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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한 나날들​

글/ 중국 청년 대법제자

[명혜망] 나는 베이징에서 10년간 생활하고 근무해왔다. 오늘 베이징에서 법을 실증한 일부 경험을 써서 자비로우신 사부님의 보호에 감사드리려 한다.

진상지폐로 베이징에서 사람을 구하다

베이징은 오가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 도시다. 우리 수련생들은 진상지폐(파룬궁 진상을 알리는 정보가 인쇄된 지폐)를 사용해 사람을 구하는데, 진상지폐로 쓰는 돈이 종종 더럽고 꾸겨져 수련생들과 상의해서 은행에서 바꿔오기로 했다. 이후에 어느 한 시장에서 새 지폐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부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특별히 배치해주셨다는 것을 알았다. 젊은 내가 가게에서 잔돈을 바꾸면 사람들의 시선을 쉽게 끌지 않아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그래서 매번 나는 1위안, 5위안, 10위안, 20위안짜리를 바꿔서 큰 가방이나 가게 주인이 준 주머니나 상자에 담아 온다. 1위안 지폐가 1만 장이면 엄청 무겁지만 마음은 흐뭇하다.

나는 매번 1만 위안에서 십몇만 위안이 채 안 되는 지폐를 바꾸는데, 모두 진상지폐로 사용한다. 수련생들이 다 사용할 수 없기에 나는 한 수련생과 상의해 진상지폐를 시장에 가서 상인들에게 바꿔주기로 했다. 처음에 상인들이 바꾸려 하지 않자 나는 그들에게 이 돈으로 장사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했다. 나중에 지폐를 바꿔 간 가게에서 장사가 점점 더 잘 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되자 진상지폐로 바꾸려는 가게 주인이 갈수록 늘었는데, 어느 한 가게 주인은 나에게 자기도 파룬궁을 연마한다고 했다. 어떤 노점상은 설날 전에 자녀들에게 세뱃돈을 주겠다며 진상지폐로 바꾸기도 했다.

진상지폐를 바꾸러 갈 때 때로는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한번은 수련생과 함께 가게에 진상지폐를 바꿔주러 갔는데 지폐를 다 세고 난 가게 주인이 다른 가게 주인들에게 “파룬궁 글자를 인쇄한 지폐가 필요해요?”라고 소리쳤다. 나는 깜짝 놀라서 바로 발정념을 했다. 한번은 두려워하는 마음에 급히 자리를 뜨고 집에 와 돈을 세어보니 200위안이나 모자랐다. 나는 혼잣말로 ‘넌 정말 쓸모없는 놈이야’라고 자신을 책망했다. 점점 환전 횟수가 잦아졌고 사람들이 오늘도 환전할 돈을 갖고 왔는지 나에게 물어보며 얼마가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 그들은 돈을 바꾼 후 세지도 않으며,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말한 대로 하기에 한 번도 금액이 차이 나지 않았다고 했다.

한 노수련생은 매주 1위안짜리 진상지폐 5천여 장을 바꿔서 한 번씩 시장을 돌며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대법 진상을 알리는데, 진상지폐 한 장 한 장이 진상 전단지였다.

베이징 큰 거리에서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글자를 쓰다

처음에 베이징에 왔을 때 주변에 다른 수련생들이 없었기에 어떻게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 잘 몰랐지만, 사람을 구하려는 마음은 간절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났는데 검은 붓으로 전봇대에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큰 글자를 써놓아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또 외근할 때나 퇴근 후 휴식 시간을 이용해 거리에 나가 쓰기도 했다. 한번은 베이징 외곽 순환도로에서 기사들이 볼 수 있도록 역방향으로 썼다. 글자를 쓸 때 마침 빨강 신호등이었는데, 내가 10~20여 미터까지 글자를 쓰고 돌아보니 계속 빨강 신호등이었고 사거리에 거의 다다랐을 때 초록색 신호등으로 바뀌었다. 매우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사부님께서 도와주신 것이었다.

하루는 퇴근길에 전봇대에 ‘파룬따파하오’를 쓰고나서 돌아서니 청년 세 명이 보고 있다가 왜 이 글자를 쓰냐고 물었다. 나는 이 몇 개 글자는 좋은 글자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줬다. 그중 두 청년을 공산당 조직에서 탈퇴시켰고 다른 한 청년은 탈퇴하지 않았다. 당시 나에게는 두려움이 없었고 오직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을 뿐이었다.

또 한번은 전봇대에 글을 쓰고 있었는데 아저씨 몇 분이 보고 지나가면서 평가했다. 나는 다 쓰고나서 인연 있는 사람을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뒤쫓아가서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주자 몇 명이 중국공산당에서 탈퇴하고 ‘파룬따파하오’를 기억하겠다고 했다. 이후에 수련생에게 스티커로 붙이는 방법을 배우고 우리 주택과 주변에 ‘파룬따파하오’ 표어를 붙였는데 10~15일간 붙어 있었다.

