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일본 파룬궁수련생
[밍후이왕] 저는 왕웨량쯔(望月良子)라 부르는데 올해 68세입니다. 저는 성격이 강직하고 포부가 있는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를 여장부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식구가 많은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제가 철이 들었을 때부터 줄곧 몸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악한 당의 교육으로 우리는 대약진, 3반5반(三反五反), 정풍(整風), 4청(四清), 유례없는 문화대혁명 등 다양한 정치 운동을 겪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집안 출신이 나빴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배척과 억압을 받았습니다. 농촌에 내려갔다가 나중에 공장에 와서도 매일 투쟁 속에 살았습니다. 공포에 떠는 지옥과 같은 환경에서 아무리 원대한 포부를 갖고있어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3년을 문화대혁명을 하다가 졸업했기에 문화 지식도 없고 또 가정 출신이 나빠 직업을 찾으려 해도 어느 직장에서도 저를 채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상실감에 너무 씁쓸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세상이 넓어도 우리의 길과 삶이 없었고 사람들 사이에 친밀함이 없었는데 왜 그런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회에 발을 붙이기 위해 열심히 일했으며 어떤 고통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어린이집이 없어서 아이를 데리고 출근했습니다. 구매원인 제 남편은 항상 집에 없었기에 우리 집 안팎 일은 모두 제 몫이었습니다. 저는 식당, 목수, 장인, 교사, 총무를 맡기도 했는데 한때는 다들 저를 잘 대해 줬고, 상사도 저를 잘 대해 줬습니다.
몇 년 후, 상사가 바뀌면서 그곳을 나와 청소부가 됐습니다. 저는 승복하지 않고, 상사를 찾아 다투었으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40대도 채 되지 않아 병가 퇴직을 했습니다. 절차를 마친 후에도 여전히 속상해서 상사에게 ‘나는 유능한 천리마인데 당신들이 써주지 않으니 나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본때를 보이려다 만신창이 되다
저는 남편과 상의하고 식당을 개업했습니다. 나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돈을 빌려 집을 빌렸고, 세 바퀴 차를 샀습니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돌과 벽돌을 줍고, 우리만의 식당을 마련했습니다. 며칠 만에 개업했는데 정말 흐뭇했습니다. 우리는 자립하여 차츰 요리사를 한 명 불렀고, 종업원도 한 명에서 두 명, 열여덟 명까지 고용했습니다. 영업은 흥성했습니다. 우리는 세무서, 주민위원회, 경찰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뒷배가 대단했습니다. 각 지역의 장들이 좌석을 예약해 매일 만석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낮에는 식당을 하고 밤에는 무도장을 열었습니다.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너무 피곤했고, 가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빠서 제때 먹지도 못하고 몸도 점차 지탱하기 힘들었는데 영업 때문에 버텼습니다. 결국은 어느 날 정말 더 일할 수 없어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는 “큰 병원에 가십시오. 지금 우리는 빈 침대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3개 병원이나 갔지만 모두 그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저는 오랫동안 대변에 피가 섞여 나왔기에 제 상태를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고, 마침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게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일생이 억울하지 않으며 이제 죽는다고 해도 아쉬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부대병원 원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즉시 저를 병원에 입원시켰고 앞으로는 움직이지 말고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결국 굴복했습니다. 침대에 누운 그 순간부터 저는 제 인생이 곧 끝날 것을 알았습니다. 40대에 죽음을 향한 저는 이번 생을 돌이켜 보니 온갖 고초를 다 겪었고 너무 고생스러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왜 이렇게 고생스러울까? 나는 왜 이렇게 고생스러울까? 내 운명은 왜 이렇지? 나는 평생을 고군분투했고 유명해지고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게 됐지만 결국 무엇이 있는가? 죽음뿐이다.’
