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사존의 보호에 감사드리며 항상 자신을 수련자로 여겨야

글/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대법제자

[명혜망] 오늘 겸허한 마음으로 수련 중의 깨달음을 보고하려 한다. 적절하지 못한 곳은 시정해주시길 바란다.

​사존의 보호

27년 동안의 수련 과정을 회상하며 사존의 보호에 감사드린다. 9일 학습반에 참가했을 때 사존께서 내 몸을 정화해주셨다. 1주일간 설사했지만 정신은 아주 좋았다. 예전의 편두통, 복통, 요통 등 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5~6세 때 바이러스성 심근염에 걸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에는 침대에 누워 쉬어야 했으며, 친구들과 밖에서 놀 수 없었고 체육 수업은 전부 빠졌다. 하지만 수련한 후 등산과 달리기를 할 수 있었다.

처음 사부님의 ‘논어’를 외우던 날, 가부좌하면서 달걀껍데기 속에 앉아있는 묘한 감각을 느꼈는데 사존께서 제자를 격려해주신 것이었다. 심성 고비를 넘기지 못할 때마다 사부님의 경문을 외운다. 특히 ‘정진요지-진수(真修)’를 매번 외우고 나면 마음속 괴로움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부처(佛)는 당신들을 제도하기 위해 일찍이 속인 중에서 동냥했고, 나는 오늘 또 큰문을 열고 대법(大法)을 전수하여 당신들을 제도하고 있다. 나는 무수한 괴로움을 겪었어도 고통스럽다고 느낀 적이 없는데, 당신들은 또 무슨 내려놓지 못할 것이 있는가? 당신이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을 천국으로 갖고 갈 수 있단 말인가?” 사존의 고생스러운 제도에 비하면 이 정도 어려움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한번은 어렸을 때부터 대학교까지 배운 모든 기술을 법을 실증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놀랐다. 예를 들어 어릴 때 바느질을 배우고 옷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대법이 박해받은 초기에 수련생들과 함께 100여 개 파룬궁 깃발과 수많은 현수막을 봉제했다. 일반 회사에서 판매했던 경험은 나중에 대법제자가 운영하는 진상을 알리는 매체에 사용됐다. 일반 회사에서 테스트 작업을 한 경험도 마침 수련생이 설립한 진상을 알리는 사이트에 사용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사존의 정성스러운 배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은 사존께서 보호해주신 체험 몇 가지를 나누려 한다.

1) 약 10년 전 문득 법을 배울 때 읽던 작은 판본의 ‘전법륜’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당시 노안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것은 속인의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안으로 찾았다. ‘그간 매일 열심히 법공부하는 것을 소홀히 해서 그런 게 아닐까? 법공부를 많이 해야겠다.’ 작은 글자를 보는 것이 좀 힘들었지만 열심히 읽었다.

한번은 어느 한 줄을 읽는데 책의 글자가 확대됐고, 읽지 않은 글자는 여전히 작았다. 정말 신기했다! 나는 꾸준히 열심히 법공부해야 교란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 박해가 처음 시작됐을 때 시애틀 수련생들이 SOS 걷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시애틀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며 중국에서 발생한 잔혹한 파룬궁 박해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때 수련생이 같이 참여하라고 해서 1주일간의 일정을 배치했다. 우선 비행기로 시애틀로 가서 오리건주 포틀랜드까지 걷고, 다시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으로 비행기 타고 돌아오기로 했다.

가는 길에 시애틀 수련생들의 정진과 정념을 느낄 수 있었다. 행렬에는 노인과 아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했다. 종종 밤에 텐트에서 잤는데 매우 추웠고, 먹는 건 모두 통조림이었는데 정말 쉽지 않았다.

우리는 매일 대략 30~50km를 걸어야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걷던 날 오후, 발목을 삐었다. 당시 우리를 따라온 차는 이미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여관으로 갔고 우리는 6~8km를 더 가야 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를 데리러 차를 돌리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팀장에게 내가 걸을 수 없다고 말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버티자’라는 일념을 내보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 정법 구결을 염했다.

그때는 빨리 걷지도 못했고, 민둥산과 벌판이라 감히 대열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못하고 열심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한걸음에 한 구절씩 쉬지 않고 정법 구결을 읽다 보니 머릿속이 텅 비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1시간 넘게 걸어 여관에 도착했는데 그제야 진짜로 걸을 수 없게 됐고 발목도 부었다.

다음날 수련생이 날 공항에 데려다줬는데 당시 나는 공항에서 벽을 짚고 천천히 탑승구까지 걸어갔다. 비행기가 도착하자 나는 시트에서 일어났는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마치 삔 적이 없었던 것처럼 발목이 완전히 나은 것이다. 제자에 대한 격려에 사존께 감사드렸다.

