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양메이윈 사건’ 19주년 회고
글/ 량전(梁珍)
[밍후이왕] 2021년 3월 14일은 홍콩 ‘양메이윈 사건’ 19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것은 홍콩 ‘기본법’이 홍콩인의 시위 자유권을 보장하는 중요한 인권 사례로 꼽히며 대학에서 ‘기본법’ 연구에 필수 과목이 되었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사건은 3년이 지나는 동안 무고한 판결을 받은 파룬궁수련생들이 승소에 이르기까지 어떤 비바람의 길을 걸어왔을까? 많은 당사자가 당시의 우여곡절과 어려움을 증언했다.
양 씨는 교사이며 홍콩의 전통적인 대가족 안에서 자랐다. 그녀의 고모 양리셴(楊勵賢)은 홍콩에서 첫 번째로 직선제 여성 시의원으로 당선되었는데 그녀는 정직하고 강직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어린 시절 양메이윈은 바른길을 가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이 확고했다.
그녀의 허약하고 병약한 데다 왜소한 신체 때문에 양메이윈은 처세에 조심스러웠고 신중한 성격을 형성했으며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1998년, 호주에 있던 고모가 그녀에게 파룬궁 수련을 소개해주었다. 그녀는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하면서 제 몸이 정말 좋아졌습니다. 전에는 힘이 없었고 약했는데 파룬궁을 수련하면서부터 무거운 것을 들 수 있었습니다.”고 말했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양 씨는 그해 경찰차에 실려 간 첫 번째 파룬궁수련생이었다.
인권변호사, ‘통행 방해 사건’은 홍콩 기본법의 중요한 인권 판례
미국계 인권변호사인 존 클렌시와 샤보이(夏博義) 신임 변호사협회 회장은 당시 ‘통행 방해 사건’의 대표변호사였다.
올해 1월 6일, 79세인 존 클렌시는 범국민 사전선거에 참여하고 조직했다는 이유로 ‘국가 정권 전복죄’ 혐의로 체포돼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홍콩 국가보안법이 처음으로 시행된 후 체포된 최초의 외국인이다. 그의 변호사 생활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2002년 이른바 ‘통행 방해 사건’이다.
“양메이윈 사건은 홍콩법률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학생들이 ‘기본법’ 원리를 배울 때는 모두가 이 사건을 연구한다.” 후에 보석을 허가받은 존 클랜시는 당시의 판결을 회상했다.
2002년 3월 14일, 스위스 파룬궁수련생 4명과 홍콩 파룬궁수련생 12명이 주관 부서인 중련판(中聯辦, 중국 연락 판공실) 앞에 앉아 중국에서 일어나는 파룬궁을 박해하고 살육하는 것에 맞서 단식으로 항의하자 경찰들은 무력으로 난폭하게 잡아갔다. 그해 8월, 수련생들은 길을 가로막고 경찰을 습격 했다는 등 총 7개 죄명으로 선고받았다. 3년간의 항변 끝에 2005년 5월 5일 당시 홍콩 종심법원의 리궈넝(李國能) 부장판사 등 5명의 대법관은 일제히 경찰의 구속이 부당하다고 판결해 기소가 전부 뒤집혔다.
50년 넘게 홍콩에서 살았지만, 광동어(廣東語)를 잘하지 못했던 존 클랜시는 “시민이 시위할 수 있는 권리를 확실히 인정한 사건”이라며 “그래서 재판부가 이 사건을 참고해 기초적인 사례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고 말했다.
파룬궁수련생들이 항의할 당시 중련판 앞에 널찍한 인도가 있고 파룬궁수련생들은 극히 협소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길을 가로막았다는 누명이 씌워져 고소당했다. “그 당시 스위스에서 온 4명이 모여 한동안 단식하기로 했고 잇따라 홍콩 파룬궁수련생 12명이 이들을 지지하여 총 16명이 참여했습니다. 그들이 앉아있던 자리는 비교적 좁았습니다. 그래서 법정은 그들이 인도를 막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고 말하며 존 클랜시는 회상했다.
“나중에 그 보도는 좁아졌는데 그 당시에는 비교적 넓어서 그때는 주차장이었습니다.” 파룬궁수련생들이 항의한 이후 중련판에서는 문 앞에 아주 빨리 거대한 화단을 세워 공공 공간을 축소했는데, 시위 단체들이 중련판에 와서 항의함을 방해한다는 의심을 받아 이 화단은 ‘정치적 화단’으로 인식되었다.
