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동북 대법제자
[밍후이왕]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1997년에 대법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시간상으로는 노 대법제자이지만, 대법제자의 이름만 걸었을 뿐 수련을 진정으로 착실히 하지 않았습니다. 201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저는 마난(魔難)에서 깨어나 실속있게 수련하며 용맹정진했습니다.
저는 올해 56세로 집은 동북 현급 시의 한 깊은 산속 삼림 농장 안에 위치해 어릴 적부터 산에서 자랐습니다. 높은 산 속의 밀림이라 매우 외졌고 부모님은 모두 삼림 농장의 노동자였습니다. 결혼할 나이가 되어도 저는 이 외진 산을 벗어나지 못하고 삼림 농장의 노동자와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남편의 수입으로 가족을 부양하기에 부족했습니다. 저는 부지런히 산속에서 3ha 크기의 밭을 일구어 농사로 생활을 유지하며 두 아이를 외지에서 공부시켰습니다.
이곳은 비록 외졌지만, 대법의 복음은 여기에도 전해졌습니다. 1997년 한 지인이 남편이 연마하고 있는 공법이 정말 좋다며 일해도 지치지 않거니와 젊어진다며 저에게 소개했습니다. 이 말은 저를 감동하게 했습니다. 저는 일 년 내내 농사를 짓는데 가정의 많은 일을 저 혼자서 하고 있었습니다. 수련하면 일해도 힘들지 않아 일을 더 잘할 수 있으니 그러면 연마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인이 저에게 먼저 책을 읽어보라며 ‘전법륜(轉法輪)’ 한 권을 보내왔습니다.
그때 저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한 번 읽은 후 느낌이 너무 좋았는데 사람에게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온종일 농사일을 하기에 책을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겨울 농한기 때에 저는 연공장에 가서 수련생을 따라 법공부하고 연공했습니다. 농번기에는 멈추고 일에 몰두했습니다. 집 안팎의 일은 저 혼자 떠맡고 있는데 시부모님까지 집에 일거리가 있으면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비록 법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진선인(真·善·忍)’의 표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며 일을 함에 남을 위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남편은 나중에 간부로 승진했습니다. 삼림 농장의 노동자로부터 직장의 책임자가 되자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돌아왔는데 가정생활은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반면에 저는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휴식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제 삶은 가정의 생활을 위해 쉴 새 없이 바삐 보냈습니다. 저에게 수련이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중사(中士)가 도를 들음에 있는 듯 없는 듯”[1]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소박하고 유능함은 남편의 감정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현대 사회의 이 큰 염색 독에서 그는 시대 조류에 휩쓸려 밖에서 먹고 마시고 놀면서 외도를 했습니다. 저는 줄곧 그의 결혼을 만류했지만, 아무리 타일러도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저를 버렸고, 2014년 우리는 이혼했습니다.
1. 사람을 구하는 발걸음을 내디디다
이혼이 가져다준 큰 충격으로 저는 화나고 억울하고 원망하며 온종일 정에 얽매여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서러운 마음에 자꾸 울고 싶고, 아는 사람을 봐도 울고 싶었습니다. 이를 갈며 그가 가정을 책임지지 않고, 저와 아이에게 미안한 일을 저질렀다고 미워했습니다. 이 몇 년간 고생스럽게 이 집을 위해 그렇게 많은 것을 바쳤는데, 결국 이런 상황으로 떨어졌습니다. 이혼 후 그는 또 승진했는데 명(名)·리(利)·정(情)의 시련에 직면하자 저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습니다. 저는 살이 많이 빠졌고 기력도 떨어졌습니다.
