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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한 세상에 깨끗한 연꽃 같은 대법 수련자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저는 50대 시골 여성입니다.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전에는 성격이 도도하고 오만하며 승부욕이 강했습니다. 결혼 후에도 저는 제가 가정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며 남편의 어리석음, 나약함, 무능함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남편도 저를 아껴주는 법을 몰라 늘 저와 다퉜습니다. 시부모님도 제가 남편을 잘 보살피지 않자 불만을 품으셨고 결국 가정 내 갈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부터 일에 부딪히면 타인을 위해 생각할 줄 알게 됐습니다. 관용하고 참고 양보하다 보니 몸과 마음에 모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여기서 저는 생활 속에서의 일부 사소한 일들을 써내 파룬따파의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증명하려 합니다.

1. 자녀 교육

아들이 옷을 도둑맞은 후

아들은 중학교에 다닐 때 아껴먹고 아껴 쓴 생활비를 모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명품 패딩을 하나 샀습니다. 그런데 며칠도 안 돼서 세탁 후 복도에서 말리다가 잃어버렸습니다. 일주일 후 아들은 화장실에서 다른 아이가 이 패딩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이 즉시 돌려달라고 하자 그 아이는 자기가 훔쳤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변에 구경꾼들이 많아지자 그 아이는 아들에게 새 옷을 사줄 테니 사람들 앞에서 이 일을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고 속삭였고 아들은 승낙했습니다.

아들이 집에 돌아와 제게 이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아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아들은 새 옷을 갖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네 옷을 돌려받으면 되는 거야. 그 친구는 돈을 벌 수도 없으니 또 집에 가서 달라고 해야 하잖니. 너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포함해 절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 게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그 친구가 앞으로 이 학교에서 어떻게 지낼 수 있겠니. 다른 아이들이 알면 틀림없이 따돌릴 거야. 그 친구가 만약 짧은 생각에 학교를 그만두기라도 한다면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몰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해야 하고 타인을 선하게 대해야 해.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충고해주렴.” 아들은 동의했습니다.

오해로 다친 아들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오후,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친구들 몇 명이 따라왔습니다. 제가 무슨 일인지 물었으나 아들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방에 들어가 보니 아들의 팔이 크게 부어 있어 왜 그런지 물어보았습니다. 아들은 어제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손을 잡고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학생이 막대기를 들고 아들의 친구를 때리려 했고 친구가 무의식적으로 피하다 제 아들이 대신 팔을 맞은 것입니다. 어제 온 친구들은 제 아들을 도와 복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수련하는 사람이 일할 때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해야 하므로”[1]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저는 아들과 상의했습니다. “엄마는 네가 많이 아프고 괴롭고 억울하다는 것을 알아. 얼른 마음속으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염하렴. 엄마도 염해줄게. 사부님께서 분명 널 도와주실 거야. 네 뼈는 괜찮을 거야. 아니면 같이 가서 엑스레이라도 찍어볼까?” 아들은 그러자고 했습니다.

병원에 가는 길에 아들에게 “절대로 친구들에게 복수하게 하지 마. 서로 싸우다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실수로 누군가가 맞아서 다치고 불구라도 되면 어떻게 하겠니? 우리는 육체적 고통을 조금 겪는 것뿐이잖니? 조금만 참으면 지나가. 한신(韓信)은 사타구니 밑을 기어나가는 치욕까지 당했잖아. 그를 용서하렴. 어쩌면 나중에 좋은 친구가 될지도 모르잖아.” 그러자 아들은 동의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보니 뼈는 괜찮았고 집에서 이틀간 휴식하니 나았습니다. 우리는 아들을 때린 학생의 책임도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끼리 패싸움이 한 차례 일어날 뻔했지만 이렇게 넘어갔습니다.

