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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잘 배우지 못한’ 원인과 표현을 분석해보다

글/ 해외 대법제자

[명혜망] 사부님께서 많은 경문에서 ‘법을 잘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나는 대법제자라면 법을 잘 배워야만 사명을 잘 완성할 수 있다고 이해하며, 사부님께서도 일부 좋지 않은 현상은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라고 지적하셨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중생을 구도하고 대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잘했고, 변화가 큰 그런 지역은 반드시 여러분이 법 공부를 잘한 것이다. 개인적인 제고가 빠른 그런 대법제자는 틀림없이 법 공부를 중시한 것이다.”(정진요지3-오스트레일리아 법회에)

20여 년간 수련하면서 나는 장기간 법을 잘 배우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많은 요소가 우리가 ‘법을 잘 배우는 것’을 방해하고 있음을 체득했다.

‘법을 잘 배우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

나는 일하는 마음이 ‘법을 잘 배우는 것’을 방해하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인식했다.

박해가 시작됐을 때, 나는 현지에서 비교적 일찍 걸어 나와 진상을 알린 대법제자였지만, 사당(邪黨: 공산당)에 대한 불만, 격분 등 감정을 품고 있었다. 많은 수련생이 내가 잘했다고 칭찬했고, 나도 자신이 괜찮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한 수련생은 내가 단지 일만 하고 수련은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나와 어머니가 장기간 극렬하게 말다툼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말다툼을 작은 일로 여겼고 마음을 닦는 큰일로 인식하지 않았다. 더욱 관건적인 문제는 온종일 마음이 고요하지 않았으며, 법공부를 적게 하고 연공은 더 적게 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일반인)는 내가 연공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내가 수련을 하는 게 아니라 정치를 하고 있다고 여기셨다. 그때 나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누구든 조금이라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말싸움을 벌였고, 원한 등 감정에 강하게 이끌렸다.

그 후로도 여러 해 동안 일하는 마음에 이끌릴 때가 많았다. 최근만 하더라도 적지 않은 문장을 대법 사이트에 투고했는데, 쓰다 보니 일하는 마음이 나타나 더 많이, 더 빨리 쓰고 싶어졌다. 법을 배우고 연공해야 하는 시간에도 마음이 고요하지 않고 글의 구상이 끊임없이 떠올라 글쓰기를 멈출 수 없었다. 때로는 서둘러 쓰느라 수일간 법공부와 연공을 그다지 잘하지 못했다. 사실 이때는 정(情)에 통제되어 기분 내키는 대로 했다. 사실은 마성(魔性)에 순응한 것이지 이성적으로 시간을 안배한 것이 아니다.

장문 한 편을 쓰는 과정에서 여러 번 머리가 갑자기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법공부와 연공을 여전히 중시하지 않았다. 최근에 자신의 문장이 내용상 무슨 문제가 없는데도 적게 발표돼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나중에 문제를 인식했는데, 겉으로 보면 법을 실증하는 문장이지만 법공부와 연공을 홀시한다면 이미 빗나간 것이고, 이것이 계속되면 몹시 위험한 지경에 이른다는 것을 알았다. 문장이 발표됐다고 해서 제고했다고 볼 수 없으며, 세 가지 일을 잘해야만 되며, 특히 법을 잘 배우는 것이 제1위이고 그 기초하에 일을 해야 한다.

나는 일하는 마음 뒤에 많은 강렬한 사람마음과 사람의 정, 애호심이 있다는 것을 체득했다. 예를 들면, 자신이 대가를 치렀고 공로가 있다고 느끼는 성취감의 배후는 자아와 하늘의 공을 탐하고 지름길로 가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상업(思想業)도 법공부를 교란하는 중요한 요소다. 나는 수련생의 문장을 읽을 때는 방해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한두 시간이 지나지만, 법공부와 연공만 하면 방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쁠 때는 법을 배울 시간이 없고, 바쁘지 않을 때는 법공부를 많이 하기보다는 시간을 다른 일에 쓰기 더 쉬웠다. 나는 일부 수련생의 문장을 보았는데, 그들은 법공부가 마음에 들어오게 하고 자신을 잊을 정도로 아주 몰입해서 배우며 ‘법 중에 용해되는’(정진요지-법 중에 용해되자)는 느낌이 있다고 했다. 나에게는 이런 상태가 적기에 참 부러웠다.