2016년 정월, 가장 가까운 사람인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저는 다시 고통에 빠졌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저와 함께 계시며 관심을 가져주셨고 매일 장을 보고 요리를 하며 집안일을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출근하고 아이는 외지에서 근무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외롭게 홀로 남은 저는 결국 이러한 큰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한 달 넘게 집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비로소 사람은 왜 살며 사람이 사는 진정한 의미와 천년만년의 기연(機緣)은 법을 위해 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제외하고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없으며, 이 세상에서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없다. 당신이 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기 수련마저 희미해져서 속인의 일을 중하게 보는데, 당신들에 대해 말하면 그것은 대법제자의 수련 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2]
세인은 정을 위해 살지만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명·리·정을 닦아 버려야 합니다. 무거운 충격으로부터 깜짝 놀라 깨어난 저는 사람 구하는 사명을 지닌 대법제자라고 생각하자 사부님이 계시기에 절대 외롭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여러 번 시간을 연장해 대법제자가 다 수련해 올라오고 뒤떨어진 자가 따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중에 저도 있었습니다! 요 몇 년간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고 사람 중에 미혹되어 세상에 온 목적을 잊고 있었으니 자칫하면 자신을 망칠 뻔했습니다. 저는 더는 기다려 주신 사부님의 자비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정을 내려놓고 사(私)에서 벗어나 신의 길에서 분발하여 바짝 뒤쫓아 가겠습니다.
2016년 봄, 우리 지역의 자료점이 파괴되었는데 수련생이 납치돼 판결받았습니다. 밍후이왕은 곳곳에 자료점 꽃을 피우라고 했으니 저는 기다리거나 의지하지 않고 수련생의 도움으로 압력을 무릅쓰고 집에 작은 자료점 꽃을 피웠습니다. 스스로 자료를 만들어 나가 배포하는 동시에 몇 명의 노년 수련생에게 공급해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자전거를 타고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집마다 진상 자료를 배포하는데 여름을 보냈습니다. 제가 사는 사방 수십 리에 다 배포했는데 나중에 얼굴 맞대고 ‘삼퇴’(중공 3대 조직인 중국공산당, 공산주의청년단, 소년선봉대 탈퇴를 성명)를 권유하기 위한 기반을 다졌습니다. 길이 있는 곳이라면 저는 어디를 막론하고 다 갔습니다.
겨울이 되면서 저는 혼자 위층으로 올라가서 한 번에 한 동씩 6개 단지를 6층까지 배포했습니다. 그때 제가 인쇄한 것은 투인원 진상 소책자인데 가지고 다니기에 편리했습니다. 외출할 때마다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제가 법 속에 녹아들자 사부님께서는 저에게 경제상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2016년 8월, 제가 있던 임업국(林業局)은 임업 노동자 자녀들에게 집단 공장에서 정년퇴직의 기회를 주었는데 이런 일은 전례가 없습니다. 제가 신청했더니 2017년부터 퇴직금이 생겨 생활이 보장되었습니다. 저는 세 가지 일에 몰두하며 수련에 더욱 용맹정진했습니다.
2017년 초에 저는 이웃 수련생 A 씨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일찍 시골에 내려가 집마다 진상을 알린 적이 있어 경험이 풍부했습니다. 우리가 있는 이곳은 북방의 현(縣)급 농업 도시로서 농촌 인구가 많았습니다. 많은 중생을 아직 구하지 못했기에 시골에 가서 진상을 알리려면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저도 시골에 가서 진상을 알리고 싶은 소망이 있었기에 우리 두 사람은 서로 호흡을 맞춰 시골에 가서 집마다 진상을 알리자고 교류했습니다. 사람을 구하는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저는 중고 오토바이 한 대를 사서 보행 도구로 삼았습니다.
북방의 봄갈이 계절에는 젊은이들은 밭에서 농사를 짓고 노인과 아이들만 집에 있을 뿐 마을에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A 씨의 고향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진상을 알리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좋으며 평안을 지키고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둘은 고향 친구들에게 직접 만든 진상 걸이를 선물했는데 그 위에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라고 적혀 있어 서로 앞다투어 요구했습니다. 우리는 선의로 이것은 보기 좋게 집에 걸어두는 것이 아니라 항상 위에 새겨 있는 ‘파룬따파하오’를 외우면 마음이 탁 트이고 밝아지며 병을 없애고 몸이 건강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때 한 부녀자가 “당신이 방금 말하자 제 마음이 탁 트이고 밝아졌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진상을 분명히 알게 되어 진상 자료를 더욱 소중히 여겼습니다. 누군가 ‘파룬따파하오’라고 외치고는 “고맙습니다! 당신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련생은 “대법 사부님께서 우리더러 여러분을 구하라고 했으니 대법 사부님께 감사드리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운전기사 한 분이 “그럼 저는 대법 사부님께 감사드리겠어요!”라고 말하고는 ‘파룬따파하오!’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먼저 지대가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곳으로 갔습니다. 농민들은 모두 도로 양쪽에서 밭을 갈고 파종하므로 우리 둘은 양쪽 밭고랑을 넘나들며 진상을 알렸습니다. 순박하고 선량한 시골 사람 대다수가 잘 받아들였으며 어떤 이는 우리를 집에 가서 좀 쉬고 밥을 먹고 물을 마시라고 했지만, 우리는 간곡히 사양하고 계속해서 진상을 알렸습니다.