세상의 괴로움과 몸의 병마로 인한 고통이 함께 몰려왔습니다. 저는 의사에게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놀라서 “왜요? 제가 이렇게 오래 의사로 환자를 치료했지만 죽고 싶다고 말하는 환자는 없었어요. 그들은 모두 저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했어요. 왜 그러세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그에게 “너무 지쳤어요. 제 인생이 너무 힘들어 이렇게 많은 고민과 고통과 고난이 없이 푹 쉬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만성 영양실조와 혈변으로 인해 1주일 동안 수혈을 받은 후 수술이 가능했습니다. 7~8시간 동안 전신마취를 하지 않고 수술을 했습니다. 저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으며 점차 기진해 잠잠해졌습니다. 수술대에서 내려오자 죽기보다 더 괴로웠습니다, 죽지 않고 고통스러워 침대에서 뒹굴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앞에서 딸과 아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아들과 딸은 “엄마는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우리에게 말씀을 안 하셨어요. 엄마가 이대로 가시게 되면 우리는 어떡해요? 엄마, 꼭 건강하게 사셔야 해요”라고 했습니다. 사실 죽고 싶지만, 제가 놓을 수 없는 것은 아들과 딸입니다. 저는 그것을 놓지 못해서 계속 살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 아들은 매일 쪽 걸상에 앉아 26일 동안 병상에 누워 있는 저를 돌보면서 체중이 10㎏ 넘게 줄었습니다. 저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에 살았기에 친한 친구 4명이 저를 들것으로 들어서 집으로 데려다주었습니다. 저는 폐인이 되었고 모든 일에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저처럼 강한 사람이 지금 이렇게 되어가는 것이 너무 슬퍼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동안 제 아들은 매일 저를 엎고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오르내리면서 저를 돌봐줬습니다. 3개월 후 일본 비자가 발급됐는데 시어머니는 제 상황을 알고 제가 일본에 가서 돈을 쓰는 것이 두렵고 제가 거기서 죽을까 두려워 일본에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아내는 저와 결혼해 고생만 했어요. 이번에 한 번 바람을 쐬게 하고 싶어요. 갔다가 안 되면 다시 데리고 오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에 시어머니는 저의 방문을 동의하셨고 우리는 재산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출국했습니다.
1992년 9월 6일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날아가 비행기에서 내려 이 땅을 보니 저는 마치 오랜만에 떠나 있던 고향에 온 듯했고, 자기 집처럼 친근하고 너무 편안했습니다. 전차를 탔더니 많은 사람이 저에게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그들은 단정하게 차려입고 예의 발랐습니다. 저는 이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나아지면 이 나라를 위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반드시 바치리라 생각했습니다.
3일 동안 긴 여행 끝에 집에 돌아와서 쓰러졌습니다. 밥도 못 먹고 아픔에 시달렸습니다. 일주일 후, 이모가 찾아와 시어머니에게 저를 히가시긴자 암센터 병원으로 데려가 구청에 도움을 청하게 했습니다.
나는 밥도 먹고 집안일도 하고 잠도 자게 되다
시간이 너무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4년이 지났습니다. 1997년 말, 친구가 제가 매일 약을 먹는 모습을 보고 “연공 하자. 이 공은 정말 좋다”고 했는데 저는 싫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에는 집에 찾아와 자신들의 종교를 믿으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가족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했고 게다가 저는 TV 비디오를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연거푸 몇 번을 회피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만나서 얘기하자는 전화가 왔습니다. 제가 친구에게 갔는데 이미 손님이 와있었습니다. 제가 돌아서 나오려는데 친구가 저를 불러세우고 두 사람 앞에서 “이 친구 병으로 비실비실해 매일 약을 먹는데 연공을 하라고 해도 하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두 손님이 저를 바라보는데 정말 난체했습니다. 저는 매우 체면을 중시하는데 여태까지 저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 저에게 겸손하게 청을 드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저는 화가 났으나 체면 때문에 “더 말하지 말고 제게 보여주겠다던 것을 줘요. 집에 가서 볼게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비디오테이프와 책 ‘대원만법’을 가지고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서 누웠는데 마음이 아주 불쾌했습니다.
다음 날, 별일 없이 지내다가 어제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어쨌든 가져왔으니 한번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녹음기를 켜자마자 너무나 친절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들렸고, 눈앞에 너무나 친절하고 존경스러운 사부님이 나타나시는 것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이것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부님의 움직임은 아름답고 신성하고 신비했는데 마치 “일어나서 연공하라”고 저를 부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일어나서 사부님의 구령에 따라 연공을 시작했는데 너무 편하고 좋았습니다. 저는 너무 감동되고 흥분됐습니다. 저는 그 감정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연공을 다하고 나서도 사부님의 자비하고 자애로운 모습이 머릿속에 선했으며 아름다운 음악이 귓가에 오래 맴돌았습니다.
