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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일불이(說一不二)’를 가볍게 논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여인은 드세고 날카로운데다 난폭하고 경박하고 신랄한 말투로 주인 노릇까지 하네.’[1] 당(黨: 공산당)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자란 나는 ‘가정주부’ 이 역할에서 이러한 현대적이고 강한 여성의 특징을 충분히 갖고 있다. 이는 수련 중에 매우 큰 장애를 가져왔다. 대법을 수련하면서 그것은 진정한 자신의 본성이 아니고 후천적으로 형성된 물질이라는 것을 차츰 인식했을 때 그 이기적인 ‘가아(假我: 가짜 자아)’를 이미 수십 년간 자양해 상당히 강대해졌음을 알게 됐다. 그것은 이 육체에 이미 단단히 흡착됐고 나무뿌리가 휘감기고 줄기가 뒤얽히듯 피와 살에 연결됐다. 정말 그것을 벗기려면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고통이 필요했고 그것도 필사적으로 발악하고 저항해 이 방면에서 나는 곤두박질하고 넘어지며 부딪쳤다.

‘설일불이(說一不二: 하나라고 말하면 둘이라고 하지 않는다, 독단적으로 결정한다는 뜻, 한글판 ‘전법륜’에서는 ‘말하면 고분고분했는데’라고 의역: 역주)’라는 간단한 네 글자는 구(舊) 우주 중의 사람의 이기적인 속성의 일부 방면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그것은 내 수련의 과정을 관통했고 조금만 주의하지 않으면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때로는 근본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것을 의식하고 닦으려고 할 때 그것은 가만있지 않으며 이 대뇌에 반영되는 것은 고통, 질투, 괴로움 등등이며 심지어 잠도 잘 자지 못한다.

작은 일에서 수련하는 것은 괜찮지만 큰일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집을 사는데 수십만 위안이 든다. ​작은 일은 남편과 의견이 일치하여 충돌이 없었지만 인테리어를 할 때는 그렇지 않았다. 법공부를 할 때 나는 큰 결심을 내리고 남편에게 하라고 했으며 상관하지 않고 조용히 있겠다고 했고, 또 속인 일을 중시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말뿐이며 정말 닥치면 그 습관이 된 ‘설일불이’가 나타난다. 남편은 매우 절약하는 사람이다. 인테리어를 잘하고 싶지만, 돈을 많이 쓰려하지 않는다. 그것이 될 일인가? 그뿐만 아니라 30여 년간 그는 이미 내 ‘설일불이’에 습관이 됐는데 단번에 ‘대권’을 맡기니 도리어 불안해하며 꾸물거리더니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때 내 그 자아가 구실을 찾아 ‘어쩔 수 없이’ 또 한 번 직접 하게 됐다. 인테리어 과정에서 만약 남편이 의견이 있으면 작은 것은 받아들이고 큰 것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때로는 그것은 수련인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했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을 통제하지 못하며 에둘러 회피하고 근본적으로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그렇게 했다. 때로는 지난 뒤 후회돼 이번에는 이러했으니 다음에 고치자고 생각한다. 이렇게 한 번 또 한 번 그것을 닦을 기회를 놓쳤다.

만약 어느 한 번 실패해 방법이 없어 타인의 주장대로 하면 그 원망이 때때로 나오며 늘 그 일을 꺼내 말한다. 이지적이지 못할 때면 또 속인에게 말해 울분을 터뜨린다. 예를 들면 손녀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3년 전, 우리는 아파트 안에 학교가 있는 집을 샀다. 목적은 이후에 아이를 보내고 맞이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데 아파트 단지 정문을 나설 필요도 없다.

