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도명(道明)
[밍후이왕] 내가 아는 한 수련생은 1999년 박해를 받고 수련하지 않다가 몇 년 후 수련생들의 도움으로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그녀는 내게 자신이 법학습이 부족하다고 했다.
몇 년 후 그녀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분명히 그녀가 법학습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지적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스스로 말했다. “저는 법학습이 부족해요.” 나는 그녀가 자신의 문제점을 알고 있으므로 반드시 정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몇 년이 지나 그녀를 만났는데 그녀는 여전히 같은 말을 했다. “저는 법학습이 부족해요.” 나중에 나는 그녀가 거의 이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을 발견했다. 이 말투는 첫째, 자신이 안으로 찾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둘째, 자신에게 나타난 법을 벗어난 어떤 언행이라도 이 말을 방패막이로 삼을 수 있다. 법학습이 부족하다는 것은 정진하지 못한다는 것이지, 잘하지 못하는 구실이 될 순 없다.
많은 노수련생이 교류하자마자 안으로 찾기 시작하는데, 이런저런 마음이 한 무더기다. 그리고 어떤 수련생은 행위가 법에서 벗어났어도 당신은 그녀를 질책할 수 없는데, 당신이 막 지적하려 하자마자 그녀는 앞다퉈 자신을 좀 분석해 당신보다 찾아낸 마음이 더 많고 완전하다고 한다. 10여 년 내내 아직도 자신이 잘 수련했고 그 누구도 자신이 집착심을 찾는 것보다 많이 찾아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집착심을 십수 년이나 그곳에 방치하고 제거하지 않으면서 늘 들고나와 중얼거린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으로 찾으라고 하셨지만 집착을 찾아내 거기에 놓아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닦아 제거하고 멸해버리라고 하셨다. 집착심을 찾아낸 것이 많다고 해서 수련을 잘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들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없고 그것을 입에 발린 말로 삼아 스스로 분석해 자신이 잘 수련했다고 과시하거나, 방패막이로 삼아 다른 사람의 권유를 듣지 않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안으로 찾는 목적이 불순하다
우리가 때때로 안으로 찾는 것은 풀리지 않는 모순이 발생했을 때 부득이 안으로 찾는 것인지라 목적이 불순해진다. 우리는 때때로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으로 찾지, 객관적으로 수련의 기점에서 자신의 경지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진정하게 안으로 찾지 못한다.
어떤 노수련생은 자녀나 손자들이 안 좋은 일을 당하면 자신이 잘 수련하지 못했다고 반성하는데, 자신이 잘 수련했다면 아이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 목적은 자녀들을 행복하고 평안하게 하거나 자신이 건강해져서 자녀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수련생은 자신의 자식에게 돈을 다 갖다 바쳤고, 또 아껴 써야 하는 유일한 노령연금까지 짜내 자식에게 보탠다. 이뿐만 아니라 이런 행위가 자식이 자신의 소업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인지, 아니면 자신의 억측인지 모르겠다. 자식이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필사적으로 안으로 찾고 적극적으로 진상을 알리며 정진실수(精進實修)한다. 겉으로는 착실하고 성실하게 수련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각고의 수련을 통해 아이들이 더욱 잘 살게 하려는 것이다. 안으로 찾을 때 그야말로 마땅히 제거해야 할 마음은 빙빙 돌기만 하면서 건드리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병업관을 장기간 돌파하지 못하면 필사적으로 안으로 찾는데, 결국 병업을 제거하기 위해 닦게 된다는 것이다. 기점이 틀렸는데 어떻게 진정으로 안으로 찾을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안으로 찾는 것은 법이고, 법은 곧 수련에 쓰이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바르게 믿고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사부님께서 친히 전하시는 제자인데 우리가 바르게 믿고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조사정법(助師正法)할 수 있겠는가?
대충대충 안으로 찾다
나는 한 수련생을 접촉한 적이 있다. 그 수련생은 안으로 찾는 것이 매우 얕고 일이 생기면 안으로 찾을 수 있기는 하지만 뭘 찾았느냐고 물으면 항상 “아, 사람 마음이지요”라고 한다. 더 깊이 파헤쳐 보라고 하면 “아, 사적인 거예요”라고 한다. 더 깊이 파고들게 하면 그는 짜증을 참지 못하며 “무슨 집착이든 모두 사람 마음이잖아요”라고 한다. 사실 이처럼 대충대충 안으로 찾는 것은 일종 정신적 게으름이다. 어떤 집착에서 비롯된 모순인지도 깨닫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제거할 수 있겠는가? 나중에 다시 모순이 생기면 에돌아간다.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넘실거리고, 비가 오면 물 따라 흐른다’는 이런 방법으로 매번 그럭저럭 지나가면 한 경지에서 배회할 수밖에 없다. 이런 방법으로는 성취하기 어렵다.
나는 일찍이 ‘간악한 지혜는 어떠한 간언도 물리칠 수 있었고, 교묘한 말재주는 자기의 잘못을 합리화할 수 있었다’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매우 강한 성격이었기에 나를 안으로 찾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설사 명백히 틀렸다 하더라도 변명하고 절대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법을 배우고 마음을 닦으면서 내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 바로 사(私)라는 것을 점점 깨달았다. ‘사(私, 개인)’는 또 ‘사(死, 죽음)’와 같은 발음(스, si)이다. 나는 내가 다시 고집스럽게 이 사(私), 즉 ‘죽음에 이르는 막다른 길’을 지키려는 것을 뚜렷이 의식했다. 대법의 감화로 나는 점차 성숙해져서 안으로 문제를 찾아내면 즉시 제거하고 결코 안일하게 굴지 않았다. 올해 내게 이 마음이 있다면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절대 이 마음을 갖고 있을 수 없다. 내가 어떤 한 집착심을 깨끗이 제거할 수 있다고 말할 순 없다. 그러나 나는 경지가 제고된 후 같은 집착심이 다시 나타난다는 것을 뚜렷이 느낄 수 있으며, 전과는 다른 심성 경지로 그것을 대할 수 있었다. 물론 반복은 일상적이다. 그러나 나는 좌절하지 않도록 자신을 격려하고 경험과 교훈을 정리하곤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집착을 제거할 때는 더욱 가슴을 도려내고 뼈를 발라내는 듯하다. 보통 나는 대량의 법학습을 통해 이를 돌파한다.
법학습과 심성 수련을 강화하는 수련은 곧 반복적인 단련이고, 마지막에는 진금(眞金)을 연마할 수 있을 것이다.
약간의 얕은 견해이니 아낌없이 바로잡아주길 바란다.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현재 인식에 따라 작성된 것이므로, 수련생들이 서로 교류하고 ‘비학비수(比學比修)’ 하는 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2년 6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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