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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겪은 일로 진상을 알려 제로화 소란을 제거하다

글/ 중국 후베이 대법제자

[밍후이왕] 저는 1997년에 법을 얻은 대법제자로 시골에 살고 있습니다. 20여 년의 수련 과정에서 신기한 일을 많이 겪었는데 최근 수련 체험을 사부님께 보고드리고 수련생 여러분과 교류하겠습니다.

도시에 사는 70여 세의 시누이가 올해 상반기에 몸이 불편하다며 제게 간호해달라고 해 4월 30일에 갔습니다. 5월 10일쯤, 고향 조카딸이 아들을 낳았다며 시누이에게 전화해 저와 함께 축하연에 참석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진(鎭) 서기가 조카딸네 식당에서 식사하다 전화를 바꿔 달라고 하며 저를 찾았습니다. 그는 제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파룬궁을 수련한 적이 있는데 상부의 파룬궁 ‘제로화’ 정책에 따라 서명해야 합니다. 서명만 하면 명단의 이름을 지우고 더는 찾지 않을 것이니 당신은 계속 수련해도 됩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파룬궁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선인(真·善·忍)’을 위배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니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서명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제가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 자녀에게 더 좋다고 대답하니 그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며칠 지나 서기가 남편을 구슬렸습니다. 남편은 제게 전화를 걸어 서명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큰 교통사고에서 대법 덕분에 살아난 사람으로 남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서명할 수 없다고 하니 남편은 더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주민센터, 파출소, 진 정부 직원 5명이 찾아와 남편에게 제가 돌아왔는지 물었습니다. 남편은 제가 일하므로 당분간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남편에게 말을 전하라고 했고 남편은 말은 전하겠지만 서명할지는 아내가 결정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남편이 그들의 전화를 차단해 그들은 더는 전화하지 못했습니다.

또 며칠이 지나 6월 22일이 됐습니다. 저는 원래 낮잠을 자지 않지만, 그날은 무슨 일인지 오후 3시에 법공부하는데 너무 졸려서 참지 못하고 침대에 잠깐 누웠다가 일어나니 반 시간이 지났습니다. 시누이는 3층 별장에 삽니다. 그때 시누이가 뛰어 올라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습니다. “들었어요? 그 사람들이 정말 왔대요, 대여섯은 된답니다. 이곳의 주민센터 직원이 그들을 데리고 왔대요.”

시누이는 과정을 자세히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이 와서 문을 두드려 시누이가 문을 열고 무슨 일로 올케를 찾냐고 물으니, 그들은 제가 파룬궁을 수련해 서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시누이는 서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서명하지 않으면 데리고 가서 현(縣)에 넘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올케가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이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잡으러 오셨네요. 고향 분들이 이렇게 멀리까지 오셔서, 들어와서 있다 가라고 하고 싶었는데 올케를 잡겠다고 하니 문 앞도 내어주기 싫네요. 가세요, 빨리 가세요. 밥 먹고 할 일이 없어 나쁜 사람은 안 잡고 좋은 사람을 잡나요. 올케는 좋은 사람입니다. 제가 압니다. 저는 봤습니다. 돈과 열쇠를 주워도 기다리며 가자고 해도 안 가고 주인이 와서 찾아가야 떠납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을 어디에 가서 찾겠습니까? 우리 집에 와서도 헌신만 합니다. 행여라도 제가 손해 볼까 봐 무슨 일이나 다 맡아서 합니다. 당신들이 데리고 간다는데 저는 허락할 수 없습니다.” 시누이의 정의로움에 그들은 그냥 물러갔습니다.

그날 오후 5시, 시누이가 택배를 찾으러 나가보니 여성 두 명이 근처 정자에 앉아 있어 왜 아직 안 갔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들은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았다고 했습니다. 시누이의 말을 듣고 저는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밤 11시가 다 되어갈 무렵, 그들은 또 시누이에게 전화해 제가 돌아왔는지 물어서 시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시누이에게 세 가지 조건이 있다며 저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첫째, 서명하라. 둘째, 날 데려가 현에 넘길 것이다. 셋째, 이곳 주민센터나 파출소에 넘겨 처리할 것이다. 저는 옆에서 다 듣고 나서 조카딸네 집으로 갔습니다. 조카딸도 수련생이고 조카딸의 아들도 수련생입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다른 사람의 전화를 빌려 남편에게 전화해 상황을 알려주고 친척 집에 없으니 당분간 전화할 수 없다고 알려줬습니다.