평소에는 기력도 없고 잠도 잘 못 자는데 그날 밤은 달랐습니다. 눈을 뜨니 해가 높이 떠올라 방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가족들은 일찍 나가고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 열 시가 넘었습니다, 그렇게 달콤하게 오래 잤습니다. 여태껏 이렇게 푹 잔적이 없는데, 이 공은 정말 신기했습니다. 저는 그 연공 음악을 생각하고 즉시 일어나 정리하고 비디오를 다시 켰습니다. 그 연공 음악에 맞추어 사부님께서 가르치시는 동작에 따라 연공을 했습니다. 연공 해도 지치지 않았으며, 원래 매일 생활할 때처럼 힘들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 1주일, 2주일이 지나자 저는 파룬(法輪)이 회전하는 것을 느꼈는데 매번 달랐습니다. 회전은 매우 미묘했는데 어디가 불편하면 파룬이 회전했습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자 제가 연공 하지 않을 때도 제 뱃속에서 파룬이 돌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파룬이 있게 됐습니다. 저는 날마다 파룬의 회전 속에서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밥을 먹을 수 있었으며, 집안일도 하고, 안색도 좋아졌습니다.
어느 날 우리 가족은 집이 깨끗하고 질서정연하게 정돈된 것을 보고, 제가 갑자기 변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남편이 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전 다 나았어요. 저는 이제 병원에 갈 필요도 없고, 약을 먹을 필요도 없어요. 매일 저를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는 다 나았어요.” 남편은 놀라서 이유를 물었습니다. 저는 연공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제가 일본의 무슨 종교에 들어간 것 같아 두려웠고 즉시 “무슨 공인데 한번 보여줘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비디오를 켜고 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남편이 “중국 것인가?”라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또 “이 공이 정말 그렇게 좋아요? 그것이 사법(邪法)이면 어떡해요?”라고 했습니다. 처음 연공 할 때 저는 사부님께 “정말 좋습니다. 저는 꼭 연마하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원하던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기에 주저하지 않고 남편에게 “저는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끝까지 따르고 연마하겠어요”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부님은 영원히 저의 사부님이십니다’라고 다짐했습니다.
여러 번 꿈에 점화를 받고 더 열심히 법공부하다
저는 연공만 하고 법공부를 거의 하지 않아 아무것도 몰랐기에 여러 번 점화가 있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한 번은 꿈에 투명하고 하얗고 너무 좋은 세계에 갔습니다. 늘 꿈에 이 장면이 보였으며, 사부님께서도 계셨는데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너무 행복했습니다.
법공부를 하지 않아 심성이 승화되지 못했기에 어떤 장벽도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땅에 떨어진 돈을 보면 주웠고, 색관(色關)의 시련도 넘지 못했으며, 다른 사람과 싸우고, 때린 후에는 신나 했으며,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 몇 번이나 점화를 주셨지만 저는 너무 어리석어서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꿈에 사부님께서 우리 집에 오셔 저는 매우 기뻤습니다. 항상 사부님이 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정말 오셨습니다. 저는 아주 외딴 산에 살고 있었는데 집 안에는 작은 온돌이 하나 있고, 온돌 위에는 작은 책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저에게 어떤 책이 있는지 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의 책장에는 ‘전법륜’ 한 권뿐이고 텅 비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온돌에 앉아계셨고 저는 네 가지 요리와 밥 한 그릇을 사부님께 드리고 사부님의 식사하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주 똑똑히 기억나는데 사부님께서는 식사를 마치신 후 저에게 뒷마을에 가셔서 홍법(洪法)하겠는데 가겠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가지 않겠다고 대답을 드렸습니다.
