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소적(小菂)
[명혜망] 나는 1998년 말에 대법(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대법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 지 7개월 만에 박해가 시작됐다. 당시 내가 있던 연공장은 큰 연공장에서 분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로운 연공장이었고, 나 같은 신수련생이 많고 노수련생이 적었다. 박해가 시작된 후, 그간 만날 수 있었던 수련생은 나와 비슷한 신수련생 몇 명뿐이었다. 그간 나는 법공부와 연공을 많이 하는 것 외에 친척과 친구들에게 파룬궁에 관한 진상을 알려줬다. 그들은 연공 후 나의 변화를 보았기에 대법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했다.
1. 작은 자료점을 만들다
2001년 초, 악당은 천안문광장에서 가짜 ‘분신’ 사건을 일으켜 붉은 공포를 고조시켰다. 그때 나는 말로만 진상을 알리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상자료를 많이 배포해야 더 많은 사람이 진상을 알고, 심지어 우리를 지원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자료 배포 방법에 늘 고민이 많았다.
내 걱정을 보신 사부님께서 감옥에서 나온 젊은 수련생을 만나게 해주셨다. 그는 사부님의 초기 학습반을 참가했던 수련생이었다. 그는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나의 믿음을 확고히 해줌과 동시에, 대법 중에서 대법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만 생각하고 사심을 포기하라고 날 진심으로 타일렀다. 나는 처음으로 정법 수련의 의미를 알게 됐다.
이 수련생은 우리에게 1천 개의 진상자료를 줬다. 안타깝게도 이 자료를 다 배포하고 다시 연락하려던 참에 그가 또 납치된 것 같다는 말이 들렸다. 이보다 더 나쁜 소식은 사부님의 신경문을 전해주던 채널도 끊긴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 나는 스스로 자금을 조달하고 독학으로 기술을 배워 진상자료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비록 컴퓨터 켜는 버튼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말이다.
2001년에 중학생 아이에게 컴퓨터를 사줬는데 작은 프린터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컴퓨터 입문 기초’라는 책을 구해 배우기 시작했다. 그 후로 수련생들은 신경문을 직접 베낄 필요 없이 인쇄만 하면 됐다. 더 신기한 것은 나중에 우연히 인터넷 봉쇄를 돌파하는 사이트를 얻은 것이었다. 이후 명혜망에 들어가 배포할 자료도 받고 인쇄도 할 수 있었다. 우리도 배포할 자료가 생기게 됐다.
정법 노정이 추진됨에 따라 명혜망에서 다운로드할 자료 종류도 많아지고 배워야 할 기술도 많아져 인쇄 속도가 빠른 캐논 잉크젯 프린터로 교체했다. 또 CD 라이터, 호신부(護身符)를 만들기 위한 코팅기도 구입했다. 나중에 ‘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九評共産黨)’ 출판과 함께 레이저 프린터, 대형 종이 절단기 등을 추가했다. 책을 만드는 것도 배웠다. 참새는 작지만 오장(五臟)을 다 가졌듯이 내 작은 자료점도 사부님의 보호 아래서 꽃이 활짝 피었다.
처음 몇 년간 우리집 밖에서 경적이 자주 울렸고 명혜망에서도 자료점이 파괴됐다는 보도가 자주 보였다. 안전을 위해 나는 엄격하게 수구(修口)했다. 매번 단체 법공부 때 수련생들에게 자료를 가져다주면서 출처를 알려주지 않았고 수련생들도 묻지 않았다. 다들 어느 자료점에서 가져왔다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사부님의 보호 아래 내 자료점은 평온하게 걸어왔다.
그때만 해도 명혜망은 ‘자료점을 곳곳마다 세워야 한다’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왔다. 어쩌면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수련의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서약을 지키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이 몸을 포함한 나의 모든 것은 모두 대법 자원에 속한다. 이 자원을 갖고 있으면 잘할 수밖에 없고, 못하면 안 된다.’
2. 협력해 중생을 구하다
처음부터 나는 스스로 기술을 배우거나 전문 기술 수련생이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정법 중에서 부딪힌 기술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에 따라 주변 수련생들이 필요한 기술을 배워 문제를 잘 해결하도록 도와줄 뿐이었다. 다행히 해야 할 세 가지 일 중에서 수련생들은 해야 할 일들은 비슷했고 요구 사항도 비슷했다. 내가 정법 수련 중에서 세운 현실적인 목표는 정교한 기술이 아니고, 오로지 실천 중에서 사용하기 쉽고 시간이 절약되는 실용적인 기술이었다.
정법 수련 후, 수련생들과 함께 협력해 중생을 구하고 서로 도와서 일부 기술 문제를 해결했으며, 법공부, 연공과 발정념도 하고, 일상생활의 균형도 잘 잡아야 했기에 시간 배치가 점점 어려워졌다. 기술을 배울 시간도 점점 줄어들고 많은 경우에는 수면에서 시간을 짜내야 했다. 때로는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일하는 데 집착하며 법공부와 연공, 발정념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나는 체계적으로 기술을 배울 여건이 없었기에 꼭 필요한 것만 배웠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내가 장악한 기술이 아직 미완성이라는 것에 부끄럽다.
