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베이징 대법제자 퉁신(童欣)
[밍후이왕] 올해 7월 20일은 중국 공산당(중공)이 대법을 박해한 지 24주년 되는 날이다. 붓을 들자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20여 년의 정법 수련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겪었으며 쓰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말도 많지만, 한마디로 “자비로우신 사부님의 고도에 감사드립니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정법입니다! 세계는 진선인(真·善·忍)이 필요합니다!”이다.
오늘 나는 1999년 ‘7·20’ 사악한 박해가 시작된 후 3개월 동안 직접 겪은 일을 써서 역사에 남기고 은사(恩師)의 자비로움과 파룬따파의 위대함을 증명하겠다.
1. 1999년 ‘7·20’, 이틀 연속 온 가족이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
1999년 4월 25일, 우리 부부는 중난하이(中南海) 평화 청원에 참여했다. 몸과 마음이 대법에서 더욱 정화되었음을 몸소 체험한 우리는 대법의 더없는 위력과 위대함을 느꼈다. 돌아온 후 우리 지역에서는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1999년 6월 13일, 중앙 두 판공청(중공 중앙 판공청과 국무원 판공청)에서 발행한 통지를 보고 더욱 안심했으며 1999년 7월 22일까지 예전대로 아침 연공을 했다.
사실 ‘610’이 성립된 이후 사악한 중공은 이미 칼을 갈았다. 1999년 6월 21일, ‘인민일보’는 ‘과학을 숭상하고 미신을 타파한다.’라는 시리즈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나는 우연히 1999년 7월 5일 자 ‘시리즈 3’을 보았는데 글에서 사당(邪黨, 공산당)이 ‘무신론’을 강조하자 경계심을 불러일으킨 나는 말속에 또 다른 뜻이 들어 있음을 느꼈다. 1999년 7월 13일, ‘시리즈 4’에서 파룬궁을 겨냥했음을 재빨리 깨닫게 되었다. 나는 즉시 ‘인민일보’에 편지를 써서 파룬궁이 개인과 사회에 모두 유익하고 해롭지 않기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파룬궁을 헐뜯지 말라고 설명했다.
1999년 7월 21일 아침, 단체 연공할 때 정부가 파룬궁 수련 금지를 선포한다고 하기에 모두 서둘러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아내, 어머니, 다섯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있는 형수와 함께 곧바로 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달려가 그런 일이 발생함을 미리 막을 수 있기를 바랐다.
우리는 먼저 톈안먼(天安門)에 도착했다. 근처에 많은 대법제자가 있었는데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조용하고 엄숙한 표정과 온건한 걸음걸이를 보면 서로 물어볼 필요 없이 모두 수련생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장안(長安) 거리 남쪽의 통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보면 아주 조용한 중난하이 정문 앞에 양복 입은 젊은 무장경찰이 10m가량씩 떨어져 꼿꼿이 서 있었다. 우리는 푸유(府右) 거리까지 갔다가 다시 서쪽으로 시단(西單) 교차로에 이르렀다. 이렇게 묵묵히 조용히 걸어갔는데 서쪽으로 향하는 인파도 있고 동쪽으로 향하는 인파도 있었다. 당시 정말 신성하기로 거대한 파룬이 톈안먼, 중난하이 사악의 중심을 둘러싸고 돌고 있음을 나는 느꼈다. 바른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끊임없이 돌고 있었다. 대법제자는 자비로운 발걸음으로 중생을 파멸시키는 사악의 큰 박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아내고 있었다. 우리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다시 남쪽에서 북쪽으로, 그리고 다시 반대로 이렇게 오후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집에 돌아간 후 평소와 같이 저녁 단체 연공을 했다. 밤 11~12시쯤 어느 여 수련생이 우리 집에 와서 상황을 물었고 우리는 내일 여전히 베이징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련생을 보내고 우리는 잠을 잤다. 뜻밖에 우리 집은 이미 감시당하고 있었고 여 수련생이 문을 나선 후 파출소에 불법으로 하룻밤을 구금당했다. 그녀는 매우 확고한 의지로 경찰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나중에 이 일을 알았다. 여 수련생과 그녀의 남편, 이 어린 부부는 타지에서 임시로 우리 이곳에 거주했고 우리는 사이좋게 지냈다. 그들은 음악인 그룹이었다. 20여 년이 지났으나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나중에 밍후이왕에서 여 수련생의 학문이 깊고 태도가 의젓한 젊은 남편이 노동 수용소에서 박해로 세상을 떠난 것을 알았는데 정말 가슴이 아팠다.