밭일하는 사람에게 다 알린 후, 우리는 다시 마을로 가서 집마다 진상을 알리며 인연이 닿는 사람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농번기에는 밭일하는 사람이 많아 우리에게 진상을 알릴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9일간 650명을 권유해 탈퇴했습니다.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하셨으며 우리는 다만 열심히 실천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부께서는 대법 수련자에게 정체(整體)적으로 제고해야 한다고 요구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둘만 시골에 내려가서 자료를 배포하며 진상을 알렸습니다. 나중에 우리 둘만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정체적으로 협력해 함께 나가서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성(省) 직속 임업국과 지방의 큰 읍으로서 기찻길 하나가 분기점인데 차도 양쪽에 있는 일부 수련생은 아직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협조인이 아니면서 조율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연구와 토론 끝에 A와 저는 또 두 명의 수련생을 따로따로 데리고 네 명이 오토바이 두 대로 진상을 알리러 가기로 했습니다. 이 두 수련생은 이전에도 진상을 알렸지만 겁이 많았습니다. 진상 처음 이틀, 두 명의 수련생은 저와 A를 도와 삼퇴 명단을 적고 발정념으로 우리 둘을 가지 해 주었습니다. 이틀이 지나자 그녀들도 혼자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4명은 2명이 한 팀을 이루어 한 팀이 한 거리를 맡았습니다. 앞문을 여는 사람이 있고 뒷문을 여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 두 사람은 한 명이 앞문으로 가고 한 명은 뒷문으로 갔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효율이 높아 네 사람이 나누어 두 사람이 한 마을을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우리 지역 주변은 4개 읍의 크고 작은 마을과 인접해 있는데 우리는 기본적으로 한 번은 다녀왔습니다. 매번 농촌에 내려가 진상을 이야기할 때마다 70~80명, 많을 때는 백여 명을 권유해 탈퇴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멀리서부터 가까운 곳까지 마을 곳곳 집마다 알렸습니다. 각종 진상 자료와 걸이 장식품을 가지고 다니며 상대방을 이해시킨 후에 다시 진상 자료 한 권을 드리고, 다른 사람에게 다른 자료를 선물했습니다. 탈당 서비스센터 홈페이지가 있으니 인터넷으로 상황을 알아볼 수 있고 친구들에게 삼퇴를 권해 줄 수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시골에 가서 진상을 알리다 보면 교란하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상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듣는 것을 교란해 우리가 사람 구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저는 대법은 위엄이 있기에 중생이 대법에 죄를 짓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우리가 진상을 알리고 있을 때 다른 교를 믿는 사람을 만났는데 사람들이 진상을 듣는 것을 교란했습니다. 저는 엄중하게 “안 들어도 좋고, 강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이 타인이 진상을 듣고 구원받는 것을 막을 권한은 없어요. 팔만 사천 법문 중 어느 문이든 믿는 사람이 있지 않나요? 당신이 막을 수 있나요?”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는 더는 말하지 못하고 옆으로 물러섰습니다.
진상을 분명히 알지 못한 사람이 있었는데 거짓에 속아서 좋고 나쁨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달력을 선물하면 받아들이지만, ‘삼퇴’하면 생명을 지킨다고 알리면 화를 내며 우리를 쫓아내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파출소에 전화해 우리를 잡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우리는 법을 어기지 않았고 파룬궁(法輪功)은 합법적이므로 당신이 우리를 무고하는 것은 법적 책임을 져야 하니 경찰이 오면 우선 당신을 잡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듣자마자 풀이 죽어 발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처럼 시골에 내려가 진상을 알릴 수 없는 수련생은 읍내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노인 수련생은 집 근처에서 진상을 알리고 말할 수 없는 수련생은 나가서 대법의 진상 스티커를 붙였습니다. 얼마 후 우리 동네 주거 단지 복도에 거의 다 대법 진상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글자를 모르는 수련생이 읍내에서 진상 자료를 집마다 배포했던 것입니다. 주거 단지 아파트의 크고 작은 거리마다 진상이 전해졌습니다.
