪽에는 대소변을 보는 구멍이 있었으며 난방 시설이 없었다. 감방 한 곳에 3~4명씩 감금했는데, 침대에 1~2명, 옆에 한 명, 앞에 한 명이 잘 수 있었다. 이불이 없어 옷을 입고 잘 수밖에 없었고, 식사 때는 젓가락과 숟가락을 주지 않아 손으로 먹어야 했다.

내 재킷은 앞서 경찰 자오즈융(趙之勇)이 안에 대법자료가 숨겨져 있는지 보려고 찢어버렸고, 바지도 어딘가 사라졌다. 경찰은 류즈룽에게 32kg짜리 족쇄를 채웠는데, 수갑과 족쇄는 철사로 연결돼 있었다. 나에게는 새로 만든 10kg짜리 족쇄를 채웠고 역시 수갑과 함께 철사로 연결돼 있었다. 새 족쇄라 내 발목은 날카로운 모서리에 찔려 극심한 통증이 생겼다. 나는 새로 받은 죄수복 바짓가랑이로 족쇄 고리를 감쌌는데, 덕분에 고통은 덜했지만 죄수복 바지는 심하게 닳았다. 나는 거기 한 달 동안 감금됐다.

2차 감금: 수갑과 32kg짜리 족쇄에 묶여

두 번째는 1년 후인 2004년 12월 동지를 앞둔 때였다. 내가 관리과의 ‘행위 규범’ 심사에 협조하지 않으면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때 관리과 경찰 위안웨이우(原維斌)가 다가와 내 머리를 때리자 나는 손으로 막았다. 그 후 그들은 내 몸에서 사부님의 경문을 찾아냈고, 이를 핑계로 32kg짜리 족쇄를 채웠다.

그리고는 새로 지은 폐쇄식 감방에 가뒀다. 밀폐된 마당과 복도를 지나가니 5평짜리 감방이 있었는데, 벽 쪽에 시멘트 침대가 있고 침대 앞에 수세식 변기가 있었다. 변기 위쪽에 밀폐식 창문이 있고, 창문 옆에는 작은 철문이 있었으며, 문밖에는 2평짜리 천장만 뚫린 휴게실이 있었다. 그곳에는 어디든 감시 카메라가 설치돼 있어 감시를 피할 수 없었다. 바닥에는 난방 시설이 있었지만, 수감자가 들어오면 복도에 있는 밸브를 잠가 난방 공급을 중단했다.

동지 이후 눈이 내리면서 강추위가 찾아왔다. 나는 얇은 누빔 옷에 츄리닝 바지를 입고 운동화만 신었는데, 경찰은 아침 6시면 나를 추운 휴게실로 들어 옮겼다. 나는 무거운 족쇄 때문에 하루 종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밤 9시에야 감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휴게실 온도는 영하 7~8도 정도였고, 가장 낮을 땐 영하 11~12도까지 떨어졌으며, 찬바람까지 불어 온몸이 심하게 얼어붙었다.

그쪽 감방에 포악한 앞잡이 죄수 한 명이 있었다. 그는 자주 휴게실에 와서 손가락으로 내 눈을 튕겼는데, 나는 손발이 묶여 있어 꼼짝 못 하고 당하기만 했다. 밤에 감방에 돌아온 후 나는 족쇄 때문에 침대 옆에서 자야 했고, 잘 때는 족쇄와 수갑과 한데 연결돼 있어 몸을 웅크려야 했다. 하룻밤에 몸을 간신히 두 번 뒤척이면 날이 밝았다.

경찰 심문 때면 내가 두 손으로 족쇄를 잡은 후 다른 수감자 두 명이 날 들어서 심문실로 옮겼다. 감옥 부감옥장 스톈유(石天佑)는 늘 내 상황을 보고받았는데, 내가 계속 굴복하지 않는다고 하자 화가 나서 야단이었다. 그들은 내가 동사할까 봐 한 달 후 풀어줬다. 하지만 족쇄를 푼 후 나는 걸을 수 없었다.