처음 만난 아들의 여자친구

아들이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한 여학생을 여자친구라며 데려와 말했습니다. “엄마, 저는 계속 엄마 말을 듣고 여자친구를 함부로 사귀지 않았어요. 저는 반에서 두 번째로 늦게 여자친구를 사귄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여자아이의 가정 형편을 자세히 물어보고 아이가 착하고 순수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여자아이가 제 방으로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우리 아들과 사귀니 우리 가족처럼 대할게. 내가 보니 사리에 밝은 친구 같으니 내 생각을 이야기해 줄게. 여자는 자기를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해. 연애를 말하자면 결혼한 이후가 아니면 정도를 벗어나는 행위를 해선 안 돼. 내가 일찍이 아들에게도 당부한 적이 있는데 오늘 한 번 더 당부하는 거야. 아가씨가 우리집에 온 이상 나는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해. 나는 파룬따파를 수련해. 사람 됨됨이에 있어서 예의를 지켜야 하고 사회 기풍에 휩쓸려선 안 돼. 다른 학생들을 함부로 따라 해선 안 돼. 신의 눈에 그것은 범죄이기 때문이지. 게다가 두 사람이 앞으로 계속해서 함께 지낼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순결을 지킨다면 만약 함께 지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더 큰 상처는 모면하게 되는 거야.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장래의 연인이 될 사람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해. 내가 한 말들은 진심으로 아가씨를 위해서야.” 여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후에 명절에 여자아이가 다시 우리집에 오면 계속 저랑 같이 지냈습니다. 약혼식 날짜를 정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옆집 아주머니는 제 생각과 사고방식이 진부하고 낡았다고 놀렸습니다. 한번은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이들에게 자유로운 시간을 줘야 한다며 기어코 저를 자기 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아주머니는 제 아들에게 “네 엄마 얘기를 듣지 마. 누가 요즘 그런 걸 상관하니!”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웃으며 아주머니를 따라갔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서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시나 제가 돌아왔을 때 여자아이는 제 방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2. 이익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양치기

대략 10여 년 전 어느 날 저녁, 차를 몰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도로 한복판에 한 무리 양 떼가 뛰어들었습니다. 양이 제 차에 부딪힌 것 같아서 내려서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인에게 갈취를 당할까 봐 그냥 떠나자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렇게 하면 수련인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어서 차에서 내렸습니다.

차에서 내리니 양은 진작 도망가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양을 방목하던 할머니가 뒤에서 쫓아와 제게 1천 위안(약 19만 원)을 내놓으라며 안 그러면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10년 전 시세는 양 한 마리에 2백 위안(약 3만 원) 정도였음] 저는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라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양에게 문제가 있으면 제가 책임질게요. 그런데 양 한 마리가 왜 그렇게 비싼가요?” 할머니는 “그 양이 새끼를 배고 있으니 1천 위안은 줘야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그렇게 많은 돈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한 할아버지가 다가와 중재하며 제게 500위안(약 9만 원)만 내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제게 어디 사람인지 물었고 집안의 상황을 자세히 물었습니다. 제가 시아버지의 이름을 말하자 할아버지는 “허! 무슨 돈을 받는다고! 돌아가요. 나는 당신 시아버지와 전우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제야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부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주머니에 있던 60여 위안(약 1만 원)을 할머니께 드렸습니다. 다음날 선물을 사 들고 그분들을 만나러 가서 파룬궁 진상을 알렸습니다. 두 어르신은 모두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나중에 숙모에게 이 일을 말하자 숙모는 “파룬궁을 배우더니 바보가 됐구나. 이번엔 운이 좋았지만 나중에 또 도망가지 않는다면 돈을 갈취당할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이 사회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정말 용기가 필요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토지 보상

몇 년 전, 우리 마을 앞쪽에 도로를 건설하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소식을 듣고 밭에 나무를 심어 보상금을 좀 더 받으려 했습니다. 저는 외지로 출근하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조작하면 안 돼요. 저는 대법을 수련하기 때문에 뭐든지 진실하게 해야 해요. 만약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신 땅은 알아서 해요. 내 땅에는 나무를 심지 않을 거예요.” 남편은 “당신 뜻에 따를 테니 당신이 결정해”라고 시원하게 말했습니다.

