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법을 배워 마음을 닦고 중생을 구하다

글/ 호주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1년간 세 가지 일을 한 체험을 사부님에게 보고하고 수련생들과 교류하려 한다.

1. 법을 배워 마음을 닦다

법공부는 마치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것과 같고 법공부를 잘하면 인적이 드문 곳에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다.

보통 사람은 명예, 이익, 정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면 괴로워하지만, 진정으로 법공부를 중시하는 사람은 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법에서 얻는 즐거움은 인간의 저능한 것을 억제할 수 있고 수련자 마음이 속인 사회에 유혹되지 않도록 도와준다.

대법 책을 읽으면 왜 많은 곳에서 우리 마음속까지 와 닿는 것 같은가? 그러므로 대법이 좋다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고난 속에 있는 사람은 마음이 괴로워 생각이 빗나가기 쉽다. 하지만 왜 어떤 사람은 곤경 속에서도 생각이 법을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는가? 나는 이것이 법공부를 착실하게 해 어려움에 부딪혀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법공부를 잘했기에 고비를 만나도 자신의 수련 의지를 연마하지 타인에게 자신의 관념에 부합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법공부를 하면 ‘사람이 세상에 온 목적은 잘 살려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치를 끊임없이 되새겨 주는 것 같았다. 이것은 내가 법을 배울 때 직접 받은 이로움이다. 그런 인식 때문인지 대법은 내게 세상 풍파에 맞설 수 있도록 지도해줬다. 법을 잘 배우지 못하면 정진의 마음이 있을 수 없다.

단체 법공부는 사부님께서 남겨주신 수련 형식이다. 어느 날 저녁 단체 법공부에 참가하면서 나도 모르게 대법과 제자의 의미를 조금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날 문득 ‘이런 법공부가 멈추지 않고 사계절을 잊도록 계속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 대한 사부님의 구원이었고 나에게서 나온 정념이었다. 단체 법공부의 아름다움을 맛봤기에 이전에 집착했던 사람의 것들을 내게 다시 되돌려줘도 나는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사회는 미혹의 공간이다. 마음을 들여 법공부를 해야만 이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

2. 현실에서 심성을 단련하다

2020년, 역병이 폭발해 많은 사람에게는 흉흉한 한 해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막 대법 수련을 시작한 것 같았다.

근 6년간 나는 넘어야 할 고비를 거의 회피하지 않았다.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1] 곤혹을 만났을 때 나는 모두 참아냈고 제고의 기회를 소중히 여겼다. 일단 고비를 만나면 나는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했을까? 무슨 마음이 촉성한 것일까? 내가 이 고비에서 얼마나 개변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이런 정확한 사유는 줄곧 나에게 마음을 내려놓게 했다.

그런데 최근 2년간 나는 전례 없던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줄곧 즐겁게 법을 배워왔고 모순 중에서 남을 보는 일이 드물었는데 이번 어려움은 일반적이 아니었다. 방황하는 중에 한 수련생이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당신은 넘길 수 있습니다. 당신은 꼭 넘길 수 있습니다. 당신에겐 전능하신 사부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갑자기 고비를 넘긴 후 그 과정에서의 정념정행을 되새겨 봤다. 장기간 시련 중에서 잘 수련한다는 관념을 오랜 세월 속에 변상(變相)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구세력의 술책에 넘어간 것이었다. 이런 자신에 대한 회고와 긍정은 분명 자신을 중요한 자리에 올려놓고 인위적으로 사부님과 대법을 뒷자리에 놓는 것과 같다. 개인수련에 너무 집착해 인위적으로 대법과 자신을 갈라놓으면 대법의 위력은 나에게서 나타나지 않는다. 고비를 잘 넘는 것을 당연히 해내야지 절대 자신을 감상해선 안 된다. 그 후 나는 대법을 첫 자리에 놓았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구나 일을 진지하게 하지 않거나 수련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본말이 전도된다. 집착이 살아있는 한 큰일, 작은 일에서 드러나게 마련이고 수련에는 작은 일이 없다. 집착을 버리면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 되고 근본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

집착을 떨쳐버리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꾸준히 법공부를 하는 것이다. 머릿속에 대법이 가득하니 사람의 관념은 떠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실제 환경에서 고난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은 실천 중에서 진정하게 자신을 연마(魔煉)해야만 비로소 제고해 올라올 수 있다.”[2]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때마다 착실한 수련이라면 첫 번째 일념은 사부님과 대법의 존재를 떠올려야 한다. 전부 남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자신에게 한 가지 깨달음의 기회를 준 상대에 감사하는가? 이것은 사람과 신의 구별점이다.

