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위천(宇塵)
[밍후이왕] 신은 사람을 만들고 생존 조건과 환경을 제공했다. 역사상 신불이 끊임없이 내려와 사람이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들고, 사람이 되는 도리와 수련하면 신불이 될 수 있다는 도리를 거듭 이야기했다.
인간은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처럼 생명이 매우 취약해 신의 보호를 벗어나면 잠시도 생존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사람이 신을 존경하고 은혜에 감사해야 신은 인간에게 복을 준다. 그러나 사람이 사리사욕이 팽창하고 인륜과 도덕을 지키지 않으며 심지어 신불의 존재마저 부정한다면 신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인데, 신은 타락한 인간을 징벌할 것이다.
중국의 전통문화는 신이 전한 문화다. 옛사람들은 ‘만악음위수 백선효위선(萬惡淫為首,百善孝為先)’이라 했다. 음(淫)이 왜 만악 중에 첫 번째인가? ‘음’은 ‘색’에서 비롯되며 즉 색욕에 의해 야기된 것으로 신의 안배를 혼란시키고 인체의 형상을 더럽히며 전통 관념을 파괴하고 인륜과 도덕의 붕괴를 가속했기에 천지신명(天地神明)이 용납하지 않는다.
효는 모든 행위에서 으뜸가는 것으로 본래 인간의 근본을 지키는 지대한 도리이다. 부모는 우리를 세상에 데려와 길러주니, 은혜가 산처럼 무겁기에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주 문왕의 아들 백읍고(伯邑考)는 봉신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봉신방’에 중천북극제미대제(中天北極帝微大帝)로 봉해졌다. 이는 삼청(三淸)과 옥제(玉帝)에 버금가는 지위였고 여러 신적을 나타낸 뭇 신보다 월등히 높다. 그 이유는 첫째 그의 효도는 감천동지(感天動地)했고 문왕의 장남으로서 지위가 높았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지를 구하려다 주왕에 의해 육장을 당했다. 다음으로 그는 보통 사람들이 넘지 못하는 미인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다. 경국지색인 달기의 매혹에 넋을 잃은 주왕은 황제의 존엄도 버리고 그녀의 말에 순종하는 지경이었다. 달기의 부추김에 백읍고는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주 문왕이 창시하고 공자가 추앙한 ‘주례(周禮)’가 후세에 남겨진 정통문화와 행위의 모범으로 되었다.
말겁시기에 인류가 무신론에 이끌려 신불을 믿지 않고 ‘개성 해방’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 인간의 욕심과 욕망을 증폭시킨 것이다. 인간의 부패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그 중 색욕이 끼친 해가 제일 많았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탐욕과 호색의 도덕적 타락으로 지옥에 떨어지거나 심지어 무간(無間)지옥에 떨어진 사람이 많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색정이 범람하여 산업체와 시장화가 버젓이 이루어졌고, 암암리에 색정 거래와 인신매매가 이루어지는 것이 사람을 경악게 한다. 1인 미디어 동영상에서 화제를 모았던 장쑤(江蘇)의 한 도시는 1980년대 3년 동안 5만 명에 가까운 여성을 암거래했는데 정부 측에서는 사람과 신이 공분하는 이런 죄행을 두둔하고 덮어 감추려 했다. 그것은 체제 내의 관리들이 가담해 배후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이 자신의 모습을 모방해 사람을 만들었다는 전설은 허황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체는 확실히 완벽해, 못난 외계인들이 군침을 흘리게 한다. 신의 형상인 사람이 미색을 추구하고 점유하려는 것은 신불의 형상에 대한 침해이자 모욕이 아닌가? 부부간에 규범을 벗어나지 않고 자손 번식을 목적으로 하는 이런 행위는 질책할 바가 아니며, 비록 저능한 방식이지만 세상 이치에 맞는다. 부부가 아니면서 멋대로 성행위를 한다면 신이 이런 변이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현대인의 업력을 크게 만든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서유기’의 저팔계는 원래 천정옥제 휘하의 천봉원수였으나 취중에 속념이 생겨 항아를 희롱했기에 속세로 떨어져 돼지 태에 들어갔다.
명나라 소설 《봉신연의》에서 황음무도한 상 주왕이 여와에게 조배하러 갔다. 사람에게 신을 공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반드시 사람 마음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오만한 주왕이 여와 성상을 보자 망념이 생겨 ‘짐은 귀한 천자로 천하를 갖고 있어 육원삼궁(六院三宮)이 있어도 이런 아름다움은 없다’라는 생각이 들어 시 한 수를 썼다. 그 중 ‘요염한 여와가 진인으로 변한다면 아내로 삼아 영원히 짐을 시중들게 하리라’라는 모욕적인 구절이 있었다. 격노한 여와는 구미호 등 세 요괴를 궁궐에 보내 주왕의 천하를 화란시켰다. 주왕은 색욕에 빠져 조정을 소홀히 했고 여우 요괴의 유혹으로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궁녀 대신과 백성들에게 혹형을 남용해 천인이 공노했다. 결국 나라를 멸망케 하고 후세에 악명을 남겼다.
