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미국 화인 수련생
[밍후이왕] 내 고향은 작은 현(縣) 소재지지만 신화와 고사가 많이 전해져 내려오는 영적인 고장이라 점치기가 성업을 이뤘다. 나도 어릴 때부터 여러 차례 점을 봤는데 점쟁이들은 하나 같이 살아가는 데는 괜찮지만 유독 학업만은 순탄하지 않다고 했다. 실제로 그랬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은 언제나 반에서 꼴찌였고, 가까스로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고향에 고등학교가 없어서 진학하지 못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가족의 권유로 성인대학(역주: 한국의 평생교육시설에 해당)에 입학했다. 1년 후 가족과 함께 미국 이민 길에 올라 미국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 전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결국 졸업하지 못하게 됐다. 이렇게 내 학업이 끝나갈 무렵, 대법이 내 곁에 나타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첫 번째 전환점은 대법에 대한 나의 태도 변화에서 비롯됐다. 교통사고로 인한 경추신경의 압박으로 심한 두통과 현기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고, 변형된 척추 때문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격주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으므로 삶의 희망을 잃었다. 의사는 내가 젊었기에 망정이지 조금 더 나이가 들었다면 하반신이 마비됐을 거라고 했다. 심한 뇌진탕 증세까지 있어서 시력과 기억력도 급격히 나빠졌고,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으며, 성격이 조급했고 우울증 증세까지 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업을 계속하기가 불가능했으므로 몇 년간 집에서 흐리멍덩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정신을 차려 GED 시험(미국 고졸 학력 검정고시)을 준비했다. 그러나 시험을 4번씩이나 보고도 2~4점의 근소한 차이로 모두 떨어졌다.
그마저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아예 학업을 포기하려고 했던 2016년, 어머니가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중국공산당의 거짓말에 속으며 자란 나는 파룬따파에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기에 어머니의 수련을 끊임없이 비난하며 악담까지 했다. 그러다가 차츰 파룬궁의 진상을 알게 됐고 파룬궁을 모독하는 유언비어가 모두 중국공산당이 꾸며낸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대법제자들을 따라 진상 알리기 활동에 조금씩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그 후 어느 날 갑자기 GED 시험 점수가 150에서 145로 하향돼 합격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부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하늘에서 떡이 떨어진 것 같았다. 그 후 집에서 ‘전법륜(轉法輪)’을 읽자 교통사고 후유증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때 수련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 전환점은 대학 시절에 일어났다. 스스로 인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대학에 간 목적은 단순했다. 그냥 밖에 나가 다른 환경에서 걷고 활동하면서 교통사고 후유증을 말끔히 벗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부모님은 비교적 전통적인 분들인데, 특히 아버지는 미국 교육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셨고 또 학업에만 매몰되는 것도 바라지 않으셨다. 대신 아버지는 나의 취미를 적극 지지해주셨고 학교에 휴학 신청서를 제출해 여행을 다니게 하셨다.
대학에 다닐 때도 성적은 매우 부진했다. GPA 4점 만점에 학부 졸업은 2.0 이상이어야 했지만 내 점수는 1.7에 불과해 학교에서 경고까지 받았다. 숙제는 잘했지만 시험만 보면 불합격이라 담당 교수도 의아해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내가 시험만 못 본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확실히 무슨 운명의 장벽을 느꼈다. 시험 문제의 답은 다 알고 있어서 풀 수 있었지만 막상 시험 때가 되면 풀지 못했다.
2017년 5월, 나는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수련을 시작할 때 비교적 감성적인 인식만 갖고 있었으므로 대법이 좋고, 진선인(真·善·忍)이 좋으며, 대법제자들이 좋다고만 느꼈다. 각지설법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사람은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당신은 다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당신이 학생이라면 당신은 학습을 잘해야 하고, 당신이 피고용인이라면 일을 잘 완성해야 한다.”[1] 나는 표준에 맞는 대법제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내 성적은 A였고 결국 GPA 3.3점으로 학사 공부를 마쳤다.