1999년 7월 22일, 일찍 일어나 우리 집 앞에 차 2대와 4명이 지키고 있음을 알았는데, 그중 경찰차 1대, 경찰 2명이 있었다. 연공 시간이 되어 나는 연공 장소로 갔는데 두 경찰은 막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따라왔다. 연공장에서 여전히 정상적으로 연공을 했고 교란이 없었다. 이것이 평화로운 수련 상황에서 우리의 마지막 단체 연공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내가 베이징에 가는 것을 막으려 하는 것이므로 나는 오늘 반드시 베이징에 가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곳에 서서 조용히 연공을 하고 있었고 두 경찰은 내가 매우 착실히 하고 있자 방심하고 옆에 있는 작은 가게로 갔다. 나는 이 틈에 몸을 돌려 뛰어서 떠났다. 나는 친척 집에 가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베이징으로 빨리 가라고 말하면서 저지당하지 않도록 따로따로 나오고 떠날 때 문도 잠그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봉쇄를 뚫고 베이징으로 달려가 다시 한번 사악의 박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저지하고 싶었다.
톈안먼 광장에 도착하자 전날과 마찬가지로 많은 대법제자가 바른쪽으로 회전하고 반대쪽으로 회전하는 두 갈래 인파를 이루며 조용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 톈안먼 앞에 중생을 멸망시키는 지옥의 불구덩이가 있음을 느낀 나는 대법을 지키고 중생을 구하는 데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않고 뛰어내릴 각오가 생겼다. 톈안먼에서 중난하이로 이어지는 신화문(新華門)이 있기에 장안 거리 북쪽 편도에는 행인이 한 명도 없었다. 알 수 없는 음침하고 소슬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중난하이를 지나면 장안 거리 양쪽을 모두 걸을 수 있어 우리는 장안 거리 북쪽을 따라 조용히 서쪽으로 걸어갔다.
오후가 되자 점점 사람이 더 많아졌다. 갑자기 많은 경찰과 대형 버스가 도착했고, 처음에는 많은 경찰이 긴 밧줄을 들고 길가의 수련생들을 둘러막았다. 이렇게 끌려갈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밧줄을 들고 침착하게 걸어 나왔다. 포위망이 점점 줄어들어 안에 갇힌 사람들은 강제로 대형 버스에 붙잡혀 올랐다. 이 부분 사람을 차에 다그쳐 붙잡아 태운 후, 다시 옆으로 한 바퀴 둘러막고 다시 붙잡아 차에 태운 다음, 다시 한 바퀴 둘러막고 붙잡아 태웠다. 당시 장안 거리의 서쪽 구간 북쪽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수많은 대법제자가 있었기에 잡히려 하지 않는 수련생은 길 건너와 양쪽으로 다그쳐 걸었다.
내가 사람을 잡는 곳을 떠나 서쪽으로 가다가 길목에서 공교롭게도 아들을 데리고 택시에서 내리는 아내를 만났는데 그들은 택시를 타고 왔다. 길목의 북동쪽 모퉁이에 KFC 가게가 있어,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가게에 들어서자 깜짝 놀랐다. 위장복을 입은 사람이 꼼짝하지 않고 꼿꼿이 서 있기에 가짜인 줄 알았더니, 실제 사람이 총을 메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자 나는 창가에 다가가 밖을 보았는데,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고 그때 은근히 놀랐다. 이 사악한 당이 사람을 쏠 준비가 되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내가 본 장안 거리 양쪽은 처음에 사람을 잡을 때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고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저쪽에서 계속 사람을 붙잡았고 잡히지 않으려는 많은 사람이 서쪽으로 갔는데 나중에 공터에 많은 수련생이 모였다. 여기서 마침내 예전에 잘 알고 있던 수련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둥청(東城) 보도원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먼저 돌아가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고 대처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먼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내는 자전거를 타고 나왔는데, 택시를 탈 때 친절한 운전기사가 자전거를 베이징으로 실어주었다. 나는 그들을 버스에 태우고 수십km를 혼자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오후부터 사당(邪黨, 공산당)의 모든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악랄한 먹칠 비방, 기만 선전을 전면적으로 시작했다. 유례가 없는 천지를 뒤덮는 사악의 대박해가 시작되었음을 저녁이 되어서야 알았다!
