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린성 수련생 징수이(靜水)
[밍후이왕] “표범은 반점을 바꿀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정말 열심히 노력해도 사람 성격이 바뀌는 건 정말 어렵다. 나는 파룬따파가 어떻게 나를 반항적인 여자, 잔소리가 심한 아내에서 항상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켰는지 이야기하려고 한다.
늘 싸우는 말괄량이
나는 1969년생이다. 부모님은 첫딸인 내가 착하기를 기대하셨다. 그래서 내가 굉장히 반항적이고 전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많이 놀라셨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몰랐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항상 싸웠다. 머리가 짧고 또래에 비해 키가 작고 말랐지만, 완전히 말괄량이였다. 그러나 나는 싸움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벽돌, 돌, 막대기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썼다. 나는 다른 아이들을 때리고 욕했다. 부모님이 꾸짖고 체벌했지만 나는 울거나 용서를 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속으로 내 잘못을 알았기 때문에 나를 때린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는 더 폭력적이었다. 때로는 한 번에 여러 명과 싸우기도 했다. 아이들의 부모는 종종 우리 집에 와서 내 부모에게 하소연했다. 그들이 떠난 후, 부모님은 내가 변하기를 바라면서 나를 때렸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격적인 성향이었지만 나는 서유기, 홍루몽, 삼국지연의, 봉신연의 등 고전을 많이 읽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궁금한 것이 많았다. “사람은 왜 죽는 걸까?”, “죽음 이후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죽은 후에 환생하는가?”, “우리가 영원히 살 방법이 있을까?”
그러나 누구도 내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탄식했다.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시간을 낭비하는 거니? 네가 잘 먹으면 우리는 행복해. 다른 것은 없어.” 그래도 나는 동화나 신선이 되고 득도하는 이야기를 읽는 것을 좋아했다. 마을에서 누군가가 죽으면 나는 인간의 짧은 삶을 슬퍼했다.
어렵게 결혼
시골에서는 여자들이 보통 스무 살이 되면 결혼을 한다. 나는 수능에 떨어진 뒤 집에서 지내면서 24살이 될 때까지 남편을 찾지 못했다. 엄마는 내가 까다롭다고 자주 꾸짖었다. 나는 화가 나서 엄마에게 말했다. “장애인만 아니라면 다음에 청혼하는 사람과 결혼하겠어요.”
1993년에 누군가가 나를 키가 크고(180cm) 군에서 제대한 레이와 연결해 줬다. 그러나 그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제대 후에도 안정된 직장이 없었고 집안도 가난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가 그와 데이트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레이의 어머니도 거리낌 없이 말하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양가 어머니의 반대에도 레이와 나는 3개월 만에 결혼했고 나는 예물을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결혼한 후에 레이가 사실 직업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종일 도박과 싸움이었다. 두 형과 누나는 이미 결혼했고, 아직 미혼인 여동생은 방이 두 개인 단층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우리는 집을 빌리거나 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맏형이 사는 집으로 들어갔다.
레이는 평소처럼 도박을 계속했다. 결혼하기 전에 친정어머니가 400위안(약 7만 원)을 주셨는데, 레이는 결혼 다음 날 그것을 빼앗아 도박으로 잃었다. 돈을 따면 먹을 것을 사 왔고 잃으면 빈손으로 돌아왔다.
레이는 집에서 나에게 거의 말을 걸지 않았고 물어도 답하지 않았다. 내가 몇 마디 하면 그는 짜증을 냈다. 때때로 그는 밤에 돌아오지 않았고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으면 화를 냈다. 그는 집에 돌아온 후 매일 술을 마셨고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친절하고 수다스럽기로 소문이 났다. 그녀는 늘 웃었고 이웃을 도우려 했다. 그러나 나를 볼 때마다 얼굴이 굳어졌다. 반면에 시아버지는 친절했다.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는 레이 앞에서 종종 내 험담을 했고, 그다음 레이는 가끔 나와 다퉜다. 그것이 나를 화나게 했고, 나는 시어머니에게 가지 않았다.