3) 어느 해 우리는 지역 퍼레이드를 지원하기 위해 시애틀에 갔다가 퍼레이드가 끝난 후 차를 운전해 돌아왔는데, 저녁에 우리는 차 앞에서 아름다운 무지개를 봤다. 우리는 매우 흥분했는데 여행은 힘들었지만 매우 의미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일찍 기뻐했는데, 차를 몰고 얼마 안 가서 비가 왔다. 산 아래에는 비가 내리고 산 위에는 눈이 내렸는데, 우리는 경험이 없어서 계속 산을 넘었다.

그때 내가 운전하고 수련생들은 모두 차에서 잠들었다. 산에 들어간 후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눈발이 점점 거세게 날리고 가시거리가 매우 짧아 차 앞쪽이 조금 보이는 외에 사방이 칠흑 같았다. 타이어가 미끄러져 통제 불능이 될까 봐 감히 브레이크를 밟지 못했고, 산이 막히면 못 나갈까 봐 차를 세우지도 못했다. 얼마를 가야 산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절벽인지도 몰랐다. 극도로 긴장해서 도저히 앞을 볼 수 없을 때 갑자기 앞에서 차 한 대가 나타났다. 큰 눈을 뚫고 전방 멀찌감치에 있는 차의 불빛을 통해 내가 길에서 운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잠시 후 차가 사라졌다. 억지로 계속 천천히 운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시로 앞쪽에 차가 나타나서 나는 계속 운전할 자신이 생겼는데 산에서 내려오니 새벽 5~6시가 됐다. 밤새 설산을 달렸는데 사존의 가호가 없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늘 자신을 수련인으로 여겨야 한다

대법 수련을 시작한 이후로 생활, 일, 대법 항목에서 다양한 문제에 부딪혔고, 일부는 잘 넘고 일부는 잘 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법공부 중에서 늘 사존의 자비로운 일깨움을 느낄 수 있었다.

1) 작년에 내가 일하는 회사는 오래된 시스템을 없애고 새로운 플랫폼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당시 회사는 다른 주에서 먼저 전환했고 앞 주에 경험을 쌓았다. 게다가 우리에게 3개월 교육을 했기에 회사는 플랫폼 전환을 자신했다. 그러나 전환 첫날 시스템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고 회사의 인력이 부족해 본사 직원과 제때 연락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매번 컴퓨터 앞에서 1~2시간, 심지어 3시간을 기다려서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 몇 주간 마음속에 불평이 가득했고 생각도 부정적이었다. 그러다 한번은 본부 직원과 온라인으로 채팅할 때, 나는 그녀에게 이 새로운 플랫폼이 얼마나 쓰기 불편하고 우리의 많은 시간을 낭비하며, 이전 플랫폼에는 이런 저급한 문제가 없었다고 불평했다. 상대방은 회사가 새로운 플랫폼을 사용하기로 했으니 우리는 그것에 적응해야 하며, 오래된 플랫폼을 생각하지 말라는 글을 보내왔다. 매우 부끄러웠다. 수련인으로서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현실에 직면하지 않고 온종일 불평하며 수구(修口)하지 않고 진선인(真·善·忍)을 잊었다. 이 점에서 속인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여기까지 깨닫고 나니 부정적인 감정도 없어지고 회사의 큰 변화에 태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됐다.

2) 올해 초 션윈 공연 기간에 버클리 공연을 마치고 리노로 갈 예정이었는데 현지에 눈이 내려 션윈 버스가 지나가지 못하면서 공연 일정이 변경됐다. 당시 그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며칠 쉬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생각은 이기적인 것으로, 사람을 구하는 각도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공연이 어쩔 수 없이 연기되면 어떤 중생은 션윈을 볼 기회가 없을 수도 있고 그들 세계의 중생은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쉬면서 컨디션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에 은근히 기뻐했다.

실제로 나중에는 쉬고 싶다는 생각도 실현되지 않았고 다시 다른 지역 수련생에게 불려 가 션윈을 지원하게 됐다. 모든 것은 안배가 있어서 해야 할 일이 하나도 적어지지 않았다.

3) 작년에 션윈쮜핀(神韻作品)을 극장에서 홍보하려 했는데 압력이 매우 크게 느껴졌다. 우리는 션윈 상품을 팔았는데 나중에는 추가로 책도 팔고 옷도 팔아야 하고, 지금은 또 션윈쮜핀까지 팔아야 했다. 우리의 일손은 요만큼이고 극장이 우리에게 준 구역도 그만큼 뿐이다. 그러나 션윈쮜핀은 별도의 책상이 있어야 하고 두세 명 수련생이 함께 홍보해야 했다. 당시에 ‘뭐가 이렇게 까다로워, 이 바쁜 와중에 파는 걸 도와주는 것만 해도 어디야’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사람을 구하는 이 항목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후에 한 수련생이 션윈쮜핀 판매를 도우러 왔다. 수련생 여러 명을 데려와서 매우 열심히 했는데 나는 거기서 자신과의 격차를 보았다. 돌이켜보면 수련은 끊임없이 표준을 높이고 끊임없이 연마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존께서 자비로우셔서 줄곧 제자에게 수련 제고할 기회를 주시는데, 그 당시 나는 감사할 줄 모르고 일이 많은 것보다는 적은 게 낫다는 태도를 품고 있었다.