2. 1999년 7, 8, 9월 동안, 여러 차례의 불법 소환과 교란 속에서 확고히 수련
1999년 7월 말, 지역 파출소에서 불법적으로 나를 소환하여 파룬궁 수련 상황을 조사했다. 나는 그에게 수련 후, 심신 이익을 본 사실을 설명하고 대법이 우리 지역에 널리 전해진 정황을 소개했다. 그는 원래 보도원이었던 내가 지금은 아니라는 것을 듣고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이것이 바로 대법의 순수하고 올바른 것이며 관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므로 보도원이 되지 않아도 똑같이 수련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듣고 있던 그는 매우 놀라워하며 뜻밖이라고 여겼다.
마지막에 그는 “파룬궁을 연마하고 죽은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당신들이 수집한 현지 사례 몇 가지에 관해 모두 어떻게 된 일인지 저는 잘 알고 있어요. 그들은 모두 대법에서 이익을 얻었고, 그들의 죽음은 수련과 전혀 관련이 없어요. 당시 그들 가족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대법제자들의 따뜻한 도움에 매우 존경하고 감사했어요.”라고 말했다. 그가 두 사람을 언급하자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면서 사당이 그를 해친 독을 제거해 버렸다.
1999년 8월, 지방 공안국 정치보위과 경찰이 나를 또 파출소로 불법 소환했다. 정치보위과 사람들은 이쪽은 나를 지켜보고, 저쪽은 정신없이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데, 무엇을 조사하고 있는지 몰랐다. 결국 파출소 부소장은 히스테리 하게 고함지르며 파룬궁을 다시 연마하면 어떠어떠하게 될 거라며 위협했다. 그의 이성을 잃은 광기 어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1999년 9월, 개학한 후 어느 날 학교에서 수업하고 있었는데, 지도자가 교장실로 불렀다. 국가안전국에서 왔다고 자칭하는 사람이 나를 조사하러 와서 내가 수련생의 집에 파룬궁 자료를 보냈다고 했다. 지난 두 달 동안 방학 기간에 발생한 일은 모두 학교와는 무관하다. 이번은 박해 후 처음으로 사악이 직장에 와서 교란했고, 게다가 안전국이라 매우 심각해 보였다. 교장 선생님은 매우 친절하고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확고히 수련하는 나를 이해하고 지지해 주었는데, 이번부터는 나를 위해 손에 땀을 쥐기 시작했다.
3. 1999년 10월 3일 오전, 공원에서 단체 연공을 하며 대법을 실증하다
1999년 10월 3일, 나는 직장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다. 오전에 한 노수련생이 찾아와 철제 난간 대문을 사이에 두고 오늘 공원에서 단체 연공을 하는데, 내가 모를까 봐 알려 주러 왔다고 말하고는 먼저 갔다. 나는 듣고 매우 기뻤다. 이것은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경비 아저씨에게 나갔다 오겠으니 신경을 써 달라고 부탁하고서 바로 달려갔다.
도시 중심 공원의 정문 밖은 우리 지역 최초의 가장 큰 연공 장소이며 박해 전 매주 일요일 오전이면 수백 명의 수련생이 거기에서 법을 널리 전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연공 음악이 울리고 모두가 이미 연공을 시작했는데, 대략 4~5줄, 10여 열 정도였다. 첫 번째 줄 맨 오른쪽에 마침 빈 자리가 하나 있는 것을 보고 내게 남겨진 것으로 생각하며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사악한 박해 속에서 당당하게 공원에 가서 단체로 연공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매우 상쾌했다. 조금도 두렵지 않고 마음도 정말 고요했다. 빠오룬(抱輪)을 할 때 자신이 정말 비할 바 없이 크다고 느껴졌다. 연공을 마친 후,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겨를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돌아갔다.
저녁에 먼저 주민위원회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소란을 피웠으며 나중에 파출소 사람이 나를 파출소로 데려갔고 그날 밤 바로 구치소로 납치되었다.