나는 곧 임신했다. 과일이 먹고 싶었지만, 레이는 과일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사주지 않았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되어 나는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그만뒀다. 결국,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를 잘 알지 못했다. 우리는 원수 같아서 볼 때마다 말다툼했다. 아기가 태어난 후 이혼하기로 했다. 아들이면 남편이 양육권을 가질 것이고, 딸이라면 내가 데려갈 예정이었다.
우리는 친정에서 약 64km 떨어진 곳에 살았고, 어머니가 가끔 오셨다. 그러나 나는 내 고생에 대해 불평할 수 없었다. 결국, 결혼은 내 결정이었고, 부모님이 이미 연로하셨기 때문에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속 이야기를 할 사람이 거의 없어 매우 우울했고 이혼할 날만 기다렸다.
1995년에 딸이 한 살 되었을 때 레이와 나는 다음 날 이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이웃 사람이 요통 때문에 호흡 곤란이 와서 레이가 그를 병원에 데려갔다. 그 이웃이 엑스레이 촬영을 했고, 레이도 찍었다. 친척이 그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무료였다. 데려갔던 이웃은 이상이 없었고 레이가 결핵 진단을 받았다. 이미 오래되었다고 의사가 말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레이는 흡연, 음주, 고된 노동을 할 수 없었고, 화를 내서도 안 되기 때문에 비참했다. 게다가 그는 먹어야 했다. 그의 상황을 보고 나는 우선 그를 도와주고 나중에 이혼하기로 했다.
결핵 환자는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데 그 약이 간과 신장을 손상한다. 부작용에 대처하기 위해 잘 먹어야 하는데 돈이 많지 않았다. 나는 직장을 구하기로 했다. 직장에 있는 동안 시어머니에게 딸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어린 딸을 친정 부모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친정이 멀어서 휴일이나 비번인 날에만 딸을 볼 수 있었다. 딸이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친정 부모님 집에서 살았다. 나는 시어머니가 매우 원망스러웠다. “손녀를 돌보지 않으면서 어떻게 매일 마작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이웃의 도움으로 도매시장의 신발 판매장에서 일했다. 1990년대에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수입이 많지 않았다. 나는 한 달에 600위안(약 11만 원)을 벌고 그곳에서 점심을 사 먹어야 했다.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하루 11시간을 일했는데 너무 힘들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버스를 타지 않고 레이가 구해준 낡은 자전거를 탔다. 나는 자전거 타는 속도가 빨라서 8km를 30분 만에 달릴 수 있었다.
그해 여름에 비가 많이 내렸다. 비옷을 입어도 젖어서 춥고 배고팠다. 겨울에는 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나는 자주 넘어지고 멍이 들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1위안짜리 만두와 50센트짜리 장아찌를 샀다. 이런 식으로 나는 점심으로 한 달에 100위안(약 1만 8천원)을 저축하고 수입 중 나머지 500위안(약 9만 원)은 레이에게 줘서 좋아하는 음식을 사 먹도록 했다. 레이는 매우 감동했고 3년 만에 완전히 회복되었다.
나는 일하면서 사람을 많이 만났다. 차츰 열린 마음이 되었다. 하지만 손님에게 욕을 하는 것은 일상이었고 때로는 그들과 싸웠다.
파룬궁 수련생이 되다
1997년 어느 날 아침, 나는 부스에서 신발을 다 닦고 다른 판매원인 주가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봤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책을 빌릴 수 있냐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 책은 당신이 읽을 책이 아니에요. 불가 수련법입니다. 당신은 화를 잘 내며 자주 욕을 해서 소용없을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빌려주세요. 우리 집안 모두가 부처를 믿어요,” 내가 다시 부탁했다.
그러나 주는 다시 고개를 저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구두를 닦은 후, 나는 손을 씻고 책을 빌리러 주에게 갔다.
“책 좀 빌려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읽을 생각도 하지 마세요.” 내가 말했다.
“알았어요. 여기 있어요. 읽으세요. 하지만 당신이 책 내용을 믿지 않는다면, 나쁜 말을 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좋지 않아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내가 답했다.
그 책의 제목은 파룬궁이었다. 두껍지 않고 손님도 많지 않아서 정오가 되기 전에 책을 다 읽었다.