대학 졸업 후 더는 공부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세 번째 전환점이 조용히 다가왔다. 1년 전, 교사인 남편과 결혼 후 미시간주 디트로이트로 이사했는데 남편은 공부하기를 좋아해서 확실히 아는 것이 많았다. 백과사전이나 다름없는 풍부한 지식을 가진 남편으로부터 나는 천문학, 지리학 등 각종 지식을 습득하게 됐고 공부에 흥미를 느꼈다. 가장 큰 변화는 가치관의 변화였다.
미국에 이민 와서 작은 도시에서 한가롭게 노후를 보내는 부모님과 함께 살자 내 생활 리듬은 느려졌다. 부모님도 직장에 다니지 않게 됐고 나도 별로 할 일이 없어서 집에서 취미 삼아 수공예로 시간을 보냈으므로 사회와는 단절된 상태였다. 결혼 전에는 부모님이 모든 걸 해결해주셨고, 결혼 후에는 남편에 의지해 살았으므로 역시 바깥 사회에 대한 동경이나 개념이 없었기에 언젠가 바깥 사회를 접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시간으로 이사 온 후 상황이 달라졌다. 이곳 사람들은 나에게 “당신은 어떤 직종의 일자리는 찾지 못한다”, “어떤 전공을 했어야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등등의 말을 했다. 이런 상황이 내 지난 20여 년간의 한가로운 인식을 뒤집어 놓고 말았다.
한동안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서 그간 살아온 인생을 돌아봤는데 한가로이 논 것 외에 아무 것도 이룬 게 없었다. 그래서 ‘이제 내 인생은 끝났구나. 앞날이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이곳으로 이사 온 후 마땅한 집을 구하지 못해 아파트에 세 들어 살고, 환경적 제약으로 유일한 취미인 수공예도 할 수 없게 되자 몸과 마음이 힘들었고, 또 미시간의 추위 역시 남부 사람인 나에게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친구 A가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영국 명문대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간 쌓였던 감정이 폭발했다. 현실에 대한 불만, 적응하지 못하는 환경, 질투심, 쟁투심 등이 일순간에 폭발하면서 스스로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 전체가 날 짓누르는 것 같아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입을 크게 벌려 겨우 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결론을 내렸는데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전공을 바꿔 계속 공부할 거야. 그래야 20여 년간의 시간 낭비를 보충할 수 있어.’
처음 석사 공부를 시작한 것은 2021년 5월이었다. 남편은 내가 직장에 출근하면 틀림없이 괴롭힘을 당할 것이고, 집에만 있으면 답답해할 것으로 여겨 석사 공부를 권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어떤 학교에 진학할지, 어떤 전공을 택할지는 생각하지 않고 단지 내 전공인 문과만은 지망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 학교의 지원 마감일이 2022년 1월이어서 남편에게 “당신이 나 대신 신청해줘요. 전공은 문과만 아니면 돼요”라고 부탁한 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2021년 12월 중순, 친구 A가 영국으로 떠났다는 소식과 남편이 내 석사 지원서를 신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감정이 폭발했다. 질투심이 불타올라 어떻게 단번에 판을 뒤집을지 생각하면서 학교 순위에 강하게 집착했고, 공교롭게도 우리 지역에 30위권에 드는 대학이 있자 그 대학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촉박해서 12월 중하순 내에 어떻게 지원서를 준비할 것인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신청하려고 해도 추천서 등 각종 서류를 준비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설상가상으로 내 문과 GPA로는 본래의 전공을 바꿔 30위권 대학에 지원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나는 화가 치밀어 또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 전공을 불평했고 남편의 처사를 원망했다.