자신이 부딪히고 상처받았을 때 안으로 수련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엄격하게 자신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말로는 수련자라고 하지만 적어도 그 문제만큼은 속인이다. 진정한 수련자는 관건적인 시각에 얼마나 해낼 수 있는지, 자신의 사상을 다잡을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다. 모순 속에서 참지 못하고 남만 탓하다가 나중에 가서 사과해서는 안 된다. 거대한 난관을 돌파한 후에야 수련의 아름다움을 체득할 수 있다.

생활과 일에서 부딪히는 어떤 일이든 내 마음을 움직이게만 한다면 나는 곧 틀어쥐고 놓지 않는데 심지어 사소한 염두조차 자생자멸(自生自滅)시키지 않는다. 사람은 진실해야 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음을 해내지 못했다면 반드시 자신을 향해, 기꺼이 자신의 이 마음에 공을 들여야 한다. 만약 모순 중에 마음이 물처럼 고요하다면 다시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한 사람의 미세한 생각이라도 다른 공간에서는 아마도 한 덩어리 업력일 것이다. 결국 매번 근본을 캐내고 근원을 찾는다면 모두 자신의 사욕을 건드렸음을 알게 될 테니 상대방을 탓할 수 없다. 이렇게 하면 갈등은 사라진다.

한 사람이 마음속에 모순을 품고 있다면 어떻게 우주의 시야가 탁 트일 수 있겠는가? 수련하는 사람은 적이 없으니 자신이 입은 상처를 내려놓고 다른 수련생과의 간격을 없애야 하며 중생이 다가와 진상을 알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한 가지 일에 어느 정도 공을 들였다가 부정당했었는데 이것은 사실 내 문제였다. 그러나 상대가 직접적으로 나와 소통하지 않고 뒤통수를 치는 것을 나는 조금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했다. 그날 여덟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몇 번이나 관을 넘을 기회를 잘 잡았었는데 이번엔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다행히도 다음 날 나는 여전히 나에게서 답을 찾고 분발했다.

일사일념(一思一念), 일언일행(一言一行)을 수련해 마지막 1분 1초까지 버티기란 쉽지 않다. 무슨 일이든 모두 타인을 위한 것이지 자신의 경지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음이 얼마나 홀가분하겠는가! 그것이 대법 수련이다. 정법수련은 결국 막바지에 이르렀으니 우리 모든 대법제자들이 평온하게 하늘로 통한 길을 걸어가길 기원한다.

3. 진상을 분명히 알리다

만약 내가 오늘 두 가지 일을 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열심히 진상을 알렸다면 여전히 조금 제고됐다고 느낀다. 진상을 알리지 않았다면 다른 두 가지 일에 아무리 열중해도 나아진 게 거의 없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지만, 진상을 말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

과거 역사에서 수련하는 사람은 세상과 단절돼 매우 괴롭고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결과 대개 늙어서 황천길로 가거나 결실 없이 끝난다. 그런데 정법시기에는 단체 법공부를 하고 항목 팀도 있어서 수련생들 간의 통상적인 교류가 있기에 수련의 어려움을 크게 덜어주고 진상을 알리는 열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매체에서 진상을 광범위하게 알려줘서 지난해부터 매체에 참여해 보니 그것도 넓은 세상이었다. 길에서 만난 인연 있는 사람과 마주 앉아 진상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리고 나는 혼자 생활하기에 항목 속 팀워크는 나에게 속인 사회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도 도와줬다. 그런 어려움은 혼자서 극복하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매주 빨리 일을 끝내 책임자를 안심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매주, 매년이 천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끊임없이 회전했는데 아름답다고 느꼈다.

수련생으로서 협조인에게 폐를 적게 끼쳐야 한다. 나는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주어진 번역문장은 모두 세속에 구속되지 않고 초연한 것이 좋겠으며 사회 정세와 밀접하게 결합된 글들은 별로 번역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처음 일했을 때 책임자가 나에게 준 번역문장은 전부 사회 동향이 반영된 뉴스였다.

