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캐나다 대법제자
[밍후이왕] 저는 20여 년간 대법을 수련한 제자로 사부님의 보호 아래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에 무한히 감사드립니다. 매 대법제자는 수련의 길이 다르기 때문에 수련 과정 일부를 써내어 대법의 박대정심함과 초상함을 실증하고, 자신을 채찍질하여 “수련을 처음과 같이 하면”[1] 서약을 실행하려는 것입니다.
제1부 법을 위해 찾아온 행운의 생명
나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늘 생명의 의미와 우주의 신비에 대한 호기심과 의문으로 가득 차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낼 수 있기를 희망했다. 1968년 미국에 유학해 시카고에서 근무하며 생활한 28여 년 동안 남편과 뜻을 같이하여 스키, 요트 운동을 배웠고 여행을 즐기며 세계 여러 고대문명 연구에 지대한 흥미를 느꼈다. 우리는 스스로 계획한 인생의 목표를 달성한 뒤 조기 퇴직해 반년은 항해, 반년은 여행하며 생활하기로 계획했다. 내가 마흔다섯 살 되던 해에 이 꿈이 실현되었고, 이때부터 우리는 세상을 떠돌며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7년이 지난 후, 1998년 여름 우리는 시카고로 돌아가 옛 친구들과 즐겁게 모였는데, 그들은 우리에게 대법을 소개했고, 우리를 위해 책을 준비해 주었다. 우리는 친구들에게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이튿날 친구들은 우리를 데리고 식물원에 나가 다섯 가지 공법을 가르쳐 줬다. 너무 큰 수확이 있었던 여행이었고, 바하마 제도로 돌아간 뒤 많은 시간을 배 안에서 조용히 공부했다. 나는 ‘전법륜(轉法輪)’ 책을 처음 읽고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그 후 나의 즐겁고 순탄한 인생은 더욱 깊은 행복을 얻었다. 마음속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신앙’이 마침내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나는 대법을 수련하기로 했다. 나에게는 사부님이 계신다! 남편은 비록 수련에 열중하지 않지만 대법이 좋다고 느꼈다.
어느 날 뱃머리에서 동공을 연마하고 눈을 뜨자 한 사람이 보트를 타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 “무엇을 연마했습니까? 너무 아름답습니다!” 나는 “파룬궁을 연마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방금 잡은 대하 한 마리를 내게 주었다. 나와 남편은 우리는 살생하지 않는다면서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는 바다에서 낚시를 안 하느냐고 놀라워했다. “안 합니다. 우리는 낚시는 안 해요”라고 말하자, 그는 잠시 어리둥절해 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매우 보기 드문 일입니다! 그래서 당신들 배 이름도 ‘연’이었군요!” 나는 우리 배는 물 위의 정련(淨蓮)이라고 생각했다.
반년 후, 우리는 수련생들이 있는 도시에서 함께 법공부 하고 연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999년 4월, 우리는 산과 물이 있고 파룬궁 수련생들이 있는 밴쿠버에 정착해 반년을 연공하고 반년은 여행하려고 계획했다.
뜻밖에 그해 7월 중공(중국공산당)이 파룬궁 박해를 시작했다. 천지를 뒤덮을 듯한 거짓말과 비방에 직면해 해외 대법제자들은 각국 언론의 인터뷰에 응해 진실을 밝히면서 정법(正法)의 수련에 직접 나섰다. 그해 밴쿠버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수련생이 많지 않아 큰 어려움에 빠졌다. 나는 대법이 큰 어려움에 빠졌으니 남아서 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그리스 여행을 보류해야 했는데, 남편은 이 일로 큰 불만을 가졌고, 이때부터 우리 사이의 갈등과 모순이 시작됐다. 내 일생에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고난이었다.
