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국 파룬궁수련생
[밍후이왕] 2015년 7월 13일 오후, 사단법인 한국 파룬따파불학회(法輪大法佛學會)는 한국 주재 중국대사관 앞에서 중국 민중의 장쩌민 고소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인들에게 중대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한국에서는 기자회견 당일까지 파룬궁수련생 116명이 중국 최고인민검찰원과 최고인민법원에 ‘형사고소장’을 발송해 파룬궁 박해 원흉이자 전 중국공산당 독재자인 장쩌민에 대한 사법처리를 촉구했다.
한국 주재 중공 대사관 앞에서 ‘중국민중의 장쩌민 고소열풍 성원 기자회견’ 모습
한국에서 파룬궁수련생 116명, 중국 최고인민검찰원, 최고인민법원에 ‘형사고소장’을 발송, 파룬궁 박해 원흉이자 전 중공독재자인 장쩌민에 대한 사법처리 촉구
밍후이왕 2015년 7월 11일 보도에 의하면, 올해 5월부터 중국대륙 및 21개 국가에서 6만 명 이상의 파룬궁수련자들이 중국 최고검찰원과 최고인민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해 중국헌법을 초월해 ‘진(眞)ㆍ선(善)ㆍ인(忍)’을 수련하는 파룬궁수련자에 대해 불법탄압을 감행한 장쩌민을 고소했다.
한국 교수 “장쩌민은 마땅히 전 세계인의 심판 받아야”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겸 아시아 철학회회장 최우원교수
부산대 철학과 교수이자 아시아철학회 회장인 최우원 박사는 당일 기자회견에서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생체 장기적출을 ‘짐승보다 못한 만행’으로 규정하고 “이것은 인류역사상 전대미문의 범죄로, 다름 아닌 중국공산당 전 당수 장쩌민이 주도한 범행이다. 중국 민중, 대한민국 국민 나아가 전 세계인은 모두 마땅히 이 악의 우두머리 장쩌민을 고소해야 한다”고 비난했다.최 교수는 이어서 “마땅히 장쩌민 및 그 추종자 저우융캉, 쩡칭훙, 보시라이, 뤄간 등을 전부 중국 법정과 국제 법정에 보내 전 세계인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중국공산당과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며 저지른 범죄로부터 중국공산당은 이미 극악무도한 사악한 집단임이 증명됐으며 그것은 중국의 위대한 역사 문명을 말살했고 동시에 전 세계 각국 국민에게 해독을 끼쳤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전 세계인은 마땅히 진실을 알게 된 후 사명감, 정의감을 수립해 중국공산당을 이탈하는 중국 민중을 도와 중화민족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얻게 하고 후대에 아름다운 세상을 남기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산대 철학과 교수이자 아시아철학회 회장인 최우원 박사는 당일 기자회견에서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생체 장기적출을 ‘짐승보다 못한 만행’으로 규정하고 “이것은 인류역사상 전대미문의 범죄로, 다름 아닌 중국공산당 전 당수 장쩌민이 주도한 범행이다. 중국 민중, 대한민국 국민 나아가 전 세계인은 모두 마땅히 이 악의 우두머리 장쩌민을 고소해야 한다”고 비난했다.