베이징 수련생에게 자료를 보내주다

일부 수련생들이 자료가 없어 괴로워했다. 내가 자료를 만들어 보내줄 수 있다고 하자 그들은 너무 좋아했으며, 한 수련생에게는 이튿날 바로 보내주기로 했다. 내가 그 수련생의 차로 그의 아파트 근처에 간 적 있기에 집 위치를 대략 알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1시간 30분쯤 차를 몰고 수련생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갔는데 들어서자마자 당황했다. 아파트 건물들이 다 똑같이 생겼고 단지도 너무 커서 기억을 더듬어도 수련생의 집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사부님께 수련생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드렸다. 나는 작은 나무 막대기를 주어 공중으로 던지며 막대기가 어느 쪽을 가리키면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걷다가 갑자기 익숙해 보이는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그 건물 2층으로 올라가 벨을 누르자 문이 열렸는데 바로 수련생의 집이었다.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고 내가 찾아온 방법을 말하자 그 수련생도 너무 신기하다고 했다.

나는 수련생 집에 갈 때 일반적으로 전화하지 않으며, 매번 내가 수련생 집에 도착하면 그 수련생도 집에 도착한 지 채 1분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수련생 자녀가 많은 자료를 집에 두는 것에 대해 걱정할까 봐 보통 수련생 자녀가 외출했거나 집에서 나간지 얼마 안 된 뒤에 들어간다. 또 한 남자 수련생이 나에게 와서 자료를 200부씩 주기적으로 받아 갔는데, 나는 아주 무거운 그 자료를 지고 직장에 간다. 그런 다음 약속 시간과 장소에 따라 자료를 넘겨준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대부분 이메일함으로 연락하기에 몇 년간 매우 안전했다.

베이징에서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

나는 외출할 때 가방에 진상자료를 넣고 다닌다. 다른 아가씨들은 작은 패션 가방을 들지만 나는 매고 다니는 큰 가방을 좋아한다. 가방에 많은 자료를 넣고 다니면서 언제 어디서든지 배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는 내가 이 단지에 살기에 이곳 주민들은 더욱 복이 있으므로 내가 사는 단지부터 배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쉬는 날에 하루 한 동씩 배포했다. 한 동은 6개 라인이고 한 라인은 두 가구이며 총 18층이다. 나는 한 가구씩 다니며 배포했다.

나는 보통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1층에서부터 18층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전단지를 배포하는데 한 번에 6층까지 올라간다. 올라가다 보면 여름이건 겨울이건 온몸이 땀투성이가 된다. 한번은 내가 배포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려 하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나왔다. 그는 문손잡이에 걸려있는 전단지를 발견하고 “파룬궁 자료가 있네!”라고 하면서 집으로 갖고 들어갔다. 이 말을 듣는 내 마음은 뿌듯했다. 이렇게 나는 우리 아파트 한 동에 전단지를 연속 두 번 배포했는데, 나중에 우리 동의 위챗 채팅방에서 주민들이 파룬궁 자료를 받았다는 말을 자주 보았다.

나는 시간이 있으면 가방에 전단지를 넣고 다니면서 우리 동에서부터 옆 동까지 집집마다 문손잡이에 전단지를 걸어 둔다. 안전을 위해 보통 전단지를 집 문에 붙여놓은 복(福)자 뒤편에 넣어주면서 그 집에 “복을 전하러 왔어요. 꼭 잘 보세요!”라고 말한다.

한번은 날씨가 유난히 더웠다. 나는 사람들이 낮잠을 자는 시간을 이용해 전단지를 넣은 가방을 메고 자료를 배포하러 나갔는데, 아이스바를 먹었지만 온몸이 땀투성이 됐다. 나는 속으로 사부님께 ‘제가 수련하지 않는다면 집에서 에어컨을 쐬고 싶어요. 너무 더워요’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걸으면서 사부님의 시 ‘홍음(洪吟)’을 외웠는데 특별히 신성한 느낌이 들었다.

아파트 외에도 자전거 바구니에 놓거나, 차 문손잡이에 걸거나, 또 가던 길을 되돌아오면서 버린 전단지를 다시 주워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준다. 몇 년간 얼마나 많은 가정과 운전자, 그리고 자전거 주인이 내가 배포한 자료를 받았는지 모른다.

대면해 진상 달력을 전하다

2014년 10월에 새해 달력이 발행됐다. 예쁜 달력을 보면서 나는 달력을 만들어 사람을 구하고 싶었다. ‘내가 달력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으로는 간단해 보이지만 어떻게 만들어야 하지?’ 인터넷에서 만드는 과정을 알아보니 복잡하고 어려워 보였지만, 실제 인터넷으로 필요한 재료를 사서 만들어보자 간단했다. 중요한 것은 레이저 프린터로 내부 페이지를 예쁘게 인쇄하고, 인터넷으로 달력 선반을 찾으면 된다. 마음에 드는 상가를 찾았는데 주인이 없어 나는 댓글을 남겼다. 얼마 후 답장이 왔는데 재료가 얼마나 필요한지 물었다. 나는 무엇이 얼마나 필요한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주인은 나에게 달력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계와 구매 상가를 친절하게 소개해줬다. 그 주인에게 정말 감사했고 사부님의 배치에 특별히 감사드렸다.

