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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에서 당문화를 없애다

글/ 중국 대법제자 산애(山艾)

[밍후이왕] 나는 자신이 당문화(黨文化: 공산당 문화)에 심하게 물든 것을 알고 있다. 10여 년 대법 수련에서 당문화를 없애는 데 주의했지만 여전히 당문화에 물든 관념, 습관 등이 일상생활에서 아직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난다. 당문화는 꼭 닦아야 할 요소로 많은 집착을 불러온다.

속인 시절 나는 말투가 딱딱하고 선하지 않았으며 과격한 어휘를 사용했고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수련 후 말을 곱게 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많이 바꿨으며 당문화의 ‘투쟁’적인 말투도 없앴다. 말하는 방식과 어투가 많이 부드러워져 나 자신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속으로 남과 가족을 평가하고, 특히 당문화가 심한 남편이 말투가 선하지 않고 그의 반문하는 어투는 타당하지 않다고 여겼다. 사실 나는 남편의 흠을 찾고 밖으로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춰보지 않았다. 그의 표현을 보면서 안으로 찾고 자신을 수련하는 기회로 삼지 않았다.

남편은 지나치게 자신의 건강에 신경 쓴다. 때때로 자신의 몸이 어떻다고 한다. 듣기 싫었던 나는 남편과 반대로 말하며 그를 일깨워줬다. 남편은 퇴직 전 국영기업에서 여러 해 동안 최고책임자로 있었기에 사당(邪黨: 공산당)에 많이 세뇌됐고 남이 자신을 질책하면 싫어했다. 내가 자신을 질책한다고 여긴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련에서 제고됨에 따라 또 ‘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九評共産黨)’,‘해체당문화(解體黨文化)’ 시리즈를 반복해서 듣고 우리 사이에 주요 문제는 내게 있음을 인식했다. 나는 남편과 소통해야 하고 자발적으로 그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며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고, 말하는 속도도 느리게 했으며 그와 반대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남편도 나의 선한 마음을 느꼈다. “이전에 당신은 말을 제대로 하지 않고 투덜대고 남을 질책했기에 당신과 말하고 싶지 않았지. 지금은 당신이 말을 제대로 하니 나도 내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됐어.” 그날 남편은 말을 많이 했다. 몇십 년간 나는 줄곧 그가 당문화가 심하고 말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로 남편은 내가 말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에 대한 내 평가가 그대로 내 것이 되어 돌아왔다.

남의 표현을 보고 마땅히 안으로 자신을 찾아야 수련인이다!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진선인(真·善·忍)’에 점차 동화하는 수련인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언행에서 선(善)을 체현해야 법을 실증하는 작용을 할 수 있다.

나는 말투에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 말만 하면 목소리가 높아진다. 이것은 당문화의 쟁투심이고 소리가 크면 통쾌하다고 느낀다. 두 번째는 말하는 속도다. 때로 주변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툭툭 말을 던진다. 세 번째는 말투가 딱딱해 남이 듣기에 편안하지 않다. 또 남의 말을 끊어버리거나 가로챈다.

웃을 때도 나는 문제가 있다. 웃음은 그 사람의 교양을 직접 엿볼 수 있다. 때때로 나는 크게 웃는다. 이것은 자신의 감정을 방임한 것이고 남을 아랑곳하지 않은 것으로 고상하지 않다. 전통문화에서 옛사람은 “여성은 웃어도 이를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데, 크게 웃으면 고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급해 보인다”라고 말했다.

며칠 전 한 친척이 6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우리집에 놀러 왔다. 아기가 귀여워 내가 좀 안아보았다. 아주 작은 일로 내가 너무 크게 웃어 아기가 놀랐다. 아기가 말할 줄 알았다면 이렇게 말했을 게 분명하다. “너무너무 무서워요.” 일상생활 속 작은 일들에서 몇십 년간 당문화로 변이된 언행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마땅히 모두 닦아 버려야 한다.

말하는 방식, 말투는 직접 진상을 알리는데도 영향을 미친다. 대법제자는 반드시 진상을 알리고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며 서약을 이행해야 한다. 진상을 알리는 중에 대법제자는 외관상 옷차림이 단정하고, 표정이 자비롭고, 말투가 겸손하고 부드러워야 사람을 구하는 목적에 이를 수 있다.