4. 1999년 10월 30일, 불법으로 형사 구류 당한 한 달간 대법의 아름다움을 실증
새벽 1시가 넘어서 나는 구치소로 보내졌다. 감방에 들어갔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고 있었기에 나는 다들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 밤새 서 있었다. 그곳에 서서 중난하이로 청원하러 갔을 때 온종일 서 있어도 힘들지 않은 신기함을 생각하며 구치소에서도 대법제자의 풍모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사부님을 떠올렸다. 사부님은 업력이 없음에도 인간 세상에서 사악에게 중상 비방과 심지어 불법 지명 수배까지 당해야 하는 것은 제자들과 중생을 위해 감당하신 것이다. 대법 사부님의 진수 제자로서 구치소에 들어간 것이 뭐가 두려운가? 그때 나는 우뚝 선 것 같았고, 앞에는 지옥 같은 검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곳에 많은 마귀가 쟁기를 들고 아우성치며 앞으로 한꺼번에 밀려 나오고 있었다. 내가 사부님 은혜에 감사하는 순간, 정말 악마는 뿔뿔이 흩어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단지 주변의 모든 어두운 고난을 뛰어넘은 나만 우뚝 솟아 있었다.
다음날 간수소에서 큰 지도자가 시찰하러 온다고 했다. 저녁에 많은 사람이 왔는데, 당시 시 정법위원회 서기가 와서 밤새 직접 이 사건을 감독했는데, 베이징에서 공개적으로 단체 연공을 한 첫 사례라고 했다. 1999년 10월 4일, 밍후이왕은 중국 소식을 보도하며 이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오전 9시 정각, 베이징의 한 지역에서 50명 이상의 대법 수련생이 단체로 홍법(弘法) 연공을 했는데 모두 매우 온화한 마음가짐이었고 그 에너지 마당도 매우 상서로웠다. 연공하는 동안 누군가 방해와 소란을 피웠지만, 여러 사람들은 매우 꿋꿋이 연공을 마쳤다. 연공을 마친 후 경찰차가 도착했고 7~8명이 잡혀갔다. 지금 중국의 많은 수련생은 단체 연공과 법공부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남긴 수련 형식이므로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연공을 마치자 경찰이 도착했기에 수련생들은 이미 흩어져 떠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일부 수련생을 쫓아가 붙잡았다. 저녁에 나를 붙잡았을 때, 그들은 또 하나의 ‘큰 보스’를 잡았다며 매우 기뻐했다. 밖에 있는 수련생들도 정말 잘했다. 일주일 후, 또 한 무리의 수련생이 나와서 연공을 하다가 잡혔고, 또 한 주가 지나자 한 무리의 수련생들이 다시 연공하러 나왔다고 한다. 사당의 개념으로 보면 ‘보스’가 잡혔으니 아래 사람들은 당연히 두려워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대법은 보스가 없고 오직 진수 제자들뿐이기에 완전히 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대부분 수련생은 불법 행정 구류 15일 만에 집으로 돌아갔고, 우리 5명은 ‘조직자’로 여겨 불법 형사 구류를 당했다. 당시 밖의 가족들은 내가 이번에 최소 7년에서 10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하이난(海南)성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단체 연공을 한 대법제자에게 최대 10년 이상의 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우리 지역의 대법제자들은 전체적으로 매우 바르게 행동했고, 수련생들은 “앞사람이 돌진하면 뒷사람이 바싹 따라” 누가 “조직자”라고 말할 수 없기에 우리는 한 달 만에 모두 나왔다. 이것은 대법의 신비로운 위엄을 구현한 것인데 그 근본 원인은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큰 업력을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대법제자의 많은 친지가 대법을 이해하고, 대법제자를 지지하며, 게다가 현지 공안, 검찰, 법원의 사람들은 모두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중생들도 사실 대법에 대해 범죄를 저지르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악한 장(江) 씨 마귀 집단의 박해 정책은 지방에서 보이콧되고 소극적으로 취급되었다.
