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 기자 장윈 토론토 보도) 최근 중국에서 파룬궁수련생 수백 명이 파룬궁 박해를 주도한 전 중국공산당 두목 장쩌민을 개인 명의로 최고인민검찰원과 최고법원에 고소했다. 국외 파룬궁수련생들도 장쩌민을 고소하는 열조에 합류하고 있다. 2015년 6월 8일 오후, 캐나다 토론토 중국영사관 인근의 세인트 조지 거리(St. George St.)와 블로어 거리(Bloor St.)에서 토론토 파룬궁수련생 일부는 진상 알리기 활동을 통해, 세계적인 장쩌민 고소 열풍을 지지 성원하면서 2억여 중국인의 ‘삼퇴'(공산당, 공청단, 소선대 탈퇴)도 함께 성원했다.
6월 8일 토론토 시 중심에서 진상 알리기 활동을 벌인 토론토 파룬궁수련생들
행인 160여 명이 중국공산당의 파룬궁수련생 생체 장기적출을 저지하는 서명에 동참했다.
현장을 지나던 전직 이탈리아 기자이자 캐나다 프리랜서 작가(우측)가 현장 분위기에 이끌려 사진촬영 후 수련생의 인터뷰를 받았다.
이들의 활동을 본 행인들 중 적지 않은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파룬궁수련생에게 진상을 들었고, 몇 시간 만에 160여 명이 ‘파룬궁수련생 생체 장기적출을 중지‘를 촉구하는 서명에 동참했다.
이탈리아에서 기자로 활동했고, 지금은 캐나다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 중인 모 작가는 현장 분위기를 사진에 담은 뒤 파룬궁수련생에게 구미 국가 정부들이 박해를 저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의했다. 파룬궁수련생은 파룬궁이 널리 전해진 상황과 99년 이후 박해,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생체 장기적출 현황과 왜 이런 활동을 하는지 등 진상을 상세히 알렸다. 수련생을 상대로 인터뷰를 마친 그는 현지 언론에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 토론토에는 중국 대륙에서 박해받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도피한 파룬궁수련생이 있지만 그들은 집이 있어도 중국에 돌아가기 힘들다며, 이들 중 수많은 사람이 장쩌민을 상대로 고소장을 쓰고 있고 이미 중국 최고법원과 최고인민검찰원에 보낸 사람도 있다고 밝혔다.
할아버지에서부터 손자까지 삼대가 장쩌민 고소
토론토 파룬궁수련생 정즈(鄭治, 오른쪽, 왼쪽은 모친) 가족 삼대가 파룬궁 박해한 장쩌민과 장쩌민 일당을 고소했다.
랴오양 153병원 전임 소아과 의사 정즈 가족은 파룬궁을 수련한다. 할아버지에서부터 손자 7명은 이미 장쩌민 일당을 ‘반인류 범죄, 고문죄, 집단학살죄’로 고소했다.
2006년 태국 유엔난민소를 통해 캐나다로 온 파룬궁수련생 정즈는 중국에서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온 가족이 박해를 받았다. 당시 그의 아내는 중국 랴오양 153병원(지금의 랴오양 칭양병원)의 소아과 의사였고, 부친은 이 병원의 직업병과 주임이었다.
그는 “99년 ‘7.20’부터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우리 가족 모두는 아주 참혹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16년 동안 가족 모두 거대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우리는 장쩌민이 스스로 자행한 모든 범죄에 대해 죗값을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공안국은 정즈를 출근하지 못하도록 박해했고 위협 당하던 부모님 중 부친은 결국 당국의 협박에 못 이겨 1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2005년 12월 베트남으로 도피한 정즈는 태국으로 가서 2007년 유엔난민 신분으로 캐나다로 왔다. 정즈의 어머니 자오웨이위(趙偉玉)는 “박해 받던 남편은 사망했고 집과 가족을 잃었습니다. 아들이 2년 넘게 매일 위협 당하는 모습에 마음을 졸이면서 정신이 전부 붕괴되는 것 같았습니다.“
1999년 7월 21일부터 정즈가 근무하던 153병원 원장은 현지 공안국,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회의실에서 과주임 회의를 열고는 정즈를 문화혁명식으로 비판했다. 원장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위협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그날부터 줄곧 2000년 5월까지 매일 회의실에서 비판당해야 했으며 출근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일하지 못하게 했고 봉급 대신 매달 생활비 180위안만 주었다.
당시 30살도 되지 않았던 그는 병원에서 성장할 수 있는 황금기였지만 그의 아내도 연루되어 일자리를 잃었고 위협 당하던 부친마저 정신적 압력으로 1년 후 세상을 떠났다.
