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중국에서 역병이 쓰나미처럼 전국을 휩쓸어 수많은 감염자가 발생했는데 먼저 베이징을 덮쳤다. 베이징에 밀집해 사는 많은 중국공산당(중공) 고위 관리, 전문가, 학자, 각 분야 유명인들이 잇달아 감염됐다. 며칠 만에 베이징대와 칭화대에서 교수 여러 명이 숨졌다. 사망자는 대부분 중공 당원이거나 중공 쪽에 줄 선 사람들이다.
또 비록 중공의 일원이지만 본성이 착한 일부 사람들은 진상을 알지 못해 제때 사당에서 탈퇴하지 않아 위험에 처해 있다. 특히 사회 각 분야의 최고 엘리트들은 중공의 세뇌와 기만, 이익의 유혹에 이끌려 중공 사당 쪽에 줄 서는 경우가 많다.
사촌 형은 문화혁명 때 아버지가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 추종 세력)’로 투쟁을 받고 ‘외양간’(문화대혁명 시기에 비판의 대상이 연금되던 임시 감금 장소)에 갇혔다가 허리가 부러졌다. 사촌 형은 공포 속에서 성장했고 그 시절을 가까스로 견뎌냈다. 형이 직장에 다니다가 불행히 해고돼 내가 도와준 적이 있다. 나중에 그는 열심히 공부해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학위 제도가 회복된 후 처음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어서 사촌형은 빠르게 신문에 보도됐다. 그리하여 줄곧 사회의 무시를 당하던 사촌 형은 분주하게 각 분야의 취재를 받아야 했다. 민주당파 인사들이 찾아오는가 하면 중공 당 조직에서 파견한 사람들이 더 많았는데 목적은 그들 조직에 가입하라는 것이었다. 사촌 형은 본래 천성이 후한 학자로 정치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런 상황을 당해내지 못했다. 얼마 후 이 ‘우수 인재’는 ‘활력 넘치는 신인’으로 곧 공산당의 일원이 됐다. 사촌 형은 나중에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공을 세워 이름을 날렸고 후한 교수 대우로 편안한 나날을 보내게 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미 사당에 목숨을 맡겼기에 그들과 함께 끝없는 심연으로 떨어지고 있는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사촌 형에게 공산당을 정말 믿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나는 인터넷 봉쇄를 돌파해 진실한 정보를 알아보라고 제안했으나 위험하다고 느낀 그는 여러 가지 기술적인 이유를 대며 미뤘다. 나는 몇 번이나 그를 찾아 탈당을 권유하려 했지만 성사하지 못했으니 내가 잘못했고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가슴이 은근히 아팠고 옛일들이 하나하나 생각났다.
1999년 ‘4·25’를 얼마 앞두고 어느 날 연공장 책임자가 나에게 교류회에 참석하라고 했다. 교류회 장소는 칭화대 계단식 강의실로 100여 명이 참가했다. 회의 주제는 다른 지역의 일부 연공장이 현지 경찰에 의해 교란 받고 있는 일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였다. 회의는 자유 발언 형식이었는데 수련생들은 질서 정연하게 열렬히 토론했다. 발언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자기소개를 간단히 한 후 견해를 밝혔다. 당시 상당수 발언자들은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조속히 정부에 상황을 보고해야 한다고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발표자들의 자기소개였다. “저는 교육계에 종사합니다”, “저는 과학기술계에 근무합니다”, “저는 법조계 수련생입니다”, “저는 문예계에 몸담고 있습니다”, “저는 출판계에서 왔습니다” 등등 거의 모두 전문직 종사자들로 문화, 과학기술 각 분야에 분포돼 있었는데 정말 인재가 많았다. “저는 민주당 출신입니다”, “저는 군사기관 출신입니다”, “저는 사관학교 출신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 회의를 마치고 나오다가 출구 쪽에서 대학에 출근할 때 우리 과의 한 젊은 교수와 우연히 마주쳤다. 당시 베이징 사람들은 많은 지식인과 고위층 인사들이 파룬궁을 연마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각 지식 분야와 사회 고위층에 두루 퍼져있던 파룬궁 수련자들이 모두 건재한다면, 또 모두 대법을 계속 수련해 각자의 분야에서 진상을 알려 그 지역 중생을 구했다면 이는 얼마나 바람직한 국면일 것인가! 지식인은 예부터 사회의 선구자였으며 주류사회의 흐름은 전체 사회발전에 영향을 미친다.
