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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법회] 런던 중공대사관 앞에서 평화 시위하며 20년을 수련

글/ 영국 수련생

[밍후이왕] 2022년 6월 5일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런던 중공대사관 앞에서 24시간 평화 시위를 시작한 지 20년이 되는 날입니다.

사부님의 자비와 도움, 수련생들의 사심 없는 협력이 우리를 지금까지 견지할 수 있게 해줬습니다. 참여하는 수련생 일부는 80~90세이며 부모와 함께 오는 어린 제자도 있습니다. 일부는 런던에 살고 있고 일부는 세계 각지에서 오는데 멀리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도 옵니다.

많은 사람이 우리를 격려합니다. 한 사람은 수련생들의 평화와 끈기가 영국 국민에게 본보기가 됐으므로 대사관 앞에 앉아있는 수련생들에게 여왕이 메달을 수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말합니다. “대사관 직원들이 밤이 되면 떠납니다. 거리에 사람도 별로 없는데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여기에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저도 가끔 자문합니다. ‘왜 우리는 견지하는가?’

1. 염원

저는 1997년 베이징에서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고 1999년 영국에 왔습니다.

2000년 10월 1일, 서양인 수련생 로버트가 런던 중공대사관 앞에서 3일간 시위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수련생들이 신앙 자유와 수련할 권리를 잃었고 일부는 박해를 받아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공산당(중공)의 파룬궁 박해에 대해 영국 사회에 알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수련생들은 그와 함께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천안문 광장에 가서 시위할 수는 없지만 런던 중공대사관 앞에서는 평화롭게 시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로버트가 평화 시위를 계속하고 매일 아침 대사관 앞에서 연공하는 게 어떨지 우리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대학원생이었고 대학이 대사관에서 멀지 않아 시간이 있어 참여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참여하는 수련생이 3~4명이었습니다. 매일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대사관 앞에서 연공했습니다. 우리는 또 우리가 그곳에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표지판을 세웠습니다.

2. 24시간 시위 시작

2002년 5월, 박해를 개시한 전 중공 총서기 장쩌민이 유럽을 방문했습니다. 수련생들은 그가 가는 곳마다 24시간 근거리 발정념을 했습니다. 조건이 되는 영국 수련생들은 다른 나라로 가서 근거리 발정념에 참여했습니다. 가지 못한 사람들은 런던 대사관 앞에 모여 24시간 발정념을 했습니다. 그 활동이 끝난 후 또 다른 수련생이 대사관 앞에서 계속 24시간 발정념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다른 나라 수련생들은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2002년 6월 5일, 우리는 런던 중공대사관 앞 24시간 평화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미 학업을 마쳤고 아이가 여름 방학을 맞았습니다. 그해 여름 내내 저는 아이와 함께 대사관 앞에 갔습니다. 여름 방학이 끝난 후 참여하는 수련생들이 줄었습니다. 24시간 교대할 수 있도록 다른 수련생들과 조율해 당번을 정했습니다. 당시에는 대법 관련 항목이 요즘처럼 많지 않았고 교대하기도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과제는 지역 주민들의 민원이었습니다.

대사관 관저에는 청사 외에 근처에 고급 주택가도 있었습니다. 초기에 일부 주민들은 연공 음악이 너무 크다고 민원을 냈습니다. 또한 우리의 전시판과 현수막이 깔끔하지 않고 고르지 않아 아름다운 환경을 망쳐 놨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거기 있었기 때문에 대사관은 경찰 보호를 신청했습니다. 주민들은 그 비용이 영국인들의 세금이며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박해에 대해 영국인들의 돈을 쓰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수련생들은 교류하고 안으로 찾은 후 잘하지 못했던 부분을 개선했습니다. 우리는 연공 음악이 너무 시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특별한 기술이 있는 수련생들이 전시판과 선반을 다시 디자인하고 제작했습니다. 몇 가지 개선을 거쳐 오늘날의 우리가 됐습니다. 이제 큰 행사가 있을 때 우리는 주변 주민들에게 미리 편지를 보내 행사를 진행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고 양해를 구합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주변 주민들의 이해와 성원에 감사한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몇 년 후, 환경이 바뀌었고 훨씬 더 좋아졌습니다. 종종 인근 주민들이 겨울에 우리에게 따뜻한 커피나 저녁에 음식을 가져다줍니다.