“이 책은 훌륭하다. 나도 파룬궁을 배우고 싶다.” 책을 돌려주며 내가 말했다.
“당신은 늘 사람들을 욕하는데, 어떻게 수련할 수 있겠어요?” 주가 물었다.
“나는 달라질 거예요. 믿으세요.” 내가 답했다.
나는 파룬궁의 창시자인 리훙쯔 사부님의 9일 학습 비디오를 보기 위해 9일 동안 매일 퇴근 후에 주의 집에 갔다. 다섯 가지 공법 연공을 배웠고 파룬궁 책을 구했다.
그 가르침에서 나는 덕(德)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수련은 모두 덕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처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욕하고, 싸우고, 남을 나쁘게 대하면 덕을 잃는다. 그래서 이 모든 행동을 고쳐야 했다. 파룬궁의 가르침은 또한 살생을 금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나는 활어를 먹지 않고 냉동만 샀다.
사부님은 또한 여성은 남편을 부드럽게 돌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나는 수련생으로서 누구에게나 친절해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나쁘게 대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업력의 빚일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예전에 남편에게 했던 행동을 후회했다.
사부님께서는 또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수련할 수 있다고 언급하셨다. 이는 가족을 책임지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남과 경쟁하지 않고, 사업을 할 때 남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임을 깨달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수련은 참으로 대단했다. 공무원과 일반 서민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돕는다. 인종, 연령, 경제적 상황과 관계없이 누구나 무료로 편하게 수련할 수 있다. 게다가 착실하게 열심히 수련하면, 원만에 이를 것이다. 이는 정말 대단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이해가 깊어졌다. 예를 들어 수련이란 집착과 사람의 관념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질병은 자신의 업력의 소치다.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내가 파룬궁에 따라 수련하는 한 사부님께서 모든 것을 살펴 주실 것이다.
돌이켜보면 스스로 놀랍다. 오랜 세월 부모님이 꾸짖고 수없이 때렸어도, 나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한 후에는 항상 미소를 지으며 남을 잘 대했다. 게다가 나는 기운이 넘쳤고 기분이 좋았다. 남편과 시어머니에 대한 태도가 극적으로 좋아졌다. 모든 분노가 사라졌다.
설날에 부모님 댁에 갔을 때 친지와 이웃들에게 스승님의 9일 강의를 틀어줬다. 아버지와 둘째 여동생이 수련을 시작했고 몇몇 친척들도 수련을 시작했다. 달라진 내 모습에 마을 사람들이 놀라면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은 파룬궁입니다.”
성격 개선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심성(心性)제고를 위한 시험이 왔다.
어느 날 내가 구두를 닦고 난 직후, 손님이 와서 내게 있는 거의 모든 남성용 신발을 한 켤레씩 신어 보았다, 나는 그에게 신발을 찾아주고 신발이 편한지 확인하느라 바빴다. 마지막에 그는 아무것도 사지 않고 떠났다.
다른 판매 직원이 이를 언급했다. “저 사람 좀 봐. 애초에 신발 사러 온 건 아닌 것 같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신발과 상자들을 보며 전혀 속상하지 않았고 그냥 치웠다. 사실 나도 내가 어떻게 이렇게 침착할 수 있는지 놀랐다.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나는 그를 욕하고 아마도 때리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충동은 모두 사라졌다. 시장의 몇몇 판매원은 내가 한바탕 싸우기 시작할 거라 예상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매일 행복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는 가끔 기뻐서 펄쩍펄쩍 뛰기도 했다. 아침에 단체 연공을 마치고 출근하고, 단체 법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마음가짐이 좋아지면서 주변 환경도 달라졌다. 남편은 완치된 후 전기공이 되었다. 그는 가족을 돌보았고 가끔 그릇을 사 왔다. 시어머니는 여전히 친절하지 않았지만 나는 마음에 두지 않고 잘 대했다. 시어머니에게 과일을 가져다주고 가끔 요리를 해드렸다. 시아버지는 매번 내게 고마워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어머니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시누이도 나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가끔 옷 같은 작은 선물을 주기도 했다.
