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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 신경문 및 세상을 떠난 수련생에 대한 약간의 교류

글/ 미국 뉴저지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우리 주위에 많은 수련생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 모두가 안타까워하는데 교훈을 바르게 받아들이고 법리를 깨달아야 더 잘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자신이 깨달은 약간의 소감, 그리고 착실히 수련한 체득을 여러분과 교류하려 한다. 이 중에는 우리 팀 교류 및 개별 수련생들과의 토론도 포함된다. 시간제한으로 먼저 개인의 미숙한 의견을 내놓아 다른 분의 고견을 듣고자 하며, 층차의 제한이 있기에 수련생 여러분께서 법을 스승으로 삼고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1. 서약을 실현하다

사부님께서 신경문 ‘깨어나라’를 발표하신 후 개인적으로 대법제자가 사람 속에서 ‘세상을 떠나는’ 표현은 이미 불가피하고, 갈수록 이런 표현을 더 빈번하게 더 많아질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것은 정법이 이제 세인도 도태시키고 대법제자도 점검하는 일보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고비를 넘고 있는데 다만 표준이 다를 뿐이다. 대법제자로서 “세상에 올 때 생명으로 건 서약을 이행”[1] 했는지가 점검기준의 하나가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가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했는지를 점검할 것인데 우리의 마음, 시간과 행동을 사람을 구하는 데 썼는지 볼 것이다.

정법 시기 대법제자의 사명은 바로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육신이 있기에 사람 속에서 생활해야 하고, 속인의 생각이 있기에 속인 사회에 이끌리고 오염되며 사명을 느슨히 하고 소원해질 수 있다. 속인 생활과 직장, 중생 구도 사명의 관계를 바로잡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여기 속인사회에 와서, 마치 여관에 투숙하듯이 며칠 좀 묵었다가 총총히 간다.” 일부 사람은 바로 이곳에 미련을 두고 자신의 집을 잊어버렸다.”[2]

우리는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중생을 이끌고 함께 원만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사명은 아주 크고 어려우며 막중하다. 그러므로 평소의 법공부, 연공과 발정념은 우리가 속인 사회 교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담보가 된다. 개인 수련과 정법의 관계를 균형 있게 유지하고, 속인 중의 일생 생활, 직장생활과 중생 구도의 관계를 균형 있게 배치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끊임없이 정진해 수련하는 중에서 우리는 조사정법하고 서약을 실현해야 한다.

2. 백신을 맞을지 안 맞을지는 깨달음의 기초에 달려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병업’, ‘수련인은 주사를 맞지 않고 약을 먹지 않는다.’라는 법리를 알려주셨다. 여러 해 수련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잘못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백신 접종’에 관해서는 겉으로 보기에 ‘병업’, ‘수련인이 주사를 맞아야 하는지’에 대한 시험 같지만 사실 그뿐만이 아니다.

만약 인식이 백신이 인체에 해롭지 않은지, 주사 맞고 약을 먹으며 치료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지에만 머물러 있다면 아주 제한되고 원용하지 못한 생각 같다. 처음에 나도 이런 법리부터 생각났다. 수련인의 신체는 정화됐기에 이런 것이 우리 신체를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백신을 거부했는데 이건 수련자가 주사를 맞지 않고 약을 먹지 않는 입문 단계의 인식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백신 접종은 우리 신체가 불편해 주사를 맞고 약을 먹거나, 치료를 위해 사용하는 치료 수단이 아니라 일종 사회 형태였다. 타락한 속인 사회의 소위 자구책으로서 끊임없이 자신을 가두면서 출로를 찾는 것이다. 비록 이 방법은 잘못됐지만 이건 국가와 사회 행동이고 일종 천상(天象)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사회를 개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럼 이런 천상 아래에 있는 대법제자로서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우선 고려해야 할 문제다. 예를 들어 션윈을 대관한 극장에서 배우와 스태프들이 모두 백신을 접종해야 하는데 백신 접종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션윈을 포기하는 것인데, 우리는 접종하겠는가, 하지 않겠는가? 개인 신체의 정화에 집착하겠는가? 아니면 자신을 내려놓고 남을 구하겠는가? 다들 이런 시험에 직면했을 것이다. 만약 자신을 기점으로 깨닫는다면 자신의 순정한 신체를 수호하는 걸 가장 중시할 것이고 그럼 절대 맞지 않을 것이다. 보기에는 법에 있는 것 같지만 만약 중생 구도를 기점으로 깨닫는다면 맞아야 할 때는 맞아야 하는 것이다. 맞은 후에 신체에 불편한 반응이 있더라도 맞아야 한다. 그건 이것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점이 다르면 깨달음도 다를 것이다. 사실 백신을 맞았다 해서 수련인의 신체에 무슨 영향을 일으키지 않는다. 우리 자체의 공(功)이 속인 중의 이런 세균과 바이러스를 소멸할 수 있고 게다가 사부님께서 보호해 주시지 않겠는가? 이런 바이러스 물질은 우리가 병 치료에 집착해 추구해온 것이 아니기에 우리에게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