나중에 우리집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면서 가까운 지역 법공부 팀에 합류했다. 때마침 명혜망은 ‘자료점이 곳곳에 꽃을 피워야 한다’라고 제안했고, 새로운 정법 형세에 직면해 내 역할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자아를 버리고 혼자 자료 제작을 맡았던 예전의 상태에서 벗어나, 수련생들이 ‘작은 꽃’(자료점)을 피우도록 돕는 것으로 바꿨다.
새 법공부 팀의 수련생들은 젊지는 않지만 정법 노정을 따라갈 수 있었고 집에 다들 컴퓨터가 있었기에 모두가 컴퓨터를 사용해 명혜망에 접속하고 싶어 했다. 또 인터넷 봉쇄를 돌파하고 진상자료 만드는 방법도 배우고 싶어 했다. 중생을 위해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생각이 일치했다. 이런 식으로 모든 수련생에게 컴퓨터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후 안전한 의사소통을 위해 내부 이메일함을 만들었고, 앞으로는 모두 전화 연락 대신 이메일함을 이용하기를 권고했다. 이후 인쇄 및 녹음 기술이 대중화되어 모두가 자신이 만든 진상자료를 이용해 사람을 구했다.
이 새로운 법공부 팀에서 수련생들의 사유는 활동적이었지만, 나는 약간 소심했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데 자신이 없었다. 나중에 새로운 구출 항목이 시작됐을 때 다들 날 추천해서 나는 모두를 대신해 먼저 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2009년 휴대폰을 사용해 중생을 구하는 항목을 예로 들어 보겠다. 그 당시 많은 중장년 수련생이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았다. 있어도 주로 전화받는 용도로만 사용했다. 실제로 여러 수련생의 안전도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사부님의 은혜와 수련생들의 소망을 생각하니 사명감이 절로 들어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 항목을 배워 수련생들에게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실내 강의 외에 야외 체험 학습이 더 많았다.
당시 우리 법공부 팀은 중장년층이 많았다. 비록 모두가 열정적이었지만 실제로 가르칠 때는 매우 어려웠다. 휴대폰을 처음 사용할 때 수련생들은 두려움이 있었고 조작에 익숙하지 않았다. 일부 연세 있는 수련생은 실수를 잘했고, 어떤 수련생은 머리는 좋으나 마음이 급하면 실수했다. 다른 공간의 사악이 사람마음에 틈을 타 휴대폰을 고장 나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부분은 큰 문제가 아닌 조작이 익숙하지 않아 생긴 문제였다.
나도 당시 초보였기에 작은 문제도 장시간 찾아봐야 했다. 심지어 법공부하는 데 지장을 주기도 했다. 때로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사부님 법을 몇 단락 외우는 좋은 습관을 들였다. 마음이 불편할 때는 외우고 또 외웠는데, 법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휴대폰 항목을 배울 때 처음에는 다들 고생도 많이 했고 겁도 많이 먹었지만, 휴대폰을 자유자재로 조작하게 된 후에는 모두 성취감을 느꼈고 새로운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후 일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바뀌면서 진상 항목이 자연스럽게 넘어갔고, 오히려 일반폰 항목보다 훨씬 쉬웠다. 이렇게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가 하나 더 생기자 모두들 매우 기뻐했다.
3. 착실하게 수련해 난관을 돌파하다
어느새 또 몇 년이 흘렀다. 2012년 3월 어느 날, 수련생들을 위해 ‘홍음3’을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수련 후 몸이 아주 좋았던 나에게 갑자기 심한 소업(消業) 반응이 나타났다. 심한 구토와 두통이 생겼고, 눈부심이 심해 낮에도 방에 두꺼운 커튼을 쳐놓았다. 희미한 빛에도 구토와 두통이 심해졌다. 수련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처음 2년간 사부님께서 제자를 도와 두 차례 큰 소업을 해주신 외에, 2000년 하반기부터는 병업 반응이 없어서 바빠지면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곤 했는데 여전히 활력이 넘쳤다. 그래서 갑자기 찾아온 병업에 난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당시 두통이 너무 심했는데 정신을 집중하면 두통과 구토가 심해져 발정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부님에 대한 마음만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저의 생사는 사부님께 맡깁니다!’ 힘겹게 그 생각을 지키며 감당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4~5일을 버텼다. 며칠간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고, 먹으면 토하고, 물을 마셔도 토했으며, 먹고 마시지 않아도 토했다. 음식을 다 토하고 담즙까지 토했으며, 위경련이 일어나 며칠간 한 시간도 못 자고 탈수 증세도 심했다.