이 점에서 나는 체득이 있다. 2022년 봄, 나와 한 수련생이 함께 진상을 알리러 나갔다. 수련생은 세인에게 말을 건네고 진상을 알릴 때 태도가 온화하고 친밀감이 있었다. 말투가 부드럽고 ‘선(善)’이 묻어나 상대방도 자신을 위한다는 선의를 느낄 수 있어 진상을 알리는 효과가 좋았다. 상대방 태도가 어쨌든 그 수련생은 그들의 감정에 영향받지 않고 사람을 구했다. 하지만 나는 이 점을 해내지 못했는데 그 수련생과 격차가 컸다. 이것은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심성이 그 위치까지 수련되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심각한 당문화 표현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원망이다. 50년대 태어난 사람은 어려서부터 사당이 주입한 변이된 관념인 ‘투쟁’과 ‘원한’이 어디든 있다. 지금 중국은 중공(중국공산당)에 의해 나라가 나라답지 않다. ‘공산주의의 최종목적’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의 본질은 악령이다. 그것은 원한과 저층 공간의 각종 부패물질로 구성됐다.”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생명은 도덕성이 떨어짐에 따라 서로를 줄곧 증오할 것이고 결국 마지막엔 소멸되고 만다. 수련인은 진선인의 요구에 따라 자신에게 요구해야 하고 갈등 앞에서, 이익 앞에서, 일사일념에서 대법으로 가늠해야 하고 “원망을 품지 말라 선량함을 지키라”[1]를 해내야 한다.

사부님의 가르침 대로 해야 하고 사부님 법으로 시시각각 자신을 일깨워야 한다. 원망심이 나오면 제때 붙잡아 닦아버려야 한다. 나는 일반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녀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와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자신이 이해한 법으로 그녀를 일깨워줬다.

그녀는 말했다. “몇 년간 언니가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 누구에게든 모두 그렇게 너그러워?” 그녀의 평가에 나는 기분이 좋았다. 사실 좋은 말을 듣기 좋아하는 마음이 폭로된 것이다. 하지만 속으로 알고 있다. 나는 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렇지 않다. 단지 입으로 말하지 않았지 속으로 원망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때때로 사리를 구분 못 한다고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때로는 감사할 줄 모른다고 후배를 원망한다. 이런 생각이 나오면 붙잡아 닦아 버린다. 반복적으로 없애서 스스로 원망심을 잘 없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게 아주 큰 영향을 끼친 한 가지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내가 일부러 남편에게 선량, 관용, 양보, 원망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는 화제를 일반인 각도에서 말했다. 나는 신이 나서 말했는데 여기에 내 과시심이 숨어 있었다. 가정에서 각 방면의 관계를 잘 처리했고 내가 얼마나 너그러운지 당신은 승인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말을 잘해 남편이 몇 마디 맞장구를 쳐주리라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남편은 찬물을 끼얹었다. “그런데 당신은 공산당을 미워하고 장쩌민, 마오쩌둥을 이를 갈며 미워하는데 잘 이해되지 않네.” 나는 좀 풀이 죽었다. ‘남편은 왜 이런 생각이 있지? 나는 그들을 미워하긴 하지만 이를 갈 정도는 아닌데.’ 나는 할 수 없이 “저는 잘 모르겠네요”라고 말하며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은 날 사고하게 했다. 평소 사당에 대한 나의 증오가 그의 인상에 심각하게 남았음이 드러났다! 내 말투와 표정은 증오와 원망이 서려 있었다. 중공은 ‘증오’로 나라를 세우고 훔친 후 사람들에게 신을 믿지 말고 전통을 믿지 못하게 하며 모든 아름다움을 증오하게 하고,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도록 주입했고, 중국인을 원한 속에 잠기게 했다.

대법제자는 여기에서 뛰쳐나와야 한다. 구세력이 이런 ‘원한’으로 사람을 사악하게 만들어 대법을 박해하려 했으나, 사부님께서는 장계취계(將計就計: 상대편의 계략을 역이용함)해 대법제자를 성취시키시고 있다. 대법제자는 사부님 말씀에 따라야 한다. 사당에 납치된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원망심을 품으면 사람을 구할 수 없다. 마음속에 자비심이 있어야 사람을 구할 수 있다.

사당을 원망하고 우두머리를 미워하는 것도 ‘정(情)’의 표현이고 ‘정’ 역시 집착심이다. 법에서 우리는 알고 있는데 고기를 먹는 마음을 제거하지 못해도 원만하지 못한다. 원망심을 가진 채 어떻게 원만할 수 있는가? 원망심을 제거하고 선을 닦아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일사일념에서 자신을 엄격하게 대해야 하고 대법으로 가늠해야 하며 법에 부합되지 않는 요소를 닦아 버려야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시사(詩詞): ‘홍음4-신성한 노래’

 

원문발표: 2023년 6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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