란저우 감옥에서는 경찰 업무를 돕는 수감자를 ‘사무범’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교육과, 위생실, 관리과 등에서 쉬운 일을 하거나 노약자 감방에 들어갔다. 이들은 모두 인맥을 통해 3~5만 위안씩 돈을 주고 들어갔고, 명절 때면 뇌물까지 바쳐야 했다. 그래서 감옥장들은 새로 부임할 때마다 이들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자신과 뒷거래한 수감자들을 다시 배치했다. 이 때문에 란저우 감옥 노약자 감방 수감자들은 75~80%가 사지가 멀쩡하고 건강한 반면, 각 생산 대대에는 아침마다 환자 줄이 길게 늘어섰다. 그들은 부축받거나 휠체어, 지팡이에 의지했는데, 이는 사악한 란저우 감옥의 특이한 풍경이 됐다.

3차 감금: 강제 전향

3차 감금은 2005년 9월에 있었다. 모든 파룬궁수련생을 강제로 전향시키라는 상부의 지시가 내려오면서 감옥경찰은 갑자기 나에게 수갑을 채우려 했다. 내가 따르지 않자 딩후이(丁輝) 등 경찰은 날 소파에 엎어놓고 강제로 수갑을 채웠다. 그 과정에 내 머리는 난방기에 부딪혀 피가 철철 흘렀는데, 아홉 바늘을 꿰매고 나서야 피가 멈췄다.

그들은 나를 한동안 폐쇄식 감방에 감금했다가 다시 3구역 독방에 가두고, 왕궈화(王國華), 쉐위성(薛玉生) 등 네 명의 앞잡이에게 감시하게 했는데, 그들은 전등을 24시간 환하게 켜놓고 여러 가지 수단으로 날 괴롭혔다. 나중에 신차오(新橋) 감옥(외부에서는 캉타이 병원이라 부름)에서 치료받다 돌아온 수감자로부터 그곳에서 날 괴롭히던 왕궈화가 괴질에 걸려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내외 선량한 사람들의 도움 받아

란저우 감옥에 수감된 18년간 나는 많은 선량한 수감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식사 시간에 나와 같이 밥을 먹거나 생필품을 보태줬는데, 감옥경찰은 그중 몇 사람을 불러서 감형해주지 않겠다고 협박하며 날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용기 있는 사람들은 경찰에게 나와 함께 식사할 뿐이라며 맞섰고, 내가 머리를 다쳤을 때 경찰 면전에서 그들을 난폭하고 야만스럽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대법제자에 대한 탄압이 가장 심각했던 시기, 경찰이 나와 말하거나 접촉하는 것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선량한 수감자들은 가족이 면회 때 가져다준 음식을 도시락통에 싸 와 난방기에 올려놓고, 몸으로 날 건드린 후 손으로 도시락을 가리키고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이런 선량한 사람들은 3구역과 10구역에 모두 있었다. 한번은 내가 10구역에서 경찰과 실랑이를 벌였는데 구경하러 온 수감자 중 아무도 날 공격하지 않았다. 보통 이럴 때면 경찰에게 잘 보이려는 수감자들이 뒤에서 손을 대곤 했다.

선량한 경찰도 있었다. 그들은 밖에서 군고구마, 요구르트 등 간식을 가져다줬는데. 그들의 선행은 날 감동시키고 격려했다. 어떤 경찰은 나에게 출소 후 어떻게 살아가라고 이야기해주고 늘 나를 신경 써줬다.

홍콩, 마카오, 대만 등 해외 각국 수련생과 국내 수련생들도 날 지지하고 격려해줬다. 그들이 나에게 보낸 엽서와 편지는 플라스틱 바구니에 가득 찼고, 돈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경찰의 압류로 나는 그런 편지를 한 통도 읽지 못했지만, 그 우편물들은 날 지지하고 격려한 동시에 사악이 나에게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견제했다.