이웃집 언니는 땅에 마을 사람들이 전부 나무를 심었다며 제가 심지 않으면 우리 마을의 누군가가 비싼 값에 제 땅을 빌리고 싶어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우리집은 집을 지으려고 준비했는데 확실히 돈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니에게 제가 나무를 심지 않은 이유는 대법을 수련하기 때문이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황을 조작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언니는 의아해하며 말했습니다. “우리 서민들은 별다른 재주가 없어서 땅에 뭘 좀 심어서 보상을 받는 수밖에 없잖아. 게다가 네가 빌려주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거짓을 꾸미든 너랑 상관없잖아.” 저는 “그럼 땅을 빌려주면 그가 조작하는 것에 협력하는 거예요. 이렇게 할 수 없어요. 그가 이해해주면 좋겠어요”라며 땅 빌려주기를 거절했습니다.

인테리어 사장을 선하게 대하다

우리는 집을 다 지은 후 인테리어를 했습니다. 돈은 일당으로 계산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주방 칸막이를 공사할 때 네 번이나 재시공을 했습니다. 그들이 못을 박았다가 뜯어낸 후 다시 박는 모습을 보며 제 마음도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속으로 ‘무슨 시공기사가 이래? 우리가 기술을 연습하라고 맡긴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얼렁뚱땅 일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참으며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화를 내서 수련인 같지 않은 모습을 보일까 봐 아예 그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매일 그들에게 따뜻한 마실 물을 끓여주고 담배를 주고 떠났습니다. 서서히 제 마음도 편안해졌습니다. 결국 사장이 직접 나서서 잘 마무리를 해주었습니다.

사장은 미안해하며 말했습니다. “보셨다시피 이 기사들은 아직 수준이 부족해요. 이렇게 많은 재료와 시간을 낭비했네요. 이 며칠 동안의 임금은 제가 계산할 테니 돈은 안 주셔도 돼요.” 저는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임금은 제가 드려야 해요. 사장님이 일부러 그러신 게 아니잖아요. 저도 사장님께 세부적인 도면을 드리지 못했으니 그들 탓만 할 수는 없어요.”

그들이 우리 이웃 마을의 한 집에서 일할 때 저는 그 집에 가서 그들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쓰레기 속에 너비 50㎝, 길이 3m가 넘는 부직포 조각이 있는 것을 보고 우리집에 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주워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저는 후회했습니다. 아무리 쓰레기라도 남의 물건을 사적으로 가져온 것은 옳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뜻을 품고서도 작은 일에 소홀하지 않으며(懷大志而拘小節)”[2]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저는 인테리어 사장의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어제 일하셨던 그 집에서 제가 물건을 주워왔어요. 돈을 언니에게 드리는 수밖에 없어요.” “그건 쓸모없는 쓰레기인데 무슨 돈을 주나요?” “그 집에서는 쓰레기지만 우리집에서는 쓸모가 있잖아요? 저는 돈을 써도 이렇게 적합한 물건은 사지는 못했을 거예요. 저는 다른 사람의 작은 이익을 차지해선 안 돼요. 크게 말하면 주인이 없을 때 남의 물건을 가져오는 것은 훔치는 거잖아요.” “뭐가 그렇게 심각해요?” “물건은 제가 사용했고 많지 않은 돈이니 이 10위안(약 2천 원)을 갖고 계시다가 그들이 결제할 때 10위안 적게 계산해주세요. 저를 도운 셈으로 쳐주세요.”

그녀는 돈을 받으면서 말했습니다. “역시 수련하는 사람들은 다르다니까”하며 감탄했습니다. 우리집 인테리어가 끝나 결산할 때 그들은 잔돈은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제 아들이 결혼할 때 초대해달라고 거듭 당부했습니다.

3. 웃어른을 선하게 대하다

시어머니를 돌보다

옛말에 집집마다 다른 사람은 잘 알지 못하는 고충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수련하기 전에 정말 이 말을 깊이 체득했습니다. 진정으로 수련에 들어선 후 파룬따파 법리의 가르침으로 관용하고 참고 양보하며 선한 마음으로 가족과 이웃을 대하니 진정으로 ‘진선인(真·善·忍)’이 중생에게 가져다주는 평화로움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몇 년 전, 시어머니는 집에서 50km 정도 떨어진 병원에 무릎 관절 수술을 받으러 가셨습니다. 당시 남편은 3000km 떨어진 곳에서 출퇴근해서 제때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저는 시누이와 번갈아 가며 시어머니를 돌봐드렸습니다. 매번 차로 오가면서 70대 시어머니를 도와 씻겨드리고 머리를 빗겨드리며 대소변을 받아내며 좋은 말로 위로해드리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해드렸습니다. 수술이 끝난 후 저는 재활을 도와서 시어머니를 제 뒤에 서게 하고 두 손을 제 어깨를 짚게 해 한 걸음씩 걷는 연습을 시켜드렸습니다.

