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헤이룽장 대법제자 신신
[밍후이왕] 우리 어머니는 50세에 뇌혈전이 걸렸어도 자신보다는 자식 걱정을 더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늙더라도 우리 어머니처럼 그렇게 자식을 걱정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1997년, 한 친구가 저에게 말하기를 산둥에서 오신 그녀의 둘째 숙부가 얼굴이 불그레하고 병이 없는 것은 파룬궁을 수련하여 병이 다 나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는 자신의 아버지도 수련하시게 하려 했고, 또 저에게 수련하는 연공장을 알려줬습니다.
파룬궁이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저는 이것이 바로 제가 찾고 있었던 것이라 매우 흥미가 일었습니다. 아침에 파룬궁 연공장을 찾아갔더니 보도원이 적극적으로 가르쳐주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얼떨결에 대법 수련으로 들어왔습니다. 법학습이 깊어지면서 이는 수련이며, 도덕을 회귀하게 하고 심신을 정화하는 고덕대법(高德大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파룬따파는 저의 몸과 마음에 천지개벽의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원래 이기적인 내가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했고 울화가 치미는 성격에서 낙관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대법은 저의 사상을 바꾸었고, 마음을 정화해주었으며,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자 제 몸의 병도 사라져 온몸에 힘이 넘치고 가뿐했습니다.
하루 연공을 마치면 아침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집에 가서 아침밥을 했습니다. 아침 장을 보면서 보기에 생선튀김이 좋은 것 같아서 5위안(약 960원)짜리를 사면서 5위안을 주었는데 노점상은 좋은 생선이라고 하며 또 5위안을 거슬러 주었습니다. 제가 준 것이 10위안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제가 5위안을 다시 돌려주자 그는 황급히 고맙다고 말하며, 오늘 좋은 사람을 만났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침부터 헛수고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파룬궁 수련자는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챙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업무 속에서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다
우리 회사는 건축 분야로 직원 대다수가 두 직책을 겸하고 있습니다. 저는 직장에서 접수실과 청소, 꽃에 물을 주는 것을 겸했습니다. 북방의 공사철은 짧고 공사 기간이 빡빡했습니다. 회사의 출납원 겸직 보관원은 바쁠 때 은행에 가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데, 출고할 때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오는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데 공사장에서는 급하여 출납원이 출고 체크를 도와달라고 해서 저는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퇴근할 때 공사장에서 물건이 되돌아오면, 저는 보관원을 도와 돌려받은 숫자를 체크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퇴근한 보관원이 집에서 다시 직장으로 돌아와야만 해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정오에 다른 직원이 퇴근하면 나는 접수실을 봐야해서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
바쁘다고 한번 도와준 이 일을 몇 년 동안 도와주었는데, 마치 저의 몫이 된 것 같았습니다. 비록 좀 더 고생했지만, 저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상사는(상사는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 회사의 서기에게 만약 우리 회사의 직원들이 모두 ○○○ 같이 한다면 걱정을 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해 상사와 서기가 와서 저에게 500위안(약 9만 6000원)의 보너스를 주면서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일을 잘해 준 것을 격려했고, 그들 둘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연말 상여금도 받았고 또 복지도 있어서 이 상여금은 받지 않겠다고 했는데 상사가 제 작업복 주머니에 넣을 때, 건설 항목 책임자가 들어와 저는 더 버티지 않고 받았습니다.
우리 회사는 3층 건물로 1, 2층은 사무실이고 3층은 큰 회의실이었습니다. 저는 1, 2층 복도, 2층 사무실, 3층 큰 회의실 세 곳의 청소 담당이었고, 봄이 되면 복도, 크고 작은 회의실 유리를 닦고, 꽃에 물을 주는 일을 맡아야 했습니다. 노동 강도는 강했지만, 저는 매일 깨끗하게 청소했고, 비 오는 날이면 바닥을 한 번 더 닦았습니다. 어느 해 겨울에 큰 눈이 내려 길에 뿌린 제설제로 녹은 눈이 진흙과 섞여서 검고 더러웠습니다. 출근하는 사람의 신발에 달라붙어 복도에까지 묻어와 복도 바닥이 몹시 더러워져 저는 물로 먼저 바닥을 한 번 닦은 다음 걸레로 깨끗이 닦았습니다. 비록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었지만 출근한 동료가 깨끗한 환경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뻤고, 회사의 위생을 항상 깨끗하게 유지했습니다.
국보(국내안전보위국)나 파출소 경찰이 회사에 와서 저를 괴롭혔을 때, 상사가 직접 가로막아주어 회사도 복을 받아 회사 일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많아졌고, 근로자의 임금도 오르고 복지도 좋아졌습니다.
