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1. 과시심
아내 수련생은 줄곧 내게 시련을 만들어 주면서 내 수련을 도왔다. 나는 연공인의 표준 ‘참음’을 견지하면서 안으로 찾았다. 하지만 내가 사람마음을 찾았어도 아내는 풀어지지 않았다. 나를 끝까지 밀어붙여 더는 참을 수 없게 만들어 결국 나는 아내와 다퉜다. 이런 시련은 오랫동안 계속됐고 나는 문제점을 찾지 못했다. 내게 문제가 있음을 알았지만 뿌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줄곧 괴로워했다.
내가 깨닫지 못하자 사부님께서 일깨워주셨다. 내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우리 몇 명 수련생이 함께 교류했다. 아내 수련생은 다른 수련생에게 말했다. “○○(나의 이름)는 정말로 잘 참아요.” 사실 이런 장면이 현실에서도 여러 번 있었는데 나는 깨닫지 못하다가 마침내 단번에 깨달았다. ‘정말 잘 참는다’라다는 과시심이 아내와의 시련을 계속 불러온 것이다. 구세력은 과시심을 붙잡고 아내의 사람마음을 이용해 내게 시련을 강요한 것이다. ‘너는 참음을 과시하는 마음이 있지 않은가? 이번에도 어디 참는가 보자!’
나는 ‘잘 참는다’라는 과시심을 찾고 나니 온몸이 가벼워졌다. 나는 제대로 찾았다고 생각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일깨움에 감사드린다. 그 후 이런 시련은 사라졌다.
과시심은 각 방면에서 체현된다. 자신이 참을 수 있다고 과시하고, 심성이 높다고 과시하고, 법을 잘 배웠다고 과시하고, 오성이 좋다고 과시하고, 정념이 강하다고 과시하고, 수련을 잘했다고 과시한다. 이런 과시심은 구세력이 틈을 타게 해 많은 시련을 강요했고 수련 환경이 복잡해졌다. 줄곧 구세력이 준 시련 속에서 수련하며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수련에서 과시심으로 많은 고생을 했으며 줄곧 깨끗이 제거하지 못했다. 그 며칠간 마음을 조용히 하고 과시심의 뿌리를 찾았다. 박해 초기 한 가지 꿈을 꾸었다. 사부님께서 하얀 보좌에 앉아 계셨고 나는 사부님의 아래쪽 연꽃에 앉아 있었다. 나는 아래에 분홍색 복숭아가 몇 개 있는 것을 보았다.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내려가 복숭아를 몇 개 따오겠습니다.” 사부님께서 자비롭게 웃으셨고 일념을 보내셨다. ‘너는 따지 못한다!’ 나는 그래도 시도해 보려고 내려갔다! 내가 이것을 잡아 뽑아도 안 되고 저것을 잡아 뽑아도 안 되어 또 다른 것을 잡아 뽑았다. 하지만 단지 조금 흔들릴 뿐 뽑히지 않았다. 사부님 곁에 가서 말씀드렸다. “사부님, 복숭아를 따지 못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날 보고 웃으셨다.
이튿날, 나는 수련생을 찾아 베이징에 법을 실증하러 가는 일을 교류했다. 몇 명 수련생을 찾았지만 모두 안 간다고 했다. 마지막에 한 수련생을 찾았는데 그는 동의했다. 하지만 오후에 그도 가지 않겠다고 말하며 자신을 보호하는 이유를 댔다. 하는 수 없이 베이징에 법을 실증하러 혼자 갔다. 그때 나는 사부님께서 꿈에서 수련생은 갈 수 없고 혼자 가야 한다고 일깨워주셨다고 생각하면서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깨달았는데, 사부님께서 내게 강한 과시심이 있다고 알려주신 것이다. 꿈속에서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는데도 믿지 않고 시도했다. 얼마나 건방지고 독선적인 과시심인가?
