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1999년 초에 법을 얻어 21년을 수련했다. 처음에는 법이 얼마나 크고 수련이 얼마나 엄숙한지 몰랐기에, 내가 법을 얻은 구체적인 날짜도 기억에 없었다. 수련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진정으로 법공부 팀에 들어갔고, 1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전법륜(轉法輪)’을 한 번 다 외웠다. 부끄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나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시며 지켜주셨다. 제자가 지나는 고비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안내와 고심한 안배를 느낀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주의 고층차는 바로 이런 하나의 이치이며, 보아서 누가 되면 바로 그를 선택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이치이다.”[1] 사부님께서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비로소 나는 우주의 모든 중생이 부러워하는 대법제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수련의 길목마다 법으로 가늠해 올바르게 선택하고 사부님께서 정해주신 길을 가야 한다.
처음으로 집착을 내려놓으려 하다
나는 수련하기 전 매년 생일이 돌아오면 남편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고 늘 실망스러워 화가 났다. 1999년 봄, 나는 생일이 오기 전에 미리 생각했다. ‘나는 수련인이기에 이번 생일은 어떻게 보내도 좋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평온한 하루가 지나고 남편이 내 생일을 잊어버렸어도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저녁 무렵, 남편 친구가 큰 생선을 들고 우리 집에 왔다. 나는 바로 사부님께서 격려해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을 내려놓으니 누군가가 생선을 가져왔다. 수련은 정말 미묘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2002년에 아이를 낳았다. 어떤 수련생이 병원에 가서 해산하고 다음 날 바로 귀가했다는 말을 듣고, 나도 대법제자니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중에서야 이것은 사람을 배우는 것이지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기에 바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내 생각이 바르다고 생각해 입원 준비를 하지 않고 해산하러 갔다. 결국, 해산하고 3일이 지나도 의사가 퇴원시키지 않아, 남편에게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라고 재촉했지만, 남편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자 나는 화가 나서 침대에 앉아 울었다. 좀 있다가 ‘나는 수련인이니 그렇게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내려놓자, 입원하라면 하자’라고 생각하니 화가 가라앉았다.
결국, 10분도 안 돼 남편이 밖에서 뛰어 들어오며 “가자. 퇴원하자!”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가 조금 전 한 동료를 만났는데 도와줄 일이 없는지 적극 물어왔다고 한다. 남편이 얼른 내가 집에 가고 싶어 한다고 하자 그 동료가 병원에 연락했고, 병원에서 우리를 내보내게 된 것이다. 정말 놀라웠다. 수련인이 마음을 내려놓으니 일이 순조롭게 해결됐다. 정말 신기했다!
몇 년을 수련하면서 지금도 이런 일을 돌이켜 보면 명백한 것이다. 사실 생선을 먹든 퇴원을 하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사부님께서 수련하려는 마음을 지켜보시면서 어떻게 수련하는 것이 옳은지 알려주시고 수련의 길을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법공부 팀을 찾아 착실히 수련하다
2009년 일자리가 바뀌어 신도시로 오게 되어, 거기서 수련생을 찾아보려 했다. 어느 날 버스를 탔는데 낯선 여성이 일어나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 오랜만이에요. 여기 앉으세요!” 수련생이었다! 예전에 법회에 간 적이 있는데, 내가 거기서 발언고를 발표했기 때문에 그 수련생이 나를 알아본 것이다.
이렇게 되어 나는 법공부 팀에 참가하게 되었다! 법공부는 한 수련생 집에서 했다. 수련한 지 10년 만에 마침내 집을 찾은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수련에 정식 입문한 느낌이었다. 법공부는 마치 수업처럼 한 단계에서 한 가지를 수련하는 식으로 학습 일정이 꽉 짜여 있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해명하는 문제에 관해 생각했다. 해명하면 자신이 안으로 찾는 것을 방해한다. 예를 들면 남편이, 내가 집에 오면 열쇠로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굳이 초인종을 눌러 가족들이 열게 한다고 지적했다. 사실 장을 보느라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계단을 오르자니 열쇠를 꺼내기가 불편했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해명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지적하는 것을 고치리라 생각했다. 나는 물건을 바닥에 놓고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성심껏 고치면서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이렇게, 남편이 지적하면 바로 고치자 나중에 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번은 한 수련생 집에 가서 컴퓨터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했다. 그녀에게 사람마음이 많은 것을 보고 나는 좀 싫은 생각이 들었다. 조금 뒤 속이 안 좋더니 메스꺼워지며 토했다. 그 집의 장(場)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 바로 부정했다. ‘아니야. 수련생의 문제를 볼 것이 아니라 안에서 찾아야 한다. 나 자신의 문제야.’