사부님께서 떠나시려고 하셔서 제가 사부님을 배웅하려고 문을 열었는데 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떠나셨습니다. 저는 갑자기 사부님께서 양말을 신지 않으신 것을 보고 급히 사부님께 잠깐 기다리시라고 말씀드리고 양말을 가지려 집에 들어갔습니다. 남동생의 양말을 들고 밖으로 뛰어왔는데 눈이 너무 많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빨리 걸으려고 했지만 눈이 허벅지 밑까지 닿아 한 발을 빼면 다른 발이 빠져 힘들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는 저는 너무 지쳤는데 사부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저는 꿈에서 깨어나고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또 한 번은 꿈에 저는 아름답고 투명하고 깨끗한 곳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로 기어오르려고 해도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위에서 큰 손이 저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제가 너무 무거웠고 등에는 큰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었고 결국 지쳐서 깼습니다. 저는 누워서 생각했습니다. ‘왜일까? 사부님께서 나에게 짐을 내려놓으라고 점화해주시는 것이 아닌가? 모든 집착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그러나 법공부를 잘하지 않고 어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는 ‘못 올라가면 그만두자. 몸도 좋아졌으니 연공을 하지 말자’라는 생각도 했는데 또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돈을 벌어 자신이 수입도 있고 국가의 돈을 쓰지 않고 국가를 위해 약간의 공헌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공이 너무 좋았습니다. 사부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한 번 다시 저에게 점화를 주셨습니다. 저는 영원히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꿈속, 더없이 광활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 집만 한 대나무 뗏목이 있고 기둥에는 등불이 있었습니다. 파도치는 바다에 떠 있는데 사부님이 앞에 서 계셨고, 제 옆에 누워 있는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이까지 모두 세 사람뿐이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 계셨고, 대나무 뗏목은 끊임없이 덮치는 거센 파도를 거슬려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저는 맨발로 그곳에 서 있었는데 사부님께서는 바람이 불고 물보라가 튀는 속에 움직이지 않고 먼 곳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저는 파도와 바람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얼마나 자비로우신가. 내가 뭔데?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사부님이 죽음에서 구해 주신 작은 생명이다. 그런데 나는 어려움이 닥치면 포기하려고 했다. 생명을 구해주신 사부님의 은혜에 부끄럽다. 나는 정말 실망스럽게 사부님께 늘 걱정만 끼쳐드렸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포기하지 않겠다고 한 말을 잊었다. 나는 정말 사부님을 대할 면목이 없다. 중국 속담에 하루 스승이 평생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는데, 내 목숨을 구해주신 사부님이시다. 나는 변명할 말이 없다. 수련하자!’
1998년 저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법회에 참석해 그곳에서 사부님을 정말 뵙게 됐습니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셨으나 저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기억되는 것이 ‘우주대법―쩐싼런(真·善·忍)’과 사부님과 함께 사진을 찍은 것입니다. 저는 사부님을 향해 ‘사부님, 사부님’하고 외쳤습니다. 사부님께서 뒤를 돌아보셨지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친절하시게 “책을 많이 보고 책을 많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 저는 사부님의 웅장하시고 자비로운 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병이 낫자 국가 의료수당을 단호히 반납하다
저는 법회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번에는 사부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진짜 사부님의 제자가 되어 “해내어야 수련이로다”[2]를 해내려고 했습니다. 저는 국고보조금을 반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의사에게 수련하여 병이 나아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또 이 사실을 구역소(區役所)에 알리라고 말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일본어를 모릅니다. 저는 구(區)에서 일하는 작은 외숙모에게 부탁했습니다. 그 지역에서 일하시는 외숙모는 제가 수련하고 병이 나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제가 부탁하자마자 승낙했습니다. 저는 매우 기뻤습니다.
그러나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법적으로 규정된 사항이므로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외숙모는 “네가 이 돈을 받지 않겠으면 우리가 쓰자”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반드시 반납해야 하며 병이 나았으니 다시는 받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으며, 저는 꼭 우주의 최고 법인,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진정으로 수련해 ‘진(真)’을 해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납해야 하니 다시 한번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숙모에게서 “너의 소원대로 됐다. 돈을 반납했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끝내 큰 짐을 내려놓았고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저는 운 좋게 파룬궁수련자가 되었습니다.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저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습니다. 의사는 저게 5년을 넘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운이 좋게 대법(大法)을 얻어 올해로 벌써 24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활력이 넘쳐 매일 아침 연공을 하고, 밤에는 법공부하고, 낮에는 홍법(洪法)과 파룬궁 진상을 알립니다. 저는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파룬궁은 단지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되는 도리를 깨닫게 하며 사람의 생명은 반본귀진(返本歸真)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고 알리고 싶습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스위스법회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시사: ‘홍음-착실한 수련’
원문발표: 2021년 8월 2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8/21/42960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