제가 세 가지 일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사부님께서는 꿈속에서 제가 정법 노정에 따라왔다고 점화하셨습니다. 꿈에서 수련생마다 경주용 자동차를 타고 일렬로 날듯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제가 경주용 자동차를 타고 대열을 가로질러 들어가 수련생들과 함께 쏜살같이 앞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2. 전염병이 기습하고 있어 사람을 구하는 것이 더 급하다
2020년 중국의 새해는 예전과 달랐습니다. 중공의 바이러스가 갑자기 터져 나왔고 아울러 중국과 전 세계로 급속하게 확산하여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는 것은 새로운 시점에 놓였으며, 미궁에 빠진 세상 사람들은 사생결단에 직면했습니다.
이번 설을 저는 언니 집에서 보냈습니다. 언니는 산 위의 여행지에 가족 여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정월 초이틀에 관광지 직원이 우리 지역에 와서 모든 여관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우한 여행객이 있습니까?” 저는 비로소 우한에 심각한 전염병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이 너무 빨리 닥쳤으니 병세는 틀림없이 매우 심각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산간 지역까지 긴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언니네 집에 더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 구함은 불을 끄는 것과 같으니 대법제자로서 사명을 지니고 있기에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정월 초사흘에 저는 황급히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떠나던 날 산 위의 관광지가 봉쇄되었습니다.
3. 도시를 봉쇄한 전후로 끊임없이 사람을 구하다
초나흘 날, 수련생이 저의 집에 와서 전염병이 왔으니 서둘러 사람을 구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그때는 좀 멍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밍후이왕을 열어보니 이미 이 방면의 교류 문장이 있었는데 너무 좋았고 마음도 안정되었습니다.
저의 집은 자료점이기에 저는 밍후이왕에서 ‘전염병이 왔을 때 어떻게 자신을 구할 것인가’와 ‘파룬따파하오를 명심하라’는 두 문장을 내려받은 후 낱장으로 인쇄해 수련생과 함께 길거리에 나가 마주 보면서 배포했습니다. 길거리에 있는 행인들은 모두 바삐 오가기에 진상을 알릴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받으면 집에 가서 보고 생각을 바꿀 수 있고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믿고 기억하면 재난을 무사히 넘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어 수련생들은 거리, 시장 세 곳의 대문, 주거 단지 안에, 주변 마을을 나눠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라는 표어를 붙였습니다.
전염병이 발생하던 기간에는 집마다 2시간 동안 한 사람만 쇼핑을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저와 수련생은 이 두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매일 나갔습니다. 비록 시간이 제한되어 있지만, 사부님께서 가지 해 주신 도움으로 나갈 때마다 몇 명씩 만날 수 있었고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며 ‘삼퇴’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시간이 금처럼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4. 자신의 특기를 이용해 수련생과 호흡을 맞춰 사람을 구하다
일찍이 저는 산에서 농사를 지을 때, 오토바이 타는 것을 배웠고 운전 기간은 이미 20여 년이라 기술도 숙련되었습니다. 이미 50여 세가 되었지만, 오토바이를 타면 조금도 남자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안전하게 탈 수 있습니다. 저는 2017년부터 오토바이를 타고 수련생을 데리고 농촌에 가서 사람을 구했는데 오토바이는 우리가 사람 구하는 유력한 도구였습니다. 다만 이전의 달리던 거리는 몇십 리에 불과했습니다.