돌아오는 길에 또 두 번 토하게 되자 또 한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 집에서 한 콩 반찬이 덜 익은 것들이 있었는데 먹었잖아, 중독된 게 아닐까?’ 이 생각도 부정해버렸다.
수련인이 사람의 겉을 보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실상은 업력일 수 있고 자신의 마음에서 불러온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생각을 바로잡고 수련생을 깔보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토하면 또 어떻단 말인가? 영향 주지 못한다.’ 할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는 다른 수련생 집에 공부하러 갔다.
이 생각이 바른 생각이었던지, 공부하러 가서 처음으로 가부좌하고 한 강의를 읽었는데 아프지 않았다. 수련생의 머리에 나쁜 생각이 떠오르면 반드시 그것을 부정해 버리고 법에 부합하는 생각을 해야 사부님께서 우리를 격려해주시며 바르게 선택했다고 알려주실 것이다.
법을 외우면서 사부님의 가지로 관을 넘다
나는 2003년에야 비로소 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매우 느렸기에 한 단락을 며칠씩 외울 때도 있었으며, 외우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다 하다 보니 2006년에 이르러서도 제1강을 다 외우지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했는데도 사부님께서는 내가 큰 고비를 넘을 때 가지(加持)해주셨다.
2006년, 한때 우리 집에 이상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아도 아무 응답이 없이 TV를 틀어놓은 소리가 들렸고 때론 숨 쉬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수련인이기에 이런 일에 부딪히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며, 누군가가 전화기로 듣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남편도 이야기를 잘 나누라고 했다.
또 그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안녕하세요, 듣고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전화한 것은 혹시 내가 무슨 미안한 일을 한 적이 있어서인가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나한테 미안한 짓을 한 것 맞아요.”라고 했다. 마침내 그녀가 말을 하자 나는 내심으로 기뻐하며 “내가 당신에게 미안한 일을 했다면 일부러 상처를 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사과할 테니 용서하세요. 괜찮으시면 좀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고 더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남편이 바람을 피운 것이었다. 그녀가 이혼하라고 쫓아다니며 내게 전화하는 것은 남편에게 압박을 가하려는 것이었다. 남편도 후회하면서 내게 털어놨다. 나는 상심이 무엇인지 처음 느꼈다. 정말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나는 남편을 따라 다른 도시로 가서 그 여인을 만났다.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그녀는 남편을 데리고 도망갔다. 전화했더니 남편이 휴대전화기 배터리가 다 됐다면서 먼지 집에 가라고 했다.
아마 남편이 헤어지자고 할 것 같은데, 그녀에게 너무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히려 심한 상처를 입은 것은 나였다. 남편을 빼앗아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혼자 집에 돌아온 것이다. 나는 침대에 엎드려 줄곧 울었다. 오장육부를 다 털린 듯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지쳐서 더 울지 못하겠어서 진정하고 생각해보니, 나는 수련인으로서 사부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왜 이런 문제와 마주치는가? 모두 당신 자신이 빚진 업력이 조성한 것으로서, 우리는 이미 당신에게서 무수하고도 무수한 몫을 없애주었다.” “당신이 오직 자신을 연공인(煉功人)으로 여기기만 하면 당신은 그것을 잘 처리할 수 있다.”[2]
전생에 빚진 것일 수도 있고 내게 이런 액운이 있을 수도 있으니 이 고비를 잘 넘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남편이 돌아왔고 그녀도 따라왔다. 나는 집 문 앞에서 얼른 문을 열어 남편만 끌어들이고 그녀는 문밖에 놔뒀다. 그녀는 힘껏 문을 두드렸다. 남편은 그녀를 들어오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나는 정말 싫었지만, 그래도 문을 열었다. 수련인이기에 수련인의 표준에 따라 해야 했다.
세 사람이 한자리에 있는 데서 남편이 가정을 유지하겠다고 하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하룻밤 묵게 하고 친구처럼 이야기하며 그녀를 깨우쳐 주었다. 다음날 그녀를 떠나보냈다.
