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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중의 옳고 그름과 원한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수년 전, 한 항목에 참여하면서 잇달아 오는 엄청난 압박감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는데, 온 힘을 다해 구세력과 겨뤘다. 그 과정의 어려움은 여기서 설명하지 않겠다. 어쨌든 당시 서광이 비쳐올 때, 한 수련생이 갑자기 우리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개입해 상황이 매우 복잡해졌다.

나는 그와 교류를 시도했지만 그는 우리의 방식 자체가 문제 있다고 지적했다. 나는 그와 충돌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되면 구세력에 웃음거리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교류가 안 되는 이상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항목이 단계적 성과를 낼 수 있을 즈음에 우리의 재력, 인력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항목은 잠시 중단됐다. 뜻밖에 잠시 중단한 결과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일이 끝난 후, 그 수련생은 우리의 실패에 대해 원인을 분석했고 모든 책임을 우리에게 돌렸다. 우리는 교류한 후, 그의 지적에 대해 쟁론하지 않았고 수련생들에게 해명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갈등의 격화를 피하기로 했다. 우리는 묵묵히 수련생에게서 오는 비난을 감당했고 자연스럽게 그 수련생과 멀어졌으며, 결국 마음속에 원한이 생겼다.

여러 해 후, 어느 한번 나는 납치됐다. 감옥에서 안으로 찾았는데 아주 많이 찾았지만 이 일은 잊었다. 사부님께서는 경찰의 입을 빌려 날 일깨워주셨다. “듣자니, 당신은 ○○와 갈등이 있었다면서요.” 그래서 나는 이 일의 과정을 회상했다. 수련생들 속에서 나는 그에 대한 나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에 내가 잘못한 점을 찾지 못했다.

비록 그 당시 시련을 뚫고 나왔지만 이 일은 줄곧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다시 한번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매 한 가지 사소한 부분까지 되돌아보았지만 여전히 내가 잘못한 부분을 찾지 못했다. 나는 사부님께 ‘사부님, 제자가 우둔하니 일깨워주십시오’라고 부탁드렸다.

법 한 구절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옳은 것은 그이고 잘못된 것 나이니”[1]. 수년간 쌓인 내 억울함이 순식간에 폭발했고 온 얼굴은 눈물투성이가 됐다. ‘전능하신 사부님, 일의 전 과정을 사부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부님께서는 저의 노력과 감내를 알고 계시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저의 잘못이란 말입니까?!’ 나는 자신에게 이런 불만이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고 서둘러 제거했다. ‘사부님의 법에서 내가 잘못했다고 하면 반드시 잘못한 것이고, 내가 절대로 옳은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사부님께 있고 나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서둘러 안으로 찾았지만 여전히 찾지 못했다. 그러나 잘못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2~3개월 후, 법에서 배웠다. “대법제자 외부에서 오는 압력은 고험이자 정진의 기회이며, 대법제자 내부에서 오는 모순과 압력도 마찬가지로 고험이자 정진의 기회이다.”[2] 순간 깨달으면서 나는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잘못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배치해주신 제고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꼭 잘 넘겠습니다.” 일주일 후,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비슷한 일을 배치하셨고 이번에는 두 달 가량 시간이 걸렸지만 잘 넘었다.

지금 다시 일의 과정을 생각해보면 너무 많은 잘못이 있었는데, 여기서 다시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다. 나는 그 수련생에게 털끝만큼의 원한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마음속에서 감사한 마음이 생겼다.

이 일을 통해 나는 한 가지 관념을 개변했는데, 바로 옳고 그름 속에서 문제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번 갈등이 나타날 때, 갈등 당사자의 옳고 그름과 옳고 그름 자체를 분별하지 않았다. 나는 오직 한 가지 문제만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내 앞에 갈등을 배치하신 것은 나에게 무엇을 성취시켜 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떻게 제고해야 하는가?’

옳고 그름은 같은 층차 중의 인식이고, 그 층차의 표준으로 가늠한 것이다. 그 층차를 벗어나야 제고할 수 있는데,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제고한 후에는 앞에서 인식한 ‘옳음’과 ‘그름’은 사실 모두 틀린 것임을 알았다. 자신의 ‘옳음’을 고수하는 것은 원래의 층차를 고수하는 것으로서 제고하지 못한 표현이다. 이 체험으로 문제를 보자 원한이 사라졌다. 그리고 당시에 실패라고 여겼던 것이 지금 보니 그렇지 않았다.

약간의 체험으로서 바르지 못한 부분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길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詩詞): ‘홍음3-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2] 리훙쯔 사부님 경문: ‘유럽법회에 보내는 축사’

 

원문발표: 2023년 10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3/10/6/46678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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