최 교수는 이어서 “마땅히 장쩌민 및 그 추종자 저우융캉, 쩡칭훙, 보시라이, 뤄간 등을 전부 중국 법정과 국제 법정에 보내 전 세계인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중국공산당과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며 저지른 범죄로부터 중국공산당은 이미 극악무도한 사악한 집단임이 증명됐으며 그것은 중국의 위대한 역사 문명을 말살했고 동시에 전 세계 각국 국민에게 해독을 끼쳤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전 세계인은 마땅히 진실을 알게 된 후 사명감, 정의감을 수립해 중국공산당을 이탈하는 중국 민중을 도와 중화민족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얻게 하고 후대에 아름다운 세상을 남기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번 납치돼 사는 게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게 고문당한 유치원 교사
이미 중국 최고법원과 최고검찰원에 장쩌민 ‘고소장’ 제출한 박교사
중국 파룬궁수련생 수십 명이 당일 기자회견에서 고소장을 들고 장쩌민에 대한 사법처리를 중국 당국에 촉구했다. 이날 회견해 참석한 전직 유치원 교사인 박씨는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4차례나 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당했다고 말했다. “한 번은 한 해의 마지막 날로 기억해요. 영문도 모르게 경찰이 한밤중에 모두가 잠든 우리 집에 들이닥쳐서 우리 친척을 찾는다고 했어요. 친척이 없다고 하자 저를 잡아갔습니다. 저에게 이른바 ‘군중을 모아 소란을 부린’ 죄명을 뒤집어씌웠습니다. 당시 그들은 저에게 서명하고 지장을 찍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집에서 자던 사람을 당신들이 이곳에 끌고 왔는데 내가 무슨 군중을 모아 소란을 부렸단 말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당신에게 저질렀다고 하면 저지른 것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이밖에도 우리 집을 불법적으로 수색해 많은 파룬궁 서적을 약탈해 갔습니다. 저는 잡혀가서 1주일간 감금당해 있는 동안 거꾸로 매달린채 폭행을 당하고 불법 심문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상부에서 ‘당신들을 때려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다고 지시했다’고 말했습니다.”박 교사는 중국 동북의 여러 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당했다. 그녀는 쥬타이(九台) 노동교양소에 감금된 동안, 강제전향에 불복하자 잠을 재우지 않았고, 벽에서 1미터 떨어진 곳에 ‘벽을 향해 서게’ 했다고 했다. “그 후 한 달 동안 매일 2시간만 재웠고, 그 다음 한 달은 매일 3, 4시간만 재웠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자궁하수와 전신부종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다시 채소 수확, 모내기, 잡초 뽑기, 콩 수확, 밭에서 감자 캐기 등 강제노동을 시켰는데 뼈가 시릴 정도의 차가운 논에 세우거나 뙤약볕 밑에서 피부가 타들어가도록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이후에 테베이(鐵北) 간수소에서 옴에 감염된 후, 노동교양소의 습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온 몸에 옴이 가득 생겼고, 두 다리에는 부종이 생겨 발과 관절에 참기 어려운 통증이 왔습니다. 이런 상태는 집으로 돌아온 지 수년 후에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헤이쭈이즈(黑嘴子) 노동교양소에 감금되었을 때는 말할 나위도 없이 밤낮 없는 노역에 시달렸는데, 새털로 무슨 공예품을 만들고 위생 젓가락을 포장하는 등 일을 했습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항상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가족 면회를 허가하지 않았고 집에서 보내온 물품도 경찰관이 몰수해 갔습니다.”“노동교양소에서 석방된 후 수년간 저는 항상 정신이 흐릿했고 다른 사람이 저를 불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일이 흔했습니다. 어떤 때는 영문도 모르게 갑자기 통곡하기도 했습니다. 수년 간 계속된 박해로 정말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이러면 안 되지, 내가 만약 그 길을 선택한다면 또 무슨 사건을 날조해서 파룬궁을 모함할지 모르니까’라고 마음을 돌이켜 먹으며 버티고 또 버텼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신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가서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간에 저는 공직에서 해고돼 직장을 잃었고 가족과 어린 자녀도 정신적으로 아주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중국 파룬궁수련생 수십 명이 당일 기자회견에서 고소장을 들고 장쩌민에 대한 사법처리를 중국 당국에 촉구했다. 이날 회견해 참석한 전직 유치원 교사인 박씨는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4차례나 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당했다고 말했다. “한 번은 한 해의 마지막 날로 기억해요. 영문도 모르게 경찰이 한밤중에 모두가 잠든 우리 집에 들이닥쳐서 우리 친척을 찾는다고 했어요. 친척이 없다고 하자 저를 잡아갔습니다. 저에게 이른바 ‘군중을 모아 소란을 부린’ 죄명을 뒤집어씌웠습니다. 당시 그들은 저에게 서명하고 지장을 찍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집에서 자던 사람을 당신들이 이곳에 끌고 왔는데 내가 무슨 군중을 모아 소란을 부렸단 말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당신에게 저질렀다고 하면 저지른 것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이밖에도 우리 집을 불법적으로 수색해 많은 파룬궁 서적을 약탈해 갔습니다. 저는 잡혀가서 1주일간 감금당해 있는 동안 거꾸로 매달린채 폭행을 당하고 불법 심문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상부에서 ‘당신들을 때려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다고 지시했다’고 말했습니다.”