3. 시험에 직면

2007년 하반기에 션윈이 영국에서 공연을 시작했습니다. 모두 션윈을 홍보하고 광고하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거의 모든 수련생이 참여했지만 일손이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일부 수련생이 24시간 시위를 주간 시위로 바꿀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대사관 밖에 24시간 서 있어야 하는 인력이 너무 많아 션윈 홍보에도 영향을 준다고 느꼈습니다. 일각에서는 24시간 시위를 고집하는 게 너무 이기적이라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회의해보니 모두 24시간 시위를 견지하면서 션윈 홍보 활동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그 상황을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내가 이 항목을 견지하는 것이 이기적인가? 나는 션윈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던가? 사부님의 소원은 무엇인가?’ 저는 사부님께서 우리가 션윈과 함께 임무를 완수하는 동시에 장기적인 지원이 필요한 다른 항목을 중단하지 않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표면적인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사부님의 안배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할 수 없다고 여러 번 생각했고 대사관 앞에 교대하는 사람들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고난 속에 광명이 있음(柳暗花明又一村)”(전법륜 제9강)을 알게 됩니다.

2010년 션윈은 런던 밖에서 개최됐습니다. 매주 주말 션윈 홍보를 위해 멀리 다녀야 했고 대사관 앞 시위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중국에서 막 온 한 수련생이 제 빈 자리를 채웠습니다.

또 어느 해에는 한 홍콩 수련생이 대학에 입학하는 자녀를 데리고 영국에 왔습니다. 그들의 아파트는 대사관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런던을 잘 알지 못했고 대사관에 오가는 길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빈자리를 모두 채웠습니다.

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제 생각과 행동을 살펴봤습니다. ‘여기에서 션윈을 홍보하면서 이 항목(평화 시위)을 견지하는 것은 서로 상충하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잘 배치되어 있었고 그 두 항목은 서로 보완했습니다.

언젠가 런던 외곽 쇼핑센터에 표를 팔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오후 10시 마감 후 저는 대사관 앞 야간 시간을 맡기 위해 버스를 탔습니다. 쇼핑센터에서 저는 종일 쉬지 않고 사람들에게 션윈을 소개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자마자 피곤이 몰려왔습니다. 대사관에 도착한 저는 앉아서 연공을 시작했습니다. 즉시 몸 전체에 에너지를 느꼈고 모든 피로가 씻겨졌습니다. 샤워를 한 기분이었습니다. 심신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다른 수련생들에게 상황을 물었더니 대사관 앞 시위가 션윈 홍보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대사관과 가까운 공연장 밖에서 션윈 전단지를 나눠줬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전단지 배포를 마치고 대사관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두 연공을 계속하고 발정념을 했습니다.

잘 정리하고 나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명확했습니다. 의사소통과 조율에 더 많이 노력하고 편안함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4. 우리 시위는 반(反) 박해의 상징

파룬궁에 대한 중공의 박해가 멈추지 않았기에 우리는 평화 시위를 계속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참여하는 모든 수련생의 일치된 생각이기도 합니다.

몇 년 전, 어느 날 밤에 우리는 포스터를 바꾸고 있었고 우리 앞에 차 한 대가 멈췄습니다. 운전기사가 창문을 내리며 말했습니다. “떠나려고요? 박해가 끝났나요? 아니면 여러분은 계속하셔야 해요!”

약 10년 전에 저는 BBC에서 프로그램을 막 마친 시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연공 장소를 떠나 포스터 뒤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 자전거를 탄 젊은이가 우리 앞에 멈췄습니다. 저는 청원서에 서명하고 싶은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이미 서명했어요. 오늘 왜 아무도 여기에 있지 않은지 궁금해서 멈췄습니다. 박해가 끝났나요?” “그렇다면 저는 친구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려 했고, 박해가 끝나지 않았다면 수련생이 올 때까지 이 자리에 대신 앉으려 했어요.”

영국인의 마음과 정신에 이곳은 파룬따파 반(反) 박해의 상징이 됐습니다.

5. 진상을 알리는 창

대사관 앞 도로는 분주하고 계속 차가 지나갑니다. 관광버스도 많이 지나갑니다. 저는 종종 지나는 사람들이 차 안에서 지지하는 뜻으로 휘파람 부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엄지를 치켜드는 것도 봅니다. 종종 가이드가 버스에서 관광객들에게 설명하는 것을 듣습니다. “이곳에서 파룬궁이 항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뒤에 있는 큰 건물은 영국왕립건축가협회(RIBA)이며, 종종 학술회의나 전시회, 저녁 파티 등이 열립니다. 그래서 드나드는 사람들이 끊임없습니다.

수련생들은 연공하거나, 발정념 하거나, 서명을 받거나, 행인에게 전단지를 나눠줍니다. 많은 사람이 멈춰서 전시판을 읽고 청원서에 서명합니다. 일부는 실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수련생과 이야기합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많은 영국인이 이제 파룬궁 박해 진상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옆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이게 파룬궁이야. 중공대사관은 길 건너편에 있고 수련생들이 여기서 평화 시위를 하고 있지.”