지난해(2020년) 전염병 봉쇄가 해제된 뒤 5월 초, 두 노년 수련생과 약속하고 산속으로 자료를 배포하러 갔습니다. 산에서 3일을 배포했는데 왕복 5~6백 리의 노정이었습니다. 길이 멀고 도로 사정도 좋지 않은 데다 제 오토바이가 낡아서 집까지 요동치며 왔더니 온몸의 뼈마디가 부셔질 것 같았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시도 때도 없이 누워있었고 나흘 만에야 겨우 회복했습니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현급 시로 시골의 인구가 매우 많은데 아직 많은 중생을 구하지 못했고 진상 자료도 적게 배포했습니다. 몇 년 전에 시골로 내려가 자료를 배포한 수련생 중 많은 사람이 박해받았었고 지금은 시골로 내려가 자료를 배포하는 사람이 없으며 교통수단도 부족했습니다.
전염병 봉쇄가 해제된 후, 도시 수련생 C는 저에게 오토바이를 타고 그녀와 함께 시골로 내려가 자료를 배포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먼 산간 지역으로 길이 울퉁불퉁해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너무 힘들어 저는 좀 겁이 나서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녀는 그쪽 여성 수련생과 호흡을 맞춰 오토바이를 타고 자료를 아주 빠르게 배포했다고 했습니다. 수련생이 필요한 것이 대법의 필요라고 생각하며 무조건 따라야 했습니다. 제 오토바이가 너무 낡아서 사람 구하는 편리를 위해 중고로 좋은 브랜드 오토바이를 한 대 샀습니다. 이 오토바이는 속도가 빠르고 충격 완화도 좋으며 힘이 있고 기름도 절약되었습니다.
도시의 그 수련생은 오토바이를 타고 중·단거리밖에 달리지 못하는데 우리 시는 면적이 넓었습니다. 그 때문에 수련생 C는 중생을 구해야 할 책임감으로 저와 호흡을 맞추며 외진 산골로 가서 그 지역에 자료를 광범위하게 배포하고 싶어 했습니다. 더 심각한 상황이 올 것을 뻔히 알기에 우리는 시간을 다그쳐 큰 난이 닥치기 전에 세인들에게 재난을 멀리하도록 진상을 알리기로 했습니다. 저는 수련생 C와 예전부터 호흡을 맞춘 적이 있습니다. C는 속도가 빠르고 좋은 오토바이를 타고 자료를 쾌속으로 배포할 수 있기에 우리가 함께하면 황금 파트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C는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대낮에 시골의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제가 길 중간으로 달릴 때 수련생 C는 오토바이를 탄 채 진상 자료를 정확하게 각 집의 뜰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녀는 양손으로 좌우로 던질 수 있어서 속도가 빠르고 효율이 특히 뛰어났습니다. 잠깐이면 한 마을의 배포가 끝났습니다.
우리 둘은 오토바이를 타고 우리 시의 동서남북 마을을 돌아다녔습니다. 2020년 한 해에만 2만여 건의 진상 자료가 배포되었는데 이렇게 많이 배포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도 믿기 어려웠습니다! 지도를 보니 우리 둘은 옛날 가지 않았던 외진 시골마저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정법을 빠른 속도로 추진하시고 있는 지금 저와 수련생 C는 밍후이왕에서 발표한 새로운 진상 자료를 계속 이런 방식으로 배포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대법제자는 신의 길을 걷고 있는 수련자이므로 정념과 신의 일념으로 해야만 이런 결과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체득했습니다. 처음 두 번 했을 때 저는 2~3백 리를 오가며 운전했고 집에 돌아가면 자료도 만들어야 해서 아주 바쁘게 보냈습니다. 정말 힘들고 고생이 많았습니다! 매일 편도 100리가 넘는 거리를 달려야 했는데 마음이 불안할 땐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신이 아닌가? 신의 힘은 무궁무진하다.” 이런 신의 일념이 생기자 힘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말 신이 도와주는 것 같이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 수련생 C가 “언니, 힘들지 않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웃으며 “힘들지 않아요. 제가 우주금강(宇宙金剛)이 아닌가요? 어떻게 힘들 수 있나요?”라고 말했습니다.