박 교사는 중국 동북의 여러 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당했다. 그녀는 쥬타이(九台) 노동교양소에 감금된 동안, 강제전향에 불복하자 잠을 재우지 않았고, 벽에서 1미터 떨어진 곳에 ‘벽을 향해 서게’ 했다고 했다. “그 후 한 달 동안 매일 2시간만 재웠고, 그 다음 한 달은 매일 3, 4시간만 재웠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자궁하수와 전신부종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다시 채소 수확, 모내기, 잡초 뽑기, 콩 수확, 밭에서 감자 캐기 등 강제노동을 시켰는데 뼈가 시릴 정도의 차가운 논에 세우거나 뙤약볕 밑에서 피부가 타들어가도록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이후에 테베이(鐵北) 간수소에서 옴에 감염된 후, 노동교양소의 습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온 몸에 옴이 가득 생겼고, 두 다리에는 부종이 생겨 발과 관절에 참기 어려운 통증이 왔습니다. 이런 상태는 집으로 돌아온 지 수년 후에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헤이쭈이즈(黑嘴子) 노동교양소에 감금되었을 때는 말할 나위도 없이 밤낮 없는 노역에 시달렸는데, 새털로 무슨 공예품을 만들고 위생 젓가락을 포장하는 등 일을 했습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항상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가족 면회를 허가하지 않았고 집에서 보내온 물품도 경찰관이 몰수해 갔습니다.”
“노동교양소에서 석방된 후 수년간 저는 항상 정신이 흐릿했고 다른 사람이 저를 불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일이 흔했습니다. 어떤 때는 영문도 모르게 갑자기 통곡하기도 했습니다. 수년 간 계속된 박해로 정말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이러면 안 되지, 내가 만약 그 길을 선택한다면 또 무슨 사건을 날조해서 파룬궁을 모함할지 모르니까’라고 마음을 돌이켜 먹으며 버티고 또 버텼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신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가서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간에 저는 공직에서 해고돼 직장을 잃었고 가족과 어린 자녀도 정신적으로 아주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두 차례 지명수배 당한 의류공장 사장 “하루 빨리 장쩌민 체포 촉구”
이미 우편으로 보낸 ‘고소장’ 발송증을 보이는 파룬궁수련생 위만친
파룬궁수련생 위만친(于滿琴)은 며칠 전 장쩌민을 고소하는 고소장을 중국최고인민법원과 최고인민검찰원에 발송했다. 그녀는 두 기관에서 하루빨리 사건을 처리해 악의 우두머리 장쩌민과 그의 범죄집단을 체포해 법에 따라 처벌할 것을 촉구했다. 위씨는 파룬궁을 수련한 뒤 소감을 말했다. “1996년 파룬궁수련을 시작한 후, 줄곧 시달려왔던 두통이 사라졌어요. 더욱 신기한 것은 수년간 앓았던 주근깨도 치료 없이 다 나았습니다. 저는 심신이 건강해 졌고, 도덕이 승화했으며 진(眞)ㆍ선(善)ㆍ인(忍)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게 됐습니다. 주위에 사업하는 친구들이 물건을 사기 위해 장기 출장을 가게되면 모든 돈과 각종 중요한 서류는 모두 저에게 보관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의 재물을 탐내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죠.” 위씨는 1999년 의류공장을 정식 오픈했다. 하지만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의 파룬궁 박해가 시작된 후 그녀는 정신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2001년 4월 5일, ‘610사무실(중국공산당이 전문적으로 파룬궁 박해를 위해 만든 불법 조직)’은 인터넷에 저를 지명 수배했습니다. 