감옥 수련생들도 여러 방식으로 날 돕고 격려해 줬다. 내가 이렇듯 사악하고 광적인 탄압 속에서 오늘까지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은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나의 굳은 신념 외,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존의 보호, 수련생들의 격려와 선량한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3) 여러 차례 독방에 갇혀

란저우 감옥에 수감된 18년 동안, 감옥경찰들은 날 다른 수련생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항상 수련생이 없는 구역에 배치했다. 2006년, 3구역에서 온 대법제자들이 많아지자, 그들은 날 10구역으로 옮기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독방에 연속 3개월 갇혀

란저우 감옥에는 10대 악독한 경찰이 있었는데, 10구역에만 경찰 다이쉐이(戴學義)와 대대장 가오전둥(高振東) 두 명이 있었다. 특히 다이쉐이는 늘 나쁜 생각만 하면서 사악한 아이디어를 냈다. 2008년 5월 초, 그는 날 독방에 가두고 살인범 뉴밍취안(牛明泉), 강도범 구닝닝(谷寧寧) 등 4명의 앞잡이를 시켜 날 2주간 2층 침대 프레임에 매달아 놓고 잠을 못 자게 했다.

그때 나는 온몸이 붓고 발과 발목에 피멍이 들었으며 감각을 잃었다. 소변도 붉은색을 띠었고 거의 혼수상태가 됐다. 한번은 내가 소변을 본다고 해서 그들이 수갑을 풀고 날 바닥에 내려놨는데 나는 바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때문에 용변기가 넘어져 오줌이 모두 바닥에 쏟아졌다. 또 한번은 살인범 뉴밍취안이 주먹으로 내 배를 세게 강타해 이마에 땀이 날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나는 그렇게 독방에서 힘겹게 3개월을 버텼다.

많은 대법제자를 박해한 감옥경찰 다이쉐이는 얼마 후 업보를 받아 폐암에 걸려 죽었다. 가오전둥도 많은 대법제자를 박해했는데, 핑량 대법제자 차오시(曹璽)를 발끝이 땅에 닿을 듯 말 듯하게 철사에 매달아 놓은 적이 있다. 그도 조만간 업보를 받을 것이다.

진지린, 죽기만도 못한 고문에 시달려

대법제자 진지린(金吉林)은 란저우 감옥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 9구역 부감옥경찰 장하이쥔(張海軍)에게 가혹한 박해를 당했다. 그는 앞잡이를 시켜 진지린에게 끓는 물을 붓게 하고, 피부에 생긴 물집을 바늘로 터트린 후 소금을 뿌리게 했다. 진지린은 극심한 고통 때문에 잠도 자지 못하다가, 깨진 보온병 유리 조각으로 동맥을 끊어 목숨을 잃을 뻔했다.(그는 잔혹한 박해 때문에 극단적 행위를 한 것이며, 파룬따파의 법리는 이런 행위를 금지함) 란저우 감옥으로 두 번째 납치된 뒤 진지린은 7구역 대대장 위저우장(魏周江)의 박해를 받았다. 2021년 8월, 내가 출소할 때 그는 여전히 독방에 갇혀 있었다.

왕유장, 감옥에서 박해로 사망

대법제자 왕유장(王有江)은 5구역에서 대대장 장하이쥔, 경찰 왕궈천(王國臣)에게 잔혹한 박해를 받은 후 뇌졸중으로 한쪽 신체가 마비됐다가 결국 사망했다.

쑨자오하이, 구타로 치아가 대부분 부러져

헤이룽장 자무스(佳木斯)시 대법제자 쑨자오하이(孫照海)는 1구역에서 대대장 왕궈천, 경찰 쿵판핑(孔繁平)에게 지속적인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쑨자오하이를 독방에 가두고 ‘시체 침대[死人床]’에 묶어놓거나 ‘호랑이 의자’에 앉혀놓고 고문했다. 경찰의 구타로 쑨자오하이는 치아가 몇 대 남지 않았지만, 대법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거기에 1년 가까이 갇혀 있는 동안 그는 반년 넘게 단식하며 박해에 맞섰는데, 경찰은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독방에서 풀어줬다.