그런데 집을 산 후 아들과 며느리가 그 학교는 새로 지은 학교이기에 교사들의 수준이 낮다며 기어코 아이를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한 초등학교에 보냈다.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가고 데려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가? 이후에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진력해야 한다! 그러나 나중에 책임질까 봐 주장하지 못하고 어쨌든 아이의 교육이 달린 문제라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매번 아이를 데려가고 데려오는 것이 어려울 때마다 그 억울함에 가슴이 꽉 막혔고 요즘 젊은이는 이기적이고 부모를 배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유는 전부 그 ‘나’의 주위를 맴돌았다. 만약 애초에 이 학교를 내가 선택했다면 억울함이 덜 했을 것이며 심지어 억울하지 않고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달갑게 여겼을 것이다.

‘설일불이’는 수련에 매우 심각하게 반영된다. 교류할 때 자신이 깨달은 것을 다른 수련생에게 말한다. 처음에는 마음이 평온하고 태도가 온화했다. 수련생이 집중해 듣는 것을 발견하면 말할수록 자신의 느낌이 좋고, 말할수록 신이 나서 브레이크를 밟지 않은 것 같다. 결국 일언당(一言堂)으로 변해 수련생이 무슨 말을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내가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니 당신은 부정확한 상태를 고쳐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미 비이성적인 상태로 대법 중에 자신의 위치를 바르게 놓지 못하고 주의식이 똑똑하지 못하며 머리는 통제당한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진상을 알릴 때 효과가 좋지 못한 것은 대부분 이 원인이다. 다른 사람이 반박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머릿속은 온통 자기 연설문뿐이어서 서로 교류가 진행되기 어려웠다.

‘설일불이’는 위사위아(爲私爲我)의 비교적 전형적인 일종 표현으로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이며, 자신의 ‘하나’만 인정하고 타인의 ‘둘’은 용납하지 않으므로 대법의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2]와 배치된다.

내 수련 중에서 이 강렬한 자아는 또 한 가지 표현이 있다. 만약 그것의 ‘하나’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것은 잠재의식 속에서 다른 사람의 ‘둘’이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길 원한다. 이러면 나의 당초 그 ‘하나’가 뛰어나다는 간접증거며 선의적으로 무조건 남의 ‘둘’을 원용(圓容)하지 않는다.

‘설일불이’는 수련인 자신에게 해악이 상당히 크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인의 이익을 침범한 것이며 자신의 욕망을 만족하는 동시에 타인의 이익을 손상하고 타인의 이익을 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덕을 잃은 것이 아닌가? 그럴 뿐만 아니라 속인의 것을 쟁취하는 속인의 이치다. 만약 우리 수련인이 늘 속인의 이익을 중히 여기면 어떻게 속인을 벗어나겠는가?

‘설일불이’는 여러 가지 표현이 있다. 매 한 번의 표현은 자신의 공간장에 존재하는 구우주의 이기적인 속성의 대 폭로다. 당연히 우리 수련인이 안으로 찾고 그것을 똑똑히 인식할 때는 그것을 제거할 좋은 기회다. 따라서 그것이 나타나는 것이 두렵지 않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것을 분별하지 않고 심지어 그것에게 의지하고 그것을 버리기 아쉬워하며 또한 그것이 만들어준 만족감 속에서 사람의 소위 행복과 기쁨을 즐긴다면 두려운 일이다. 매 한 차례 심성관이나 모순이 충돌할 때 만약 우리가 과감히 내가 요구하는 ‘하나’를 내려놓고 의지를 확고하게 해 그것의 통제를 벗어날 때, 우리는 수련인이 진정한 홀가분함을 체험할 수 있다. 그것은 속인이 삶의 어떤 스트레스를 풀어버린 홀가분함이 아니라 우리 자신 공간장을 대청소해 가져온 상쾌함이다. 확실히 한 층의 두껍고 무거운 부패물질을 사부님께서 벗겨주시면 신체 방면에서도 그 표현이 나타난다. 우리는 ‘모순 앞에서 한 걸음만 물러서면 더없이 넓은 세상’[3]의 아름다운 경지를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자비롭게 시정해주시길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詩詞): ‘홍음3- 음양반배(陰陽反背)’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불성무루(佛性無漏)’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원문발표: 2021년 12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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