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베이징 청원,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이야기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22년의 수련 과정에서 경험하고 견증한 이야기가 많다. 이야기와 관련된 사람 중에는 겨우 한 번만 본 수련생도 있고, 지금까지 이름을 모르는 수련생도 많지만, 그녀들의 이야기를 잊은 적은 결코 없다. 이 이야기들은 마치 진주알처럼 내 기억의 깊은 곳에 흩어져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다. 그 중의 진주알 일부를 꿰어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1999년 7월, 사악한 당의 우두머리 장쩌민이 모든 탄압기구를 동원해 공포의 기세로 파룬따파와 대법 사부님을 상대로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비방과 모함을 하였다. 많은 대법제자는 정부가 진상을 잘 모른다고 여겨 자신들이 수련하여 착해지고 건강해진 진실한 경험을 정부에 반영하며, 대법의 아름다움을 실증하고 사부님의 결백을 되돌리고자 했다. 수많은 대법수련자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연이어 베이징 평화청원의 길을 걸었다. 이는 단지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고, 마음속에 담아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말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선량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탄압과 고문, 감옥, 심지어 행방불명이었다. 대법제자는 자신들이 사는 성(省)의 공직자나 회사 간부가 연루되지 않도록 이름과 주소도 대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수련생은 호적이 없는 사람으로 분류되어 공안 데이터에 번호로 매겨졌다.

2000년 6월, 나와 여동생은 대법을 위한 평화청원을 하러 베이징에 갔다가 베이징 교외의 스리취(十里渠) 수용소에 불법감금 되었는데, 입고 있던 옷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없었지만 여경으로부터 강제로 알몸수색을 받았다. 감옥 측은 우리에게 그 어떤 생활용품도 판매하지 않았으며, 감방에는 이불도 없어 환경이 아주 열악했다. 베이징에 간 대법제자가 많아 모든 감방이 꽉 들어찼는데, 내가 있던 6인용 침대가 있는 감방에는 20명 정도의 대법제자가 있었다. 이 수련인들은 다들 매우 선량했고, 일함에 타인을 고려할 줄 알았다. 사람은 많지만 침대가 적어 다들 앞다퉈 차가운 바닥이나 악취가 풍기는 화장실 옆에서 자고, 판자 침대는 다른 이에게 양보하려고만 했다. 어떤 수련생은 다른 수련생이 다리를 편히 펴고 자게 하려고 자신은 매일 밤 벽에 기대어 앉아 잠을 잤다.

악랄한 경찰은 감방의 방충망을 고의로 뜯어냈다. 밤에는 밝은 불빛이 모기를 더 많이 모이게 하는데, 교외의 모기는 크고 독이 있어 수련생들 모두 물려서 온몸에 큰 혹이 생겼고, 잠결에 긁어 피가 나곤 했다. 작고 통통한 한 노년 수련생은 다른 이들이 편하게 잘 수 있게 매일 밤 옷을 휘둘러 모기를 쫓느라 아주 적게 잤다. 한 노년 수련생은 자신의 흰색 러닝셔츠를 찢어 수건 대용으로 쓰게 했다. 또한, 언제 새 휴지를 얻을 수 있을지 몰라 두 개뿐인 휴지를 서로 아껴가며 사용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선(善)을 수련하는 수련생들의 그 마음은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함께 법을 외우고 연공하고 서로를 북돋워 주면서 다들 평화롭고 침착하게 행동했다.

사람을 때리는 경찰을 위해 눈물을 흘린 수련생

이 노년 수련생은 키가 크고, 피부는 하얗고 생기가 있었기에 수련하기 전에 각종 심각한 질병에 시달렸던 사실을 누구도 보아내지 못했다. 이 수련생이 72세라고 직접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60세 정도인 줄 알았을 것이다. 이 수련생은 사투리가 심해 주의 깊게 들어야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번은 이 수련생이 불법 신문을 받고 감방으로 돌아왔는데, 운 것이 티가 날 정도로 눈이 시뻘겠다. 모두 관심을 두고 이 수련생에게 맞았는지 물어보았다. 이런 일은 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노년 수련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찌 된 일인지 말해주었다. 젊은 경찰이 어디에서 왔는지 묻기에 이 수련생은 자신이 수련하고 모든 병이 다 나은 경험을 그 경찰에게 알려주면서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어 가정도 화목해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저는 이름과 주소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지역의 공무원이 면직당할 수도 있어요. 그분들은 그 자리에 어렵게 올라갔을 텐데, 제가 누를 끼칠 순 없지요.”라고 했다. 하지만 그 경찰은 전혀 듣지 않고 이 수련생을 때리기 시작했다. 흉악하게 구는 경찰을 보고 가련한 마음에 수련생은 즉시 눈문을 흘리며 “내 나이 벌써 70세가 넘었어요. 당신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은데,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수련인을 욕하고 때리면 업을 지어 장래에 지옥에 떨어져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떡해요?”라고 했다. 수련생들은 이 말을 듣고 그 경찰이 가여워 탄식하는 한편, 이 노년 수련생의 선량함에 탄복하고, 금쪽같은 수련생의 착한 마음씨에 감동했다!