그 기간 저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수련생이 빈집을 하나 제공해 주어 저는 대량으로 법공부, 법암기, 연공, 장시간 발정념을 했습니다. 한 달 정도 조절하니 마음이 안정되고 공간장도 맑아져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고향에 가서 주민센터를 겨냥해 발정념하고 혼자 찾아갔습니다. 가자마자 저를 찾으러 왔던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저를 왜 찾았나요?” 그들은 서명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저는 먼저 도시에서 그들을 만나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그들은 이해한다며 자신들도 하기 싫은 일이라며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도 일하기 쉽지 않다고 말해주고 이어서 제가 겪은 체험으로 대법의 아름다움, 제게 나타난 기적, 서명하지 않는 원인을 말해줬습니다. 저는 대형 교통사고에서 살아난 사람이라고 하니 그들도 인정했습니다. 저는 교통사고가 나서부터 회복까지 전 과정을 얘기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현 인민병원에서 며칠간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내장이 전부 위치가 바뀌었고, 갈비뼈 12대 골절, 1대 파열, 대퇴골 분쇄성 골절, 고관절이 4조각으로 파손됐습니다. 의사는 말했습니다. “반드시 수술해야 합니다. 수술하지 않으면 평생 마비가 될 것이고, 일어난다 해도 다리 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아 계속 힘들 겁니다. 수술한다고 해도 불구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10일 후, 시 중심병원 의사를 초빙해 수술 준비를 했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마취사가 검사지를 보며 간 수치가 10배 이상인 것을 보고 마취를 하지 않겠다며 의사가 멋대로 한다고 질책했습니다. 가족이 듣고 저를 시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시 병원 의사는 각종 검사 결과를 보더니, 수술을 안 해서 다행이라며, 했다면 수술대에서 내려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에서 10여 일 입원하고 수술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검사지를 들고 정형외과 전문의를 찾아가겠다며 그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하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전문의는 두 병원의 검사 결과를 대조해보더니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수술의 고통을 덜었고 현 병원에서 다리에 박은 금속 고정장치만 남겨뒀습니다. 한 달이 지나 고정장치를 빼내고 퇴원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지팡이를 쓰지 않고 휠체어를 2번 정도만 쓰고 집에서 연공을 견지했습니다. 일주일 만에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고 의자와 벽을 잡고 걸을 수 있었으며, 한 달 후에 간병인을 보냈습니다. 남편이 외지에서 일해 저는 혼자 장을 보고 생활했습니다. 반년 만에 완전히 회복했고 지금은 아무 병도 없고 온몸이 가볍습니다.

저는 말하면서 가볍게 뛰어오르는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줬고 그들은 조용히 들었습니다. 저는 또 수련을 통해 가족 간에 서로 죽이려던 원한을 해결한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남편이 억지를 부리는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제 남동생은 성실하고 착한 사람입니다. 남편은 이익 문제로 제 동생에게 의견이 있어 어느 날 저녁, 두꺼운 쓰레받기 모서리로 동생을 공격해 동생은 머리가 터지고 피가 줄줄 흘렀습니다. 병원에 가니 시누이가 당직 의사를 끌고 가버렸습니다. 당직 의사는 시누이의 사위였습니다. 남동생이 버티지 못할 무렵 누가 소문을 냈는지 퇴근한 의사가 와서 간단하게 처치해줬습니다.

섣달 28일에는 또 상처에 고름이 생겼습니다. 남동생은 이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일로 저는 변호사를 선임해 남편을 고소했습니다. 남편은 제가 쓴 ‘혼인 채무 공동상환’을 보더니 8만 위안(약 1600만 원)의 거짓 채무를 적어 저를 협박했습니다. 제가 돈이 없으니 남편도 서명하지 않고 결국 흐지부지됐습니다. 우리는 2년 넘게 별거했습니다. 친지들이 우리 둘을 화해시키려 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저는 ‘전법륜(轉法輪)’을 읽으면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자신의 시련은 모두 전생에 진 빚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예전에 늘 생각했습니다. ‘당신한테 이렇게 잘하는데 왜 날 이렇게 대하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2년 별거 기간 저 혼자 아이를 키우고 남편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지만 저는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이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니 마침 남편이 다리 육종 수술을 해 돌보는 사람이 없어 그의 동료가 남편을 제가 사는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저는 그를 간호해줬습니다. 당시에 저는 큰 압력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친정 식구가 이해하지 못해 저와 말도 섞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부님의 법이 제 선량한 본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부부는 인연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만약 오늘 그를 포기한다면 그는 자포자기할 것이며 인생을 망치게 될 겁니다. 제가 선한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이면 그도 감동해 개과천선해 가족이 다시 화목해질 겁니다. 아이도 아빠가 있어야 온전한 가정이 됩니다.” 저는 수시로 친정 식구를 타일렀습니다. 가족들은 제가 수련한 후 질병이 다 사라지고 아이도 잘 키우는 것을 보고 모두 대법 사부님께 감사드렸으며 제가 한 말도 들어주었습니다. 반년이 지나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편이 장례식에 오니 친정 식구들이 받아줬습니다. 점차 그들과 남편 사이의 원한이 사라져 지금은 사이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주민센터 두 직원은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더는 서명에 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퇴근할 무렵 그들은 저에게 집에 가서 밥을 해야 하지 않냐며 퇴근할 때가 됐다고 해서 저는 그럼 먼저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일어나서 미소를 띤 얼굴로 제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들과 인사하고 저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가니 남편이 어디 갔었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주민센터에 진상을 알리러 갔었고 그들이 서명하라고 하지도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놀라며 의아해하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허스.

 

원문발표: 2022년 7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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