3년 전 어느 주말, 저는 우리 전시판 앞에 서 있는 서양인을 보았습니다. 그는 전시판을 한 번 둘러보고 진지하게 살폈습니다. 제가 연공을 마친 후 그가 물었습니다 “10년 넘게 여기에 있었나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런던 도보 여행 가이드 책자를 제게 보여줬습니다. 그 책에는 우리의 24시간 평화 시위가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몇 주 전에 시위 현장에서 연공하고 있었고 뒤에 있는 건물에서 행사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한 젊은 남성이 통화하는 것이 들렸는데 그는 상대방에게 여기에 오는 길을 알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파룬궁 전시판 앞에서 내려야 해, 파룬궁은 이 자리에서 18년이나 있었어.” 이 말을 들은 후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은 거의 확신에 차서 18년이라고 했는데, 분명 우리를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 2년을 잘못 계산했구나.” 잠시 후 저는 그가 딸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파룬궁 수련생이야. 박해에 반대하기 위해 여기서 명상하고 있지.” 어린 소녀가 말했습니다. “그냥 저기 앉아서 명상하다니 정말 지루하겠네요!” 저는 소녀의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녀가 멈춰 서서 전시판을 읽었습니다. 잠시 후 소녀는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보세요,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이 전기충격을 받아서 결국 고문당해 저렇게 죽었어요. 너무 잔인해요!”

저는 이곳의 에너지장이 사람들이 진상을 알지 못하게 막는 부정적인 물질을 해체한다고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있는 자체가 그들이 진상을 아는 기회가 됩니다.

저는 전 세계 수련생들이 모든 항목에서 노력을 쏟아 반(反)박해 일을 하고 있으며, 명백한 결과를 우리는 볼 수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인식했습니다.

6. 좋은 수련 환경

시위에 자주 참여했던 한 서양인 수련생이 제안했습니다.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것은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수련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모든 협조인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영국 수련생의 제고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저는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주에는 마침 야간에 빈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야간 담당이었던 저는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입으로는 이 항목이 중요하다고만 말하면서 실행하는 것을 못 봤어.’ 이런 감정에 짓눌려 저는 매우 피곤했습니다. 텐트에 들어가 잠시 누우려고 생각했습니다. 막 누웠을 때 누군가가 텐트를 잡아당기려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보려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달걀 하나가 제 머리를 쳤습니다. 저는 매우 낙담했습니다. ‘오늘 왜 이렇게 안 좋은 일이 있지? 내 잘못일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겠지.’ 다른 수련생들과 협조인들에 대해 불평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저는 앉아서 발정념하고 곧 진정됐습니다.

다음 날 아침, 집에 돌아와서 남편에게 그 일을 말했습니다. 남편이 위로해 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당신 문제가 무엇인지 안으로 찾아야 해요.” 그 말을 듣고 너무 억울해 울고 싶었습니다. 마음을 진정시킨 후 생각했던 질문들을 밤새 되짚어보았습니다. ‘내가 이 항목에 참여하기로 했을 때 원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나는 왜 견지하려 했는가? 나는 참여할 수 있는 수련생들을 소중히 여겨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 다른 수련생들에게 이 항목을 지속하는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겸손하고 사심 없는 마음으로 해야 하고 과시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더 많은 수련생이 참여하고 이 항목을 계속할 수 있다.’

7. 처음과 같이 수련

2000년 10월 1일부터 오늘까지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느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우리가 하는 일이 보통 사람이 의무를 다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날마다 해마다 매일 똑같은 장면이고 똑같은 일을 합니다. 파란만장도, 심금을 울리는 경험도 거의 없습니다.

저는 종종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그렇게 긴 세월 견지하는 게 쉽지 않은데 그걸 어떻게 해냈어요?” 저 역시 왜 계속 견지하려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본래 우리의 소망은 박해가 끝나는 날까지 견지하는 것 아니었던가요? 중공의 파룬궁 박해가 계속되고 있는데 우리가 왜 멈추겠습니까? 어려움이 크다고 극복할 수 없을까요? 왜 우리가 계속할 수 없을까요?

이 항목은 평범해 보이는 매일매일, 수련생들이 해야 할 세 가지 일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계속 정화되고 더 높이 올라가므로 무더운 여름, 겨울의 추위, 장마를 견딜 수 있으며 우리의 신념과 소망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교대를 위해 차례를 정하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 잘못임을 압니다. 저는 최근 매체 항목을 돕고 션윈 홍보도 시작했습니다. 수련생들과 더 많이 소통하고 이 항목의 역사와 의미를 공유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수련생이 참여할 것입니다. 제가 아직 하지 못한 이유는 다른 수련생들이 제게 과시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또는 누가 거절할 때 체면을 잃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든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수련을 처음과 같이”(각지설법 9, 2009년 대뉴욕국제법회 설법) 상태를 이룰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적절하지 못한 곳은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2022 유럽 파룬따파 수련심득교류회 원고)

 

원문발표: 2022년 9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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