사흘을 걸어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한 수련생

감방에는 약간 까만 피부를 가진 수련생이 있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매우 수척해 보였고, 한 손으로 가슴을 감싼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안문광장에서 경찰에게 폭행당해 갈비뼈를 다쳤고, 아픈지 벌써 며칠이 지났었다. 서른이 좀 덜된 이 수련생은 억양이 간쑤(江蘇)성과 저장(浙江)성 일대 사람으로 보였다. 옷차림은 노점에서 가장 싼 그런 옷이고, 장기간 노동을 한 흔적으로 미루어보아 궁핍한 생활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중에 대화를 나눠보니 내 추측이 맞았다. 몇십km나 되는 산길을 걸어 나와서 차를 탔는데, 돈이 없던 그녀는 80여 위안을 겨우 빌려 자신이 만든 건량미를 챙겨 큰 산을 빠져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80여 위안으로는 베이징에 갈 수 없었기에 베이징과 가장 가까운 곳의 차표를 끊어서 타고 오다가 나머지 거리를 사흘간 걸었는데, 이 사흘간 굶으면서 마침내 천안문광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청원한 길이 없었기에 천안문광장에서 사람들에게 ‘파룬따파는 정법(正法)입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법과 사부님을 위하는 수련생의 그런 경건함과 굳건한 믿음에 나는 정말로 놀랐다!

두려워도 이름과 주소를 발설하지 않은 수련생

남방의 한 젊은 여성 수련생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기를 좋아했는데, 고등학생처럼 가녀리고 얌전했다. 그녀에게는 갓 2살이 넘은 아이가 있는데, 아이가 그리운지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게 “저는 담이 작아 정념이 있는 수련생과 함께 있고 싶어요. 그러면 저에게도 정념이 생길 것 같아요.”라고 했다. 내가 “담이 작은데 왜 베이징에 왔어요?”라고 묻자 “당연히 와야 한다고 생각해서 왔어요.”라고 했다.

수련생들은 악랄한 경찰의 불법감금에 단식으로 항의하기로 했다(우리보다 앞서 감옥에 들어온 수련생들이 며칠 전에 한 여성 수련생이 음식물 주입을 당하다 파이프가 기도에 꽂혀 그 자리에서 질식사했다고 알려주었다). 단식으로 항의한 지 나흘째 우리는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당했다. 고문실 양쪽에 철제 침대 2대가 놓여 있고, 침대 난간에는 수갑이 4개 달려있어 사람을 침대에 고정할 수 있었다. 남성 재소자 몇 명은 코로 음식물을 주입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며 준비를 했다(파이프를 콧구멍에 꽂아 식도를 거쳐 위장에 삽입한다). 내게 파이프를 꽂을 때, 마음속으로 ‘꽂아도 안 들어갈 것이다.’라고 묵념했다. 그 결과, 아무리 해도 꽂히지 않아 한참 여럿이 돌아가며 시도했지만,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반복되는 게 귀찮아진 나는 마음속으로 ‘언제 끝나려나. 꽂혀야 끝나려나.’라고 생각하자 파이프가 쏙 들어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느낌에 답답해진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당시에 ‘나한테 꽂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다면 정말 그렇게 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나중에야 했다.

감방으로 돌아온 후에 그 젊은 수련생의 연한 분홍색 티셔츠에 큰 발자국을 보았다. 그녀는 내게 “저는 당신의 뒤에 있었어요. 당신이 음식물 주입을 당할 때 비명을 지르는 걸 들었는데, 당신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까 두렵더라고요. 제 차례가 됐을 때, 이미 밥을 먹어서 주입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 ‘먹었어도 주입해야 한다!’라고 했어요. 그들은 사람을 고문하기 위해 그러는 거였죠. 그 뒤에 그 사람이 제게 두려운지 물었어요. 제가 ‘두려워요!’라고 하자 그는 ‘어디서 왔지?’라고 물었어요. 저는 ‘말 안 할 거예요!’라고 했어요. 나중에 그 사람이 저를 발로 걷어찼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내 비명이 수련생에게 그렇게 큰 공포를 심어주리라곤 생각지도 못해 매우 부끄러웠다. 수련생은 그토록 순수하고 마음이 수정처럼 맑고 고왔다.

며칠 후에 우리 회사의 지도자가 나를 찾아와 고향으로 데려가 불법감금 했다. 그들이 베이징 경찰에게 3천 위안(한화 약 56만 원)을 지불하고 베이징 방문 명단에서 이름을 지워줬다. 그때 장쩌민이 “청원하는 대법제자가 많은 성(省)은 그 성의 관리를 면직한다.”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각 성과 시에는 청원하는 대법제자를 가로막기 위한 ‘베이징 주재 사무소’의 관리가 베이징 경찰에게 대법제자 한 명당 3천~5천 위안을 내고 데려와 베이징 경찰은 큰 횡재를 했다. 이 때문에 베이징 경찰은 온 힘을 다해 대법제자를 심문하고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려 한 것이다. 각 지역 경찰은 또 그 비용을 대법제자에게 전가해 어떤 대법제자는 심지어 몇만 위안을 벌금으로 갈취당했다. 장기간 심문해도 이름과 주소를 발설하지 않은 대법제자는 여러 대의 버스로 실려 갔다. 몇 년 후에 지구에서 유례가 없는 피비린내 나는 생체장기 적출 죄악이 폭로된 후에야 버스로 실려 갔던 그 대법제자들이 비밀수용소나 지하병원에 감금되어 중공의 생체 장기적출의 공급원이 되어 무고한 피해자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20여 년이 지났다. 더는 그 수련생들을 만나지 못했고, 그녀들과 관련된 어떤 소식도 모른다. 그 수련생들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들이 여전히 건재하게 수련하고 사람을 구하는 바른 길을 걷고 있기를 너무도 간절히 바란다!

 

원문발표: 2022년 5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2/5/16/437190.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2/5/16/437190.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