종종 우리는 깊이 미세하게 숨어있는 과시심을 잘 감지하지 못한다. 나는 더욱 깊은 층차에서 과시심의 근원을 찾아봤다. 그는 낡은 우주의 극단적인 ‘이기적인 요소’에서 왔다. ‘이기적인 요소’가 있기에 이런 ‘이기적인 요소’가 끊임없이 강화되면 ‘독선’이 나온다. 이 이기적인 요소는 낡은 우주의 ‘성주괴멸(成住壞滅)’의 ‘괴’ 시기의 변이된 산물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창궁의 성주(成住)는 도(道) 중에 있었으나 괴(壞) 시기는 도를 벗어나 모두 자신만을 위한다네”[1]. 과시심을 철저히 없애려면 반드시 ‘이기심’을 닦아버려야 무사무아(無私無我)하고 이타적인 생명이 될 수 있다.
2. ‘이기심’ 제거
며칠 전 아내와 나는 삼륜차를 타고 수련생 집에 가서 법을 실증하는 데 필요한 어떤 문제를 해결하러 갔다. 아내는 내게 혼자 수련생 집에 가라고 했고 자신은 아파트 아래에서 기다리다 함께 집에 갔다가, 내일 다시 오자고 했다.
나는 수련생 집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니 수련생은 몇 분 안에 끝낼 수 있으며 내일 다시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급한 일이라서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참을성 있게 수련생이 일을 끝내기를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나 총총히 아파트에서 내려와 아내를 찾았지만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이미 혼자 집에 갔다. 나는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잡지 못해 먼 길을 걸어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이미 화가 나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왜 저렇게 크게 화가 나 있을까? 나도 수련생이 일을 즉시 처리해줄지는 몰랐고, 법을 실증하는 일인데 빠를수록 좋지 않은가? 당신도 수련자인데 이해하고 지지해야 하지 않는가? 왜 법에 서서 문제를 보지 않는가?’ 나는 안으로 찾으니 잘못이 없어 단지 심성 제고의 기회로만 생각했다.
얼마 후 아내는 미친 듯이 날 쫓아냈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듣지 않았다. 아내는 내가 ‘이기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생각했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법을 실증하기 위한 것인데도 이기적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전에 이런 일도 있었다. 아내와 나는 시골에 있는 수련생의 기계를 수리하러 갔다. 우리는 날이 저물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시골에 도착한 후 뜻밖의 일이 생겨서 밤이 되어 집에 도착했다. 돌아온 후 아내는 나와 다투었는데, 줄곧 왜 그러는지 몰랐고 역시 심성 제고의 기회라고만 생각했다. 그때 나는 화내지 않았다.
이번에도 같은 문제가 나타났으니 안으로 찾아야 했다. 내가 정말로 이기적인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평소 늘 慈悲(츠뻬이)한 마음과 상화(祥和)한 심태를 유지한다면, 문제와 마주쳐도 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충적인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늘 慈悲(츠뻬이)하고 선(善)으로 남을 대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고려하여 매번 문제와 마주칠 때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이 감당해 낼 수 있는지 없는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를 우선 생각한다면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연공(煉功)함에 높은 표준, 더욱 높은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2]
나는 남의 감당 능력을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만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강요하며 남을 개변하려 했다. 예를 들면 남의 심성 감당 능력이 40%이면 남에게 100% 감당을 요구한다. 이것은 강요가 아닌가? 수련생을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이런 이기적이고 나쁜 마음을 지니면 어떻게 법을 실증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법을 실증한다’는 가림막에 덮여있던 ‘이기심’이 마침내 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진심으로 아내에게 사과했고 잘못을 인정했다. 내가 수련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감당한 아내에게 감사했다. 그 한순간 무조건 안으로 찾는 경지를 느꼈다. 백분의 백 나 자신의 잘못이었고, 상대방이 맞고 틀린다는 개념과 생각 자체가 없었다. 이런 경지는 상대방을 보는 요소가 전혀 없고 오로지 자신 잘못만 인정하는 것이다.