경찰이 우리 의류공장 주소를 알고 나서 저를 체포하려해 저는 억지로 낮은 가격에 넘기고 도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중국공산당이 불법적인 지명수배를 하고는 곳곳을 수색해 체포하려 했기에 위씨는 2004년 한국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탈출 반년 후인 2005년 1월 1일, 중국공신딩 610사무실은 또 저에 대한 ‘도망 중 지명수배령’을 내렸습니다.” 위씨가 한국 입국 후 이전에 임차한 중국의 백화점 코너가 계약을 갱신하지 못해 강제로 회수해 갔다고 한다. 위씨는 말했다. “장쩌민이 명령을 내려 파룬궁을 박해함으로써 저는 좋은 생활조건을 잃었고, 가족도 심각하게 정신적 박해를 당했습니다. 단지 제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만으로 저의 어머니, 오빠와 올케는 하루 종일 제가 체포당할까봐 마음을 졸여야 했습니다. 출국하기 이틀 전, 어머니에게 한국에 갈 것이라고 했더니 ‘이제 가면 언제나 돌아오나?’하며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저를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눈물을 머금고 ‘저도 언제 돌아올지 잘 모르겠어요’라는 대답에 어머니는 눈물만 흘렸습니다.” “어머니는 2007년 9월 돌아가셨습니다. 이후에 올케에게 전화했더니 어머님는 제가 해외에서도 또 지명수배당한 것을 알고는 매일 안절부절못하며 지내다 돌아가실 때 눈과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알려줬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하루 종일 일어날 수 없었고 더없는 고통 속에서 헤매야 했습니다. 박해 때문에 어머니의 마지막 길도 배웅해 드리지 못한 저로서는 평생 유감을 남겨야 했습니다.”
파룬궁수련생 위만친(于滿琴)은 며칠 전 장쩌민을 고소하는 고소장을 중국최고인민법원과 최고인민검찰원에 발송했다. 그녀는 두 기관에서 하루빨리 사건을 처리해 악의 우두머리 장쩌민과 그의 범죄집단을 체포해 법에 따라 처벌할 것을 촉구했다.
위씨는 파룬궁을 수련한 뒤 소감을 말했다. “1996년 파룬궁수련을 시작한 후, 줄곧 시달려왔던 두통이 사라졌어요. 더욱 신기한 것은 수년간 앓았던 주근깨도 치료 없이 다 나았습니다. 저는 심신이 건강해 졌고, 도덕이 승화했으며 진(眞)ㆍ선(善)ㆍ인(忍)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게 됐습니다. 주위에 사업하는 친구들이 물건을 사기 위해 장기 출장을 가게되면 모든 돈과 각종 중요한 서류는 모두 저에게 보관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의 재물을 탐내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죠.”
위씨는 1999년 의류공장을 정식 오픈했다. 하지만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의 파룬궁 박해가 시작된 후 그녀는 정신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2001년 4월 5일, ‘610사무실(중국공산당이 전문적으로 파룬궁 박해를 위해 만든 불법 조직)’은 인터넷에 저를 지명 수배했습니다. 경찰이 우리 의류공장 주소를 알고 나서 저를 체포하려해 저는 억지로 낮은 가격에 넘기고 도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불법적인 지명수배를 하고는 곳곳을 수색해 체포하려 했기에 위씨는 2004년 한국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탈출 반년 후인 2005년 1월 1일, 중국공신딩 610사무실은 또 저에 대한 ‘도망 중 지명수배령’을 내렸습니다.” 위씨가 한국 입국 후 이전에 임차한 중국의 백화점 코너가 계약을 갱신하지 못해 강제로 회수해 갔다고 한다.
위씨는 말했다. “장쩌민이 명령을 내려 파룬궁을 박해함으로써 저는 좋은 생활조건을 잃었고, 가족도 심각하게 정신적 박해를 당했습니다. 단지 제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만으로 저의 어머니, 오빠와 올케는 하루 종일 제가 체포당할까봐 마음을 졸여야 했습니다. 출국하기 이틀 전, 어머니에게 한국에 갈 것이라고 했더니 ‘이제 가면 언제나 돌아오나?’하며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저를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눈물을 머금고 ‘저도 언제 돌아올지 잘 모르겠어요’라는 대답에 어머니는 눈물만 흘렸습니다.”