법공부와 연공할 때는 방해를 받지만 교류문장을 읽을 때는 왜 그렇지 않은 것일까? 개인적으로 인식하기에는 법공부와 연공은 사상 속의 나쁜 물질을 직접 제거할 수 있기에 집착심과 사상업이 죽을 힘을 다 해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공부를 견지하려면 사상업의 교란을 배척해야 한다. 교류문장을 읽어도 계발을 받고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지만 법공부와는 여전히 비교가 안 된다. 일하는 것으로 법공부를 대체할 수 없고, 교류문장을 읽는 것으로도 법공부를 대체할 수 없다.

나는 수련생 문장을 읽고 감동과 격려를 받아 교류문장을 읽고 인식이 제고되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법을 잘 배우지 못해 사상 속의 나쁜 물질이 제거되지 않으면, 심성이 제고되지 못하고 공이 자랄 수 없으며, 이것은 수련이 아니라는 것을 훗날 인식했다. 물론 교류문장을 많이 읽는 것도 제고에 매우 중요하나 그 어떠한 극단으로 나가서는 안 되며, 본말이 전도되면 안 된다.

법공부를 방해하는 또 한 가지 요소는 무신론 사유다. 눈에 보이는 일이나 성적 따위 등을 더 중시하는데, ‘성적’이 보이지 않는 법공부는 등한시하는 것이다. 배후에는 신사신법(信師信法)이 부족한 문제도 있다.

나는 법을 잘 배워야 우리의 본질이 개변되고 마성이 제거되어 불성(佛性)으로 변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사람마음을 품고 일을 하면 표준에 도달할 수 없고, 오히려 구세력이 안배한 일사일념(一思一念)에 따라 움직이고 갖가지 부정적인 작용을 일으킨다. 심지어는 일을 많이 하고 큰일을 했다고 우쭐대거나 반면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법을 잘 배우지 못한 표현

개인적으로는 법을 잘 배우지 못한 표현에는 법공부의 양이 부족하고, 법공부할 때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며 임무를 완수하듯 하고, 법공부할 때 100% 법을 믿지 못하고, 법리로 수련을 지도할 줄 모르는 것이 포함된다고 인식했는데, 이는 수련생이 언급한 ‘배움과 실천이 제각각’인 것과 같다.

법공부할 때 진정으로 법을 믿지 못하는 예를 들어 보자. 최근에 ‘전법륜(轉法輪)’ 제1강의 “또 많은 불가대법(佛家大法)이 민간에서 유전(流傳)하고 있으며, 역대 단독으로 전해지고 있다”라는 구절을 보았는데, 내가 과거에 이 구절을 읽을 때, 진실로 여기지 못하고 ‘역대 단독으로 전해지고 있다’를 마치 허황된 신화처럼 여겼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전법륜’ 제2강에서 “우리는 수많은 세대의 사람을 거치고, 극히 멀고 오랜 연대를 거쳤는데, 숫자만 말해도 깜짝 놀랄 것이다. 이처럼 오래고 먼 연대를 거쳐 형성한 것인데, 당신이 몇십 위안(元)으로 法輪(파룬)을 사려고 하는가?”라는 구절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진실로 여기지 못했음을 발견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은 극히 오래고 먼 많은 세대의 사람을 거쳐 형성한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사부님 말씀은 우리가 100% 믿어야 하는 진상이다. 지금은 매 한 구절을 법을 100% 믿는 마음으로 읽느냐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진정으로 믿어야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홍음-착실한 수련)를 해낼 수 있다.

법을 얻고 수년간, 나는 법공부 양마저 보증하지 못하고 연공은 더 적게 했으며, 마음을 고요히 하고 연공할 수 없었다. 그 후 몇 년간은 법공부와 연공의 양은 충족했으나, 경건함과 순수한 마음이 조금도 없어 책을 내려놓기만 하면 속인으로 변했다. 최근 몇 년간, 법공부를 하면서 서서히 법리를 볼 수 있게 됐고 심성이 조금씩 올라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법을 잘 배운 수련생은 사부님과 법에 경건한 마음을 갖고 있고, 사람을 항상 겸허하게 대하며, 무슨 일이든 사부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법에서 구체적으로 깨달음을 얻고 법에서 문제를 보며 이성적이고 침착하다. 이와 비교하여 법을 잘 배우지 못한 수련생은 만사에 사람의 방법과 능력 등을 강조하고 사람 마음으로 사람이나 일을 대하기 쉽다.