군대 동기를 만나면 레이는 종종 말했다. “너희들 아내는 내 아내에게 배우라고 해. 그들이 파룬궁을 배우면 부부싸움도 하지 않을 것이고 아내가 나쁜 짓을 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
“며느리가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었고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한다고 당신 시어머니가 말했네.” 한 이웃이 내게 말했다.
“우리 모두 파룬궁에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답했다.
길에서 마주치면, 예전에는 그저 나를 무시했던 시어머니가 지금은 인사를 건네신다. 시어머니는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모든 사람이 파룬궁을 수련하면 세상은 훨씬 더 나은 곳이 될 거예요. 모두 선량해서 경찰도 필요 없게 될 거예요.”
당시 심성 제고는 비교적 쉬웠다. 그러나 가부좌하고 명상하는 것은 어려웠다. 다리가 뻣뻣해서 고생해야 했다. 결가부좌를 하는 데 1년이 걸렸다.
직장에서 나는 종일 행복했다. 더는 누구와도 다투거나 싸우지 않았다. 예전에 했던 나쁜 말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항상 웃고 있는 나를 보며 몇몇 영업 사원이 이유를 물었다. “글쎄요, 저는 이제 파룬궁 수련생이고 수련을 통해 건강하고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기뻐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파룬궁의 가르침을 계속 공부하면서 나는 완전히 바뀌었고 더 많이 남편을 배려하게 되었다. 남편 또한 달라졌다. 그는 집을 청소하고 빨래하고 바닥을 닦고 장을 보고 요리했다. 또한, 내 수련을 매우 지원해 주어서 기뻤다.
하지만 매번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한번은 같이 밥을 먹다가 남편이 갑자기 두 번이나 뺨을 때렸다. 이유도 모르고 울면서 나갔다.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나는 주로 때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수련을 시작하고 나니 다른 사람들이 나를 때렸다. 힘들었지만 인내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그래서 나는 눈물을 닦고 상을 치우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남편은 자기가 나를 때린 이유를 모른다고 했다. 사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몰랐다. 사부님께서 남편을 통해 나를 시험하고 제고하도록 도와주셨음을 깨달았다.
매일 출근하기 전에 시부모님께 아침밥을 차려주던 시절이 있었다. 시이모님이 우리 가정의 화목함을 좋아하며 당신의 돈으로 시부모님 집이 있는 땅에 방 세 칸짜리 집을 지어주셨다. 시이모님은 당신의 언니 부부 즉 우리 시부모님이 아들 며느리와 여생을 보내길 원했다. 집의 설계가 괜찮은지 남편이 물었고 나는 좋다고 했다. 그래서 시부모님과 어린 딸과 손자가 새로 지은 집에 살고 우리 부부는 시부모님의 옛집에 살았다. 우리 대가족은 매 식사를 함께했다.
어느 날 시어머니는 당신이 일찍 일어나니까 아침밥을 준비할 수 있다고 했다. 너무 고마웠고 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지 않았다. 놀랍게도, 내가 일어났을 때 시어머니가 옆 방에서 남편에게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네 아내는 정말 게으르다. 일찍 일어나서 아침밥을 할 필요 없지만, 내가 아침밥을 하는데 자고 있다.” 나는 변명하지 않고 계속 가족을 위해 아침밥을 했다. 시어머니는 불평을 그만두었다. 남편도 더 나아져서 시어머니가 나에 대해 뭐라고 하든 더는 나와 논쟁하지 않았다.
심성 고험에서 가장 어려웠던 사람은 남편의 둘째 형 량이었다. 그는 삼륜차로 돈을 벌었지만, 식비를 한 푼도 쓰지 않았다. 그는 매일 아침 식사를 하러 왔으며, 시어머니가 한 달에 30위안(약 5600원)을 내라고 했지만 한 푼도 쓰지 않았다. 그는 “오늘 음식은 너무 밍밍하다. 그 요리는 너무 짜다. 맵다. 밥이 너무 연하다, 국물이 너무 담백하다, 채소를 제대로 썰지 않았다” 등등 나에게 불평도 했다. 시어머니가 “왜 너희 집에서 먹지 않느냐”고 물으니 우리 집이 더 맛있다고 했다.
