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복연(福緣)
[명혜망] 나는 올해 77세이며 대법을 수련한 지 25년이 된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사부님께서 내 손을 잡고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이셨는지 모른다. 크나큰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으며 하고 싶은 말은 사흘 동안 해도 다 할 수 없다. 여기에서 수련 중 있었던 몇 가지 작은 이야기를 사부님께 보고드리겠다.
1. 수련 초기에 두려운 마음 돌파
내 고향은 시골이고 어릴 때 식구가 10명이었다. 아버지가 유일한 노동력이어서 가난하고 생활이 어려워 검소한 습관이 생겼다. 부모님은 모두 학교 문턱에 가본 적이 없어 글자 하나도 모르시지만 농사일은 잘하셨다. 특히 아버지는 농사의 달인이셨다.
농작물 파종기에 가뭄이 들 때마다 다른 사람이 파종한 밭은 발아율이 아주 낮았지만, 아버지가 심은 모종은 모두 싹이 텄다. 그러나 중공(중국공산당)은 “사람이 얼마나 대담하면 밭에서 얼마나 많은 수확량이 난다”, “1무(666.7㎡) 땅에 천 근의 씨를 뿌리면 만 근의 양식을 수확할 수 있다”는 등 황당한 소리를 하면서 극단적이고 제멋대로 농민들을 지휘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중공의 맹목적인 지휘를 듣지 않고 자신의 경험에 따라 씨를 뿌리셨다. 결국 아버지는 이 때문에 비난과 비판받으셨다. 그래서 부모님은 이후 우리에게 시비와 번거로움을 초래하지 말도록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엄격히 경고하셨다. 이리하여 나는 아주 내성적인 성격이 되어 고분고분 순종하고 소심했으며, 담이 작아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했다.
대법을 수련한 후 나는 사람의 이치를 알았다. 2000년 초겨울 어느 날 오후, 우리 마을의 A 수련생이 우리집에 와서 한 가지 일을 의논했다. “오늘 밤 우리는 현수막을 걸러 갈 건데 아주머니도 가시겠어요?” A는 관련된 몇 가지 상황을 간략히 말했다. 나는 “좋아요. 갈게요”라고 말했다. 나는 기쁘고 뿌듯했지만 겁이 나고 두렵기도 했다. 지금 말하면 정말 부끄럽다. 그때 나는 법공부가 깊지 않아 오성이 나빠서 무엇이 법을 실증하는 것인지 전혀 몰랐다. 다만 감성적으로 대법이 좋다고만 인식했고 현수막을 거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기뻐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없었다.
그 당시 농촌에는 아직 가로등이 없어 컴컴했다. A와 B 수련생이 오토바이를 타고 더 먼 곳에 현수막을 걸러 갔기에 나는 컴컴한 길을 따라 혼자 다른 마을에 현수막을 걸러 갔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쨌든 대답한 일이고 또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두려워도 가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날은 저녁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속으로 가서 어떻게 할 것이며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발을 신을지 등을 여러 번 고민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나는 우리 마을에서 약 1.5km 떨어진 목적지로 급히 가서 붉은 천에 노란색 글자가 적힌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파룬따파는 정법입니다’라는 큰 현수막 두 개를 각각 도로 옆에 있는 두 나무 사이에 끈으로 묶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나도 모르게 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다행히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매우 순조로워 속으로 안도의 숨을 길게 쉬었다.
나는 땀을 닦은 다음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등 문구가 적힌 형형색색의 작은 삼각 깃발을 들고 길가를 따라 걸으면서 약 10m 간격으로 꽂았다. 7~8개를 꽂았을 때 갑자기 몸 뒤 멀리서 한줄기 밝은 빛이 비쳤다. 뒤돌아보니 자동차 한 대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얼른 나머지 작은 깃발 30여 개를 길가 풀밭에 두고 빈손으로 태연한 척하며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순간 자동차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괜스레 한바탕 놀랐다.
나는 다급히 돌아서서 작은 깃발을 찾으러 갔는데 다행히 그날 밤 손전등을 지니고 갔었다. 대략적인 위치만 기억하고 있어서 몇 번을 뒤져서야 겨우 찾았다. 나머지 작은 깃발을 다 꽂고 나자 마치 무거운 짐을 부린 것처럼 홀가분하고 즐거웠으며, 너무 기뻐서 길에서 묵묵히 ‘홍음(洪吟)’을 외우면서 종종걸음으로 재빨리 되돌아왔다.
