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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중 하나의 난관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명혜편집부에서 발표한 ‘아첨과 자심생마’를 읽은 후 깊은 감회가 있었다. 나 자신의 수련 여정에서도 일부 유사한 표현이 존재했고, 주변에서도 일부 이런 표현이 존재했다. 이 속에서 개인의 체험과 인식을 말하겠다.

마음을 닦고 집착을 제거하는 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수련 제고하는 과정이고, 또 신체의 용량과 마음의 용량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과정이다. 집착심은 수련인의 층층 신체에 견고한 껍데기를 형성하는데, 집착심을 제거하면 그 층에 대응되는 껍데기를 제거한 것이다. 그럼 다른 공간의 그 신체는 더 높고 더 미시적인 데로 돌파하는데, 더욱 미시적일수록 더욱 거시적이며 수련인의 신체 역시 한층 한층 크게 변한다. 이렇게 신체와 마음의 용량이 잇달아 확대되면 당신은 더욱 많은 법을 담을 수 있고, 더욱 많이 법에 동화할 수 있다.

나는 수련 중에 이러한 한 가지 체험이 있다. 사람마음의 집착이 옅어질수록 지혜도 일부 표현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생사를 내려놓고 근본 집착을 내려놓는 수련 여정에서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련을 겪었는데, 몇 해 전에는 뼈를 도려내는 듯한 아픔 속에서 근본 집착을 내려놓은 후 내 심경에 한 가지 질적인 변화가 발생한 것을 발견했다. 사실 바로 용량이 확대된 표현이다. 법공부할 때 나의 지혜는 마치 열린 것 같았고 법은 나에게 각종 내포를 보여줬는데 내 수련상태도 변화가 발생했다. 그 시기에 법공부 팀에서 교류할 때 나는 늘 여러 사람이 들어본 적 없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법공부 후 교류 시간이 되면 모두들 내 인식을 듣는 것을 비교적 좋아했는데, 이는 나에게 다소 만족감을 주었고 자신이 남다르다고 느꼈다.

어느 날 이웃 도시의 한 사람이 현지에 왔다. 그는 주변 일부 수련생의 아첨에 의해 높이 치켜세워졌다. 일부 수련생은 그가 천목이 매우 잘 열렸고 심지어 개오했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부 수련생은 그를 매우 만나고 싶어 했고 그와 ‘접견’한 일부 수련생은 과분한 총애에 놀라는 느낌이었다. 그 당시 나도 그를 만나고 ‘늦게 만난 것이 한스러울 뿐’, ‘영웅 간의 우정’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말한 인식이 ‘상당히 높고’ 그의 인식이 남다르다고 여겼다. 그 당시 나도 그 사람을 매우 수호했고 심지어 한동안 그의 한 세트 남다른 주장을 선전해줬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후에 여러 사람에게 추켜세워져 갈수록 자아가 팽창했고, 갈수록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겼으며, 갈수록 오만해졌는데, 나중에는 누구에게도 불복했다. 말투가 오만했고 전 세계에서 그가 가장 잘 수련했다고 생각하며 명혜망에도 불복했는데, 심지어 명혜망을 공격했다. 결국 나는 확연히 깨달았다. 나는 그가 자심생마(自心生魔)했음을 발견하고 그를 설득했지만 듣지 않았다. 지금도 이 사람은 또 한 무리 사람들을 데리고 있고, 그 속에서 자심생마의 허튼소리를 하고 난법(亂法)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지금 그 한 기간을 회상하면 나는 너무나 부끄럽고 이 교훈은 나에게 큰 충격을 줬다. 그의 몸과 나 자신의 몸에서, 나는 수련인의 강대한 장애인 ‘사심[私我]’과 ‘자아에 집착함[執我]’을 보았다. 이런 위아위사(爲我爲私)하는 ‘사심’과 ‘자아에 집착함’은 발견하기 쉽지 않은데, 생명의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됐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명시하셨다. “나는 또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다.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을 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역시 남을 위하고 후세 사람을 위하는 데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대법(大法)의 영세불변(永世不變)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1]

사부님 말씀에서 나는 인식했는데, 그 당시 나의 자아 만족과 그의 자심생마는 마침 이러한 미시적인 낡은 본성으로 조성된 것이고, 이런 자아에 집착하는 표현은 마침 수련에서 넘기 힘든 난관이었다. 이 난관은 바로 한 개의 걸림돌인데, 그것을 돌파하지 않고 닦아서 제거하지 않으면 수련인은 용량을 확대할 수 없다. 그 시기 수련은 ‘꽉 채워진’ 느낌이었고, 자신에 대해 만족했으며,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더 발전하면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되고 자아가 팽창돼 결국 자심생마한다.