이뿐만 아니라 박해는 그의 큰 이모, 둘째 이모까지 모두 연루되게 했으며 그들은 모두 감시와 위협을 받아 아주 큰 상처를 입었다. 정즈의 아들은 생후 열흘쯤부터 어른을 따라 피난을 다니느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온 가족이 중국을 떠날 수밖에 없어서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캐나다로 온 것이다.
가오순친 가족 모두가 장쩌민 고소
우한에서 온 파룬궁수련생 가오순친 고소장을 중국 최고인민검찰원과 최고법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우한에서 온 파룬궁수련생 가오순친(高順琴)은 10여 차례 불법 체포되어 박해를 심하게 받았다. 확보한 모든 증거를 동봉한 고소장을 중국 최고인민검찰원과 최고법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가오순친은 1998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하면서 신체가 건강해졌다. 원래 성격이 급하고 거칠었으며 승부욕이 강했던 그녀는 수련한 후 성격이 좋아져 사람을 대할 때도 선량했다. 그러나 장쩌민이 박해를 시작하면서부터 10여 차례 감옥에 갇혔고 노동교양소에서 받은 고문으로 수차례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그녀는 말했다. “납치된 후 가혹한 폭행부터 시작해 마지막에는 세뇌반에 넘겨 강제로 파룬궁을 수련하지 못하도록 전향시키려 했습니다. 전향하지 않으면 수면을 박탈한 채 매달고, 정제불명의 약물을 주입했습니다. 마지막에 노동교양소에 보내졌을 때는 기억을 상실했습니다.”
“2004년 4월 20일경 610 두목 천치거는 사악한 경찰을 시켜 소회의실에 있는 책상에다 저를 짓누른 채 모종의 약물을 주입했습니다. 저는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고 가슴이 두근거렸으며 온몸이 불편했습니다. 당일 오후 4시경 천치거는 또 사람을 시켜서 낮고 어두운 작은 방에서 양 팔을 벌려 십자 모양으로 저를 세운 채 고정시켜 놓았습니다. 밤 12시후 대회의실로 데리고 가 계속 창틀에 묶어놓았고 이튿날 아침 8시 이후에는 또 식당에 데리고 가 제 두 손을 창틀에 묶어 놓았으며 밤 12시후 제가 기절하자 풀어주었습니다.”
“이런 독극물 주사를 맞으면 서서히 발작하면서 점점 증세가 심해집니다. 그해 6월경 저는 우한시 허완 노동교양소로 옮겨져 불법 감금돼 있는 기간 점차 기억력을 잃었습니다. 머리는 텅 비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으며 11월부터 발이 차고 열이 나면서 통증이 시작됐습니다. 극심한 고통에 저는 밤새 잠을 잘 수 없었고 이후에는 발의 통증으로 감각을 잃어 땅을 디딜 수도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뒤에는 이가 흔들리다 빠졌으며 온몸에 부종이 나타났습니다.”
“2005년 노동교양소에 있던 저를 집으로 데려 가려고 아들이 왔을 때, 저는 이미 심장이 쇠약해지고 기억을 거의 잃어 아들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밥 먹을 때 삼촌이 아들의 이름을 불렀을 때에야 아들임을 알았다. 몇 년이 지났지만 저는 아들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을까봐 그 당시 일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토론토 파룬궁수련생, 장쩌민 고소 붐을 일으키다
이번 활동을 진행했던 장씨는 말했다. “지금 국내외 파룬궁수련생들이 장쩌민 고소에 줄줄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장쩌민은 파룬궁을 박해한 원흉입니다. 1999년 7월부터 탄압은 장쩌민이 직접 일으킨 것입니다. 그는 집단학살을 자행한 우두머리로서 이번 박해를 해외까지 확산시켰습니다. 토론토 중국 영사관 내에 파룬궁을 모독한 대량의 사진 자료를 비치한 채 몇 년 동안 우리 동포를 독해하고 있으며 거짓말로 파룬궁에 대한 증오심을 선동했습니다. 수많은 해외 수련생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습니다.”
마지막에 장씨는 말했다. “지금 토론토에는 중국대륙에서 박해 받았던 파룬궁수련생이 아주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박해받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오늘 활동은 시작입니다. 전체 파룬궁 수련단체를 놓고 볼 때 장쩌민이 저지른 국가 테러리즘 소멸 정책은, 국제 형사법에서 규정한 고문죄, 집단학살죄와 반인류 범죄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번 파룬궁 탄압을 주도한 장쩌민이 결코 역사적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알리려 합니다.”
문장발표: 2015년 6월 11일
문장분류: 해외소식>지역보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6/11/31074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