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법공부 시작 전에 한 수련생이 나에게 “아버님이 돌아가신 달에 월급이 나왔나요?”라고 물으면서 이런 경우 월급 지급과 관련된 규정에 관해 설명해 줬다. 내가 “나왔어요. 월급을 받고 다음 날 돌아가셨으니까요”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그럼 운이 좋았네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한 달 치 월급을 생각해서 뭘 하겠어요. 그간 아버지께 잘해드리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릴 뿐이에요.”
그 후 나는 경각심을 느꼈다. “운이 좋았네요!” 이건 속인의 말 아닌가? 이번에 나는 마침내 그것을 틀어잡았고 동시에 우리 대법 수련은 속인 중에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는 속인의 환경에서 명리정(名·利·情)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명명백백하게 사람 마음에서 벗어나 심성을 제고하라고 하셨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수(真修)제자여, 내가 당신에게 가르친 것은 수불수도(修佛修道)하는 법(法)이었건만, 당신들은 속인 중의 이익이 손실됨으로 인해 오히려 나에게 괴롭다고 하소연할 뿐, 자신이 속인 중의 집착심을 내려놓지 못함에 대해서는 괴로워하지 않는데, 이것이 수련인가? 속인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이것은 초상적인 사람으로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관이다. 진수제자는 사람마다 모두 넘어야 하는바, 이것이 수련자와 속인의 경계선이다.”[1]
사실, 우리 평소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은 다 수련자와 속인의 경계선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가 수련자의 경계선을 지킬 때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구세력의 배치로 잘못 들어가게 되고, 제때 깨닫지 못하면 난관을 지나는 중에 씨름하거나 떨어지게 된다.
내가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나에게 큰 교란이 된 것은 구(舊)우주의 수련 이념이었다. 나는 이런 구우주 수련 이념에 따라 개인 수련을 해서 처음에는 비약적으로 제고했고 수련의 길에서 거의 장애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또 다른 일정한 사고 패턴이나 일종 자아를 형성했다. 그래서 나는 정법 수련에 대한 요구에 완전히 동화하지 못했고, 이는 구세력이 교란할 수 있는 약점이 되어 큰 시행착오를 겪었다.
개인 수련과 정법 수련의 관념이 충돌하면서 나는 대법 수련만이 정각(正覺), 대도(大道)이며, 사람마음을 직지인심(直指人心)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진정으로 집착을 없애고 사람에서 벗어나 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것은 가장 어려운 것이다. ‘명명백백함’에 있어서나, 주이스(主意識)의 인식에 있어서, 특히 내가 박해를 반대하는 길에서 쉽게 익숙해지자 구세력도 은연중에 나에게 ‘또 다른 자아’를 심었다. 그것은 내가 자신의 집착을 의식하거나 깨닫기 어렵게 했다. 이런 집착은 이미 한 가지 관념을 형성하고 ‘자아’로 전환됐기에 그것들은 내 공간장 안에 숨을 수 있었고 중요한 순간에 내 의지를 소멸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사회에서 대부분 속인의 사고방식으로 이야기한다. 우리는 사람을 구해야 하므로 때로는 속인의 집착에 따라 말하는데, 이는 때때로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속인과 혼동하게 한다. 만약 우리가 의식적으로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면 따뜻한 물에 개구리를 삶듯이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지만 때는 이미 늦는다. 집착을 떨쳐버려야만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최근 나는 종종 이유 없이 매우 피곤하거나 졸렸다. 점차 나는 이것이 속인 생활에서 우리가 소모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왜냐하면 우리가 접촉하고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속인의 물질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신의 일면’을 점점 격리하거나 그것과 뒤섞인다. 그래서 졸음, 피로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막을 수 있을까? 바로 법을 배우는 것이다. 끊임없이 법을 배우는 중에서 우리는 이런 부패한 물질을 인식하고 제거하며, 이로써 수련자의 경계선을 파악하고 사람 중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할 수 있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착실한 수련[實修]은 평소의 일사일념 속에서 자신의 언행을 바로잡고 수련인의 경계선을 끊임없이 지키는 것이다. 내가 그 수련생의 사람마음을 틀어잡으면서, 수련인의 경계선을 지켰고, 속인의 것을 반복하거나 강화하지 않았으며, 나 자신을 속인과 혼동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바로 배후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사실 평소에도 우리는 대법으로 자신의 언행을 바로잡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평소에 모두 대법에 따라 할 수 있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수련생이 다시 법을 배우러 왔을 때 나는 그녀에게 이 일을 이야기했다. 그 수련생은 오성이 매우 좋아서 내 말을 듣고 “네, 속인의 마음입니다”라고 한 다음에 잠시 생각한 후 “이미 자연스럽게 형성됐네요”라고 말했다. 그날 나도 그 수련생에게 생활에 대한 고민을 말했고 그녀는 거기에 대한 조언을 해준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을 정상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수련생들은 그런 말에도 속인의 마음이 있다고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정확히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수련생들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그런 말은 원래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이라, 법공부할 때 해서는 더욱 안 됐다. 다시 생각해보니, 만약 우리가 평소에 이렇게 일사일념에서 명석하게 문제를 볼 수 있다면 우리의 법학습 환경을 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수련도 사실 어렵지 않다. 우리가 자각적으로 대법에서 용련(熔煉)할 수 있다면 되돌아 올라갈 수 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정진요지-진수(真修)’
원문발표: 2023년 7월 1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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