이런 위아위사의 표현은 수련인 속에서도 가끔 표현된다. 선명히 표현되면 남이 알 수 있지만, 선명히 표현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를 뿐만 아니라 남들도 알지 못하며, 비교적 은폐되어 남들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단체 모임에 참가할 때 늘 핸드폰을 소지하는데, 남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고 단체의 안전에 영향을 준다고 지적하면, 그는 반대로 남들이 정념이 강하지 않고 두려운 마음이 있다고 질책한다. 또 자신은 정념이 강하고 두려운 마음이 없다고 과시한다. 이렇게 자아에 집착하는 표현은 여러 사람이 비교적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교류할 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하게 사악의 각종 박해를 돌파했는지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어디에 누락이 있어서 사악에게 이용당하고 이로 인해 박해를 받았는지 안으로 찾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난관에서 심성의 단호한 표현은 수련생들에게 깊은 계발을 받게 하지만, 그 속에는 과시심과 환희심이 섞여 있고 자아에 집착하는 표현이 있다. 이렇게 선명하지 않은 표현은 쉽사리 발견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어떤 법공부 팀 책임자는 자신의 한 세트를 만들었다고 과시하는데, 가끔은 출발점이 좋게 보인다. 여러 사람을 이끌어 공동으로 제고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전하는 것은 그 자신의 것들이고 한 무리 사람들을 이끌어 그를 뒤따르게 하며, 자신도 모르게 여러 사람을 잘못 이끌면서 자신도 문제가 있는지 모른다. 또 자신의 천목으로 본 것들에 집착하고, 자신이 인식한 이치에 대해 집착해 신나게 이야기하며, 자신이 말을 잘한다는 것에 집착해 수련생들에 의해 아첨을 당하고, ‘권위’에 집착해 만족감을 느낀다. 또 일부 수련인의 남에게 강제로 주입하려는 표현, 정체 협조 중에서 원융[圓容]하지 않고 자신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등등 유사한 이런 유도 자아에 집착하는 표현이다. 그들은 늘 자신이 어떠어떠하다고 강조하는데, 사실 항상 잊고 있다. 자신의 일체는 모두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고 당신이 정념으로 관을 넘고, 당신이 천목으로 보고, 당신이 깨달은 더욱 높은 법리, 당신의 지혜 등등은 모두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왜 보기에는 ‘아주 괜찮게’ 수련됐다고 보이는 사람들이 자심생마하고, 심지어 반개오(半開悟) 상태에 있는 일부 수련인들도 자심생마하는가? 확실히 안타깝고 깊은 사색을 자아낸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늘 ‘자아에 집착하는’ 이 관문에서 넘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본질적으로 그들의 ‘위아위사’의 이전 본성이 닦이지 않았다. 이는 그들 수련 중에서 넘지 못한 하나의 관문이 됐다. 일단 수련 단체에서 아첨, 추켜세움의 시장이 생기면 그들은 다소 특별해진다. 늘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끼고 자아가 팽창하며 잘난 척하는데, 심지어 자심생마한다.

말법말겁(末法末劫) 시기에 구우주 생명들은 모두 법에서 벗어났고 생명들은 모두 재앙 속에 있으며 생명이 신우주로 걸어 들어가려면 반드시 환골탈태해야 한다. 우리 이전의 구우주에서 위사위아의 본성을 신우주의 무사무아, 선타후아의 상태로 동화시켜야 하는데, 이는 본질적인 환골탈태다.

정법 중에서 구세력은 자아에 집착하는 표현을 개변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남만 개변하려 한다. 이러한 본질상에서 개변하려 하지 않는 위사위아의 표현은, 마침 신우주의 법에 동화하는 거대한 장애가 됐다.

따라서 ‘자아에 집착함’과 ‘사심’을 닦아낼 수 있는지는 수련에서의 큰 관문이고, 이 관문을 넘지 못하면 수련자는 그곳에 끼인 것처럼 되고, 그 미시적인 사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신우주로 들어가는 데 거대한 장애가 된다. 그다지 적절하지 못한 비유를 하자면, 당신 그 마음속에 법을 담은 병이 비록 거의 다 찼지만 ‘사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당신은 더욱 큰 용량의 병으로 바꿀 수 없다. 그러면 일단 당신이 일정한 정도로 제고하면 원래의 병은 더 이상 법을 담을 공간이 없고, 당신의 수련은 멈춰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당신은 당신이 끝까지 차오름을 느끼게 된다. 그럼 당신은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겨지고, 아울러 그 시기 당신은 또 수련 단체 속에서 비교적 부각된다고 느껴지며, 더 나아가 남들이 아첨하고 추켜세우기만 하면 진짜로 자아가 팽창되고 이로 인해 자심생마하게 된다.

이때 만약 당신이 그 ‘사심’을 인식하고 그것을 제거하면 이 관문을 넘을 수 있고 용량이 확대되며, 법을 담은 원래의 작은 병을 큰 병으로 바꿀 수 있다. 이때 당신은 원래 작은 병에 담은 법을 새로운 큰 병에 담게 되는데, 그럼 원래의 법이 그 큰 병의 밑부분을 조금 채웠을 뿐임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은 원래의 인식이 아무것도 아니고 그것은 너무나 낮고 보잘것없으며, 심지어 ‘잘못됐음’을 발견하게 된다.​

끝없는 대법 속에서 수련하는 수련자가 어찌 스스로 대단하다는 느낌이 생길 수 있는가? 개오한 사람 역시 이런 느낌이 있지 말아야 하며, 망망한 바닷속에서 당신은 작은 병으로 그만큼의 바닷물을 담았을 뿐이다. 만약 진짜로 그러한 대단한 느낌이 있다면 반대로 당신은 용량이 모자란 것이고, 당신의 용량이 너무나 작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법을 전혀 잘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고, 마땅히 정진해야 하고 마땅히 용량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착실하게 수련한 진수제자는 겸손한 것이다!

단지 개인의 한 점의 옅은 인식이고 부족한 부분은 자비롭게 시정해주시길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정진요지-불성무루(佛性無漏)’

 

원문발표: 2023년 8월 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3/8/1/4636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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