법공부가 깊지 못한 나는 이런 변고가 갑자기 찾아와 가정관에 부딪혔는데, 법으로 가늠해 엄격히 자신의 심성 제고를 요구하지 못했다. 늘 억지로 참으면서 속으로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이렇게 내 신앙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데 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인(忍)’은 아주 강한 것으로서 ‘진(眞)’과 ‘선(善)’을 넘어선 것이다. 수련의 전 과정에서 당신에게 ‘인(忍)’하라고 하며, 心性(씬씽)을 지키고 함부로 행동하지 말도록 한다.”[2] 오랜 시간, 나는 억울했고 남편을 미워하면서 참았다! 그동안 그는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깨져 수술을 받았다. 나는 생전 처음 환자를 돌보았는데 법에 따라 진정으로 남편을 위해 생각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남편은 더 이상 내가 대법을 수련하는 길을 막지 않았고 차를 몰고 나를 도와 따지웬 신문을 배부하고 여러 가지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또 배를 몰고 씬탕런 제작진을 데리고 바다 풍경을 찍으러 갔다.
나의 개인 수련은 ‘전법륜’ 책에 나오는 많은 과정을 거쳤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가 최대한 일반사회에 맞게 수련할 것을 간곡히 가르치셨다. ‘위사위아(爲私爲我)의 옛 속성을 고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3]
2001년 9월 11일, 처음으로 귀중한 중국인들을 만나다
그해 9월 11일, 사악은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 요충지를 기습했다. 세계 각지에서 미국으로 향하던 여객기는 캐나다로 방향을 틀었고, 이 중 일부는 밴쿠버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리치먼드시에 있는 톰슨(Thompson) 행사센터도 임시로 긴급접대센터로 바뀌었다. 센터에 승객을 보내 등록하고 숙박하게 했다.
이날 화요일 저녁 무렵 몇몇 대법제자가 여느 때처럼 찾아와 연공하고 홍법했다. 공항에서 이곳으로 넘어오는 승객들을 보고 우리는 홍법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깨달았다. 나와 다른 수련생이 자발적으로 관계자를 찾아가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았고, 봉사 행렬에 가입했다. 또한 우리는 파룬궁을 수련한다고 알려주었다. 곧 중국어 통역이 필요해 나는 즉시 앞으로 가서 그녀와 함께 큰 버스에 올랐다. 안에는 중국인이 꽉 차 있었다. 먼저 이들에게 진심 어린 관심과 위로의 말을 하고 난 후 “저는 파룬궁 수련자인데 오늘 밤 여러분께 봉사하게 돼 매우 기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진지하게 통역을 시작했다. 모든 것을 인계한 후 나는 다시 한번 버스에 가득 찬 중국인들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오늘 밤 우리가 이런 특별한 상황에서 만났는데 만날 수 있는 것도 인연이기 때문에 나는 모처럼 이 기회를 이용해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는 정말 좋습니다! 여러분이 파룬궁의 진실을 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집중해서 듣고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또 손뼉 치면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네 대의 차로 중국인 승객을 맞았다. 이들은 베이징에서 출발해 상하이를 거쳐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여행객인데, 필요한 수속을 마친 후 무리를 지어 나와 차를 타고 호텔로 갔다. 자원봉사자는 각 여행객이 가지고 있는 서류를 점검하고 정확한 차에 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 분의 선생이 나를 찾아와 말했다. “당신은 방금 차에서 매우 용감한 말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국내에서 파룬궁을 너무 심하게 탄압하고 있습니다. 너무 참혹합니다.”
어떤 사람은 차를 탄 후 두 손을 모은 채 창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있었고, 많은 사람이 일어나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들이 오늘 밤 대법제자와의 만남을 기억하고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기억해 그들 생명의 위치를 바르게 놓기를 바랐다.
2003년 5월 18일, 사부님 은혜를 회상하다
나는 밴쿠버의 평범한 수련생이다. 2002년 사부님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이 있어서, 가장 존경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사부님을 밴쿠버로 초청했다. 사부님께서는 자비롭게 “돌아가 밴쿠버 불학회에 법회 때 꼭 가겠다고 전하라”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사부님의 말씀을 한 자도 틀리지 않게 이곳 불학회 책임자에게 전했는데, 전체 수련생들은 매우 격동되었으며, 그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노력했다. 2003년 5월 18일, 법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2003년 캐나다 파룬따파 수련 심득교류회에 참석한 수련생들을 위해 사부님께서는 밴쿠버 웨스틴 베이쇼어 국제컨벤션센터를 방문해 1시간 넘게 강의하셨다. 캐나다 및 세계 각지에서 온 1500여 명의 수련생이 이번 법회에 참가했다.