한번은 상급기관 책임자가 우리 회사에 와서 일을 처리하고, 회사의 위, 아래층을 한 번 둘러 본 다음 우리 책임자에게 회사의 청소가 위생적이고 정말 깨끗하다고 말했습니다. 책임자는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제가 직장의 명예를 세웠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퇴직할 때 전 직원회의에서 제 일에 대해 높은 평가를 했고, 저에게 500위안 보너스를 공개적으로 지급했습니다. 직원들은 손뼉을 치며 당연하다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아들이 대법에서 혜택을 받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저와 함께 연공을 했습니다. 그때 열두 살쯤 되었는데, 겨울방학에 저와 함께 연공장에 나가 연공을 했습니다. 북방의 겨울은 몹시 추워, 가장 추웠을 때는 영하 30도가 넘었는데, 아들이 저에게 자신의 손이 아랫배에 가면 마치 작은 난로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손이 시리지 않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어렸을 때 갈치 알레르기가 있었는데 한 번은 알레르기로 손과 얼굴이 부은 적이 있어 선생님은 아이를 조퇴시켜 부모에게 병원에 데려가 보게 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온돌에 누워 있으면 엄마가 사부님 ‘병업(病業)’ 경문을 읽어 줄게. 한숨 자고나면 괜찮아질 거야.” 제가 다 읽자 아이도 잠이 들었습니다. 깨어났을 때 아이는 부기가 모두 가라앉은 것을 보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수업을 받았고, 그 이후로는 알레르기가 없었습니다.
아들은 머리가 그리 총명하지 않지만, 대법의 지혜로 학습 성적은 매우 좋아 반에서 손꼽혔습니다. 저는 1년 동안 불법적으로 노동교양을 당했는데, 아들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학급에서 3등으로 합격하며,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에서는 매년 신체, 학습, 활동 3가지가 다 좋은 3호(三好) 학생이었고, 중학교에서는 성적에 따라 우수반으로 들어가 반의 상위권이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명문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아들은 대학에 가서도 꾸준히 기숙사에 사람이 없을 때 연공을 했고, 반에 사람이 없을 때는 법공부를 했습니다. 아들이 배운 전공은 취업률이 100%였으며, 졸업 후 순조롭게 좋은 회사에 들어가 대우가 매우 좋고 임금이 매우 높았습니다.
시부모님을 참을성 있게 돌봐 드리다
남편은 집에서 맏이로, 여동생 하나에 남동생 둘이 있습니다. 큰 서방님은 마흔여섯 살이 되던 해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고, 작은 서방님은 지적장애가 있어서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시아버지는 74세 되시던 해에 뇌경색과 소뇌위축이 검진되어 저와 남편은 시부모님과 작은 서방님을 우리 집으로 모셔와 돌봐 드렸는데, 집이 작아서 우리 부부는 따로 나가서 셋방을 얻어 살았습니다. 시아버지가 소변을 보지 못해서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으셨는데, 수술을 막 끝마치고 나와 24시간 간호가 필요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시누이와 조카사위에게 돌봐드리게 하셨고, 우리 부부는 출근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매일 아침, 점심, 저녁에 그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병원으로 보냈습니다. 아침에 시아버지는 좁쌀죽을 드셨고, 가족에게는 볶음 요리, 떡이나 만두를 챙겨 주었습니다. 점심은 시아버지의 식단에 따라 두 가지 요리를 볶아서 만들었습니다.
하루가 마치 아침을 마치고 나면 점심을 준비하는 것 같았고, 퇴근하면 다시 저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꼬박 한 달 동안 바빴는데 병원의 간호사는 제가 시아버지의 딸인 줄 알고 시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따님이 참으로 좋은 분이네요, 바쁜 와중에도 서둘러 다니시네요.” 시어머니가 며느리라고 하자 병실 사람들은 모두 시어머니가 복이 있고, 이렇게 효성스러운 며느리가 있는 것을 부러워했습니다. 시아버지가 76세 되시던 해에 침대에 누워 스스로 생활할 수 없게 되었고, 시어머니의 부담을 줄여드리기 위해 저는 남편과 상의하여 3천 6백 위안(약 68만 4000원)을 들여 시아버지께 의료용 전동침대를 하나 사 드렸습니다. 버튼을 누르면 시아버지를 뒤척여드릴 수 있고, 식사 때 침대에 앉힐 수 있어 탁자를 놓고 식사하시게 할 수 있었으며, 몸을 뒤척여드리지 않으면 욕창에 걸리게 되어, 몸을 뒤집고 싶으면 버튼만 누르면 뒤집을 수 있었는데, 수동으로 핸들을 돌려도 몸을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시아버지 기저귀는 제가 퇴근하면 빨아 드렸습니다.