5. 태풍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다
2020년 8월 하순의 어느 날, 새벽에 검은 구름이 뒤덮여 비가 언제 내릴지 몰랐습니다. 집에서 비를 기다릴 수만 없다고 생각한 저는 수련생 C와 함께 자료 50권을 가지고 70리 떨어진 한 읍에 가서 대면하여 자료를 주며 삼퇴를 권유했습니다. 도중에 먹구름이 머리 위를 내리누르는 폭우가 마치 우리 둘을 따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비가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사부님께 청을 올렸습니다. 이렇게 오전 내내 우리가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을 알렸는데 사람들이 예전보다 대법에 더 공감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료를 다 배포한 후 우리는 서둘러 집으로 달렸습니다. 읍내에서 십여 리를 벗어나자 큰비가 내렸는데 길 양쪽에는 비를 피할 곳도 없고, 우비도 가져오지 않아 계속 비를 맞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가 갈수록 세지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는데 빗물이 시야를 흐려지게 해서 저는 끊임없이 모자 위의 씌우개를 닦았습니다. 잠깐 사이에 우리 몸은 흠뻑 젖어 추워서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습니다.
마침내 무사히 시내에 있는 수련생의 집에 도착해 우리가 놓아둔 가방을 가지러 갔습니다. 언니 두 분이 여기에 머무르라며 옷이 다 젖어서 몹시 춥겠다고 했습니다. 수련생 C는 다 젖었으니 언니한테 폐 끼치지 말고 그냥 집에 가자고 했습니다. 저도 이왕 다 젖었으니 이제 멀지 않으니 그대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저는 또 비바람 속에서 50리 길을 운전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수련생이 그날 비바람이 몰아친 것은 우리가 동북 지역을 강타한 태풍 ‘마이삭(Maysak)’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알려줬습니다. 그때 여러 지역에 광풍과 폭우가 계속되었는데 동북 지역에서는 전례가 없던 일로 우리 시 주변의 농작물도 모두 땅에 쓰러졌습니다. 어쩐지 그날의 광풍과 폭우가 우리와 오토바이를 휩쓸 것 같았지만 다행히 사부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셨기에 무사히 집에 돌아왔습니다.
6. 깊은 산 속에서 정념으로 위험에서 벗어나다
우리 시의 동남부는 산간 지역으로 깊은 산에 여러 개의 삼림 농장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산이 높고 수림이 빽빽하여 매우 외집니다. 전염병 발생 이후 이곳은 줄곧 폐쇄된 상태였습니다. 2020년 9월 28일에야 봉쇄를 해제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후, 저는 거기에 가서 자료를 배포할 수 있어 매우 기뻤습니다! 그곳의 여러 삼림 농장 중 9곳은 아직 진상을 알리지 못한 곳이므로 제가 가서 자료를 주지 않으면 아무도 가서 배포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태어났으므로 그쪽의 중생은 제가 살려야 합니다.
그곳에는 이 지역의 아주 유명한 관광지도 있는데, 관광지가 있는 삼림 농장이 가장 컸습니다. 매년 가을 황금연휴를 맞아 성 안팎에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여기에서 화려한 색채를 뽐내고 있는 풍경을 관람하고 있었습니다. 관광객이 많으면 당연히 자료를 주기에 가장 좋은 시간인데 평소 사람이 적어 낯선 사람이 오면 현지인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수련생 M의 집은 바로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침 산 아래 임업국에서 일하고 있어 저는 그녀의 집에서 나흘 묵었습니다. 저는 그녀와 함께 산에 가서 그 9개의 삼림 농장에 진상 자료를 배포하자고 약속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9시에 우리 둘은 진상 자료 500부를 가지고 오토바이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첫 번째 삼림 농장에 도착했고, 백여 부만 필요해서 우리는 아주 빨리 배포를 끝냈습니다. 추수철이라 농민들이 모두 매우 바쁘게 밭에서 수확하느라 삼림 농장에는 사람이 얼마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모두 시멘트로 길이어서 오토바이를 타기에 편리해 자료도 빠르게 배포했습니다.
12시가 되어 관광지가 있는 가장 큰 삼림 농장에 도착했는데 점심 식사 시간이라 길에 사람이 많았습니다. 자료를 배포하기가 불편해 우리는 바로 위의 두 삼림 농장으로 갔습니다. 이 두 삼림 농장은 합치면 150호도 안 되는 작은 농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빠르게 배포를 마치고 다시 관광지 삼림 농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먼저 길 남쪽부터 배포했는데 이쪽 골목은 모두 통하기 때문에 배포에 편리했습니다. 저는 발정념을 하면서 눈은 주위를 살피며 침착한 마음으로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북쪽은 다 막다른 골목이라 수련생에게 안에서 밖으로 배포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파출소 몇 글자에 꿈쩍도 하지 않고 묵묵히 바람이 지나듯 배포를 마치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따라 되돌아갔습니다.