나는 회의 후 반드시 직접 사부님께 인사드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사회자로서 발정념을 진행해야 했기에 자리를 뜰 수 없었다. 회의 후 사부님께서 이미 떠나셨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마음속으로 매우 미안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운 좋게도 수개월 후에 내가 수련생과 함께 일을 처리하러 가는 중 차가 코너를 돌 때, 앞에 작은 차 한 대가 갑자기 멈추었다. 그런데 작은 차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사부님이셨다! 우리는 놀랍고도 기뻐서 일체를 상관하지 않고 소리쳤다. 나는 끝내 염원을 실현할 수 있었다. 밴쿠버 전체 대법제자를 대표해 사부님께 세 번 큰 인사를 올리면서 사부님께서 밴쿠버에 오셔서 설법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 사부님께서는 자비롭게 미소 지으시며 나를 바라보시던 그 광경은 제자의 가슴에 깊이 새겨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2005년 9월 16~17일,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중국공산당 주석이 밴쿠버에 도착하자 파룬궁 수련생들은 파룬궁 박해 중단을 호소했다.
9월 16일 오후, 후진타오의 북미 방문 마지막 방문지인 밴쿠버에 도착했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숙소인 웨스틴호텔 사방에서 파룬궁 박해 중단을 청원했다.
웨스틴호텔이 포트 콜에 있는 우리 요트가 정박해 있는 클럽을 마주하고 있어 나는 그 항구에 익숙하다. 평화 청원에 힘을 싣기 위해 나는 50피트짜리(약 15m) 요트 한 척을 빌렸다. 우리 현수막이 잘 보여야 하고 작은 항만을 자유롭게 순회할 수 있어야 했다. 앞서 이미 합의를 마친 선장은 며칠 전 압력을 받아 계약을 취소했다. 수련생이 컴퓨터에서 다른 선사를 찾았다. 비록 그랜빌섬에 있었지만, 중공의 박해는 아직 없었다. 나는 배 한 척을 선택했다. 지배인에게 진상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좋은 선장 한 명을 고용해 달라고 청했다. 동료들도 모두 바쁘지만, 나와 함께 현수막을 들어줄 도우미가 필요했다. 나는 반드시 젊은 서양인 남성 수련생이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파룬따파는 세계인을 위해 남녀, 노소, 인종, 문화를 구분하지 않는 고덕 대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련생들이 만든 대형 현수막이 도착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는 내용의 영문으로 쓴 현수막을 배에 걸었다. 남편은 나와 수련생을 배에 태우고 직접 선체 양쪽에 묶은 현수막을 다시 세심하게 제일 강한 끈으로 일일이 고정시켰다. 현수막은 이틀 동안 파도를 헤쳐 갔지만, 각종 풍속을 견뎌냈고 흔들림 없이 단단히 고정돼 있었다. 부두에서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배웅하던 남편의 표정이 기억난다. 남편이 나를 혼자 떠나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람 구하는 사명’을 지니고 다른 배로 출항한 것이다! 아마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고 좀 걱정도 됐을 것이다. 대법제자 가족들도 쉽지 않았다.
고용한 선장은 자메이카 출신이었는데 예전에 내가 여행을 같이 다녀왔기 때문에 다정히 얘기할 수 있었다. 사문진교를 통해 입항한 뒤 나는 그에게 200% 항법 준수를 당부했다. 멀리 바라보니 평소 익숙하던 이 항구는 전과 완전히 다르게 호텔 베란다마다 사복 차림의 사람이 한 명씩 서 있었다. 꼭대기 층 프레지던트 스위트룸 유리창 문으로 밖을 내다보면 그의 코앞에 우리 배가 돌고 있는 것이 분명히 보일 것이다. “후진타오, 신과 국민이 당신에게 주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고 쓰인 플래카드를 서양인 수련생과 나는 손으로 들고 있었다.
언덕 위에는 인파로 가득 차 있고, 중국영사관에서 온 사람들이 난동을 부리기도 해 대법제자들의 평화청원과는 대조를 이뤘다. 물 위에는 온갖 배들이 분주히 오가는 가운데 BC성 해양 경비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멀리 흰색 제복을 입은 해경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의 책무가 항만이나 해역의 안전 확보이기 때문에 여전히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의심만 있으면 그들은 언제든지 어떤 배에도 뛰어올라 수색할 수 있다. 나는 미소를 잃지 않고 플래카드를 당기며 우리가 하는 일이 제일 바른 일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보트가 유유히 지나가자 경찰들이 경례하는 모습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모습들이 보였고, 박수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체험이었다. 우리가 어찌 운만 좋겠는가. 우리는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다!