내가 그의 동생과 결혼한 이후, 량은 만날 때마다 나에게 나쁜 말을 했다. 때때로 그는 내가 너무 어리석다며 심지어 세 살배기라도 나보다 똑똑하다고 했다. 내가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하자 나를 어리석다고 했다. 그것은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전생에 내가 그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으려니 생각했다.
시어머니에게 약 360평 정도의 채소밭이 있다. 시어머니는 그곳에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기로 했다. 그러나, 량이 자기 집을 팔아버리고 매일 땅을 달라고 했다. 결국, 그는 그 땅을 가졌다. 그런 다음 그는 도시 개발에서 사유지를 인수할 때 정부로부터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생각으로 그 땅에 집을 더 많이 지으려 했다. 그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집을 짓는 데 투자하는 사람은 나중에 보상의 50%를 받게 될 것이라고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량이 체면을 잃을까, 우리 부부는 모든 저축을 인출하여 량에게 줬다. 그는 집과 차고와 창고를 지었다. 량 부부는 나중에 정부 보상의 절반을 우리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우리도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로 생각하며 기뻤다. 우리는 그 돈으로 딸에게 큰 아파트와 차를 사줄 꿈을 꿨다. 그러나 정부가 실제로 땅을 인수하고 량 부부에게 보상했을 때 그들은 우리 모르게 모든 서류에 서명했다. 그들은 그 돈을 받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
레이와 나는 한 푼도 받지 못해 화가 났다. 당시 많은 집안이 정부의 보상 문제로 내부 갈등을 겪었다. 수련인이 된다는 것은 명성과 물질 이익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게 큰 금액[100만 위안(약 1억 9천만 원)] 앞에서 나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나는 남편을 설득해야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돈이 없어도 괜찮아요. 모두 안전한 이상 다 잘 될 거예요.” 과거의 나는 이렇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라도 돈을 위해 싸웠을 것이다.
손아래 시누이 란도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그녀는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다. 그녀의 태도는 책장을 넘기는 것보다 훨씬 빨리 바뀔 수 있다. 모든 친척과 이웃이 그녀를 두려워했다.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집안에서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 중 누구도 감히 란에게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위, 요리용 칼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던졌다. 기분이 나쁠 때, 그녀는 화풀이 대상을 찾았다. 지칠 때까지 멈추지 않았고 나는 종종 그녀의 표적이 되었다.
한번은 내가 쉬는 날 시어머니와 대화하고 있었다. 란이 우리 대화를 엿들었고 실제로 내가 그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는데도 자기를 욕하고 있었다고 우겼다. 나를 따라다니며 자기를 험담한 적이 있는지 물으면서 욕을 했다. 그런 적 없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믿지 않고 계속 욕설을 퍼부으며 친정 부모님과 내가 아는 다른 사람들까지 욕했다. 그녀는 몇 년 전의 일을 끄집어냈다. 시어머니가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내가 그녀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고 증언해줬다. 그러나 란은 자기 엄마가 내 편을 든다며 포기하지 않았다.
시누이가 말했다. “당신은 진선인(真·善·忍)을 따르는 파룬궁 수련생이다.” “참을 수 없다면 가짜 수련생이다.”
그날 저녁 남편이 집에 돌아왔을 때 란이 남편에게 나를 바로잡으라고 했다.
레이가 미소를 지으며 “그럴 필요없다”라고 했다. “당신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
란은 오래 욕하다가 결국 지쳐 나에게 물었다. “말해봐, 내가 당신을 부당하게 대했나?”
나는 웃으며 답했다. “아니에요. 뒤에서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녀의 분노는 그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란은 20년 동안 우리와 함께 살았다. 내게 잘못이 있으면 그녀는 바로 지적했다. 내가 잘하면 그녀는 파룬궁을 칭찬했다. 내가 신념을 지켜 괴롭힘을 당했을 때, 그녀는 나서서 최선을 다해 나를 지켜줬다. 내가 집을 떠나 있었을 때 그녀는 우리 대가족을 돌봤다.
(2편에서 계속)
원문발표: 2022년 5월 23일
문장분류 :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2/5/23/442895.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2/5/23/442895.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22/5/24/20148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