법을 잘 배우지 못한 교훈

한 중년 수련생이 법공부를 하면 이미 다 아는 내용을 배우는 느낌이라 인내심 있게 읽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화를 잘 낸다며 남편을 욕하거나 자녀를 욕한다고 했다. 그녀는 진상을 알리는 데 열성적이었지만 몇 년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또 한 노년 수련생은 남과 말다툼을 잘했는데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색욕이 강하고, 늘 바깥으로 뛰쳐나가 일을 하고 싶어 법을 배우기만 하면 괴롭다고 했는데 훗날 병업으로 세상을 떠났다. 또 한 수련생은 매일 세 강의를 배우고 세 가지 일도 빠뜨리지 않는데, 안으로 찾을 줄 모르고 법공부도 임무를 완성하듯 했으며 늘 심성을 지키지 못해 나중에 병업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형식만 볼 수 없으며 법공부 시 마음가짐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체득했다.

자신이 수련한 과정에도 많은 교훈이 있는데, 그 뿌리는 모두 법을 잘 배우지 못해 각종 사람마음이 너무 심한 탓에 있었다.

수년간 법공부를 하면서 법리를 보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날 건드려 화가 날 때 그 사람이 나에게 덕을 준다는 것은 알지만 분노를 통제할 수 없었다. 훗날 나는 진정으로 법을 잘 배운 뒤에야 법력이 드러난다는 것을 인식했다. 법을 잘 배우지 못할 때도 물론 일부 법리가 떠오를 수는 있지만 그 힘이 부족하다. 사람마음의 배후는 구세력인지라 근본적으로 법력에 의지해야만 사람마음을 타파할 수 있다.

화를 내는 문제는 20년간 지속됐다. 가족, 동료, 수련생까지 누구든 나를 언짢게 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계획했던 일도 갑자기 화가 나서 취소할 때도 있었는데, 내가 화를 내는 정도는 심한 편이었다. 가족과 몇 시간씩 말다툼이 계속되기도 하고, 일이 끝난 뒤에도 1~2일 정도 감정이 풀리지 않고 심성을 지키지 못해 낙담하기도 했으며, 상대방의 태도에 불쾌해지기도 했다. 항목을 할 때도 쟁투심이 강해 마음속으로 이 사람은 좋고 저 사람은 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마음이 한 무더기나 됐다. 항목은 자아를 실증하는 밑천으로 변해버렸고, 심성이 제고되기는커녕 아래로 미끄러졌다.

최근 몇 년 사이에야 비로소 기본적으로 화를 내지 않게 됐다. 어떤 수련생은 법을 얻은 후에 화를 내는 문제를 아주 빠르게 바로잡았는데, 나는 20년이나 걸렸다. 이것이 바로 법을 잘 배우지 못한 교훈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예전에 걸핏하면 화를 내던 자신이 정말 납득이 안 된다. 지금은 화를 내지는 않지만 아직도 다른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인 표현이 있다. 예를 들면, 사상이 쉽게 과격해지고 목적성이 강하며 부정적인 사고를 많이 한다. 심성 문제에 직면하면 교류문장을 읽거나 토론하고, 깊이 사고하는 등 방식으로 해결을 도모하려는 데 습관이 되어 있었지,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법을 잘 배우기에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명혜편집부의 최근 문장 ‘신경문을 속인에게 배포할 수 있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경문 배포 문제에서 우리 본토 수련생들은 사부님의 배치에 따라야 할 뿐만 아니라, 심성과 오성(추측하고 제멋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을 제고하는 과정 중에서 법에서 지혜와 계시를 얻은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법에 따라 해야만 비로소 조금씩 도(道)를 깨달을 수 있다.” 나는 모든 문제와 난관에 직면한 진수제자는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고 법에 따라 해야만’을 근본으로 삼아 매일 경건한 마음으로 법을 배우고, 그중에서 사부님의 가르침과 은혜를 깨달아 법으로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수련은 단지 탁상공론에 그칠 뿐이다.

정에 이끌리다

나는 법을 잘 배우지 못하는 것은 정에 이끌린 것이라고 인식했다. 일에 부딪히면 사람의 정, 기분, 느낌 등으로 감성적으로 인식하는데, 법을 잘 배워야 정을 제거하고 자비가 생긴다. 일하는 마음이든 화를 내는 등 각종 사람마음이든 이 배후는 모두 정으로서, 다른 공간의 정마난귀(情魔爛鬼)와 대응되어 있을 수 있다.