뛰어가다가 갑자기 길가 도랑에서 한 남자가 뛰쳐나오더니 날카롭게 소리쳤다. “뭐 하는 사람이야?” 나는 생각하지 않고 “길 가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했다. 그 사람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 나는 얼른 계속 앞으로 갔으나 놀라서 심장이 방망이질하듯 뛰었다. 또 괜스레 한바탕 놀랐다.
그때는 초겨울이었는데 우리 북방 지역은 이미 날씨가 추웠다. 특히 한밤중에는 약간 쌀쌀해서 어르신들은 이미 솜옷을 입었다. 그날 저녁 나는 내복을 입고 간편한 복장으로 문을 나섰더니 추위와 긴장감,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그러나 집에 돌아간 후에 땀으로 흠뻑 젖은 셔츠를 벗자 잠시는 추웠지만 마음은 흐뭇했고 행복했다. 나는 내가 과감히 두려운 마음을 돌파하고 중생을 구하기 위해 미력한 힘을 다한 데 대해 만족했다.
그때는 오성이 나빠 위급한 시기에 사부님께 부탁드릴 줄도 몰랐는데 지금은 사부님께서 항상 제자 옆에 계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게다가 길을 가는 자동차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는가?!
지금 이 일을 돌이켜보면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정말 불가사의하고 우습기도 하다. 이것은 대법을 수련한 후 처음으로 두려운 마음을 돌파한 경험이다. 그 이후로 나는 종종 혼자서나 수련생과 함께 각 마을에 가서 한 집도 빠짐없이 자료를 배포했다. 동시에 전봇대에 진상 스티커를 붙이는 등 중생을 구하는 일을 했는데 모두 비교적 순조로웠다.
2. 법을 수호하러 베이징에 갔다가 순조롭게 돌아오다
2004년, 법공부와 수련생 교류문장을 보고 정법시기 대법제자는 어떻게 법을 실증하고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수련의 길을 걸어야 하는지 점차 알게 됐다. 그해 많은 수련생이 계속해 천안문광장에 발정념을 하러 갔다. 나도 가고 싶었으나 농촌 수련생은 농사짓느라 정말 너무 바빠서 같이 갈 수련생을 찾지 못했다. 고민하다가 혼자 가기로 했다.
옛사람은 “한번 스승으로 모시면 평생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모셔야 한다”라고 말했다.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비방을 받고 계신데 제자가 나서지 않으면 세인은 모두 우리가 어질지 않다고 욕할 것이다. 사부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우리의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주셨는데 사부님과 대법이 천고의 억울함을 당하고 있을 때 제자로서 무관심하고 방관할 수 있겠는가? 양심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예전에 자신에게 내가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지 물은 적이 있다. 납치되고 구타당할까 봐 두려운가? 재물과 명예를 잃을까 봐 두려운가? 자녀가 연루될까 봐 두려운가? 많은 두려운 마음과 집착심을 찾았다. 정말 선과 악의 대전(大戰) 같았다.
결국 사부님의 법이 날 깨우쳐줬다. “사부가 있고 법이 있는 한 무엇이 두려운가? 그것을 상관하지 않겠다!”[1] 나는 ‘홍음’, ‘홍음2’, ‘정진요지’, ‘전법륜(轉法輪)’ 등 법을 외웠다. 외울수록 자신감이 생겨 드디어 법을 수호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나섰다.
갈 때 나는 베이징으로 직행하는 장거리 버스를 탔다. 몸에는 가방 하나만 멨는데 그 안에는 빵 한 봉지, 화장지 하나, 비닐봉지 하나, 물컵 하나, 접이식 우산(그 속에 진상 스티커를 18개 감추어 뒀음) 하나가 들어 있었고 몸에는 약 1천 위안의 돈을 지녔다.
그 당시 버스에는 보안 검사, 신분증 검사 등이 없었다. 베이징에 가는 길에 나는 잠자는 이외 법을 외우고 발정념하면서 거의 말하지 않았다. 1박 1일을 거쳐 이튿날 새벽 4시쯤에 순조롭게 베이징 어느 터미널 밖에 도착했다. 기사는 “버스가 5시 이후에야 터미널에 들어갈 수 있으니 승객분들은 함부로 행동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일부 승객이 핑계를 대고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서 내렸다.