한번은 시어머니의 소변을 받을 때 소변을 보신 후 대변까지 보실지 몰랐습니다. 변기의 소변이 제 손목에 튀자 시어머니는 미안해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이렇게 신세 지고 싶지 않다. 예전에 출근했던 너에게 내가 월급을 달라고 했었는데, 그때는 너도 가난했었지?” 저는 그때 멍해져서 “괜찮아요, 아프지 않다면 누가 남이 돌봐주는 걸 바라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시어머니가 말씀하신 월급에 대한 일은 저는 진작에 잊었습니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생각났습니다. 제 아이가 한 살 남짓 됐을 때, 집안의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저는 1~2km 떨어진 한 초등학교에 가서 대리 교사 일을 했습니다. 낮에는 출근하고 밤에 아이를 데리러 갔습니다. 그 당시 월급은 겨우 150위안(약 2만 원)이었는데 전부 시어머니께 드려야 했습니다. 남편도 오랫동안 외지에서 출근했지만 돌아와서 월급을 전부 드렸습니다. 결국 우리는 돈이 없어서 제 친정집에서 가져온 비상금을 썼습니다.

한번은 한 가지 사소한 일로 시어머니가 욕을 하면서 빗자루를 들고 저를 때리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오자 시어머니는 제가 시어머니를 때리려 했다고, 하마터면 목 졸라 죽일 뻔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억울해서 방에 들어갔는데 손에서 쥐가 나 손을 펼 수 없었습니다. 가슴이 앞뒤로 산 두 개에 눌린 것처럼 답답해 숨이 막혔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스트레스만 받으면 가슴이 앞뒤로 아팠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이웃들과 자주 싸워서 절 건드릴 사람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두 남학생을 때렸는데 그들은 결국 학교에 나오지 못하고 학업을 그만뒀습니다. 중학교 때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던 교장의 아들을 때려서 굴복시켰습니다. 저는 공부를 잘했기에 선생님은 저에게 벌도 주지 않았습니다. 친정집이 비록 특별히 부유하진 않았지만 줄곧 자유롭게 살아왔는데 이런 억울함을 제가 어떻게 겪어봤겠습니까?! 정말 시어머니를 때리고 싶었다면 할머니가 제 상대가 되겠습니까? 그때부터 저는 시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졌습니다.

결혼 후, 남편과의 성격 차이도 너무 커서 남편이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다퉜고 시부모님도 따라서 화를 내셨습니다. 저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당시 좀 더 나은 인생을 살기 위해 저는 거의 10가지 정도의 일을 하다가 결국 스스로 바비큐 가게를 차렸습니다. 일도 힘들었고 별의별 이상한 손님을 만났는데 그때도 시부모님은 도와주신 적이 없습니다. 남편은 외지에서 돌아와서도 도와주지 않고 저와 다퉜습니다. 그때는 정말 몸도 마음도 힘들어 어떨 때는 일부러 괴롭히는 손님들과 칼을 들고 싸웠습니다. 나약한 여자가 사회 밑바닥 생활을 하느라 몸부림치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두 지쳤습니다.

수련 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예전에 그런 일들을 모두 잊었습니다. 시어머니 말씀에 저는 우리 고부간의 간격이 진작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중에 제 아들이 결혼해 아이를 낳은 후 시부모님은 아이를 돌봐주셨고 제가 시부모님댁에 가서 바로 식사할 수 있게 밥도 지어주셨습니다. 저는 시부모님이 생활에 편리하시도록 상하수도를 설치해드렸습니다. 어떨 때는 저도 차를 몰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장에 가고, 친정에도 모시고 가며, 옷도 사드리고 먹을 것도 사드립니다. 예전에 명절을 보내면 저도 시부모님께 돈을 드리고 물건을 사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아랫사람으로서 예의를 다했을 뿐이었습니다. 파룬따파를 수련한 이후부터 진심으로 시부모님을 잘 대하니 마음이 정말 편안합니다.