예전에 소업하던 나를 여러 번 목격했던 가족들은 병원에 가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체력 보충을 위해 포도당을 맞으라고 권유했다. 나는 거절했다. 며칠 후 두통과 메스꺼움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고, 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며 잠도 잘 수 있었다. 체력이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을 뜨면 초점을 맞출 수 없었고 어지러웠다. 눈을 뜰 수도 없고 거울도 볼 수 없었기에 나는 그때 내 눈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단지 가족들로부터 “무서워, 눈을 뜨는 순간 눈동자 두 개가 바깥쪽으로 갈라져”라는 말을 들었다. 즉 눈을 뜨면 대부분 흰자위만 보인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나의 구토나 두통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눈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나는 가족들에게 내가 수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상포진이 그렇게 심하게 생겼고 면적도 넓었는데, 약을 먹지 않고 2주 만에 나았다고 했다. 그때 나는 신수련생이었지만 대법의 초범성과 사부님의 위대함을 증명하겠다는 생각에 가족들에게 안심하고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나는 즉시 법공부, 연공, 발정념에 힘을 쏟았다. 법공부할 때 눈으로 ‘전법륜’을 읽을 수 없으면 사부님의 강의 테이프를 들었다. 이 기간에 나도 ‘밀레르빠의 수련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고 종종 감동해 눈물도 흘렸다. 사실 이 과정에서 내 눈도 좋아지고 있었다. 눈을 뜨는 순간에도 고통이 점차 줄어서 그 ‘순간’을 잘 활용했는데 ‘홍음3’의 시를 한 줄씩 읽고 외웠으며 결국 모두 외웠다.
눈이 떠지지 않아 이메일함에 들어갈 수 없었고 수련생들과의 연락도 끊겼다. 법공부, 연공, 발정념에 힘을 쏟은 외에도 여전히 자유로운 시간이 많았다. 그제야 나는 수련한 지 이렇게 오래됐는데 조용히 앉아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사부님께서 안으로 찾고 반성하라는 기회를 주셨음을 알았다.
내가 수련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법 노정이 시작됐다. 그래서 나는 수련의 기초가 너무 약했다. 그저 정법 수련에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기술을 배우고, 수련생들에게 전달하고, 서로 도우며,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하지만 법공부, 연공, 발정념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법공부의 질과 양이 점점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법공부가 줄어들고 일을 많이 하다 보니 마음가짐이 예전처럼 그렇게 순수하지 않았다.
결국 나도 모르게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내 기준으로 다른 수련생을 평가하고, 강요하며, 탓하고, 심지어 불공평하다는 마음도 일어났다. 나는 수련생들이 날 점차 인정하고 감탄함에 따라 심성이 나빠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아가 부풀어 올랐고 점점 겸손한 초심을 잃었으며, 마음속의 일찍이 있었던 순수함을 잃었다. 이를 깨닫고 후회하고 자책하며 사부님께 참회했다. ‘사실 제가 한 모든 일은 사부님께서 해주신 덕분입니다. 사부님을 떠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겸손함을 되찾고 정법을 위해 수련생들의 평범한 디딤돌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내 마음을 보시고 거의 매일 주변 속인들의 입이나 꿈을 통해 날 일깨워주시고, 아직 고쳐지지 않았거나 완전히 고쳐지지 않은 집착심을 명확히 볼 수 있게 해주셨다. 예를 들면 쟁투심, 식탐, 음식 낭비, 연공을 제대로 못 하는 문제, 자식 정, 허영심, 질투심 등이다.
그 당시 사부님께서 항상 곁에 계신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내 과거는 긍정해야 할 부분은 긍정하고, 비판해야 할 부분은 사실과 이성으로 비판하며, 때로는 가혹하게 비판하며 잊지 않았다. 나는 내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으며 자신을 잘 수련해 사부님을 안심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 시간은 대법 수련 후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시간이었고, 가장 깨달은 것이 많은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행복했던 나는 자신이 집에 갇혀 소업한다는 사실도 거의 잊었다. 비록 육안으로 사부님을 볼 수 없었지만 나는 사부님께서 내 손을 잡고 어둠에서 한 발 한 발짝 빛으로 데려가는 것을 진심으로 느꼈다.
한 달 후 나는 눈을 정상적으로 뜰 수 있었고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다시 수련생 환경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수련생들에게 들었는데, 내가 소업하고 수련생들과 연락이 끊긴 기간에 수련생들은 내 행방을 알아보려고 애썼고, 또한 진심으로 안으로 찾으며 의존하는 마음을 제거했으며, 두 수련생은 고속 프린터를 바꾸기도 했다. 수련생들도 진심으로 안으로 찾고 착실하게 수련해 내가 난에서 벗어나게 도와줬다. 수련생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그 당시 교훈은 마음에 매우 깊이 남았다. 수련은 엄숙하므로 조금이라도 요행 심리가 있어선 안 된다. 오로지 착실하고 착실하게 진수해 안으로 찾는 것을 자동적인 기제(機制)로 만들어, 무조건 안으로 찾고, 끊임없이 위로 돌파해야만 계속 제고할 수 있다.
최근 몇 년간의 수련에서 나는 안으로 찾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쟁투심을 일부 없앴으며, 마음을 많이 넓혔고, 예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나쁜 집착과 관념을 찾았다.
원문발표: 2023년 5월 1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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