예전에 법공부가 부족하고 법리를 보지 못했을 때 수년간 강렬한 정에 이끌렸다. 예를 들면 분노, 사랑, 원한 등이다. 훗날 법공부가 좀 나아지면서 많은 법리를 볼 수 있었고 강렬했던 정이 적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정의 물질이 교란했는데, 예를 들면 어떤 일을 하기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일을 함에 변덕이 심하고 참을성이 없고 조급했으며, 시간 안배도 제멋대로 하고 자기 억제력이 부족했다. 나는 자신이 법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법을 잘 배워야 정이 이지와 자비로 변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법을 배운 수확

나는 예전에 법을 읽을 때 태도가 우쭐했고, 표면적인 의미마저 알 듯 말 듯 하면서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른다는 이유로 그냥 대충 넘어갔는데, 사실은 다른 한 극단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마음으로 법을 이해하면서 일부 내용은 다른 공간과 관련되어 있지 심성을 제고하는 것과는 큰 관계가 없다고 여겼고, 법의 현묘함을 몰랐다. 점차 마음을 고요히 하고 법을 배운 뒤에 큰 수확을 얻었는데, 두 가지 예만 들겠다.

한번은 아이를 데리고 법공부를 했는데 아이의 태도가 진지하지 않아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아이도 나에게 성질을 부려 서로 대립각을 세웠다. 당시에 마침 “이 두 가닥 힘이 한곳으로 쏠렸는데, 그 역시 목숨을 앗아가려고 온 것이다.”(전법륜)라는 구절을 읽었는데, 즉시 명백해졌고 화가 즉시 사라졌다. 바로 아이와 이 경험을 나누니 아이도 신기하다고 느꼈다.

나는 예전에 한 수련생이 눈에 거슬렸는데 그가 보내는 어떤 교류든 다 반감이 들었고, 마치 나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처럼 늘 그와 부딪혔다. 법공부를 할 때 다음 부분을 읽자마자 명백해졌다. “기공이 사회에서 보급된 시간은 아주 짧은데, 많은 사람이 고집스러운 관념을 품고서 늘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비방하며, 그것을 배척한다. 그가 어떤 심리상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처럼 기공을 싫어하며, 마치 그와 무슨 관계라도 있는 듯이 기공을 제기하기만 하면 곧 유심(唯心)이라 한다. 기공은 과학이며 더욱 높은 과학이다. 다만 그러한 사람의 관념이 너무 고집스럽고 지식이 너무 편협하여 조성한 것일 뿐이다.”(전법륜) 내가 상대방을 눈에 거슬려 하는 것은 자신의 관념이 고집스럽고 지식이 편협해 자신의 관념으로 평판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깨닫고 나서 즉시 개운해졌다.

훗날 마음을 고요히 하고 법을 배우면서 법은 정말로 내가 즉시 명백히 알아야 할 구체적인 법리를 일깨워주어 관을 넘을 수 있도록 지도하고, 심성을 제고시켜줄 수 있다는 것을 체득했다. 나는 법의 매 글자의 배후에는 모두 층층의 불도신(佛·道·神)이 계시기에 지혜롭게 우리를 지도해주시리라는 것을 이해했다. 매번 같은 내용을 읽는 것 같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마음을 고요히 하고 법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에 대해 경건함과 공경심이 없으면 법이 펼쳐질 수 없다.

비교적 착실하게 수련을 잘하는 어떤 수련생은 교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난관이 클 때면 계속 자신에게 이렇게 경고해요. ‘나는 넘지 못하지만 법이 날 데리고 넘어갈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반드시 날 데리고 넘어가주실 것이다.’ 끊임없이 법을 배우고 자신을 법에 맡겨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희망이 없을지라도 반드시 법을 꽉 쥐고 놓지 말아야 합니다.”

맺음말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전념하여 책을 보지 못한다. 특히 대법(大法)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당신들은 어떠한 구실로도 당신들이 책을 보지 않고 법을 배우지 않는 것을 덮어 감출 수 없는데, 당신이 사부인 나 개인을 위하여 일할지라도 역시 날마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 공부를 해야 하며 착실하고도 착실하게 수련해야 한다.”(정진요지2-원만을 향해 나아가자)

사부님께서는 20여 년간 설법에서 우리에게 법을 잘 배워야 한다고 끊임없이 일깨워주셨다.

약간의 체득을 공유하니 수련생 여러분께서 참고하시길 바란다. 층차의 한계가 있으니 맞지 않은 곳이 있다면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3년 10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3/10/3/4664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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