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랴오닝 파룬궁수련자
[명혜망] 저는 1997년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20여 년간 수련하면서 사부님께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 더 좋은 사람, 더욱 고상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파룬궁 수련으로 의료사고 후유증 완쾌
1996년, 출산할 때 의료사고를 당했습니다. 실습생인 의사가 실수로 수술 바늘 반쪽을 몸속에 남겨놓은 채 봉합한 것입니다. 수술이 끝난 뒤 바늘 반쪽을 못 찾았는데, 제가 남편 등에 업혀 엑스선 검사실에 가서야 몸속에 있는 바늘 반쪽을 발견했습니다.
처음 봉합 수술은 작은 수술이라 마취도 안 하고 했으므로, 역시 마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 부위를 다시 절개해 바늘을 찾았습니다. 저는 엄청난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수술을 받은 후 소변을 보지 못하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소변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튿날 피에 흠뻑 젖은 거위알 크기의 거즈 뭉치를 배출했으며, 그때부터 여러 후유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요통으로 몸을 뒤집기도 어려웠고, 조금만 걸어도 복통이 심했습니다.
남편은 야근으로 치진 몸인데도 제 병을 고치려고 백방으로 명의들과 민간 처방을 찾았고, 많은 돈을 썼습니다. 하지만 고생만 했을 뿐 저는 낫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파룬궁을 만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믿지 않고 반신반의로 며칠간 따라 했지만, 갑자기 몸이 좀 편해지면서 허리도 아프지 않고 몸을 쉽게 뒤집을 수 있게 됐습니다. 나중에는 걷기 편해져서 석탄 통을 들고 아파트 아래에서 4층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됐습니다.(그때는 4층 집에서도 석탄을 사용해 밥을 지었음)
어느 해 섣달그믐날, 우리 부부가 아이와 함께 설을 쇠기 위해 시댁에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운전자가 과속으로 달리다가 우리를 치고 그대로 뺑소니를 쳤습니다. 바닥에 쓰러졌던 저는 일어나 몸에 묻은 흙을 털었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아이도 무사했습니다.
화가 난 남편은 운전자를 찾아서 혼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파룬따파의 법리를 말해주며 만류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셔서 무사했던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크게 다쳤을 거예요. 사부님께서 저희의 빚을 대신 갚아주신 거예요.” 그때부터 저는 진정한 파룬따파 수련자가 됐습니다.
시댁을 원망하던 마음도 내려놨습니다. 저는 원래 큰 병원에서 출산하려고 했는데 시어머니가 돈을 쓰지 말고 가까운 병원에서 출산하라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 그런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시어머니를 줄곧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이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어 이제는 시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닦아 선과 덕으로 원한을 풀다
90년대는 입주민을 엄격하게 통제했으므로 우리는 시아버지 명의로 난방시설도 안 된 낡은 아파트를 매입했고, 6년 후 남편 명의로 난방시설이 된 90평방미터의 새 아파트를 매입한 후, 낡은 아파트는 친정 오빠에게 팔았습니다. 그러나 입주민 통제로 오빠는 우리에게 집값을 치르고도 명의이전을 할 수 없어서 때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년 후, 남편이 공무 중 사망했는데 당시 매입한 아파트 명의 이전은 절반만 진행된 상태였습니다. 파룬따파를 여러 해 수련했으므로 시댁과의 관계는 좋게 유지하고 있었지만, 오랜 기간 실업 상태였고 아이가 초등학생이라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파트 매입 때 진 빚도 다 갚지 못한 상황이었고 남편의 사망 보상금도 매우 적었지만, 보통 사람처럼 회사를 찾아가 울고불고 떼를 쓸 수도 없었습니다. 생활이 어렵고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임에도 오직 파룬따파의 법리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사부님께서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이기심을 내려놓으라고 하신 말씀이 한마디 한마디 떠올랐습니다.
남편의 배상금으로 나온 4만 위안(약 727만 원)이 저에게는 유일한 돈이었지만, 저는 70대 시부모님을 위로하는 마음에서 그 돈 전부를 드렸습니다. 시부모님은 노년에 효자 아들을 먼저 보냈으므로 무척 상심이 크셨습니다. 제가 만약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그 돈을 시부모님께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한동안 세월이 지난 후, 친정 오빠에게 판 아파트가 명의 이전이 가능해졌는데, 마음이 변한 시부모님은 친정 오빠에게 명의 이전을 해주기는커녕 “내 명의로 된 아파트니 당장 나가거라”라고 하셨습니다. 시부모님이 이럴 줄 상상도 못했던 올케는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집값을 다 치르고도 몇 년간 명의 이전을 못 했는데 지금 와서 이러시다니. 집값을 돌려주신다고 해도 안 돼요. 이미 몇 년이 흘러 부동산이 올라 그 돈으로 다른 집도 살 수 없어요!”
저는 중간에서 정말 난처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시댁을 대하는 방법을 알려줬습니다. “정 안 되면 시부모를 때려요. 힘없는 70대 노인이니 무서워할 거예요. 그렇게 억지를 쓰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젊은 아들이 죽었는데도 마음을 곱게 쓰지 않고 그렇게 비열한 짓을 하다니.” 이렇게 사람들은 무슨 말이든 다 했습니다. 그러나 파룬따파 수련자인 저는 사부님 말씀대로, 대법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오빠 부부를 위로하는 한편 시부모에게 더욱 효도했습니다. 설날 등 명절을 막론하고 언제나 선물을 사 들고 아이와 함께 시부모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시부모님의 태도는 몹시 차가웠습니다. 마치 ‘눈알이 없으면 눈구멍도 필요 없다’는 속담처럼 손자도 냉대하셨습니다.
저는 시댁에 갔다 올 때마다 여러 번 울면서 사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 저는 아이와 함께 아껴 쓰며 무척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시부모님께 많은 선물을 사다 드리며 잘 모시려 하지만 냉대가 너무 심합니다. 그래도 계속 이렇게 해야 합니까?”
그러다가 사부님께서 ‘전법륜(轉法輪)’에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일을 함에 우선 다른 사람을 고려할 것이다.” 그래서 저는 개의치 않고 계속 찾아뵙고 수련을 견지했습니다.
6년 후, 감동한 시부모님이 친정 오빠에게 1만 위안(약 181만 원)을 들여 명의이전을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돈은 제가 냈습니다. 6년간 오빠 부부와 시부모님이 서로 다투고 싸웠으므로 중간의 제가 받은 정신적 고통은 무척 컸습니다.
그 후부터 우리 모자가 찾아가도 시부모님은 이전처럼 냉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이 커서 대학을 졸업한 후 먼 남방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늘 제가 혼자 선물을 사 들고 시댁을 방문합니다.
남편이 사망한 지 17년이 되는 해인 작년에, 시어머니가 제 아들에게 10만 위안(약 1828만 원)을 주시려고 했는데 아주버니가 간여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온갖 방법을 알려주며 당장 10만 위안을 받아오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26년간 대법을 수련하면서 대법이 저를 변화시킨 걸 알기에 모든 것을 법리대로 하려고 합니다.
친정 부모님의 아파트는 오빠가 상속받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올케와 관계가 나빠졌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제가 모시게 됐습니다. 친정어머니를 모시면서 어려운 점이 많았고, 그렇게 8년이 지났어도 오빠는 조금도 생활비를 보태주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못 했을 것입니다!
저는 파룬따파 진선인(真·善·忍)의 인도로 전통적인 여성의 도덕성과 정조를 지키면서 시대적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진수(眞修)하는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자비로우신 사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3년 9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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