미세한 입자로 구성되어 빛나는 신의 몸은 가장 거친 분자로 구성된 인체보다 훨씬 섬세하고 정교하다. 삼계 저층의 인간은 마치 큰 분뇨 구덩이에서 사는 것 같지만 인간은 뛰쳐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분뇨 구덩이에서 편안히 살면서 어떻게 더 즐겁게 살 것인지 찾고 있다! 불교와 도가에서는 모두 색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강조하는데 수련인이 더럽고 지저분한 이성의 인체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신으로 수련성취할 수 있겠는가? 수련인이 색에 집착하는 것은 신불에 대한 불경이므로 모든 신이 용서하지 않는데 어떻게 높은 경지로 승화해 신불이 될 수 있겠는가?
대법을 수련하면서 이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풍채가 당당하고 총명한 한 남자 수련생이 있었는데 많은 수련생이 자주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로 인해 그는 득의양양해졌고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고 자신의 색심을 방임하여 자기를 해치고 남까지 해쳤다. 결국 구세력에게 빌미를 잡혀 여러 번 납치되었고 풀려난 후 경제가 어려워지자 다단계에 가입했다. 지금 대법제자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또, 행동에 별 이상이 없어 보이지만 마음속으로 색관을 넘지 못해 구세력의 교란을 받고 수련에 큰 교란을 받는 이도 있다.
공자는 “예에 어긋나는 것은 보지도 말고, 예에 어긋나는 것은 듣지도 말고, 예에 어긋나는 것은 말하지도 말며, 예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도 말라.”라고 했다. ‘예(禮)’는 인간의 행동 규범 중 하나이다. 규범에 맞지 않고 후천 관념의 지배를 받는 것은 사람의 근본을 망각한 표현인데, 이는 천지와 신불에 대한 경외보다 사심과 잡념이 더 많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만든 신불에 감사하지 않고 생명의 근원을 잊어버리고 육체 표면에서 생겨난 욕망에 지배당하고 색에 미혹되며 이성의 표면색상에 유혹되어 색욕을 추구하고 부부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 음란행위를 초래한다면 이것은 신불이 용납하지 않는 중죄이며 가장 나쁜 행위 중 하나이다. 그래서 수련계에는 “색심이 일어나면 큰 과실이 된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 사회는 미혹의 공간이며 인간의 생리적 반응은 인간의 의식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지 않기에 사람이 색의 시험을 견디기 어렵게 된다. 사람은 정통문화 관념으로 자신을 주도하고 색욕의 위해를 인식해야 한다.
이른바 ‘색자 머리에 칼(色字頭上一把刀)’이라 하는 색마, 이 사람을 현혹하는 부정적인 생명은 원래 독사이며 사람의 정혈지기(精血之氣)를 먹고 산다. 사람이 추구하는 색욕의 쾌감은 사실 색마가 사람의 정혈지기를 흡수한 후 흥분된 느낌을 사람의 뇌로 전달하는 것이지 사람 자신의 진정한 느낌이 아니다. 사람이 색욕에 빠지면 즐거운 것이 아니라 인체에 큰 해를 끼친다. 기와 혈이 약해지고 장기가 손상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색마에게 에너지를 보충해 주어 그것이 점점 더 강해져 사람을 해치는 능력이 강해진다. 색심을 버리지 않으면 수련자에 대한 상해가 더 크며 공든 탑이 무너진다.
삼계는 우주 중에서 반대 이치(反理)라, 사람의 많은 습관적인 느낌은 허상에 불과하다. 신불은 사람을 ‘행복한 삶’을 살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고생으로 업을 갚으면서 도리를 깨달아 승화하라고 한다. 사람이 너무 자유롭고 편안하게 사는 것은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니며, 수련에 어려움을 가져다주며 업력이 축적된다. 고금중외에 수련계는 인류사회의 모든 것을 허황된 것으로 보는데 매우 일리가 있다. 반대되는 이치로 인해 생긴 온갖 거짓은 사람을 미혹시키고 심지어 안락하여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잊고, 반본귀진하는 사람의 목적과 진정으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천국의 정원을 잊게 하며, 일시적인 ‘향락’의 가상으로 만겁의 파멸을 초래한다. 법을 얻는 사명을 띠고 온 수련생이 자신 세계의 중생을 구원하지 못하고 선천적 세계가 무너진다면 어찌 ‘유감’이라는 두 글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구우주의 생명인 대법제자가 대법에 동화되어 신우주에 귀환되어 선천적 경지에 들어설 수 있다면 어떤 말로도 스승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인간 공간의 가장 더러운 색욕에 걸려 실패하겠는가? 색마가 들이닥치고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때마다 대법의 수련자에 대한 요구를 생각한다면, 하늘 아래 우뚝 선 신불이 그에게 이끌릴 수 있겠는가? 온 하늘의 신불과 자신에게 한없이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중생이 자신의 일사일념을 지켜보고 있음을 생각하면 어찌 잘못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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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발표: 2022년 12월 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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