이틀간의 항행이 끝났다! 17일 황혼 무렵 무사히 귀항해 배를 돌려주기 전에 지정된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채워야 한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큰 엔진에 있는 기름 탱크 두 개가 각각 기름을 넣기만 하면 꽉 차서 전혀 넣을 수 없었다. 좀 더 넣자 기름이 넘쳐나 바닥에 흘렀는데, 항구를 오염시키면 벌금을 내야 한다. 선장은 멈추라며 격동되어 말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그는 회사에 증언할 것이며 오늘 밤에 이 기적을 그의 여자 친구와 자메이카의 친구들에게 전할 것이라고 했다. 이틀간 운항한 요트의 휘발윳값은 30달러(약 3만 원) 미만이었다.
물론 선장은 이런 일을 본 적이 없어 문제가 있을까 해서 사흘을 지켜본 뒤 확인을 거쳐서야 배를 돌려주는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3일 뒤 남편이 나와 함께 갔는데 역시 이상이 없었다! 계산할 때 매니저는 “이건 기적입니다!”라고 찬탄했다. 남편은 그에게 “‘성경’에 예수가 바다 위를 걸어 다닌 신적(神跡)을 기록했습니다. 오늘 당신은 파룬궁의 신적을 목격했습니다. 수련인들이 배를 운항할 때 기름을 넣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튿날 서양 수련생이 보내온 소식이었다. 로이터통신 9월 16일 자는 우리 선박에 대한 신문 기사와 함께 배 사진과 현수막을 첨부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수련생은 “웰, 로이터통신까지 우리 메시지를 전해줬습니다! “하여도 구하지 않으니”[4] “구함이 없어야 스스로 얻는다.”[5]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功)은 사부에게 달렸다.”[6]
제2부 세계를 돌며 인연 있는 사람을 구도하다
2004년 이집트 여행
중국을 여행한 후 가장 가보고 싶은 문명 고국은 이집트였다. 떠나기 전, 수련생은 홍법을 위해 가벼운 현수막과 대법 정보가 담기 영문 책갈피도 준비해 주었다. 우리는 두 달여의 여정 동안 너무나 많은 소중한 추억을 남겼다.
한 번은 피라미드 앞에서 이집트 영어반 중학생들과 그들의 선생님들에게 대법 진상을 이야기하고 책갈피를 나누어 주었다. 그들이 나와 사진을 찍자고 요구했다. 남편이 우리에게 그들이 ‘파룬따파하오’ 현수막을 펼쳐 든 사진을 찍어 주었다.
한번은 우리가 차를 타고 어느 관광지에 가야 하는데 경험이 없어 차를 잘못 탔다. 차 안에는 모두 남성들이고 여자는 나 혼자였다. 한 이집트인이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티셔츠에 쓰인 ‘Falun Gong’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가 그에게 책갈피를 선물하자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다. 그가 읽은 후 아랍어로 모두에게 알렸고 모든 사람이 책갈피를 달라고 나한테 몰려들었다. 어떤 사람은 “내 아들에게 컴퓨터가 있으니 당신들 노정을 알아봐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기쁘기도 하고 감동도 받았다. 남편도 와서 나를 도와 책갈피를 나누어 주었다.
또 한 번은 우리가 차에 탔는데 빈자리가 하나 있는 것을 보고는 내가 가서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이집트 복면 여인이 갑자기 표준 중국어로 내 티셔츠에 있는 ‘Falun Gong’을 가리키면서 무엇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차에서 내릴 차례가 되자 그녀가 우선 내리지 않고 당신과 더 이야기하고 싶으니 조금 뒤 당신과 같이 차에서 내리겠다고 했다. 나중에 플랫폼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며 “오늘 파룬궁에 대해 알게 돼 기쁩니다. 저는 대통령궁의 중국어 통역관입니다. 더 많은 분에게 파룬궁의 진실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모든 것은 사부님의 배치였다!