“어머니는 2007년 9월 돌아가셨습니다. 이후에 올케에게 전화했더니 어머님는 제가 해외에서도 또 지명수배당한 것을 알고는 매일 안절부절못하며 지내다 돌아가실 때 눈과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알려줬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하루 종일 일어날 수 없었고 더없는 고통 속에서 헤매야 했습니다. 박해 때문에 어머니의 마지막 길도 배웅해 드리지 못한 저로서는 평생 유감을 남겨야 했습니다.”
한국인의 아내 박해원흉 고소, 전례 없는 대재난이 하루빨리 종식되길 희망
파룬궁수련생 고성녀씨(중간 발표자)가 장쩌민 고소성원 기자회견 발표
파룬궁수련생 고성녀씨는 한국인 곽병호씨와 2003년 5월 18일 중국에서 결혼했다. 고씨는 입국수속을 밟을 당시 파룬궁수련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국공안부에 수차례 여권발급을 거부당했다. 그러다가 2004년 5월 7일 납치당해 중국 자무쓰(佳木斯) 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당했다. 1년간 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당한 기간 고씨는 온갖 비인간적인 고문학대를 당했다. 한편 이 기간, 한국에서는 고성녀씨를 구하기 위해 한국인 24만여 명에게 구명지지 서명을 받았고, 국회의원 24명이 고씨 석방을 요구한 연대서명을 당시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에게 전달했다. 아울러 73개 지방의회와 자치단체가 중국공산당에 ‘고성녀씨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2005년 5월 13일 고성녀씨는 마침내 중국 자무쓰 노동교양소에서 석방되었다. 고씨는 고소장에 “저는 선천성 심장병을 앓다가 파룬궁수련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 수련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병이 재발한 적이 없습니다. 선천성 심장병은 아이를 출산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수련을 통해 건강을 찾은 저는 현재 10살 된 딸이 있습니다. 18년의 파룬궁 수련 기간, 저는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았고 남편을 알뜰히 보살피며 부모에게는 효도하면서 모든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있고, 모든 일을 ‘진(眞)ㆍ선(善)ㆍ인(忍)’에 따른 좋은 사람이 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리하여 남편과 가족들의 지지를 얻었고 주변 사람들도 제 모습을 보고는 파룬따파는 좋다고 말했습니다.” “2003년 5월 21일 저는 한국인과 혼인신고를 마치고 여권을 발급하러 자무쓰 출입국에 갔습니다. 직원은 저에게 컴퓨터상에 저는 파룬궁수련자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파룬궁은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시 610, 정법위를 찾아가 호소했지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떠넘기면서 ‘당신은 장쩌민을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이 기간 저를 비롯해 한국에 있던 남편과 가족은 매일 눈물로 나날을 보내야 했고 정신적 고통은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장쩌민은 저와 우리 기족에게 준 정신적 박해와 고통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2004년 5월 7일, 고씨는 다른 한 명의 수련자와 함께 거리에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는 표어를 붙이다가 납치당했고 이후 중국 자무쓰 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당했다. 고씨는 노교소에서 강제노동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파룬따파를 확고히 믿는다는 이유로 또 고문학대를 당해야 했다. 그녀는 “제가 자무쓰 노동교양소에서 연공할 때 여 경찰관 가오제(高潔)는 저를 발로 마구 폭행해서 기절시켰습니다. 그 후 또 여러 명 경찰관이 들어오더니 수갑을 채워 쇠 침대에 묶어놓았습니다. 당시 저의 몸은 바닥에 있었고 그러다보니 거의 1주일간 실신해 있었습니다. 경찰관은 제가 혼수상태에 빠진 것을 보고 사건이 심각해질까봐 일단 저를 침대에 옮겨놓고 다시 수갑을 채웠습니다. 제가 깨어나자 또 노교소 의사를 불러와 제 코로 약물을 타 넣은 우유를 강제 주입했습니다. 악독한 경찰관 세 명이 저를 내리누르고 호스를 제 코에 마구 찔러 넣었는데 저는 수차례 거의 숨이 멎는 것 같은 고통을 겪으며 숨 쉴 수가 없었습니다. 호스를 코에서 뺄 때는 머리며 베개며 온통 피로 물들었습니다. 2004년 7월 어느 날 노동교양소에서 최소 7명의 교도관이 저를 찾아와 무슨 밥을 먹인다며 또 박해를 가했습니다. 한 교도관이 저를 의자에 앉히고, 다른 한 교도관은 제 머리를 뒤로 잡아당겼으며, 또 다른 교도관은 제 왼쪽 얼굴을 누르고, 또 다른 교도관이 저의 오른쪽 얼굴을 눌렀고, 또 한명의 교도관이 저의 몸을 틀어잡고, 또 다른 한명의 교도관이 저의 입을 숟가락으로 벌리고, 또 다른 교도관은 숟가락으로 마구 저의 입안을 휘저었습니다. 