하루는 친척 수련생이 갑자기 날 비난하며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비꼬았다. 나는 생각했다. ‘수련의 기회가 왔구나.’ 난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고 조용히 안으로 찾았고 마음이 평온했다. 하지만 아내와 관을 넘긴 것처럼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심에서 우러나와 내가 틀렸다는 마음이 없었다. ‘무슨 차이일까? 무슨 원인일까?’ 찾아보니 아내와 심성관을 넘긴 후 아내에게 감사한 원인은 아내에 대한 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에 대한 정이 깊은 것이다. 비록 관을 넘었지만 정의 요소가 섞여 있었고 순정하지 않았다. 나와 친척 수련생 사이는 정이 깊지 않다. 정을 버려야 순수하게 관을 넘었다고 볼 수 있고 ‘무사(無私)’의 표준에 이를 수 있다!
왜 친척 수련생에게는 잘못을 인정하고 수련인이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와 표준에 이르지 못했는가? 무엇이 심성 제고를 막고 있는가? 나의 과시심, 교만, 체면, 원망, 보복심, 쟁투심이 수련에서 제고를 가로막고 있었다.
3. ‘참음’을 체득
발생한 모든 일을 통해 ‘참음’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있었다. 예전에는 갈등에서 ‘참음’은 모두 조건이 있었음을 발견했다. 상대방이 틀렸으면, 나는 대법의 요구에 따라 높은 자태를 유지하고 상대방과 견식을 같이 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참았다. 이런 ‘참음’은 조건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기점에 서서 참은 것이다. 이것은 이기적인 ‘참음’이고 근본적으로 대법 수련자의 ‘참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매번 갈등이 나타날 때 보기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지만, 정도가 심해지거나 시간이 길어지면 참지 못한다. 법에 있지 않은 ‘참음’은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다. 이것은 진수(真修)가 아니고 가짜 수련이다! ‘참음’은 마땅히 무조건이야 하고 이타적이어야 하며, 어떤 이기심이 있어도 안 된다. 이런 ‘참음’이야말로 법에 있고 어떤 외부적 충격에도 금강부동(金剛不動)이다.
수련생이 심성을 지키지 못하고 ‘참지’ 못하면 흔히 마음속에 ‘불평’이 생긴다. 이런 ‘불평’은 눈으로 봐야 믿는다는 관념에서 생긴 것이고, 사물의 진상을 보지 못한 잘못된 인식이다. 법에서 알게 됐지만, 이 우주에는 근본적으로 사람이 인식하는 그런 ‘불평’이 없다. 왜냐하면 우주의 근본 특성 진선인(真·善·忍)이 모든 것을 제약하고 있고 모든 것을 균형 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쁜 일을 하면 응보를 받고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 생명마다 자신이 무엇을 하든 갚아야 하는데 우주의 법리는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대법제자인 우리도 역사상 지은 모든 업력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운이 좋다. 우리는 자비로운 사부님이 계시고 사부님께서 제자를 위해 모든 업력을 갚아주셨고 제자를 위해 감당하셨다. 단지 조금 남겨 우리가 제고하는 데 사용하게 하셨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수련을 위해 배치됐다. 이 이치를 알면서도 우리가 불평이 있을 수 있을까? 매번 갈등에서 사부님을 생각하면 참을 수 있고 우리에게 갈등을 만들어 준 사람을 선하게 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참음은 선의적이고 우주 법리에 대한 깨달음이며 생명에 대한 자비와 이해와 관용이다. 그래서 ‘참음’에도 ‘선(善)’이 포함돼 있다.
대법 입자로 대법을 수호하는 것은 우리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책임이다. 어떤 충격을 받든 우리는 금강부동해야 한다. 우리는 대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지금 ‘참음’ 경지에 대한 내 인식이다. 이 ‘참음’은 이성적이고 법의 표준이 있으며, 이런 ‘참음’은 대법을 파괴하는 구제불능의 생명에 대한 무한한 방종과 다르다. 대법을 수호하기 위해 법을 파괴하는 생명은 마땅히 제거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참음’에는 ‘진(真)’이 있고 이성적이다.