바이인시 핑촨(平川)구의 한 70대 대법제자는 납치된 후 2구역에 수감됐다. 내가 감옥을 나올 때, 그는 독방에 갇혀 4개월 넘게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국내외 관련 단체와 수련생 여러분께 그에 대한 관심을 부탁드린다.

재차 독방에 가둔 후 검은 복면 씌우고 ‘호랑이 의자’에 앉혀

악독한 경찰들은 주기적으로 사건을 만들어 대법제자들을 탄압하고 박해했다. 한번은 일을 마칠 때였는데, 경찰은 내가 그의 구령을 따르지 않았다며 따로 훈련을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와 맞서며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본 경찰 장위취안(張玉泉)이 날 다시 독방에 가뒀다.

그와 구역 담당자 왕쯔줘(王子卓) 두 사람은 날 2층 침대 프레임에 수갑으로 채워놓고 잠을 못 자게 했다. 낮에는 검은 복면을 씌우고 작업장에 데려가 ‘호랑이 의자’에 앉혔다. 그들은 끈끈이가 붙어 있는 끈과, 입을 막는 데 쓰는 투명 테이프, 들것 등 형구를 준비하고, 우궈화(吳國華), 장정쥐(張正擧) 등 4명의 앞잡이를 대동한 채 기세등등했다.

나는 장시간 매달려 있어 의식이 흐리고 온몸이 부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도 사존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대각자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나니 의지는 금강으로 만들었구나 생사에 집착이 없나니 정법의 길은 탄탄하여라”(홍음2-정념정행)

나는 생각했다. ‘지난 10여 년의 고통도 모두 이겨냈는데 마지막 남은 1년을 견지하지 못할까? 견딜 수 있어, 반드시 견뎌낼 수 있어!’ 이 확고한 일념 덕분에, 또 사존의 도움과 대법의 보호 덕분에 나는 마침내 험악한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코로나 유행 기간, 감옥경찰들이 2교대로 나누어 일주일 간격으로 근무했기에 감시 인력이 현저히 부족했다. 거기다 연말 보너스를 많이 받으려면 하반기에는 생산에 집중해야 했기에 그들은 날 침대 프레임에서 풀어줬다.

그 무렵 또 ‘사무범’ 란훙쥐(冉鴻擧)가 심장병으로 죽으면서 그가 생전에 다른 한 수감자에게 거액의 사기를 당한 일이 드러났다. 구역 담당자 왕쯔줘는 이 사건을 해결하느라 나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날 아예 독방에서 나오게 했다.

(4) 란저우 감옥의 ‘이미지 공정’과 노예 생산

정부 지원금을 ‘모범수’에게만 사용

감옥장 장융웨이(張永維)는 란저우 감옥으로 부임된 후,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대대적인 ‘이미지 공정’을 벌였다. 그는 정부의 수감자 식비 지원금을 이른바 ‘모범수’ 식사 개선에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신문과 TV 보도 등을 통해 자신의 성과를 홍보했다. 이 때문에 다른 수감자들은 평소 고기 구경도 못 했고, 설날, 5월 노동절 연휴와 10월 국경일 연휴 때만 한두 끼 먹을 수 있었다.

사라진 식용유 한 트럭

감옥에서는 평소 일주일에 서너 끼는 그나마 좀 나은 음식이 나왔지만, 잘게 썬 닭가슴살이 조금 섞여 있을 뿐이었고, 반찬은 기름기 없이 볶아 늘 눌어붙어 있었다. 그런데 감옥 식당에서 식용유를 빼돌리는 트럭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목격됐다. 감옥 측은 닭 뼈를 사다가 감자와 함께 볶아서는 ‘닭볶음탕’이라고 하고, 잘게 다진 닭가슴살과 야채를 함께 볶고는 ‘고기야채볶음’이라고 했다. 야채도 감자, 양배추, 셀러리, 당근 등 제일 저렴한 야채 몇 가지만 제공하면서도, 수감자 가족에게 보여주는 식단은 종류가 다양하고 영양이 풍부하게 짜서 눈속임했다.