다른 각도에서 볼 때 ‘무아(無我)’는 새로운 우주의 표준이고 대법제자는 무사무아(無私無我)를 닦아내야 한다. 과거 소도(小道) 수련에서 밀레르파 부처님은 마지막 남은 오만한 박사를 구하기 위해 독주를 마셨고 몸을 바쳐 남을 구한 이야기를 남겼다. 하물며 대법을 수련하는 우리가 자기 신체를 오염시킬까 봐 중생을 구하지 않거나 스스로 중생 구도를 제한한다면 본말이 좀 전도된 게 아닌가? 여기에서 구(舊) 우주의 ‘사(私)’와 ‘아(我)’의 특성이 고층차까지 관통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경문 ‘원용(圓容)’에서 우리에게 ‘깡그리 버리는’ 법리를 알려주셨다.

3. 병업 가상을 타파하고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다

마난(魔難)이나 신체 소업이 나타났을 때 첫 일념을 법에서 깨닫고 바로잡아야 한다. 예를 들어 신체가 소업할 때 첫 일념은 그것을 좋은 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나쁜 일로 생각하는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 중에서 당신들이 부딪힌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모두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들이 수련하기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3] 이 뒤에는 아주 깊은 법리가 있는데 만약 좋은 일로 여긴다면 담담하게 대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에게 소업뿐만 아니라 심성과 법에 대한 이해에서 부족한 부분을 찾을 기회가 되기도 한다. 자발적으로 이 일을 통해 자신을 바로잡는 것이 정념정행이고, 이러면 쉽게 넘어갈 수 있다. 그건 수련에서 이미 표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첫 일념이 그것을 나쁜 일로 여기면서 본능적으로 배척하고 거부하며 두려움이 생긴다면, 혹은 병업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여겨 노력하거나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병업을 감당한다면 더 많은 집착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신체 소업의 난이 더 커지고 정념이 없어져 정행하지도 못한다. 난관이 길어지고 줄곧 기회를 줘도 제고하지 못해 갈수록 난이 커진다.

사실 신체를 소업하는 과정은 정말 깨달음을 제고하라고 주신 기회다. 수련인의 신체는 원래 병이 없지만 소업해야 하기에 괴롭고 일부 구체적인 병리적 표현도 나올 수 있다. 만약 대뇌가 주관적으로 신체의 괴로움을 속인 의학 방면의 무슨 병증과 연관 짓고 이런 연관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병업 가상의 속임수에 빠질 것이다. 깨닫지 못할수록 난이 더 커지고 감당하는 시간도 점점 길어진다. 그래서 일부 사람은 ‘병업 고비’를 늘 넘어가지 못한다. 그건 자신의 바르지 못한 관념이 이 소업을 병업으로 여기고, 그다음 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건 스스로 불러온 것이고 이 시험을 넘어가지 못하면 자신에게 시끄러움을 가져다준다.