또 한 가지 신기한 일이 있었는데 새로 구치소에 들어온 사람이 구타당하는 일이 다반사라는 것을 많은 사람은 알고 있다. 박해 후 많은 친지가 우리에게 연마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이유 중 하나는 구치소에 들어가면 매를 맞는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 달 전에 어떤 범인이 맞아 병원에 입원했는데 구치소에서 책임 추궁을 피하고 더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때리는 것을 금지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이 ‘좋은 일’은 때마침 우리 대법제자들이 만났으니 모든 것이 다 배치된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지 사악이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 밤 심문을 하는데 예심(預審) 관계자가 파룬궁에 대해 정말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나는 그들에게 대법의 아름다움과 직접 경험한 베이징 텔레비전 방송국과 중난하이로 청원하러 간 감동적인 장면을 들려주었다. 정말 놀란 그는 문을 나서자마자 동료들과 기뻐하며 말했다. “그는 중난하이와 방송국까지 갔었어요!” 얘기 도중에, 그들은 서둘러 가야 한다며 또 파룬궁을 실은 차가 몇 대 더 왔으니 또 밤새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 당시 외지에서 많은 수련생이 베이징에 청원하러 왔고, 도시의 구치소에 모두 가둬 둘 수 없어 교외로 보냈다. 외지의 대법제자 중 일부는 이곳에서 큰 고통을 겪었지만, 또한 엄청난 대가를 치르며 우리 지역 구치소의 경찰과 죄수들에게 많은 진상을 알려 주었다. 정말 전례 없는 대단한 자비로운 구도였다!
구치소에 있던 한 달 동안 감방의 재소자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도 파룬궁을 수련하는 ‘선생님'(나의 직업)을 존중했다. 점차 모든 사람이 진상을 알게 되었고 대법의 순수함을 알게 되었다. 대법 에너지장의 자비로운 작용으로 감방 전체가 점점 더 평화로워졌다. 정말 불광(佛光)이 널리 비치고 있었다!
5. 맺음말: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나를 구해주시고, 인류를 구해주시며, 온 우주를 구해주셨다.
사악한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마귀 두목은 “3개월 안에 파룬궁을 없애라”라고 건방지게 아우성쳤지만,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파룬따파는 피비린내 나는 홍색 공포 속에서 우뚝 솟아 영원한 불멸의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파룬따파의 순수한 바른 에너지는 우주의 모든 사악한 요소를 제거하고 본성이 살아있는 모든 중생을 구하고 있다. 여기까지 쓰니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는 운이 좋게도 사부님께서 법정건곤(法正乾坤)의 그 전무후무한, 유례없는 정법의 역사에서 직접 경험한 증인으로 된 것에 대해 더없이 자랑스럽다! 그것은 우리 생명의 영원한 영광이다!
1999년 ‘7·20’을 돌이켜보면 상전벽해, 우주와 인간 세상은 급변했다. 2022년 11월, 큰 박해의 주범 장쩌민은 끝장났다. 올해 1월과 4월에 사부님은 세인에게 보내는 두 편의 경문을 연달아 발표하셨는데, 온 세상이 무한한 자비로 충만 되었다. 나는 우리의 수련환경도 끊임없이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대법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다만 점점 더 대법의 진정한 위엄을 드러내고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사부님은 변한 적이 없다. 나는 정말 갈수록 사부님의 거대한 덕과 크나큰 은혜의 끝없는 장대함을 느낀다!
사람 중에서 나는 존경받던 교사로부터 감옥에 갇힌 ‘노동개조범’으로 지위가 바뀌었으나, 가장 기쁜 것이 대법제자의 신분은 변한 적 없다는 점이다. 나는 법을 믿고 법을 고수하는 마음은 변한 적이 없다.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인도해 주시며, 손을 잡으시고 한 걸음 한 걸음 혼자서는 도저히 지나갈 수 없는 ‘7·20’ 이런 큰 재난을 헤쳐 나가게 하셨다!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나를 구해주셨고, 모든 인류와 우주를 구해주셨다!
올해는 사악이 대법을 박해한 지 24년이 되는 해이자 파룬따파가 인간 세상에 널리 전해진 지 31주년이 되는 해이다. 다행히도 7월 10일까지 중국 공산당의 사악한 공산당, 공청단, 소선대 조직에서 탈퇴한 용사는 4억 1500만 명이 넘었고, 하늘이 공산당을 멸망시키고, 붉은 벽이 무너지고, 붉은 왕조가 수시로 전복될 수 있게 되었다. 27년 동안 수련한 노대법제자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만고에 만날 수 없는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기억하며,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하길 바란다!
자비롭고 위대한 사부님 감사합니다!
원문발표: 2023년 7월 1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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