나는 우산 속 진상 스티커를 재빨리 주머니에 넣고 걸으면서 붙였다. 일부는 길가 난간에, 일부는 육교 손잡이에, 일부는 공중전화 부스에 붙였다. 잠깐 사이에 모든 진상 스티커를 다 붙여 마음이 정말 홀가분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 시기, 나는 학생 시절에 기차를 타고 동북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후 30여 년간 멀리 가본 적이 없었고 천안문의 위치는 더욱 몰랐다. 다행히 출발 전에 나는 ‘전국 관광교통지도’를 사서 몇 페이지를 살펴봤다. 여러모로 알아본 후 드디어 천안문광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약 6시쯤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사진사가 다가와 나에게 기념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지금 광장에 사람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사진 찍기 좋을 때라며 잠시 후 국기 게양식 때는 사람이 많아 사진 효과가 별로 좋지 않다는 둥 말을 했다. 나는 “좋아요. 제가 자세를 잡으면 찍어주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대연화수인(大蓮花手印) 자세를 했다. 몇 분 사이에 사진이 나왔다. 나는 광장을 한 바퀴 돌면서 법 구결을 묵념하고 발정념을 했는데 두려움 없이 마음이 비교적 평온하고 든든했다.
하루 동안 밥 한 입 먹지 않았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광장 주변에 간식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뜨거운 두유 한 컵을 사서 한 모금 마시고 바로 내려놨다. 광장에서 화장실 가기가 너무 어려워 감히 마시지 못했다. 줄을 서야 했고 한 사람이 한 번에 1위안을 내야 하거니와 장시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사실 당시 나는 전혀 배고프거나 목마른 느낌이 없어서 계속해 광장을 돌면서 발정념을 했다.
9시쯤에 나는 S성(省)에서 온 수련생 5명과 H성에서 온 3명의 수련생을 만났는데 우리는 만나자마자 오랜 친구처럼 친해졌다. 우리는 함께 둘러앉아 각자의 수련 체험을 교류하고 각자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한 가족처럼 다정했다. 우리 9명은 함께 단수 입장하고 발정념하는 단체 사진을 찍고 각자 한 장씩 받았다. 수련생들이 서로 앞다투어 돈을 내겠다고 해서 나는 돈을 내지 못해 매우 유감스러웠다. 지금도 그 수련생들이 그립다. 다들 정진하고 계시죠?
사실 당시 광장에는 이베코 경찰차가 줄줄이 주차되어 있었고 경찰과 사복경찰이 사방에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를 보지 못했다. 이것이 기적 아닌가?! 사부님, 제자는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속으로 외쳤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제 사진을 어떻게 집에 갖고 갈지 고민됐다. 그때 기차에서는 철도 경찰이 수시로 검사할 수 있었다. 당시 광장에는 연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연을 풀고 펼쳤을 때 길이가 약 4~5m 정도 됐고 지네, 제비, 손오공 머리 등 각종 모양이 있었는데 나는 손오공을 선택하고 그 속에 사진을 끼워 넣고 안전하게 집으로 갖고 왔다.
집으로 돌아갈 때 저녁 기차를 타야 했는데 기차역이 몇 개나 돼서 도대체 어느 역에서 표를 사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때 내 옆으로 한 중년 남성이 지나갔다. 나는 다급히 그에게 모 지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면 어디에서 표를 사야 하는지 물었다. 그는 즉시 “마침 저도 그 지역으로 가려고 표를 사러 가는 길이니 절 따라오세요”라고 말했다. 순간 나는 감동해 정말 울고 싶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 제자를 도와 큰 어려움을 해결해주셨습니다!’ 나는 정말 엎드려 사부님께 몇 번이고 절하고 싶었으나 속으로 묵묵히 ‘정말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나는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3. ‘작은 꽃’을 피우고 사면팔방의 중생을 구하다
2000년에 사부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중국의 자료점은 곳곳에서 꽃을 피워야 한다고 지시하셨다. 나도 이 소원이 있었으나 걱정이 태산 같았다. 기술, 설비, 소모품, 안전 등 많은 방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늘 걸음을 내디디지 못했다.
2009년이 되어서야 소원 성취를 했다. 그러나 여전히 두려운 마음이 심했다. 수련생이 컴퓨터를 구입하고 시스템을 설치해줬는데 집에 한 달 넘게 두고 있다가 기술 수련생을 청해 어떻게 명혜망에 접속하는지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때 사용한 것은 무선 인터넷 충전 카드였다.
수련생이 저녁에 두 시간 넘게 가르쳤는데 수련생이 떠난 후 나는 컴퓨터를 켜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몰라 귀찮게 수련생에게 다시 가르쳐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나는 첫 번째 교훈을 받아들여 수련생이 한 단계 가르칠 때마다 그것을 차근차근 기록하고, 기록에 따라 수련생에게 시범해 보여주면서 어느 단계가 잘못되면 수련생이 시정해줬다. 그 후 나는 기록대로 인터넷에 접속했고 드디어 명혜망에 순조롭게 접속할 수 있었다.