일부 수련생은 신체에 소업이 나타나면 자신을 집에 가둬놓고 소업에 전념한다. 소업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면서 소업이 끝나면 다시 대법 일을 하겠다고 한다. 결국 소업이 갈수록 길어지고 상태도 심각해져 집에서 ‘몸조리’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또 어떤 수련생은 병업 상태가 나타나면 수련생들이 보고 업신여길까 봐 단체 법공부와 연공에 참가하지 않는다. 난관을 잘 넘은 후에 다시 교류하겠다고 생각하며 아직 넘지 못했기에 교류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구세력은 바로 병업 가상, 그리고 우리가 사람 속에서 아직 닦지 못한 수많은 관념을 이용해 수련생이 우리 수련 단체를 벗어나고, 공동 정진하는 환경을 벗어나게 만드는 것 같다. 병업 난관에 부딪힌 수련생들을 고립시킨 후 박해를 가중 시키고 결국 육신을 빼앗아 간다.

병업 난관에서 쉽게 속인의 투기 심리에 빠질 수 있다. ‘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라는 방식으로 수련을 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연공이 부족해 병업이 나타난 건 아닌지? 그러면 연공을 강화한다. 하지만 연공을 늘려도 병업이 여전히 존재하면, 법공부가 부족한 건 아닌지 생각하며 대량으로 법공부한다. 법공부를 많이 해도 병업이 계속 사라지지 않으면 평소에 발정념을 잘하지 못한 건 아닌지를 생각하며 발정념을 강화한다. 하지만 장시간 발정념을 많이 해도 병업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병업을 없애기 위해 하는 방식은 병업에 집착하고, 병업 가상에 미혹된 것이다. 병업 가상 뒤에 있는 수련의 본질을 보아내지 못 하고, 법에서 깨닫지 못했다. 오히려 속인 방식의 ‘요행’ 심리로 어떤 방법으로든 병업을 없애면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병업 가상은 한 방면으로 우리에게 소업해주고 신체를 정화해준다. 다른 방면으로는 법리를 깨닫고 심성을 제고할 기회를 제공해준 것이다. 만약 병업 가상의 이 법리를 깨닫는다면 신체 소업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소업 가상에 교란받지 않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데 앞장서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신체 소업 중에 있는 수련생들이 단체 수련에서 이탈하지 말기를 건의한다. 마음을 터놓고 수련생들과 교류하고 단체 교류에서 심성과 깨달음을 제고하기를 바란다. 동시에 현지 수련생들은 단체 발정념으로 고비를 넘는 수련생 공간장 안에 있는 사악한 요소를 제거하고, 그의 정념을 강화해줘 함께 난관을 벗어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4. 연장한 생명을 사람 구하는 데 쓰지 않는다면 생명 위험이 있다

만약 마음이 바르지 못해 연장한 시간을 갑절 정진해 사람을 구하는 데 쓰지 않고 속인으로 돌아가 생활을 즐기는 데 쓴다면 생명 위험이 있을 것이다. 일부 수련생은 장기간 신체에 난을 겪다가 병원에 가서 수술해 종양이나 암세포를 떼어내고 일부 장기도 잘라냈다. 속인의 의료 방식으로 목숨을 건진 후 차츰 또 속인 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수련과 중생 구도를 느슨히 했다. 이렇게 여러 해 생명이 연장됐기는 했지만 결국 병업이 더 심해져 육신을 잃고 말았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는데, 무릇 연장하여 온 생명은 백 분의 백 수련하는 데에 써야 하는 것으로 속인 중의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럼 그가 또 자신의 생명이 연장되어 온 것임을 모르고 그가 또 파악하지 못해 백 분의 백 연공인의 요구에 따라 하지 못할 경우, 그는 수시로 이 세상을 뜰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이 직면한 문제이다.”[4]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개인 수련 단계에서 백 프로 연공인답게 하는 것은 연장된 생명에 대한 요구다. 하지만 정법 시기에는 백 프로 중생 구도 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되살아난 생명이 만약 전심전력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지 않고 서약을 실현하지 않는다면 연장된 생명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속인은 곧 ‘생로병사’의 길을 걸어야 하고 해탈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법 시기 대법제자로서 생명의 의의는 오로지 중생 구도를 위해 존재한다.

