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산둥성 대법제자
[밍후이왕] 저는 1997년에 법을 얻어 지금까지 26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수련 과정을 돌이켜보면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비틀거리며 걸어오면서 착실히 수련한 시간이 형편없이 적었습니다. 이유는 대법에 대해 명석한 인식이 없었고 대법을 정신적으로 의탁할 곳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 마음이 많고 무거웠으며, 자아가 강하고, 명성·돈·정(情)에 집착했습니다. 그중 수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라고 인식합니다.
집안에서 막내였던 저는 젊었을 때는 먹고 마시며 노는 것 외에 아무 일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로운 생활을 좋아하고 구속받는 것을 싫어해서 돈을 좀 벌면 진탕 먹고 마시며 저축에 대한 인식도 없었습니다. 전통적인 가정 관념도 없어 오랫동안 떠돌아다녔고 놀다 지쳐서야 가정을 꾸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33살에 결혼했고 큰 형이 결혼 자금을 대줬습니다.
큰형은 제 성격 때문에 제가 인생에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저는 큰형이 저를 어떻게 말하든지 개의치 않았습니다. 저는 원래 천마행공(天馬行空-천마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님)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고,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떤 일을 결심하면 누가 말려도 듣지 않았고 몇 번 쓴맛을 보지 않고는 절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큰누나와 조카가 동북 지역에서 돌아왔을 때 집을 구하지 못해 잠시 저와 함께 지냈습니다. 누나는 자주 “넌 이 집을 여관이라고 생각하는구나”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저는 회사에서 사무실과 직원 식당을 관리했는데 온종일 접대가 끊이지 않아 보통 한밤중에 곤드레만드레 취해 집으로 돌아왔고, 방에 들어오면 바로 잤습니다. 때로는 방에 구토했고 청소는 큰누나가 다해줬지만 저는 취해서 알지도 못했습니다.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수련 후, 저는 가족에게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줬으나 모두 받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모두 경시하거나 등한시했습니다. 저는 진상을 알리는 방식을 되돌아봤습니다. 제 말과 관념에는 모두 독선, 강요, 조급함, 내 말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등 당문화(黨文化: 공산당 문화)의 흔적이 있었기에 효과가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생각해봤습니다. ‘사부님께서 먼저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는데 좋은 사람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가족들이 자주 저에게 “너는 네 일만 중요하지”, “넌 말하기만 하면 성급해져”, “가족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구나”라고 했던 말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가족에게 무관심했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은 두 누나와 형이 있어서 그들의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또 수련 초기에 중공(중국공산당)의 박해를 받은 적이 있어서 가족들은 대법의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고, 이로 인해 진상을 알리기가 더욱 쉽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제가 너무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부님의 신우주(新宇宙)가 원하는 것은 타인을 위하는 생명입니다. 이기심과 이타심은 서로 대립되는 것인데 자아를 내려놓지 않고 어떻게 타인을 위할 수 있을까요? 이리저리 생각해보다 자신을 먼저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 큰형과 큰누나는 모두 외지에 있었기에 저는 이사해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같이 쇼핑, 힘든 일, 집안 청소를 도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광산에서 주는 약간의 위로금에 의지하다 보니 폐품을 주워서 파는 것에 집착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늘 그 돈이 자신의 노동으로 바꾸어 온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매번 어머니가 폐품을 파실 때마다 함께 갔습니다. 큰누나는 생활이 매우 어려웠고 저는 아직 결혼하지 않아서 집을 큰누나에게 양보했습니다. 큰누나의 딸이 대입 준비를 하고 있어서 저는 응시 원서 내는 것을 도왔고, 대학원 입학시험을 볼 때 시험을 치르는 도시까지 따라갔습니다. 큰형이 바쁠 때면 문서 정리를 도왔습니다.
가족 모임을 이용해 저는 가족들에게 전통문화를 알리고 선악과 윤회, 옮고 그름에 대한 분간, 육척항(六尺巷: 청나라 강희제 시기에 장씨와 오씨 집안이 서로 3척 너비만큼 땅을 양보해 6척 너비에 골목길이 생겼다는 이야기) 고사 등을 들려주며 그들의 무신론과 진화론 관념을 타파했습니다. 노력은 뜻있는 사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몇 년간의 노력으로 마침내 가족과의 거리를 좁혔고 가족은 제 변화를 보고 모두 기뻐했습니다. 이제 제가 진상을 알리면 가족들은 매우 쉽게 받아들입니다.
갓 피어난 ‘작은 꽃’이 타인을 위하는 마음을 수련해내다
2004년, L수련생(내 동창이기도 함)은 제가 있는 도시로 와 광고 디자인을 배우면서 우리집에 머물렀습니다. 당시 기술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고 진상자료 수요는 많았습니다. L은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그때 저는 임금이 높아서 5천 위안(약 94만 원)을 들여 컴퓨터 한 대를 사주고 또 초고속 인터넷을 설치해줬습니다. 이렇게 하면 L이 기술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법 일도 할 수 있었었습니다. 이렇게 한 송이 ‘작은 꽃’이 피어났습니다. L은 이 컴퓨터로 많은 컴퓨터 지식을 배웠고 서서히 우리 그곳의 기술 고수가 되어 현지 수련생들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줬습니다.
저도 L로부터 유지 보수기술을 배워 골목마다 다니며 비바람을 무릅쓰고 봉사했습니다. 때로는 L과 함께 기술을 연구하며 실험해본 후 기술 논단에 올려 더 많은 수련생이 혜택을 받게 했습니다. 다른 수련생을 잘 보조해주는 과정에서 저는 자아를 내려놓는 즐거움을 체험했고, 타인을 위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체득했습니다.
전염병 기간에 저는 두 지역을 오가며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A지역 수련생들은 매우 분산되어 있었고, 어떤 곳은 오토바이로 편도만 한두 시간이 걸렸습니다. 기계의 정상적인 작동을 보장하는 것이 저의 책임이어서 저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도중에 법을 외웠고, 어떤 일이 있어도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이 오토바이는 저와 함께 수만 킬로미터를 달렸습니다. 한 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 가게에 들렀습니다. 그는 오토바이에 다가와 이리저리 살펴보고 만져보더니 어떻게 그렇게 오래 달릴 수 있었느냐며 신기해했습니다. 저는 이 오토바이가 ‘신기(神器)’라고 했습니다.
제가 조금씩 바뀜에 따라 한 줄기 금빛 찬란한 길이 보였습니다. 자아를 내려놓을수록 자신이 얼마나 비천하고 보잘것없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안으로 찾을수록 법이 더욱 끝없고 위대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봤을 때 생명의 제고는 정말 얼마나 얻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노력을 들이고 얼마나 내려놓았는지, 얼마나 타인을 위했는지에 달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묵묵히 사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의 길에서 저는 반드시 수련생들과 잘 협력해 함께 잘 걷고, 반드시 무사무아(無私無我)를 수련해내 사존의 자비로우신 제도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이상이 체득 중 부족한 부분은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길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3년 3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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