고강도 노예 노동에 시달리는 수감자들

수감자들의 강제노동은 해마다 가중되고 있다. 장융웨이가 새로 부임하자마자 각 수감 구역의 생산 임무를 단번에 2배로 늘렸고, 이듬해에는 60%로 늘렸으며, 그 후에도 매년 약 50%씩 지속적으로 늘렸다.

수감자들은 아침 6시 30분부터 저녁 6시 30분까지 쉬지 않고 일하는데, 중간에 30분간의 짧은 점심시간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8시 30분이나 9시까지 연장해 일할 때도 많고, 특히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면 전기봉, 고무봉으로 구타하고, 전봇대를 껴안은 자세로 수갑을 채워놓기도 한다. 그러면 겨울에는 혹한, 여름에는 땡볕에 시달리게 된다.

개인 생활용품 사용, 극도로 제한

란저우 감옥은 속옷, 내복, 이불 등 생활용품을 추가로 주지 않으면서 외부 반입도 엄격하게 금지했다. 그들은 수감자들의 물품을 정기적으로 검사했는데, 그때마다 반입을 금지한 옷과 이불이 산더미처럼 나왔다. 이중 어떤 것은 감옥 내 매점에서 구입한 새것이었다.

감옥 매점에서는 한때 라디오, 솜바지, 솜옷, 겨울 신발, 운동화 등 물품을 팔았었지만 나중에는 모두 금지됐고, 깡패 같은 경찰들에게 모두 압수당했다. 나도 라디오 두 개, 이어폰 두 개, 옷, 신발, 벨트, 찻잔 등을 빼앗겼는데, 그들은 압수할 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감방은 거의 난방이 되지 않는 데다 웃풍도 너무 세서 밖이나 다름없었다. 난방 공급은 저녁 11시면 끊겼다가 아침 6시에 다시 공급됐다. 그래서 밤에 이불과 담요를 같이 덮어도 추워서 여러 번 깨는데, 한 사람당 한 개씩만 사용할 수 있었다.

흉내뿐인 사후 응급조치

감옥 수감자들은 병이 나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다. 이 때문에 2020년 한 해에만 병사한 수감자가 20명이 넘었다. 10구역에서는 2019년과 2020년 2년간 세 명이 죽었는데, 두 명은 감옥에서 죽었고, 한 명은 신차오(新橋) 감옥(캉타이 병원)에 간 지 일주일이 채 안 되어 사망했다. 이렇게 사람 목숨을 함부로 다뤄도 아무도 그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왕싱윈(王星雲)은 담도 결석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지만, 치료는커녕 죽는 날까지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일을 했다. 츠싱우(郗星武)는 위암에 걸렸는데 치료받지 못해 캉타이 병원으로 옮긴 후 일주일도 안 되어 사망했다. 란훙쥐(冉鴻擧)는 심장병을 앓았는데,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어서야 캉타이 병원에 가게 됐지만, 감옥 대문을 나서기도 전에 숨을 거뒀다.

란저우 감옥은 수감자가 사망해도 속임수를 써서 쉽게 책임에서 벗어났다. 예를 들어 수감자가 죽은 후 링거를 걸고 산소마스크를 씌워 놓고 응급조치를 한 것처럼 꾸미거나, 링거를 걸고 산소마스크를 씌운 채 차에 태워 캉타이 병원으로 데려가는 흉내만 내면 그만이었다.

란훙쥐의 죽음으로 드러난 거액 사기 사건

수감자 란훙쥐는 원래 주취안(酒泉) 강철그룹 최고재무책임자였는데, 총재의 지시에 따라 불법 자금을 사용했다가 공금 횡령죄로 감옥살이를 하게 됐다. 억울한 마음에 란훙쥐는 감옥 안에서 항소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사기꾼 수감자 궁지더(龔積德)가 그에게 변호사비 50만 위안(약 1억 원)을 주면 소송에서 이길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이 말을 믿은 란훙쥐는 밖에 있는 가족에게 부탁해 궁지더의 누나에게 15만 위안(약 3천만 원)을 먼저 줬다.