나는 남편을 용서했다. 비록 이성적으로 용서하기는 했지만, 마음은 아팠다. 그때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마치 칼에 베인 듯 아팠다. 시시각각 칼로 살을 도려내는 느낌이었다. 반년이 지난 어느 날, 이 일을 생각해보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또 전화를 걸어와 남편더러 한 번 와달라고 했다. 나는 마음을 내려놓지 않아 불러온 것임을 바로 깨달았다.
나중에 이 일로 자신을 점검했다. 이 일을 생각했을 때 마음이 서글프고 아프면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것임을 알고 또 내려놓으려고 했다. 2년이 지나서야 완전히 내려놓게 되었다. 나중에 다시 이 일을 생각하자 마치 남의 일처럼 나와 상관없어 보였다. 사부님의 배려에 감사드렸다. 법을 외우며 기초를 닦았기에 수련자의 표준을 선택했고, 사부님의 가지(加持)로 이 고비를 넘긴 것이다.
딸에 대한 정을 내려놓다
나는 딸을 낳기 전에 온몸에 붉은 점이 생기고 누런 물이 흐르면서 매우 가려웠다. 잠이 들면 나도 모르게 손으로 긁으면서 잠이 깼다. 손이 닿은 곳은 긁어서 부었다. 소업이 끝난 후 임신했다.
딸이 어렸을 때 아이를 데리고 ‘홍음’을 외웠다. 초등학교 때, 방학이면 남편이 출장을 갔기에 나는 집에서 어린이 제자 학습반을 꾸렸다. 학습반이 끝날 때마다 어린이 제자들이 체험을 썼는데 모두 많이 향상되었다. 하지만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법공부 팀에 가려고 하면 아이가 싫어했다.
한번은 억지로 아이를 데리고 공부하러 갔다. 아이 차례가 되었으나, 읽지를 못했다. 한 수련생의 제안으로 발정념을 시작해서 반쯤 지나자 수련생이 아주 강대한 저항을 감수했다면서 아이 자신이 부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사부님께 태도를 표시하고 사부님의 가지(加持)를 청하라고 알려주었다. 아이는 사부님 법상 앞에 꿇어앉아 울면서 “사부님 저는 사부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사부님, 그 나쁜 것을 제게서 떼주십시오.”라고 빌었다. 그런 후 다시 공부하자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이렇게 마쳤다.
아이는 중학생이 되자 휴대전화기에 빠지고 힙합 춤에 연연했으며, 반항하고 싸우며 앙심을 품었다. 나는 아이에게 나와 함께 법공부 팀에 갈 것을 강요했고, 토요일 법공부가 끝나면 오후에 휴대전화기를 주겠다고 했다. 한번은 아이가 가려 하지 않아서 휴대전화를 주지 않고 나 혼자 갔다가 돌아오니, 아이가 조각칼로 팔에 금을 많이 그은 것을 보게 됐다. 나중에 또 극단적인 생각도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고층 집 창문에서 내려다본 지면 사진을 찍고는 “이렇게 뛰어내리면 어떨지 모르겠다.”라는 글자를 입혀서 친구들에게 돌렸다. 아이는 가족들이 연락하지 못하도록 전화를 차단했는데, 마침 아이가 그리워하는 친척이 이 사진을 보고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매우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자신을 찾아보았다.
우선, 나는 아이에게 법공부를 강요할 수 없다. 너무 집착했다. 다른 집은 나와 달리 왜 아이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을까? 다음으로, 아이를 너무 사랑하면 안 된다. 늘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데, 사람은 각자 운명이 있다. 셋째,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 이쯤에서 더 강요하지 않아야 하지만, 속인 중에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게 이끌어야 한다. 넷째, 발정념을 많이 해야 한다. 배후에서 아이를 통제하는 부정적인 생명을 해체하고, 아이를 해치는 현대의 변이된 관념에 의한 행위를 제거해야 한다. 다섯째, 최악의 결과를 생각해봤다. ‘만약 이 아이를 잃는다면 어떻게 하지? 나는 두렵지 않다. 수련인이 부딪히는 모든 일을 바르게 직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을 믿고 모든 것을 사부님의 안배에 따르며, 모든 것을 사부님께 맡기고 마음을 바르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더는 아이에게 요구하지 않고 자신을 수련하고 집착을 버렸다. 급기야 중학교 입시를 하루 앞둔 전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는 내게 먼저 ‘홍음’을 같이 외우자고 하고는 잠이 들었다.