5. 근본 집착을 버렸는가? 진정한 수련자가 맞는가?

사부님께서 경문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走向圓滿)’를 발표하신 지 벌써 21년이나 된다. 지금은 법정 인간을 향한 과도단계이고 대법제자가 원만을 향해 나아가는 후기 단계다. 우리는 자신의 근본 집착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봤는가? 근본 집착을 버렸는가? 근본적으로 대법제자라고 할 수 있는가? 오래 수련한 노수련생이라 해서 이 근본 집착이 없는 것이 아니다.

15년 전, 나는 보스턴에서 사부님의 이 경문을 읽었고 당시 크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처음에 남편이 먼저 법을 얻고 나서 나에게 소개해줬고 그때 ‘전법륜’을 읽어 보고 아주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당시 수련할 시기가 아닌 것 같아 내려놓고 진정으로 입문하지 않았다. 나와 남편 수련생은 금실이 아주 좋았으며 사실 내가 그에게 더 많이 의지했다. 남편은 법을 얻은 후 바로 수련을 시작했고 아주 몰입하고 정진했다. 일하는 외 여가를 거의 모두 법공부, 연공과 홍법(洪法)에 쏟아 나와 함께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때 나는 금방 미국에 와서 모든 것이 낯설고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게다가 가정생활에 이러한 반전이 생겨 몹시 괴로웠다. 그래서 여러 번 싸우기도 했지만, 확고히 수련하려는 그의 마음을 개변시킬 수 없는 것을 보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오직 나를 개변해 그를 따라 배워야만 같이 일하고 더욱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나는 속인의 ‘정’을 지니고 수련에 들어섰다. 사부님의 이 경문을 보고서야 자신의 근본 집착이 ‘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남편에 대한 ‘정’을 내려놓지 못해 이 ‘정’을 지니고 수련에 들어섰다. 이 근본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걸 느꼈지만 오랫동안 버리지 못했다. 나는 부부의 정을 아주 소중히 여겨 우리 사이의 수련생 정보다 더 중요시했다. 부부 감정이 좋은 것을 좋은 일이라 여기면서 이것을 즐기고 내려놓기 싫었으며, 근본 집착을 버리는 것을 수련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오랫동안 법을 배우고 법을 실증하는 일도 하면서 자신이 아주 정진한다고 여길 때도 있었지만 속으로 이 ‘정’을 내려놓지 못했다. 사실은 내려놓기 싫었다. 사부님께서 수련생 입을 빌어 여러 번 점화해주셨지만, 집착이 너무 강해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도 나는 남편의 대한 정, 이 근본 집착을 내려놓지 못했다.