저는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극심한 고통으로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줄곧 힘이 빠져 기진맥진할 때까지 저를 괴롭혔습니다. 잇따라 노동교양소 의사를 불러와 저에게 강제음식물 주입을 시도했는데 저의 코에 꽂은 호스를 통해 약물을 탄 우유를 부어넣는 박해를 가했습니다. 호스가 꽂힌 코로는 피가 흘렀고 베개며 머리며 온통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잔인무도했습니다.”“2004년 11월 노동교양소에서는 파룬궁수련생에게 파룬궁을 모욕하는 내용이 들어간 파룬궁수련 포기 보증서에 서명하도록 강박했습니다. 파룬궁수련생을 작은 쪽걸상에 앉히고 남녀 경찰관 십여 명이 시커멓게 우리를 빙 둘러싸고 한 명씩 밖으로 불러내어 파룬궁수련을 포기하겠다는 보증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동의하지 않으면 전기봉으로 전기충격을 가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폭력을 가했습니다. 함께 감금되었던 파룬궁수련생 위춘메이(于春梅)는 십여 명의 교도관이 함께 몰려들어 그녀를 때리고 전기충격을 가해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얼굴이 찐빵처럼 부어올라 침대에 누운 채 수일간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다들 그녀는 죽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얼굴은 전기충격으로 3,4cm 검게 부어올랐고 이후에 완전히 변형되었습니다.”고씨는 촉구했다. “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당한 동안 저는 무죄주장을 할 수 없었고 아울러 저에 대한 불법 노동교양 처분의 근거를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쩌민은 이번 박해를 개시했고, 중앙정부로부터 성·시에 이르기까지의 상하급 관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협하고 핍박해 그들이 양심을 저버리고 밥그릇을 위해 장쩌민을 따라 이 한차례 박해를 집행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장쩌민을 마땅히 심판대에 올려야 합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사단법인 한국파룬따파불학회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심신수련법인 파룬궁은 1992년 5월 13일 중국 지린성 창춘시에서 최초로 전파된 이래 초기 7년 동안 1억여 명 중국인들이 파룬궁 수련을 통하여 심신의 진정한 건강을 되찾았다. 그러나 파룬궁 수련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에 대해 강한 질투심을 느낀 장쩌민은 상무위원 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9년 7월 20일 파룬궁에 대한 잔혹한 탄압을 개시했다. 장쩌민은 직접 법률을 초월한 파룬궁 전문탄압조직인 ‘610 사무실’을 결성하고, 전국적 범위에서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파탄시키고, 육체를 소멸하라’, ‘때려죽여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때려서 죽으면 자살로 위장한 뒤 화장하여 증거를 인멸하라’는 정책을 집행하게 했다. 장쩌민은 또 직접 명령을 내려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생체장기적출을 진행하게 했다. 박해 원흉 장쩌민은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상 보장된 인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였고, 중국 형법상 고의살인죄, 상해죄, 인체장기적출 매매죄, 불법구금죄, 납치죄, 강제노동죄, 모욕비방죄, 고문에 의한 자백 강요죄, 피감시관리대상자 학대죄, 국민의 종교신앙불법박탈죄, 독직죄 등을 범했으며, ‘집단학살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과 ‘고문 등 처벌에 관한 조약’상의 집단학살죄와 고문죄 및 국제형사법상에 가장 엄중한 범죄인 반인류죄를 범했다.” 이에 대해 사단법인 한국파룬따파불학회는 전국 파룬궁 수련생 일동과 더불어 중국인들의 반인류범죄자 장쩌민 고소를 적극 지지 성원한다고 표시하고, 아울러 파룬궁수련생을 잔혹하게 박해한 사악의 우두머리 장쩌민은 최종적으로 반드시 엄연한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파룬궁수련생 고성녀씨는 한국인 곽병호씨와 2003년 5월 18일 중국에서 결혼했다. 고씨는 입국수속을 밟을 당시 파룬궁수련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국공안부에 수차례 여권발급을 거부당했다. 그러다가 2004년 5월 7일 납치당해 중국 자무쓰(佳木斯) 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당했다. 1년간 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당한 기간 고씨는 온갖 비인간적인 고문학대를 당했다.