명혜망 접속 방법을 배운 후 나는 또 자료 인쇄를 배우고 싶었다. 수련생은 또 자료 제작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구매해줬다. 수련생이 가르친 매 단계를 나는 상세히 기록했다. 마우스 커서를 어디에 둬야 하고 어떻게 하면 손 모양 커서로 바뀌는 등까지 자세히 표기했다. 수련생은 나의 진지한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이거까지 적습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어쩔 수 없어요. 기초가 전혀 없어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했다. 사실 당시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았지만 나중에 번거로움이 적어졌다. 수련생이 가르친 것을 나중에 거의 다시 가르칠 필요 없이 한 번에 배우려고 노력했다.
자료 제작법을 배웠지만 두려움이 심했다. 내가 컴퓨터를 배운 것을 남편(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음)이 알고 있으나, 자료 제작을 이해하지 못해 지지하지 않을까 봐 나는 자료 제작 일을 숨겼다. 매번 남편이 외출하기를 기다렸다가 서둘러 만들었고 자료를 출력할 때 항상 커서를 멈춤 버튼에 놓고 남편 발소리가 들리면 즉시 멈추고 프린터를 가렸다. 이렇게 4년간 숨겨왔다.
어느 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요리조리 피하면서 조마조마하게 일하는 상태가 언제면 끝날까? 내가 하는 일은 사람을 구하는 일이고 가장 신성한 일인데 왜 내 집에서 당당하게 하지 못하지?’ 사실 남편은 내가 대법을 배우는 것을 매우 지지한다. 대법을 배우기 전에 나는 편두통, 관상동맥성 심질환 등 여러 질병을 앓았는데 대법을 배운 후 치료하지 않고 저절로 나아 몸이 건강해지고 정신상태도 좋아졌으며 가정도 화목해졌다. 남편은 대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담이 작고 중공의 폭력적인 통치와 공포, 위협을 두려워했다. 특히 중공의 연좌제나 자녀가 연루될까 봐 두려워했다.
심사숙고 끝에 남편에게 이 비밀을 털어놓고 남편이 시비를 분별할 수 있도록 이치를 설명하기로 했다. “옛사람은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고 말했어요. 사부님께서 절 구해주셨으니 저는 중생을 구해야 해요.” 그런데 남편은 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나이 들수록 총명해지고 능력이 있고 첨단 기술을 다룰 줄 안다며 “아는 것이 적지 않네, 정말 대단해!”라며 칭찬했다. 나는 “제가 능력이 있고 어떠어떠한 것이 아니라 대법이 제게 지혜를 열어주고 대법 사부님께서 제게 모든 것을 주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라고 말했다. 남편은 연속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래”라고 말했다.
내가 인쇄한 ‘호신부(護身符) 이야기’ 4단 전단지는 거의 남편이 접었는데 수없이 많이 접었다. 설날이 다가오면 고광택 잉크젯 용지에 세뱃돈 봉투를 인쇄해야 하는데, 자르고 붙이는 것을 모두 남편이 도와줬다. 남편은 매일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9자진언을 진심으로 염해 복을 받아서 몸이 건강하다.
자료 제작에 필요한 소모품은 모두 내 사비로 구매한 것이다. 낮에는 인쇄하고 밤에 배포하면서 쌓아둔 적이 없고, 일부는 다른 수련생에게 사용하도록 줬다.
정법을 수련한 후 중생을 많이 구하기 위해 지난 몇 년간 얼마나 많은 거리와 골목을 다녔고, 얼마나 많은 마을과 정원을 다녔는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모르고 얼마나 많은 비바람에 얼굴을 씻었는지 모른다. 별이 날 향해 눈을 깜빡였으며 달이 구름을 뚫고 나와 동행했다. 추위와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중생이 구원받으면 행복했다. 사면팔방에 모두 사람을 구하러 다닌 대법제자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는 운 좋게 우주 중의 정법시기 대법제자라는 제일의 칭호를 가졌기에 영광스럽고 자랑스럽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실 때마다 거의 우리에게 법공부를 잘하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나는 대법제자이기에 반드시 사부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전법륜’, ‘홍음’ 6권과 ‘정진요지’ 등을 외웠으며 여러 번 베꼈다. 법공부를 하고 외우는 목적은 내 수련을 지도하기 위함이다. 법을 떠나서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으며 원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정진하는 수련생과 비하면 나는 아직 많은 집착심을 깨끗이 내려놓지 못했고 착실한 수련이 뒤떨어진 것을 깊이 느끼고 있다. 앞으로 세 가지 일을 잘하고 더 노력해 사부님을 따라 진정한 집으로 돌아가겠다.
층차의 제한으로 법에 있지 않은 부분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길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원문발표: 2023년 5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3/5/5/4573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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