남편의 사망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고 날 깨어나게 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새롭게 수련 중에서 나타난 문제를 생각하고 수련 중의 일체를 더 엄숙히 대하게 됐다. 나중에 수련하면서 나는 이 근본 집착을 깊이 찾아봤다. 수련에 입문할 때 이토록 불순한 집착을 갖고 들어왔으니 이 사람 마음이 여태껏 대법을 견지하게 만든 건 아닌가? 지금 남편이 세상을 떠났는데 계속 수련할 것인가? 금실이 좋은 부부생활이 없어졌는데 계속 수련할 것인가? 나는 속인 속의 일체 정, 속인이 보기에 좋다고 여기는 정이라도 집착하기만 하면 수련을 가로막는 엄중한 걸림돌이 된다는 걸 진정으로 깨달았다. 수련인은 속인 사회에서 속인 형식에 부합되는 가정과 직장이 있는데 우리는 이런 형식을 수호해야 하지만 집착해서도 안 된다. 그건 우리가 인간 세상에 내려온 목적이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고 사람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속인의 일체 정을 내려놔야만 중생에 대한 자비를 닦아낼 수 있고, 속인의 정을 잡고 놓지 않는다면 그건 곧 속인이다. 이런 인식은 생명을 대가로 깨달은 것이니 내 깨달음이 얼마나 낮은지, 그 대가가 얼마나 뼈아픈지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깨달았다 해서 해낸 것은 아니기에 나중에 많은 시험을 겪었다. 남편이 세상을 뜨고 얼마 안 돼 나는 뉴저지주에 있는 쇼트 힐스 몰(Short Hills Mall)에서 티켓을 판매했다. 매번 눈앞에서 커플들이 사랑스럽게 손을 잡고 지나가는 걸 보면 머릿속에 남편과 금실 좋았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가슴에 애틋한 미련과 아쉬움이 생겼다. 이런 집착의 물질들은 아직 깨끗이 제거되지 않았고 장(場)이 남아있기에 반응하게 된다. 매번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배척하고 억제했으며 법리에서 그것을 분석해봤다. 자신에게 이건 나 주왠선(主元神)의 생각이 아니라고 알려줬다. 주왠선은 이것이 집착이고 버려야 할 것이라는 걸 깨달았는데 어찌 그것을 승인하고 가지려 하겠는가? 이건 내가 아니라 외부 교란이기에 부정해야 한다. 이렇게 한 번 또 한 번 법리로 집착을 타파했다. 차츰 이런 시험이 점점 적어졌고 나중에는 아무리 금실 좋은 커플이 내 앞에서 지나가도 더 이상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유혹은 마치 바람처럼 눈앞에서 스쳐 지나가고 소리 없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자신이 이 정, 이 근본적인 집착을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6. 발정념을 잘해 공간장 내 사악을 제거하다

우리는 모두 발정념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이건 사부님께서 정법제자에게 주신 공능으로 우리에게 스스로 사악을 제거하고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주신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못 하면 한 가지 고리가 부족하게 되며, 이러면 자신이 교란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도 교란받고, 심지어 박해받아 육신을 잃을 수도 있다.

사부님께서는 ‘로스앤젤레스시 법회 설법’에서 어떻게 발정념을 해야 진정으로 제고할 수 있냐는 제자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대법제자가 원만으로 나아가려면 세 가지 일을 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가? 발정념은 그중의 한 가지 일인데 이렇게 중요한 것을 왜 잘하지 못하는가? 왜 그것을 그렇게 간단히 보며 중시하지 못하는가? 이미 이렇게 중요한 것임을 알고 있고, 게다가 세 가지 일 중 한 가지인데, 당신이 잘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는가?”[5]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것마저도 잘하지 못하는가? 자신의 그 한 부분을 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도와주어야 한다.”[5]

발정념에 있어 나에게는 줄곧 많은 문제가 존재했다. 몇 주 전에 한 수련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이 수련생이 예전에 발정념할 때 늘 손이 떨어지고 심지어 잠들기도 한다고 알려줬다. 나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고 꼭 돌파하겠다고 결심을 내리면서 자신에게 규정을 세웠다. 첫째, 발정념을 중시하고 전 세계 발정념 시간을 쉽게 놓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놓쳐버린다면 제때 보충한다. 둘째, 또렷한 정신으로 발정념하고 흐리멍덩하거나 손이 떨어지지 않게 한다.