1992년과 1993년 동방건강박람회 기간에 베이징은 거리 곳곳뿐만 아니라 정부 기관과 군부대에도 리(李) 대사라는 분이 와서 병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대단하고 신기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사부님께서는 중국에서 54기 파룬궁 전수반을 개최하셨고 그중 베이징에서 13기를 조직하는 등 가장 많이 개최하셨다. 장소는 제2포병부대 강당 등 군부대에서 많이 강의하셨다. 1995년, ‘전법륜’이 베이징에서 출간됐고 공안부 강당에서 성대한 발간식을 가졌다. 현재 ‘전법륜’은 40개 언어로 번역됐다. 베이징에서 세계로 뻗어나가 각국 파룬따파 수련생들이 매일 배워야 할 경전이 됐다. 만약 이번 박해가 없었다면 베이징은 사부님께서 법을 전할 때 늘 계시던 곳이었고, 파룬궁 연구회가 있는 곳이었으며, 대법 전파의 기지로서 사부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본 곳인 만큼 베이징 사람들은 얼마나 큰 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
베이징 사람들은 예부터 천하 대사에 관심을 두고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자질과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6.4’(천안문 사건)의 핏자국을 밟고 정권을 잡았기에 베이징은 여섯 조대의 고도(古都)이자 역사 문화로 유명한 도시이지만 나날이 부패하고 쇠락했다. 중공의 파룬궁에 대한 가혹한 박해와 함께 베이징은 이미 사악의 소굴로 전락했고 사악의 통제가 가장 엄격한 곳이 됐다.
사당의 극단적 폭정과 강력한 세뇌 아래 베이징 사람들은 우롱당하고 노예화됐으며 도덕 수준이 크게 떨어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잡지의 장황한 유언비어에 따라 중공의 파룬궁에 대한 흑색선전에 동감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CCTV가 파룬궁을 모함한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을 진실로 여겼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소위 ‘백만 명 ×교 반대’에 서명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파룬궁을 비판하는 크고 작은 집회에서 이에 호응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대법제자들에게 냉담하고 폭언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리사욕을 위해 사악한 경찰의 공범과 하수인이 됐는가? 이 20여 년 시대 흐름의 역행 속에서, 천고의 억울함에 직면해 누가 감히 나서서 파룬궁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누가 감히 파룬궁 수련자들의 반(反)박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는가? 파룬궁은 불법(佛法)이고 만물을 만든 우주의 대법이다! 중공의 박해를 묵과하고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도덕성이 이미 타락한 것이다. 중공의 박해가 잘못된 불법 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보호를 위해 침묵했으니 그 죄업이 이미 당신 몸에 올라갈 것이다. 중공의 박해를 인정하고 중공과 함께 간다면 공범이다. 인심이 나빠지고 도덕성이 타락해 업력이 커지면 역병이 찾아온다. 베이징 전역이 전염병에 감염돼 많은 사람이 사망했는데 ‘역병에는 눈이 있다’.
밍후이왕 교류 문장에서 보면 많은 수련생이 대규모로 진상 자료를 배포하고 있다. 집집마다 차례로 배포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으며, 각종 진상 자료를 이미 여러 차례 배포했고 ‘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九評共産黨, 9평)’ 등 자료가 거의 집집마다 전달됐다. 일부 변두리 마을에서는 수련생들이 직접 집집마다 진상을 설명하고 자료를 건넨다. 이를 볼 때마다 수련생들의 정념정행에 감탄하고 마음에 격동을 금할 수 없는데 베이징은 언제 이 정도에 이를까? 개인적으로 파악한 바에 의하면 베이징의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9평’을 본 적이 없고 진상 자료를 받은 적도 없으며 진상 전화나 편지, 우편물을 받은 적이 없다. 베이징 주류사회 민중, 체제 내 인사들, 특히 더 많은 발언권을 가진 지식계 엘리트들이 각종 진상 자료를 보고 인터넷 봉쇄를 돌파해 실제 정보를 볼 수 있다면 사회적으로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우리 베이징 대법제자들이 집집마다 들어가 진상 자료를 주고 삼퇴를 권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개인적인 소감이므로 자비롭게 지적해 주시길 바란다.
원문발표: 2023년 1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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