연로하신 아버지를 돌보다

6년 전, 아버지는 걷기가 불편해지면서 항상 침대에 누워있기만 좋아하고 운동을 싫어하셨습니다. 늘 누워만 계시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식사량이 줄어들어 심지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어지셨습니다.

친정집에 갔다가 이런 상황을 보고 아버지를 우리집으로 모셔왔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아버지를 목욕시켜드리게 하고, 새 옷을 갈아입혀 드리고 아버지를 제 방에서 지내시게 했습니다. 매일 수제비, 좁쌀죽 등을 만들어 드렸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9자진언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真善忍好)’을 많이 암송하시라고 당부하고 연공도 가르쳐 드렸으며 대법 책도 함께 보았습니다.

일주일쯤 지나자 아버지는 점차 정상적으로 되어 스스로 화장실에 다닐 수 있었고, 우리와 함께 식사도 하실 수 있었으며, 몸이 갈수록 좋아져 지팡이 없이 문밖을 나설 수 있게 되셨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아버지는 기뻐하며 집으로 명절을 쇠러 가셨습니다. 그 후 아버지의 몸이 좋지 않기만 하면 다시 우리집으로 모셔와 돌봐드렸습니다.

2020년 늦가을과 초겨울 어느 날 오후, 아버지가 목욕하시려고 해서 저는 목욕물을 조절하고 아버지를 팔걸이가 있는 둥근 의자에 앉게 해드렸습니다. 저는 어린 손자를 데리고 나갔다가 두 시간 뒤 돌아와서 화장실에 가보니 아버지가 변기에 앉아 계셨는데, 바닥과 벽, 변기가 온통 대변이었습니다. 저는 멍해졌습니다. 아버지는 “하마터면 내 살이 다 벗겨질 뻔했어”라고 하셨습니다. 알고 보니 아버지가 부주의로 수돗물 온도를 높게 하셨는데 행동이 느리다 보니 뜨거운 물이 한참 동안 몸에 콸콸 부어진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몸의 반쪽이 어깨부터 허벅지까지 모두 데어 붉게 됐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부축해 천천히 방으로 모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며 “아버지, 병원에 가고 싶으시면 바로 차로 모셔다드릴게요”라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안 가, 괜찮아. 이번에 정말 대법을 배워야겠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여동생이 와서 보고 서둘러 집에 가서 화상약을 가져왔습니다. 아버지는 바르지 않겠다며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밤새 아파서 보행기를 짚고 왔다 갔다 하셨고 저와 아들이 번갈아 돌봐드렸습니다.

하룻밤이 지나자 아버지는 온몸에 물집이 생겨 옷을 입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삼륜차로 앞마당으로 모시고 나갔습니다. 저는 낡은 솜옷을 치마로 만들어 아버지께 걸쳐 드렸습니다. 한 살 남짓한 손자는 잠시 외할머니댁에 보냈습니다. 이렇게 저는 밤낮 아버지를 돌보면서 목욕을 시켜드리고 상처를 두 시간에 한 번씩 닦아드렸습니다. 닦지 않으면 피부가 곪아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찼습니다. 아버지의 하루 세끼를 돌봐드리고 수시로 기저귀와 옷을 빨며 매일 두세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나흘 뒤, 아버지의 상처에 서서히 딱지가 앉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밤에 이불을 덮으면 다음 날 아침 온몸에서 고름이 흘러나왔습니다. 이불을 덮지 않으면 춥고, 이불을 덮으면 곪을까 봐 걱정됐습니다. 결국 옷을 입혀드리지 않고 방안 난방 온도를 올렸습니다. 보온 속바지 다리 부분을 잘라내 아버지 다리에 씌우고 상의의 두 옷소매 부분을 잘라내 팔에 씌워드렸으며, 가능한 한 화상 부위가 밖으로 드러나게 했습니다. 누워있기 너무 힘들어하시면 부축해 일으켜 앉혀드리고 몸을 조금씩 움직이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엉덩이 피부가 거의 한층 벗겨졌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낮에 아버지 몸의 상처를 말릴 때 사부님 설법을 들으시게 했습니다. 어느 날 밤, 아버지는 빈사 상태에 빠져 창밖을 가리키며 “다 준비됐어, 가야 해. 그들에게 알려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놀라서 밤에 계속해 불을 켜둔 채로 있었습니다. 이후에 아버지께 “밤에 뭐라고 하셨어요?”라고 물어보았더니 아버지는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시어머니가 오셔서 상황을 보시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심한데 남동생에게 알려야지. 이렇게 연세가 많으신데 화상이 심해져서 정말 일이 생기면 어떡하니?” 저는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아버지는 대법을 믿으시고 사부님께서 관여해주고 계세요! 보세요, 나날이 좋아지고 있잖아요? 병원에 가도 이렇게 빨리 낫지는 못해요. 믿기지 않으시면 오후에 다시 와서 보세요. 분명 지금과는 또 달라져 있을 거예요.”