발정념할 때 나는 최대한 단정한 몸과 손짓을 유지했다. 또한 머릿속에 떠오른 잡념들, 발정념과 관련이 없다면 모두 외부 교란이기에 제거했다. 감히 내 공간장에 들어왔으면 모두 여지없이 소멸해버렸다. 이렇게 2주가 좀 안 되게 견지하니 효과가 아주 뚜렷했다. 자신의 각 층차의 공간장이 모두 깨끗이 청리되고, 외부 교란이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며, 나 자신이 발정념을 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발정념 문제가 해결되면서 다른 방면의 개변과 제고도 잇따라왔는데 이건 내가 생각지 못한 것이다. 정공을 연공할 때 더 쉽게 고요해지고 잡념이 적었으며 쉽게 졸리지 않았다. 자세도 많이 단정해지고, 연공할 때 몸이 정천독존(頂天獨尊)해진 것 같았으며, 법공부할 때 졸리지 않고 더 정신 차려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나팔 연습을 하는 것도 돌파구가 생겨 머리가 트인 것처럼 요령을 장악하게 되고, 일할 때 더욱더 효율적이고 머리도 맑아져 사반공배(事半功倍-노력에 비해 결실이 훨씬 더 큰 것)의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악을 제거하고 자신의 공간장을 정화한 후 추구하지 않고 얻게 된 것이다. 그제야 진정으로 무엇이 정체(整體)제고, 정체승화인지 깨닫게 됐다. 수련 중의 체험은 이토록 아름다웠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사악을 제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됐다. 발정념을 잘하지 못하면 우리 공간장 내에 사악한 요소가 많이 숨어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교란하고, 우리 집착을 강화하며, 법에 대한 우리의 바른 믿음을 약화시킬 것이다. 그러면 정념이 부족하고 병업 현상 등이 생길 것이다. 장기간 발정념을 중시하지 않고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악에게 영양을 공급해줘 그것들이 점점 강대해져서 우리 주이스(主意識)를 더 억제하고 그것들이 만들어낸 난이 우리를 망쳐버릴 것이다. 발정념 과정에서 사람 여기에는 별로 큰 변화가 없었지만 다른 공간에서는 분명히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끊임없이 층층 공간을 바로잡는 과정이 진정으로 법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부님께서 나에게 발정념의 이런 체험을 느끼게 해주신 것은 자신의 제고를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교류해 여러분과 함께 정진하라는 뜻임을 깨달았다.

맺는말

수련은 소업, 시련, 고생, 난관과 더불어 오지만 매 한 번의 경험은 모두 층차와 경지의 정체적인 승화다. 수련에는 작은 일이 없기에 평소 닦지 못한 ‘누락’은 원만으로 향하는 마지막 시험대가 될 수 있다. 수련은 자발적으로 법에 동화하는 것이지 수동적으로 점검받는 것이 아니다. 수련은 생사를 내려놔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사(死)’는 내려놓을 수 있지만 ‘생(生)’은 내려놓지 못한다. 인간 세상이 너무 고달프다고 여기면서 엄중한 신체 소업 시련에서 더 이상 감당하기 싫어 떠나기를 선택했다. 어떤 사람은 ‘사(死)’를 내려놓지 못해 신체 소업이 나타나기만 하면 속인의 병이라 여기며 죽음을 두려워한다. 수련은 살얼음판을 걷듯이 방심해서는 안 되고, 아주 신중하고 집중해야 한다. 또한 수련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처럼 대충대충 해서는 안 되며 전진하지 않으면 곧 후퇴한다.

보통 사람이 사업을 이루려면 와신상담(臥薪嘗膽)하고 심혈을 많이 기울여 일평생 노력을 들여야 한다. 우리가 성취하려는 건 완전히 새로운 생명, 새로운 우주에서 한 천지를 주관하는 왕과 주다. 우리의 원만은 개인의 작은 원만이 아니라 구원받은 중생을 이끌고 함께 가는 대원만이다. 이토록 위대하고 신성한 일을 어찌 대충 하는 수련으로 대해서야 되겠는가? 사명을 지녔으면 일생의 노력을 다 쏟아부어도 모자랄까 염려하고, 시시각각 수련해도 제대로 정진하지 못할까 봐 조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를 포함한 여러 수련생분이 이지적이고 명석하게 법리를 깨닫고, 우리가 맞닥뜨린 각 방면에서 착실히 수련해 자기 수련의 길을 개척하고,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해주신 위대한 원만을 성취하시길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깨어나라’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 경문: ‘정진요지3-시카고 법회’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로스앤젤레스시 법회 설법’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현재 인식에 따라 작성된 것이므로, 수련생들이 서로 교류하고 ‘비학비수(比學比修)’ 하는 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1년 12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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