어느 날 법공부를 하다가 문득 내게 속하지 않는 것을 가지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인생 노정에는 원래 공부할 인연이 별로 없었는데도 사부님께서 자비롭게 내 몸을 회복시켜주시고, GED를 통해 대학 공부도 무사히 마치도록 해주셨다. 그런데도 나는 집착에 이끌려 사부님의 자비를 이용해 명성을 다툰 것이다. 결국 깨달은 후 완전히 내려놨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최후에 속인 중에서 형성된 관념이 사람을 지배하여 모든 것을 하고 있지만, 사람은 오히려 그들 자신이 한 것이라고 여긴다. 인간 자신은 그때 이미 매몰되고 휩싸여 아무런 작용도 일으키지 못하므로 전혀 인간 자신이 아니다. 현재 사회의 사람은 모두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그가 대단하다고 칭찬하며 이 사람은 쉽게 손해 보지 않고,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으며, 재주가 있고, 노련하다고 여긴다. 나보고 말하라면 그는 더없이 어리석다. 그는 이 한평생 그 자신이 살지 않고 다른 것에게 자신을 맡기고 대신해서 살게 했는데, 그의 신체는 다른 것에게 통제당하고 있다.”[2]
나는 웃으며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공부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관념에 이끌려 졸업장, 학위, 학교 순위 등에 집착하다니 정말 어리석었구나.’
냉정해진 후 모든 과정을 되돌아봤다. 줄곧 번잡한 것을 싫어하면서 사회와 접촉하고 싶지 않았고, 심지어 의도적으로 도피하기까지 했다. 도피할수록 사회와 마주하게 되면 무력감에 빠져 나만의 편안한 곳에 숨으려 했고, 편안하지 못한 곳에서는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싶어 강한 허영심을 드러냈는데, 이것이 바로 ‘사(私)’였다. 결국 이기심에 이끌려 자신을 잃었고 일반인들과 말다툼을 했으며,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았고, 그래도 가망이 없을 때는 교육환경을 탓했다. 또 ‘나에게 안정된 가정환경과 좋은 교육환경이 있었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질투심이라고 깨닫고 나니 억눌렸던 마음이 전부 사라졌다. 남편에게 진심으로 사과한 후 “앞으로 공부를 더 하고 싶으면 열심히 해서 스스로 해결할게요”라고 말했다.
2021년 12월 말, 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전공에서 1월 초에 학생모집 소개 모임이 있다는 통지를 받았다. 당시에는 공부하겠다던 생각을 완전히 접은 상태였지만 남편이 그 이메일을 발견하고 모임에 참석하라고 권했다. 참석하자 지원 마감일이 1월 15일로 공지됐지만 미국 현지 학생들은 8월까지 지원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남편의 격려와 협조로 신청 방법과 절차를 배우게 되면서 사회와 첫 접촉을 하게 됐다. 신청서를 작성할 때 다시 무력감이 밀려왔지만 잘 해내고 싶었다. 추천인을 찾아 소개장을 받을 때는 체면이 구겨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사부님의 도움으로 추천인들이 자발적으로 소개장을 작성해줬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2022년 2월 신청서를 제출했다. 원래 6~8주 후에 결과가 나올 예정이었지만 3월 초 합격 통지를 받았다. 나는 그 30위권에 드는 대학의 공학 계열 대학원에 합격했다.
수련 초기에 몇 명의 수련생이 있는 자리에서 무신론자 B에게 진상을 알렸던 기억이 난다. B는 대법제자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대법을 수련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신앙은 단지 정신적 문제인데 매우 어리석다며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순간 할 수 없었던 일,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이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살핌으로 하나하나 이루진 것들이 떠올라 울음이 나왔다. B에게 내가 직접 체험한 것들을 열거하자 그도 침묵했다.
비록 수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정진하지도 않았지만, 사부님께서 가장 좋은 것들을 대법제자에게 주셨음을 수없이 체득했다. 그러므로 이를 써서 수련생 여러분과 나누려 한다.
이상은 현 단계에서 체득한 것으로 법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으면 바로 잡아주시길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휴스턴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오스트레일리아법회 설법’
원문발표: 2023년 5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3/5/3/4515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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