정법제자는 모든 바른 요소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대법은 내 생각을 바로잡았고 내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이런 잘못된 인식을 재빨리 제거하자 머릿속에선 사회 동향에 대한 무감각과 무관심이 사라졌다. 그래서 뉴스 번역을 열심히 할 수 있었다.

매체에서 번역 외에 나는 대면 진상을 알리는 것을 중시했다. 2020년 우한폐렴이 터진 후 나는 한 의사를 만났다. 그녀는 50~60년대 지식인처럼 보였고 그 시대는 도덕성이 높았다. 나는 그녀가 반드시 의덕(醫德)이 근본임을 인정할 것으로 생각했다. 진상은 상대방의 취미에 따라 이야기해야 한다. 나는 “의사는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우리 부모님께 들으니 옛날 의사는 모든 약에 독이 있는 것을 알기에 약을 처방할 때 매우 신중했다고 합니다. 지금 중국 의사는 환자가 오자마자 약국으로 보내고 또 한약방으로 보내 돈을 법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했다. “대장금은 조선시대의 유명한 의사였습니다. 왜 그녀는 역병에 걸린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자신은 괜찮았을까요?” 뜻밖에도 그녀는 여기까지 듣자 안색이 변하면서 “괜찮을 수도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 얼굴에 나타난 놀라움에서 나는 이 사람이 의덕을 중시하는 의사임을 알았다. 그녀는 대장금은 의덕이 고상해 감히 역병이 침입하지 못한다고 인정하는 것 같았다. 무신론 세뇌를 많이 받은 사람은 이런 인식에 도달하기 어렵다. 나는 서둘러 그녀에게 폐렴의 최초 폭발과 만병통치약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헤어질 때 그녀는 돌아가서 대법 진상을 계속 알아보겠다고 약속했다.

지난해 역병이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국내에 있는 음악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중공이 전염병 상황을 은폐한 사실을 얘기했다. 처음에 그녀가 계속 집안일을 얘기했기 때문에 나는 듣기 싫었고 짜증이 났다. 그녀를 좋지 않게 대해서인지 그녀는 “넌 전화로 그런 얘기를 하면 괜찮지만 나는 중국에 살고 있고 안전 문제도 있어.”라고 말했다.

두 번째 통화할 때 나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전염병이 끝나지 않았으니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출국하지 마세요.”라고 친절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곧바로 수락했다. 이번 의사소통에서 그녀는 집안일은 거의 말하지 않고 오히려 “올해(2020년) 27개 성·시가 홍수 피해를 입었지.”라며 걱정하는 말을 했다. 그녀 말을 따라 나는 “싼샤(三峽)댐은 사람을 해치는 공정입니다. 한 수리공사 전문가는 그에게 30분만 시간을 주면 그가 싼샤댐이 가져올 문제를 분명히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논술한 12가지 문제 중 이미 11가지가 들어맞았다고 합니다. 전문가에게 30분도 주지 않을 정도로 문외한 관리를 선호한 것을 보면 중공의 오만함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심각한 기후변화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싼샤 프로젝트가 장강(長江) 중하류의 생태계를 변화시켰다고 분석했다. 그녀는 “충칭은 본래 화로라고 하지만 지금 따뜻해진 이런 기후변화는 싼샤댐 공사 때문인 것 같아.”라고 말했다.

진상을 이야기하는 과정에 만약 수량이나 표면적인 효과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보통 사람의 경지에서 일하는 것이다. 음악 선생님이 이번에 사소한 집안 얘기 대신 자신이 관심을 갖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가 바로 구원을 받을 전조였다. 우리가 곧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할 때 그녀는 나에게 함께 역병 난관을 벗어나 이 재난의 증인이 될 것에 동의했다.

4. 맺음말

사람은 세상을 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보통 사람은 3일도 잘 살지 못하니 수련하는 사람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는 반드시 이 사람이 업력이 커서가 아니라 수련의 소질이 있고 중임을 맡아서 불법(佛法)이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일 수 있다.

사실 모든 사람은 하늘이 큰 임무를 맡긴 것과 같다. 우리 대법제자는 이 역사적 중임을 완수하고 사부님과 중생의 간절한 기대를 저버리지 말자.

부족한 점은 자비로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21년 11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1/11/12/433540.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11/12/433540.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