아이는 아침에 일어나 시험장에 가기 전에 좀 떨린다고 했다. 나는 “9자진언(九字真言)을 외우렴” 하고 말해주었다.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몇 번 외우더니 고개를 들고 웃으면서 “됐어요. 긴장이 풀렸어요”라고 했다. 아이는 그 시험에서 비범한 실력을 발휘해 최고의 성적으로 순조롭게 꿈에 그리던 성(省) 명문고에 합격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아이는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사람을 만나는 데 장애가 있었다. 나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가 도를 넘는 일을 저질러 위험할 때마다 사부님께서 관장하시고 방법을 찾아 막고 계심을 발견했다. 아이의 상태는 좋았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했으나, 전체적으로 점차 좋아지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는바, 사부님께서 아이를 관장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기에, 내가 할 일은 아이에 대한 정을 내려놓고, 아이를 보면서 나 자신의 문제를 고치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사부님의 안배에 따르기로 했다.
깊이 파고든 질투심
샤오리(小麗)는 손아랫동서로 나와 동갑이다. 매년 고향에 내려가면 본다. 그 부부의 생활 방식은 우리와 달라 돈을 헤프게 쓰지만, 고액의 대출을 받고 있다. 동서는 멋을 잘 내지만, 키가 크지 않아 예쁜 옷을 여럿 갖추고 높은 하이힐을 신는다. 나는 속으로 동서를 좀 업신여겼다. 그해 여름, 고향에 갔다가 돌아온 후 나는 굽 높은 하이힐이 생각나 두 켤레를 사고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중에 동서는 생활이 어려워져서 일하러 다니면서 우리 집에 묵으려 했다. 내가 가장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살려고 했다. 나는 우선 이것은 나를 수련하라는 것이며,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수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이 난관을 넘어야 했다. 안으로 찾았다. 내가 왜 다른 사람을 깔보는가? 동서는 빚을 지고도 아파트에 살면서 예쁜 옷을 입는데, 나는 마음이 평형을 이루지 못했다. 왜 마음에 걸리는가? 동서를 질투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찾자 놀랐다. 나는 지금까지 동서를 질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좀 무시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내가 산 하이힐 두 켤레가 문득 생각났다. ‘왜 동서에게 있는 것을 보고 나도 살까 했지? 아직도 사람을 질투하는구나.’ 이 질투심은 정말 대단한데, 그렇게 깊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그것을 잡아내게 해주셨다. 그러니 고쳐야 한다. 사부님의 고심하신 안배에 감사드립니다.
집착심은 우선 스스로 인정해야지, 스스로 집착심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버릴 수 있겠는가? 사실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집착심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인식한 후에는 버리기 어렵지 않다. 나는 한 가지 생각을 정했다. ‘나는 너를 버리기로 했다! 집착심이 다시 나타날 때 그것에 끌려가지 않아야 그것은 점차 약해지고 나중에는 완전히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빨리 되지 않고 시간이 걸리기에 양파처럼 껍질을 한겹 한겹 벗겨야 한다.’
동서는 우리 집에 온 후 내가 많은 마음을 버리도록 도와주었다. 예를 들면, 동서가 청소를 돕는다고 화장실 세정제로 주방 스테인리스 스토브를 닦는 바람에 스토브가 그을음처럼 시커멓게 되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되었다. 나는 사용하는 데 전혀 지장 없으니 화도 내지 않고 속지도 않겠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동서가 교통카드를 사고 싶다고 해서 어디서 파는지 알려줬는데도, 사지는 않고 나를 보자마자 교통카드를 달라고 했다. 나중에 동서를 데리고 슈퍼마켓을 지나다가 교통카드가 있는 것을 보았다. 동서는 들어가더니 또 사지 않고 나왔다.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동서는 내게 또 교통카드가 필요하다고 했다. ‘정말 사람을 못살게 구네!’ 짜증이 났다. 그 후 어느 날, 나는 문득 알게 되었다. ‘내가 속았어. 내가 잘못했다. 마음이 번거롭고 힘든 것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잖은가? 이 마음을 버려야 하지 않나? 왜 내가 그 속에 빠져 있는가? 나는 이 수련의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반드시 마음을 내려놓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차를 운전해서 버스 운행 시작점을 찾아 동서 마음에 들만한 카드를 사서는 백 위안(한화 약 1만 8000원)을 충전해서 건넸다. 동서는 아주 좋아했다.