2006년 남미 페루
잉카(Inca)문명에 대한 관심으로 남미를 여행할 때 우리는 특별히 페루를 방문했다. 현지에 있는 대법학회 관계자와 연락해 수도 리마(Lima)에서 열리는 홍법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그해 현지에는 중국 수련생(책임자)이 한 명밖에 없었기에 그들은 중국인 얼굴이 궁금하고 반가웠다. 우리가 터미널에서 홍법할 때 한 페루 수련생이 신나게 달려오면서 중국인 한 명이 진상 서명란에 사인을 해주셔서 기쁘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우리 남편 사인이었다. 그는 옆의 작은 공원에서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이 일 때문에 모두 웃었다. 저녁에 남편은 나를 그들의 법공부팀에 데려다준 후 바로 호텔로 돌아가서 휴식했다.
이것은 정말 잊지 못할 모임이었다. 우리는 한 수련생의 집으로 갔다. 먼저 거실에 들어가기 전 사부님의 법상에 합장하고 인사를 드린 후 그들은 스페인어로 법공부를 하고 내가 옆에서 묵독했다. 심득교류에서 모순이 되는 문제를 만나면 전체 수련생들은 일제히 중국어로 “안에서 찾아야 한다(向内找)”를 세 번 읽었다. 끝날 때 서로 부둥켜안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와, 정말 귀여웠다, 이렇게 한다면 수련생 간에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있겠는가?
2007년 BC성 해역에서 항해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British Columbia)의 바다는 세계적인 지역이다. 우리는 배를 피렌다에서 밴쿠버로 옮긴 뒤 매년 여름이면 주변의 작은 섬으로 항해한다. 많은 섬은 모두 자동차가 갈 수 없고, 가는 곳마다 우리는 현지의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비치했다. 우리는 세계 각지에서 온, 우연히 만난 뱃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대법의 아름다움과 진상을 교류했다.
한번은 아름다운 해양공원에 배를 세워놓고 보트를 몰고 이곳저곳을 돌아보던 중 세계적으로 유명한, 평소 보기 드문 쌍범선 요트 한 척을 만나게 되었는데 상당히 아름다웠다. 저녁 식사 후 책을 보고 있는데 보트 한 척이 우리 배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알고 보니 그들이 그 명선 ‘스완(Swan)’의 주인이었다. 그는 토론토 출신이었다. 두 부부가 반가워 찾아온 이유는 예전에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배를 몰았기 때문이다. 내가 대법제자라는 것을 알고 그들은 큰 인권단체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나는 얼른 선창에서 진상 자료 한 세트를 꺼내 그들에게 주면서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고 했다. 작별할 때 서로 축복했다! 남편은 이건 정말 ‘이선회우(以船會友)’라고 했다. 나는 사부님의 법신께서 언제나 인연 있는 사람을 대법제자 앞에 데려다주신다고 말했다. 나도 그동안 진상을 알릴 수 있게 지지해준 남편에게 고마웠다.
맺는말
중공 바이러스(코로나 19)로 인해 2020년 3월 션윈 공연이 취소되었고, 매년 남편과 다니던 두 가지 여행도 불가능했다. 대만에 계시는 99세 고령인 어머님 면회도 가지 못했다. 집에서 컴퓨터로 진상을 알리는 일은 나에게 좀 벅찼다. 나는 자신이 점차 나태해져 마치 동면에 들어간 듯했다. 수련생의 방할과 격려로 나는 펜을 들게 되었다. 자신의 수련 과정을 열심히 회고하여 초심을 찾게 해준 수련생에게 감사드린다.
수련은 엄숙하고, 수련은 스스로 해야 한다! 인류 역사의 가장 중요한 시점인 지금,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의 수련과 사람 구하는 시간을 연장해 주셨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한 생명이 역사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이다. 긴긴 역사 속에서, 이 한 단락 시간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그렇게 소극적으로 되지 말고, 분발하라. 당신은 수련인이다. 중생은 당신이 구도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7]
사부님께 큰절을 올립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법에 있지 않은 곳이 있으면 자비롭게 시정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지설법9-2009년 대뉴욕국제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파룬궁-제3장 心性(씬씽) 수련’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불성무루(佛性无漏)’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홍음-도(道) 중에서’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6]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7] 리훙쯔 사부님 경문: ‘세계 法輪大法의 날 설법’
원문발표: 2021년 9월 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9/9/4306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