오후에 시어머니는 정말 다시 오셨습니다. 보니 화상 면적이 오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정말 그렇네. 낫는 게 빠르네”라고 하셨습니다. 여동생은 계속 저와 함께 아버지를 돌봤습니다. 열흘 후 둘째 여동생도 왔다가 제가 지친 모습을 보고 저를 도왔습니다.

12일 후, 남동생이 와서 보고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어?”라고 말해서 저는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네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어. 네게 알리면 병원에 가야 한다고. 돈을 쓰거나 번거로움을 줄까 봐 걱정하셨어. 게다가 이렇게 화상 면적이 큰데 짧은 기간에 나을 거란 보장도 없으니까. 아버지가 자신을 대법 사부님께 맡기겠다고 하셨으니 너도 걱정하지 마. 이제 많이 나으셨어. 네가 그때 장면을 못 봐서 그렇지 정말 끔찍했어. 네 일을 보러 가. 시간 나면 나랑 교대해주고 시간이 없으면 안 와도 돼.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10여 일 후 아버지는 소변을 자주 보셨는데 어떤 때는 10여 분에 한 번씩, 어떤 때는 30분에 한 번씩 보셨습니다. 점차 소변이 맑아지고 단시간에 살이 빠졌으며, 눈에 눈곱이 끼지 않고 귓속마저 깨끗해졌습니다. 가슴 피부는 젊은 사람처럼 탱탱해졌고 윤이 났습니다. 손도 부기가 빠지고 색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며 손가락을 펴고 쥘 수 있게 되셨습니다. 예전에 구부릴 수 없었던 그 굵은 다리도 정상으로 변해 두 다리의 굵기가 같아졌습니다.

24일 후, 아버지는 회복되셨고 피부만 약간 흑갈색이 되셨습니다. 나중에 남동생이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갔습니다. 이틀 뒤 제가 아버지를 보러 가니 삼촌과 둘째 삼촌도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신기해. 병원에 가면 돈이 얼마나 들었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빨리 낫지 못했을 거야! 게다가 몸 절반이 다 데었잖아. 피부이식만 하더라도 돈이 부족하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약 한 알 드시지 않고, 주사도 맞지 않고, 아무런 염증 치료도 하지 않으셨지만, 사부님 설법을 듣고 제가 ‘전법륜’을 읽어드리는 것만으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온 가족이 모두 파룬따파의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비록 이 기간에 몹시 고생스러워 저도 살이 10여 kg이나 빠졌지만 며칠 휴식하니 곧 괜찮아졌습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웃들도 저를 보고 “아, 요즘 다이어트해요? 안색이 좋아 보이네요!”라고 말했습니다.

파룬따파는 저에게 건강한 신체를 주었고, 명성과 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줬으며, 마음의 자유를 얻은 당당하고 선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줬습니다. 파룬따파는 저에게 행복과 평화로운 가정을 주었습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와서 파룬따파를 알아보고 진선인(真·善·忍)이 가져다주는 순정함, 아름다움 및 내면이 승화되는 행복과 기쁨을 체득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캐나다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경문: ‘정진요지-성자(聖者)’

 

원문발표: 2023년 3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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