한편 이 기간, 한국에서는 고성녀씨를 구하기 위해 한국인 24만여 명에게 구명지지 서명을 받았고, 국회의원 24명이 고씨 석방을 요구한 연대서명을 당시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에게 전달했다. 아울러 73개 지방의회와 자치단체가 중국공산당에 ‘고성녀씨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2005년 5월 13일 고성녀씨는 마침내 중국 자무쓰 노동교양소에서 석방되었다.
고씨는 고소장에 “저는 선천성 심장병을 앓다가 파룬궁수련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 수련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병이 재발한 적이 없습니다. 선천성 심장병은 아이를 출산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수련을 통해 건강을 찾은 저는 현재 10살 된 딸이 있습니다. 18년의 파룬궁 수련 기간, 저는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았고 남편을 알뜰히 보살피며 부모에게는 효도하면서 모든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있고, 모든 일을 ‘진(眞)ㆍ선(善)ㆍ인(忍)’에 따른 좋은 사람이 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리하여 남편과 가족들의 지지를 얻었고 주변 사람들도 제 모습을 보고는 파룬따파는 좋다고 말했습니다.”
“2003년 5월 21일 저는 한국인과 혼인신고를 마치고 여권을 발급하러 자무쓰 출입국에 갔습니다. 직원은 저에게 컴퓨터상에 저는 파룬궁수련자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파룬궁은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시 610, 정법위를 찾아가 호소했지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떠넘기면서 ‘당신은 장쩌민을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이 기간 저를 비롯해 한국에 있던 남편과 가족은 매일 눈물로 나날을 보내야 했고 정신적 고통은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장쩌민은 저와 우리 기족에게 준 정신적 박해와 고통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2004년 5월 7일, 고씨는 다른 한 명의 수련자와 함께 거리에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는 표어를 붙이다가 납치당했고 이후 중국 자무쓰 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당했다. 고씨는 노교소에서 강제노동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파룬따파를 확고히 믿는다는 이유로 또 고문학대를 당해야 했다. 그녀는 “제가 자무쓰 노동교양소에서 연공할 때 여 경찰관 가오제(高潔)는 저를 발로 마구 폭행해서 기절시켰습니다. 그 후 또 여러 명 경찰관이 들어오더니 수갑을 채워 쇠 침대에 묶어놓았습니다. 당시 저의 몸은 바닥에 있었고 그러다보니 거의 1주일간 실신해 있었습니다. 경찰관은 제가 혼수상태에 빠진 것을 보고 사건이 심각해질까봐 일단 저를 침대에 옮겨놓고 다시 수갑을 채웠습니다. 제가 깨어나자 또 노교소 의사를 불러와 제 코로 약물을 타 넣은 우유를 강제 주입했습니다. 악독한 경찰관 세 명이 저를 내리누르고 호스를 제 코에 마구 찔러 넣었는데 저는 수차례 거의 숨이 멎는 것 같은 고통을 겪으며 숨 쉴 수가 없었습니다. 호스를 코에서 뺄 때는 머리며 베개며 온통 피로 물들었습니다. 2004년 7월 어느 날 노동교양소에서 최소 7명의 교도관이 저를 찾아와 무슨 밥을 먹인다며 또 박해를 가했습니다. 한 교도관이 저를 의자에 앉히고, 다른 한 교도관은 제 머리를 뒤로 잡아당겼으며, 또 다른 교도관은 제 왼쪽 얼굴을 누르고, 또 다른 교도관이 저의 오른쪽 얼굴을 눌렀고, 또 한명의 교도관이 저의 몸을 틀어잡고, 또 다른 한명의 교도관이 저의 입을 숟가락으로 벌리고, 또 다른 교도관은 숟가락으로 마구 저의 입안을 휘저었습니다. 저는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극심한 고통으로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줄곧 힘이 빠져 기진맥진할 때까지 저를 괴롭혔습니다. 잇따라 노동교양소 의사를 불러와 저에게 강제음식물 주입을 시도했는데 저의 코에 꽂은 호스를 통해 약물을 탄 우유를 부어넣는 박해를 가했습니다. 호스가 꽂힌 코로는 피가 흘렀고 베개며 머리며 온통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잔인무도했습니다.”