4. 마음 닦는 것이 관건
이번에 발생한 일을 통해 나는 수련 중에 숨어있는 문제를 발견했다. 나는 ‘색욕심’을 제거하는 방면에서 줄곧 소도(小道) 수련에서 배회했고, 이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 평소 매우 신중했다. 아내의 다정한 행동도 나는 ‘경계’하고 각종 방식으로 피했다. 나와 아내의 다정함은 색욕심을 내려놓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내가 처음으로 사부님의 ‘홍음5’, ‘홍음6’에서 ‘慈悲(츠뻬이)는 사랑보다 크다네’ ,‘수련생의 그리움’, ‘부득이’ 등 시사(詩詞)를 읽을 때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한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다. 이제 알게 됐는데 색욕심을 제거하는 수련에서 무의식중에 내게 많은 ‘틀’을 정해 놓았고 이 ‘틀’은 마치 ‘계율’처럼 날 제약했다. 진정으로 내심에서 공들여 수련하지 못했다. 이런 계율을 지키기 위해 색욕심을 수련한 것이고 무의식중에 소도 수련의 길을 걸었다. 그간 이런 점을 인식하지 못해 이런 계율을 만든 것인데, 이것은 진정한 자신이 아니다. 나는 수련에서 형식적인 표면을 걸었고 사부님께서 배치한 대도무형(大道無形)의 수련의 길에서 걷지 못했다. 나는 줄곧 법에서 수련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색욕심 때문에 나는 아주 고통스러웠다.
수련인으로서 남을 위해 생각해야 하고 남을 배려해야 한다. 내가 그렇게 아내를 대하니 아내가 편할 수 있겠는가? 내 표준으로 남을 요구하면 안 되고 상대방 각도에서 문제를 봐야 한다. 이 점을 깨닫자 ‘대도무형’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인식했다. 오직 유형적인 표면에서 공을 들였고 내심에서 자신의 마음을 닦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아내에게 많은 상처를 줬다. 마침내 나는 사부님께서 전한 우주 대법은 정말로 고덕대법(高德大法)임을 깨달았다! 어떤 생명에도 모두 자비롭고 원융[圓容]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도무형의 법리에 따라 잘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남을 배려하고, 문제에 부딪혔을 때 마음을 닦으면 대법이 생명에 대한 자비와 원융은 펼쳐지고 생명은 대법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잘하지 못했고 남에게 상처를 줬고 많은 사람이 대법에 오해를 불러오게 했다. 모두 나의 수련 부족이다! 사부님께서 중생에 아름다움과 신성한 대법을 주셨는데, 나의 수련 부족으로 대법에 소홀히 해서 오해를 불러왔고 사부님의 기대를 저버렸다.
나는 이제 아내의 감정을 생각하게 됐고 더는 피하지 않으며, 오로지 내심에서 자신의 색욕심을 닦고 아내에게 상처 주지 않는다. 내가 법 속에 있기에 색욕심은 빨리 제거됐다. 이후 나와 아내는 두 마음이 함께 있는 느낌이고 형체적인 존재가 사라졌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아내를 생각하고 아내도 나를 생각했으며 상대방을 위해 생각했다. 색욕심은 아주 미약하게 변했고 심지어 그런 생각조차 더러워 보였다. 우리가 함께 있는 대법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높은 경지의 행복을 가져다준 느낌이었고 삶은 정말로 아름다워졌다.
대도무형의 법리는 우리 수련의 각 방면에 있는데, 우리가 일단 형식을 만들면 마음 닦는 것을 소홀히 하고 극단적으로 가기 쉬우며, ‘대도무형’ 법리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우리가 중생을 구하는 일과 법을 실증하는 항목을 할 때, 우리가 하는 일과 항목 그 자체를 너무 중하게 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닦아서 제고하는 것을 소홀히 하면 ‘대도무형’의 대법 수련의 길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修在自己),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功在師父)”[2]이고, 진정으로 중생을 구하는 것과 법을 실증하는 것은 사부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자신을 제고하고 대법에 동화할 뿐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시사: ‘홍음6-누가 이치를 알리오’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23년 7월 2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3/7/22/46318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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