변호사가 파룬궁수련생들의 끈기에 감탄하다
소송은 무려 3년이 걸려 공정한 재판을 받았고 존 클랜시는 파룬궁수련생의 끈기에 감탄하였으며 법정에서 층층이 계속 항소하여 결국 전부 최종적으로 무죄를 입증받았다. “그들은 마땅히 법률이 자신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당사자들은 모두 상소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법정에서 이 권리가 있음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자 소송을 맡은 대행 측은 베테랑 변호사들을 찾아서 도와주기로 했고 결국 판결에서는 시위할 권리가 있다고 똑똑히 명시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파룬궁수련생의 사건을 대리하는 것에 거대한 압력을 느꼈는지를 질문받은 존 클랜시는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면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사랑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돈이나 명성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그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고 답했다.
샤보이 신임 변호사협회 회장은 파룬궁수련생들의 소송을 도와 ‘시위의 권리’를 저술했다. 그는 언론에 ‘통행 방해 사건’을 대행하면서 홍콩에 시위의 권리에 관한 책이 없음을 발견하고 직접 책을 쓰기로 했다고 밝혔다. “평화적인 항의는 좋은 일이며 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내게 했습니다.”
파룬궁수련생들이 ‘통행 방해 사건’에서 승소하자 저명한 인권운동가 및 변호사인 고 쓰투화(司徒華) 회장은 ‘애플데일리’ 칼럼을 기고하고 “파룬궁은 홍콩 전체 시민들의 시위 자유의 권한을 수호했으며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찬양했다. “이들은 그들의 신념인 진선인(真·善·忍) 중의 인(忍)을 충실히 실천했습니다.”고 했다.
파룬궁수련생들이 ‘통행 방해 사건’을 승소한 것은 홍콩 주민들에게 매우 고무적이다
당시 소형캠코더를 들고 ‘통행 방해 사건’의 전 과정을 녹화한 피고인 중 한 명인 저우성(周勝)은 “당시 스위스 파룬궁수련생 네 명이 3일 동안 단식할 예정이었으나 셋째 날 중련판에서 두려움을 느껴 경찰에 전화해 수련생을 체포하게 했습니다”고 말했다. 경찰은 먼저 수차례 경고하고 나서 현장을 정리했다.
저우성은 소형 캠코더를 들고 현장에서 여경이 연장자인 여 수련생의 귀 뒤 혈 자리를 눌러 기절하게 한 모습과 한 남자 수련생을 마찬가지로 혈 자리를 눌러 설 수 없게 한 모습을 담았다. 이 두 명의 수련생은 먼저 잇따라 경찰차에 실려 갔다. 그 당시 긴박한 상황이어서 저우 씨는 봉쇄 펜스 구역 밖에 있는 수련생에게 캠코더를 건네준 후 자신도 경찰차에 납치됐다. 경찰 측은 나중에 오히려 길을 막고, 업무 집행 방해와 경찰 습격 등의 죄명으로 파룬궁수련생들을 모함 및 고소했다.
법정에서 경찰관이 공공연히 날조한 걸 보고 그녀는 “경찰들 스스로 자기 손을 물어 이빨 자국을 냈습니다. 그런데 수련생이 그녀를 물었다고 했어요. 다만 수련생의 턱이 경찰에게 부딪혔을 뿐인데 경찰은 법정에서 수련생들이 그녀를 습격했다며 공공연히 거짓말을 했습니다.”고 전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한 그 경찰은 징계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승진까지 했다.
같은 해 피고가 된 파룬궁수련생들은 교류한 후, 정부의 관련 부문에 진상을 알리기로 했다. 그중에는 각국의 영사관과 홍콩 법무부, 법원, 입법회 의원, 변호사협회, 경찰서 등 정부를 직접 방문해 진상을 알리고 진상 자료도 우편으로 부쳤다.
저우성 등 수련생 3명은 미국으로 건너가 유엔(UN)에 중공과 홍콩 정부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고소하는 등을 포함해 전 세계로 사건의 진상을 설명했다.
저우성은 3년간 누명에 시달린 ‘통행 방해 사건’에서 파룬궁수련생이 승리한 것은 홍콩 시민들에게 큰 격려가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오늘 중공의 탄압이 격화되면서 홍콩이 붉은 공포에 직면한 것에 대해 홍콩 시민들은 바른 일을 하는 걸 견지해야 하며 공산당에 겁먹지 말고 자유와 법치를 계속 쟁취해야 한다고 밝혔다.
원문발표: 2021년 3월 18일
문장분류: 해외소식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3/18/42223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