“2004년 11월 노동교양소에서는 파룬궁수련생에게 파룬궁을 모욕하는 내용이 들어간 파룬궁수련 포기 보증서에 서명하도록 강박했습니다. 파룬궁수련생을 작은 쪽걸상에 앉히고 남녀 경찰관 십여 명이 시커멓게 우리를 빙 둘러싸고 한 명씩 밖으로 불러내어 파룬궁수련을 포기하겠다는 보증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동의하지 않으면 전기봉으로 전기충격을 가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폭력을 가했습니다. 함께 감금되었던 파룬궁수련생 위춘메이(于春梅)는 십여 명의 교도관이 함께 몰려들어 그녀를 때리고 전기충격을 가해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얼굴이 찐빵처럼 부어올라 침대에 누운 채 수일간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다들 그녀는 죽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얼굴은 전기충격으로 3,4cm 검게 부어올랐고 이후에 완전히 변형되었습니다.”
고씨는 촉구했다. “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당한 동안 저는 무죄주장을 할 수 없었고 아울러 저에 대한 불법 노동교양 처분의 근거를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쩌민은 이번 박해를 개시했고, 중앙정부로부터 성·시에 이르기까지의 상하급 관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협하고 핍박해 그들이 양심을 저버리고 밥그릇을 위해 장쩌민을 따라 이 한차례 박해를 집행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장쩌민을 마땅히 심판대에 올려야 합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사단법인 한국파룬따파불학회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심신수련법인 파룬궁은 1992년 5월 13일 중국 지린성 창춘시에서 최초로 전파된 이래 초기 7년 동안 1억여 명 중국인들이 파룬궁 수련을 통하여 심신의 진정한 건강을 되찾았다. 그러나 파룬궁 수련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에 대해 강한 질투심을 느낀 장쩌민은 상무위원 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9년 7월 20일 파룬궁에 대한 잔혹한 탄압을 개시했다. 장쩌민은 직접 법률을 초월한 파룬궁 전문탄압조직인 ‘610 사무실’을 결성하고, 전국적 범위에서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파탄시키고, 육체를 소멸하라’, ‘때려죽여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때려서 죽으면 자살로 위장한 뒤 화장하여 증거를 인멸하라’는 정책을 집행하게 했다. 장쩌민은 또 직접 명령을 내려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생체장기적출을 진행하게 했다. 박해 원흉 장쩌민은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상 보장된 인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였고, 중국 형법상 고의살인죄, 상해죄, 인체장기적출 매매죄, 불법구금죄, 납치죄, 강제노동죄, 모욕비방죄, 고문에 의한 자백 강요죄, 피감시관리대상자 학대죄, 국민의 종교신앙불법박탈죄, 독직죄 등을 범했으며, ‘집단학살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과 ‘고문 등 처벌에 관한 조약’상의 집단학살죄와 고문죄 및 국제형사법상에 가장 엄중한 범죄인 반인류죄를 범했다.”
이에 대해 사단법인 한국파룬따파불학회는 전국 파룬궁 수련생 일동과 더불어 중국인들의 반인류범죄자 장쩌민 고소를 적극 지지 성원한다고 표시하고, 아울러 파룬궁수련생을 잔혹하게 박해한 사악의 우두머리 장쩌민은 최종적으로 반드시 엄연한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문장발표: 2015년 7월 16일
문장분류: 해외소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7/16/3125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