그러나 그 후 란훙쥐는 변호사를 만나지 못했다. 수상하다는 생각에 궁지더를 재촉했지만, 궁지더는 변호사가 그의 사건을 살펴보느라 바쁘다면서 남은 35만 위안(약 7천만 원)을 지불하면 만나줄 것이라고 말했다. 란훙쥐는 의심하면서도 35만 위안을 마련하려고 애썼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노심초사하던 란훙쥐는 결국 심장병이 재발해 감옥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 후 란훙쥐의 가족은 감옥경찰들이 변호사 선임에 개입한 것으로 오해하고 선불한 15만 위안을 돌려받으려고 했다. 이 때문에 감옥 내에서 사기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다급해진 수감 구역장 왕쯔줘는 사기범에게서 돈 15만 위안을 돌려받아 즉시 궁지더의 누나에게 전해주고 사태 확산을 막았다.

그런데 2021년, 검찰 수사팀이 한 달간 란저우 감옥에 진주하면서 감사식 수사를 벌였다. 왕쯔줘는 이에 대비해 회의실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 야간 당직 죄수에게 시켜 제보함의 제보 편지를 모두 꺼내 버리게 했다. 하지만 란훙쥐 사건은 한 수감자가 수사관과 면접하는 형식으로 결국 제보됐고, 사기범 궁지더는 폐쇄식 감방에 갇혀 법의 심판을 기다리게 됐다.

하지만 이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15만 위안은 적은 돈이 아닌데 누가 쉽게 낯선 사람에게 줄 수 있겠는가? 궁지더와 란훙쥐가 밖의 가족과 자주 연락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주 전화를 하려면 또 경찰의 허락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사이에는 반드시 뒷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비리투성이인 란저우 감옥이 정부에 의해 ‘모범 감옥’로 선정됐고, 사건이 발생한 수감 구역은 해마다 모범 수감 구역으로 선정됐으며, 왕쯔줘도 ‘모범 공무원’ 명단에 올랐다. 이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극악한 정권에서만 이런 황당한 현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맺음말

불법 수감된 21년 반 동안 나는 공장에서 해고됐고, 린자좡(林家莊)에 있던 우리집은 철거되고 가산도 모두 사라졌다. 파출소에 신고했지만 접수하지 않았다. 잠시 살았던 옌자핑(晏家坪)의 집은 전기와 수도, 난방, 가스 수송관 공사 때 내가 감옥에 수감되어 공사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웃집에서 전기와 물을 끌어다 쓸 수밖에 없었는데, 이웃은 그 집을 차지하려고 수도와 전기를 끊어버렸다. 나는 지금은 다른 곳에서 셋집살이를 하고 있다. 아내는 극심한 압박으로 나와 이혼하면서 행복했던 가정이 사라졌다. 또 나는 원래 22개월의 실업 수당을 받을 수 있지만, 란저우시 사회보장국은 이런저런 핑계로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기초생활 수급자 신청도 했지만 역시 아무런 소식이 없다.

이 모든 고난은 내가 진선인(真·善·忍) 대법에 대한 굳은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사람들이 공산당의 거짓말에서 벗어나 대법의 진상을 알게 하고 불법(佛法)의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란저우 감옥의 장융웨이(張永維), 장하이쥔(張海軍), 왕궈천(王國臣), 쿵판핑(孔繁平), 왕쯔줘(王子卓) 등 경찰에게 권고한다. 당신들은 공산당의 거짓말에 속아 미혹됐다. 빨리 정신을 차리고 도의와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멈춰야 한다. 사악한 공산당의 앞잡이가 되어 대법제자를 박해하면 천고의 죄인이 되어 결국 업보를 받게 된다. 자신과 가족의 장래를 생각해 박해를 멈추라. 공을 세워 죄를 씻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고 미래가 있을 수 있다.

 

원문발표: 2024년 3월 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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