하지만 동서는 늘 교통카드를 깜빡 잊고 가져가지 않았고 나중에는 어디에 놓았는지 찾지도 못했다. 나는 사실 그 카드는 동서가 별로 쓸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과정이 나를 수련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내가 제고하자 이 일은 이렇게 지나갔다.
나중에 동서는 셋방에 들어갔는데, 어디 가나 생활용품과 옷가지가 한 무더기나 되어 이사할 때면 내가 차를 몰고 짐을 날랐다. 동서는 몸이 약해서 큰 가방과 보따리를 모두 내가 들고 위아래층으로 물건을 옮겼다. 나는 내가 그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내 수련의 길을 걷고 있으니 잘 걸어야 한다고 자신에게 충고했다. 그래서 불평하지 않고 도와주었다.
동서는 2020년 3월 급성맹장염으로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때 우리 도시는 우한 폐렴이 심해서 병원도 문을 열지 않아 가까스로 사립병원에 연락했다. 동서는 맹장이 천공된 지 7일이 되어서야 수술을 받았다. 전염병 때문에 가족이 오지 않아 내가 간호할 수밖에 없었다. 시동생이 교대하러 올 때까지 병원에서 14일간 간호했다.
동서는 병원에서 간호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비교적 까다로운 직업이었다. 동서는 내게도 그 수준을 바랐다. 동서는 잠옷 두 벌을 번갈아 입으려고 했다. 그러나 문을 연 상점이 너무 없어서 나는 전염병에도 지하철을 타고 대형마트에 가서 줄 서서 기다려서 잠옷을 사 왔다. 동서가 매일 땀을 흘렸기에 몸을 여러 번 닦아주어야 했고, 수술 후에는 물을 마실 수 없어 거즈에 물을 묻혀 치아와 입안을 닦아 주었으며, 상처가 아파 움직일 수 없어 침대에서 대소변을 받아야 했다. 욕창이 생길까 봐 약국을 몇 군데 돌아다니며 쿠션을 사주었다. 몸 상태가 좀 나아지자 자주 뒤척여주고 부축해서 침대에서 내려주었다. 동서는 나보다 몸무게가 나가기 때문에 매번 1시간씩 걸려서 했지만, 해달라는 대로 될수록 만족하게 해줬다. 동서는 형편이 안 되어 수술비만 내고 기타 비용은 내가 부담했다. 나는 갚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수련인이기에, 겉으로는 내가 동서를 간호하고 있었지만, 실제는 나를 수련하고 있었고 이것이 내 수련의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수련인은 사부님께서 관장하시는바, 수련에 부족한 것을 아시고 성취할 수 있게 배치해 주신다. 목적은 우리를 원만하게 하고 수련 성취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나는 동서가 나를 성취하게 하려고 집과 사업을 관두고 멀리서 나를 찾아왔을 뿐만 아니라, 큰 수술을 하고 고통까지 겪었으니 그녀에게 감사해야 하고, 수련의 기회를 더욱더 소중히 여겨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신분을 밝히지 않은 대법제자로,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는 일을 다른 수련생들처럼 그렇게 활기차게 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갈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부님의 안배를 느꼈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처한 환경에서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교장 선생님은 학교에 파룬궁 수련생이 몇 명 있었지만, 줄곧 파룬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나를 만난 후 내 인품과 일하는 태도를 인정했는데, 나중에 내가 대법제자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나를 여러 번 만나면서 내가 어떤 생각으로 일을 대하는지 그 기점을 살펴본 끝에 대법을 인정하고 직접 삼퇴(중국공산당, 공산주의청년단, 소년선봉대에서 탈퇴)를 했다. 나는 사부님의 질서 있는 안배를 인식하고 그대로 했을 뿐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대법제자로 선택하시고 법을 배울 기회를 주셨다. 심성을 제고할 기회와 교류할 기회, 사람을 구할 기회와 법회에 참가할 기회를 주셨다. 제자는 사부님의 안배와 사부님께서 주신 기회를 소중히 여기며, 마음이 동요할 때 정념을 지키고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을 택하여 자신을 잘 닦고 중생을 많이 구할 것이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법회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원문발표: 2021년 9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9/15/2865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