이 길은 뒷골목이고 크게 비탈진 곳으로 그 아래 산속에 또 삼림 농장이 하나 있는데 더 외진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길가의 경치는 아름다웠고 길 양쪽의 아름다운 산색은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아름다운 가을 경치를 감상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벌써 오후가 되었기에 빨리 다음 삼림 농장에 도착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큰 산이 태양을 막아 햇빛이 들지 않는 지점에 이르면 ‘솨’하는 서늘한 기운이 사람을 몸서리치게 했습니다.
18리를 달려 산기슭에 이르러 삼림 농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남쪽으로부터 한 골목 한 골목씩 배포했고 누군가를 보면 우리가 배포하는 것은 생명을 구하는 진상이니 잘 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맨 마지막 골목에 도착하니 길지 않은 막다른 골목으로 인가가 몇 채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밖에서 안쪽으로 진상 자료를 한 정원에 던졌고 그 순간 마당에 서 있던 위장복에 빨간 완장을 찬 젊은이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저는 오토바이를 타고 밖으로 달리며 골목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 젊은이는 오토바이를 타고 따라 나왔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 승용차를 몰고 그와 함께 우리를 쫓게 했습니다. 제가 삼림 농장을 빠져나왔는데 젊은이가 오토바이를 타고 뒤에서 쫓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속도를 늦추고 그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에게 진상을 알려주어 죄를 짓지 못하게 하려 했습니다. 그는 먼저 제게 “당신들은 뭘 하는 사람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우리는 사람을 구하러 왔고, 사람 목숨을 구하는 진상 자료를 배포하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태도는 좀 온화해지면서 작은 소리로 “거기 서요, 거기 서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속도를 높여 그를 따돌렸습니다.
그때 그 승용차가 쫓아왔습니다. 오는 사람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오기에 그들이 차로 가로막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뒤에서 경적을 울려도 저는 길을 비켜주지 않고 큰 산길에서 질주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약간 기울이자 그는 급히 우리 앞쪽에 차를 가로 세워놓고 저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좁은 시골길에서 속도를 줄이고 보니 차 앞은 좁아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길도 평평하지 않아 쉽게 넘어질 수 있었습니다. 차 뒷부분은 시멘트 길 쪽으로 튀어 나가 있었지만, 흙길은 평평했습니다. 저는 두렵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왼발에 힘을 주며 두 발을 디디고 오른손은 가속 페달에 힘을 주고 나는 듯이 휙 하고 달려 나갔습니다. 동시에 강한 정념을 내보냈습니다. “사부님, 제자를 구해주세요! 사부님 제자를 구해주세요! 중생이 대법에 죄를 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 운전하던 사람은 여성이 이렇게 능숙하게 오토바이를 몰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굽이가 많은 산길에서 우리를 막지 못하자 더는 뒤쫓지 않았습니다.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 제자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셨습니다!
가져갔던 과일이나 월병이 온종일 오토바이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먹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200여km의 노정, 다섯 개의 삼림 농장을 왕복하는 데 9시간이 걸렸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마침 발정념 시간이었습니다. 방에 들어서자 아들이 “엄마, 온종일 밖에 있었나요? 저는 온종일 밥을 안 먹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밥을 먹을 때 저는 아들에게 “엄마가 어디 갔었는지 알아?”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어디에 갔었다고 말하자 아들은 잘 알아듣지 못한 듯이 다시 물었습니다. “어디에 갔었어요?” 제가 다시 한번 말했더니 아들은 놀라면서 “엄마는 정말 대단해요! 진짜 대단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집에서부터 산 위의 삼림 농장까지 400여 리나 되는 산간 지역이기에 보통 남자도 오토바이를 타고 그렇게 먼 곳을 달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들에게 “엄마는 대법 제자이기에 남들과는 달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구도에 감사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2015년 뉴욕법회 설법’
(밍후이왕 제18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원문발표: 2021년 11월 12일
문장분류: 대륙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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