시아버지는 침대에 누운 지 2년 만에 돌아가셨는데, 몸에는 욕창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 만에 시어머니도 소뇌위축, 뇌경색이 검진되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입원하실 때마다 밤이면 저는 병원에서 시어머니 시중을 들었습니다. 때로는 시어머니가 바지에 대소변을 봐도 저는 더러움을 싫어하지 않았고, 시어머니를 씻겨 드렸습니다. 한 번은 시어머니에게 뇌경색이 일어나 인근 시에 입원했습니다. 병상이 부족해서 한 병실에 환자 여덟 명과 간병인 여덟 명으로 모두 열여섯 명이 있었는데, 또 복날이라 병실에 들어가면 마치 찜질방 같아 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병실이 작고 간병인의 침대를 추가할 수 없어서 저와 시어머니는 한 침대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깊이 잠드셨을 때 저는 복도 의자에 가서 앉았는데 너무 졸려서 앉아서 잠을 잤습니다.
한번은 시어머니에게 요도 염증이 생겨 화장실을 자주 가셨습니다. 제가 막 자려고 하는데 시어머니가 소변을 보려고 해서 요강을 가져와 받아야 하므로 그날 밤은 거의 못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이 저 대신 시어머니에게 식사를 가져다드렸고, 저는 다시 버스를 타고 회사 출근을 했습니다. 저녁에 퇴근해서는 시어머니에게 드릴 음식을 만들어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보름 입원하신 동안 시누이가 두 번 저를 대신해 주었습니다. 병원 병실에 있는 환자와 가족들은 저를 시어머니 딸로 알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해마다 뇌경색을 일으켜 그때마다 입원해서 주사를 맞아야 했는데 저녁 간호가 저의 일이었습니다. 재작년 우한 폐렴(코로나)에 걸리셨을 때, 한 집에 한 사람만 간호할 수 있었는데, 제가 24시간 시어머니를 돌봐 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잔소리를 많이 하셨는데 저는 참을성 있게 들었습니다. 연로하신 시어머니는 소변을 가누지 못해 자주 바지에 보셨지만 저는 제때 옷을 갈아입혀 드리고 깨끗이 씻겨 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집에서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습관이 되셨는데 남편은 성질이 급해서 때때로 시어머니의 잔소리에 짜증을 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나이 들면 말을 많이 하게 되니 듣기 싫으면 나가서 좀 걷다 오라고 권했습니다.
남편 회사는 작년에 문을 닫아서 직원이 나뉘어 외지로 출근해야 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뇌경색으로 걸을 때 발을 들 수가 없었고, 손으로 밥도 할 수 없었는데, 시동생도 밥을 할 줄 몰랐습니다. 시어머니가 사람을 고용하지 않으면 남편은 출근하지 못하고, 집에서 시어머니와 도련님을 돌봐야 했습니다. 도련님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남편 말만 들었습니다. 시간이 오래되어 남편은 잠을 설치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몸에도 병이 생겼고, 또 갱년기가 되어 짜증이 나서 걸핏하면 화를 냈습니다. 시누이가 와서 보고는 마음이 불편했던지, 남편에게는 감히 말하지 못하고 저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이 불효하여 시어머니에게도 화를 낸다고 푸념을 했습니다. 저는 시누이에게 오빠가 갱년기인데 자신도 병이 있는 상태에서 어머니와 동생을 돌봐서 그런다고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시누이에게 시어머니를 집으로 모셔다 드릴테니 며칠 동안 돌볼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시누이는 대뜸 “나랑 엄마는 성격이 맞지 않아 저는 한나절도 못 봐요. 오빠네가 모셔야 해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시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지만, 때때로 시어머니가 요구하는 것을 저는 할 수 없었습니다.(시어머니는 이웃과 한담할 수 있는 단층집으로 돌아가 살고 싶어 한다) 한겨울에 단층집으로 가면 불을 피워야 하고, 방이 아직 춥습니다. 저는 시누이에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작년에 남편은 중의에게 보여 몸을 관리해서 잠을 잘 수 있었지만, 허리 디스크가 돌출하여 허리 굽히는 것을 힘들어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식사 준비를 시키지 않고, 하루 세끼 밥을 다 하고 출근했습니다. 정말 바쁘고 힘들었지만, 매일 연공을 마치고 나면 활력이 충만해져 일해도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간혹 저는 제가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정말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저에게 파룬따파를 주셔서, 제가 인간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비난과 원망을 따지지 않고, 그들의 결점을 포용하고 선하게 대하도록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2년 3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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