이렇게 나는 모든 재료를 사서 탁상달력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한 수련생이 돈을 보내왔다. 나는 탁상달력 비용에 대해 좀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 수련생이 급한 불을 꺼줬다. 그 후 한 수련생이 전문적으로 책임지고 달력을 다른 수련생들에게 전해줬다. 나는 제작을 책임졌는데 시간이 나면 또 나가서 배포했다. 당시에는 파룬궁 진상 달력이라는 말을 못 하고 새해 달력을 전하러 왔다고 했는데, 상대방은 받으면서 매우 고마워했다. 그때 우리는 수련이 잘 되지 못해 한 수련생이 달력을 보통 자료처럼 배포하자고 했다. 어떤 날은 시장 앞에서 한 가방 가득 넣은 달력을 금방 다 배포했다. 한번은 수련생과 달력을 배포하러 나갔다가 수련생이 경찰에 납치됐다. 나는 남은 재료로 계속 만들어 배포했으며 사람 구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대면해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배포하다

올해는 나가서 자료를 배포하고 사람을 구하려는 생각으로 배낭에 자료를 넣어 인연 있는 사람들을 찾아 진상을 알리러 나갔다. 한 마을 입구에서 어떤 할아버지에게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드리며 공산당 조직을 탈퇴시켜 드렸는데 그는 나보고 조심하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할아버지는 소위 ‘민감한 날’에 전문적으로 신고하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관념이 없어서인지 할아버지에게 착한 마음이 생겼고 그분은 구원받을 수 있었다.

처음 진상을 알리러 나갔을 때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집안에서 망설이면서 도무지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결국 용기를 내서 나갔다.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할아버지를 만나 그의 옆에 앉으며 “할아버지, 뭐 하고 계세요?”라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어젯밤 꿈에 오늘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네”라고 대답하셨다. 하마터면 나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 사부님께서 격려해주신다는 것을 알았으며 할아버지께 진상을 알리고 공산당을 탈퇴시켜 드렸다. 할아버지는 “좋은 이야기 잘 들었으니 가야겠네”라고 하시며 떠나셨다. 할아버지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사부님께서 하신 것으로 생각됐다. 나는 두 발로 뛰고 입을 움직였을 뿐이다.

그 후부터 나는 진상을 알릴 수 있게 됐다. 한번은 자전거를 끌고 지나가는 한 여성에게 다가가 진상을 알리며 사부님의 시 ‘홍음-3’을 들려줬다. 어느 시였던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내 눈이 매우 맑아 보인다며 내가 말하는 것을 믿을 수 있기에 공산당 탈퇴에 동의한다고 했다.

한번은 한여름 뜨거운 날씨에 한쪽에서 담장을 쌓고 있는 여러 명의 농민공을 만났다. 가방에 있는 과일을 꺼내 그들에게 주자 나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은 내게 파룬궁을 배우는 사람은 정말 좋다고 했다.

또 한번은 공사장에 가서 몇 사람에게 진상을 알렸는데 그중 한 명이 우리가 공부하는 책을 본인도 읽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공산당 조직을 탈퇴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탈퇴하라고 권했다. 아쉽게도 나중에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는데 그가 이미 보서(寶書)를 얻어 수련을 시작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또 한번은 택시로 수련생 집에 자료를 실어 갔는데, 길이 멀어서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갖고 있던 자료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인연 있는 사람을 절대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천안문 분신자살’ 조작 사건부터 파룬궁이 사람들을 선하게 가르친다는 것과, 어떻게 공산당 조직을 탈퇴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기사는 끝까지 듣고 목적지에 거의 도착하자 탈퇴에 동의했다. 그는 나와 악수를 청했고 고맙다며 요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동의하지 않자 그제야 요금을 받았다.

베이징에서 생활할 때 신기한 경험이 너무 많았다. 항상 내가 버스에 타면 비가 왔다. 내가 버스에서 내릴 때면 비가 그치고 날씨가 맑아졌다. 어떤 때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비가 억수로 쏟아졌는데 집에 조금만 늦게 들어와도 흠뻑 젖었을 것이다. 가장 신기한 일은 자료를 만들 때나 수련생들을 만날 때 휴대폰을 다른 곳에 갖다 놓는데, 매번 휴대폰을 다시 켜자마자 전화가 걸려 온다는 것이다. 내가 전화기를 조금 전에 켰는데 어떻게 알고 지금 전화했냐고 물으면, 상대방은 그냥 지금 상의할 일이 있어 전화한 거라며 자기도 모르겠다고 했다. 하루나 이틀간 쉬는 날에는 전화기를 꺼 놓는데, 역시 켜자마자 전화가 와서 한 번도 일을 지체한 적이 없었다.

수련하면서 겪은 신기한 일들은 너무나 많다. 베이징에서 생활하는 기간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던 데서부터 점점 단련되고 성숙됐으며, 사부님의 보호하에 놀라움은 있어도 위험은 없었다. 날 단련시키고 성취시켜주신 사부님의 은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더욱더 정진하는 것으로 사부님의 제도와 은혜에 보답하겠다.

 

원문발표: 2023년 10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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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3/10/10/4655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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