4) 매체에서 일하던 몇 년간 우리는 지역사회에 매체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많은 커뮤니티 활동을 수행했다. 그동안 회의장이 취소되는 등 많은 교란이 있었는데 우리는 항상 올바른 생각을 유지하고 교란을 제거해서야 모든 활동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한번은 큰 행사 전날 밤에 어머니가 갑자기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응급진료를 받았다. 줄을 서고 혈액검사를 많이 했는데 나중에 한밤중이 다 되어 오빠가 교대해줬다. 집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오빠가 전화를 걸어와 어머니의 다리를 수술할 거라고 했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면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 행사의 주요 협조인 중 한 명이고 수천 명이 참여하는 행사인데 만약 내가 집에서 수술하는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면 이 행사는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발정념을 하고 교란을 제거해달라고 사존께 도움을 청했다. 거실에 앉아서 한 치의 방심도 할 수 없었다. 새벽 3시쯤 오빠가 의사가 수술을 안 해도 된다고 했다며 어머니를 집에 모시고 왔다.

5) 전염병 기간 션윈 공연을 할 때 일부 극장에서는 직원들에게 백신 접종 증명서를 요구했다. 우리는 이 일로 큰 팀과 작은 팀에서 여러 번 교류했고, 개인적으로 일부 수련생들과 백신을 맞을지 말지 교류했다. 사존께서는 이를 위해 특별히 경문을 발표하셨다.

나는 백신 접종 후유증이 두려워 줄곧 맞지 않으려 했다. 재택근무를 하니 주사를 안 맞아도 되고, 한 극장만을 위해 백신을 맞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안내데스크에서 물건을 팔 사람이 충분히 있는지는 상관하지 않고 그저 ‘백신 맞은 사람이 가서 일손이 많아지면 많이 팔 것이고, 일손이 적으면 적게 팔리겠지’라고 생각했다. 우리 팀 수련생들은 션윈을 지원하기 위해 백신을 맞았다. 다른 팀 수련생들도 션윈을 지원하기 위해 백신 접종을 했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재택근무자로 백신을 안 맞아도 됐다. 그리고 션윈 배우들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모든 걸 다 바쳤다.

당시 나는 백신이 몸에 해로울지 모른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점이 달랐고 수련 상태가 달랐다. 그 속에서 그나마 깨달은 것은 주사를 맞든 안 맞든 중생을 구하는 기점에 서서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련생 여러분의 사심 없는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션윈 상품팀은 무대 앞에서는 여유로워 보이지만 뒤에서 업무량이 매우 많아 새벽 2~3시까지 재고를 조사하는 수련생이 있는가 하면, 시간을 내어 물건을 판매하러 오는 수련생도 있다. 다른 팀도 자발적으로 포스터를 말거나 화물 운반을 도왔다. 이 기회를 빌려 나도 늘 돕고 지지하고 협조하는 수련생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한번은 혼자 다른 주(州)에 가서 션윈 상품을 팔았다. 공연 시작 전에 상품을 다 배치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때 전후로 세 명의 수련생이 먼저 와서 도와줘서 관객이 입장하기 전에 순조롭게 세팅을 마칠 수 있었다.

션윈 기간에 나는 우리가 관할하는 모든 도시의 프로그램 책자를 책임졌는데, 제시간에 극장에 도착하도록 보장해야 했다. 뉴욕 인쇄소에서 우리 중서부 도시에 이르기까지 겨울의 도로 상황은 예측할 수 없었고, 극장은 너무 일찍 도착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동안 매년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물건이 도착하지 않은 적도 있었고, 프로그램 책자를 잃어버린 적도 있었다. 한번은 다른 주에 갔다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프로그램 책자가 당일 도착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공연까지 5시간도 채 남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뉴욕 인쇄소 수련생이 경험이 많아서 바로 현지 인쇄소에 연락해 첫날 공연 책자 인쇄를 보장했다. 공연 시즌 중에는 밤새도록 운전해 프로그램 책자를 배달하는 등 감동적인 에피소드도 많았다.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수련생들의 아낌없는 협조로 완벽한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사존께 감사드립니다! 수련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3년 9월 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3/9/9/464229.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3/9/9/464229.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