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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궁 박해 중에서 피고 장쩌민의 작용과 역할(2)

글/ 인권법률재단(미국)

[밍후이왕](전편에 이어)

문서4: 1999년 7월 19일 박해를 개시하라고 명령

비록 중국공산당 언론매체가 공포한 정식 박해는 1999년 7월 22일부터 시작하고 민정부와 공안부 두 부서가 선포한 공고를 상징으로 하지만 사실은 파룬궁 현지 연락인을 대규모 체포하고 구류한 것은 공고 발표 이틀 전부터인데 바로 1999년 7월 20일이다. 7월 19일 대규모 체포 전, 장쩌민은 중국공산당 성급(省級) 당위원회 지도자 회의에서 담화를 발표하고 박해를 시작하기 전의 최후 동원령을 발표했다. 이번 회의는 이후 미국 내부 외교문서에서 확인했고 또 위키리크스에 의해 공개됐다.

장쩌민은 직접 나서서 파룬궁 박해를 지지했고 파룬궁 신도를 추악하게 묘사했으며 아울러 그들에 대한 박해를 해외까지 확장했다.

1999년 9월 뉴질랜드에서 연 APEC회의에서 장쩌민은 시기에 아주 적절치 않는 괴이한 행동을 했다. 그는 자리에 있는 모든 국가 지도자, 당시 미국 대통령 클린턴을 포함해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모함하고 선전한 책 한 권을 나눠주었다. 책에는 파룬궁수련생이 위험하고 정신이 비정상이며 마땅히 저지해야 한다는 모함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1999년 10월 25일, 장쩌민은 프랑스 방문 전, 프랑스 ‘르피가로’지와 서면 인터뷰를 가졌다. 장쩌민은 취재 중에 파룬궁을 공격하고 아울러 파룬궁을 ‘X교’라 칭했다. 이 이전에 중국공산당이 통제한 어떠한 문서와 언론 매체는 파룬궁을 ‘X교’라고 칭하지 않았다. 이번의 재차 표명은 장쩌민 본인이 직접 탄압을 결정한 것이고 또한 박해를 끝임 없이 격상함을 증명했다. 3일 후 중국공산당 정부 당국 대변인 인민일보는 특별평론원의 문장을 발표해 장쩌민의 ‘파룬궁은 X교’라는 논조를 호응했다. 장쩌민이 인터뷰를 받은지 5일 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황급히 ‘X교 조직을 금지하고 X교 활동 방비와 처벌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켰다. (역시 ‘X교’란 단어를 사용) [편집자 주: 파룬궁은 선(善)을 지향함을 가르친다. 중국공산당이 진정한 사교(邪教)다.)

2000년 9월, 장쩌민은 CBS TV방송국 인터뷰를 받고 아래와 같은 성명을 했다. “자세한 연구를 거친 후 우리가 얻은 결론은 파룬궁은 X교라는 점이다.”

중국 국무원은 2003년 3월 21일에(2003년 국무원 8호령) 610사무실 조직구조에 관한 통지를 발표해 ‘국무원 사교(邪教)문제 방범 및 처리사무실과 파룬궁문제 처리 중앙지도자 소조사무실은 하나의 기구, 두 개의 간판이며 공산당중앙 직속기구 서열에 편성함’을 명확히 했다. 이것은 국무원도 ‘610사무실’ 간판을 건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그러나 국무원은 이 기구의 권력을 진정으로 관리하지 않았다. 이외, 중국공산당 대변인의 데이터베이스 ‘People.com.cn’을 조사하니 중국공산당 중앙 아래에는 ‘파룬궁 문제처리 지도자소조’ 혹은 ‘사교문제 방범과 처리소조’란 정식 명칭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한 가지 비밀조직이며 20세기 60년대의 ‘중국공산당 중앙 문화혁명소조’와 유사하다. 그 조직은 단지 마오쩌둥의 지령만 듣고 똑같이 광범위하게 초법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장쩌민 명령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사람

두 부서 사람들이 장쩌민의 지령을 받고 파룬궁을 박해했다. 한 부서는 직접 장쩌민의 우편물과 발언을 받았고 다른 한 부서는 상부가 전달한 내부문서를 받았다. 이 내부 문서는 하급부서에게 장쩌민의 우편물과 발언을 전달하게 했고, 하급 관리에게 문서 지시문을 공부하고 관찰 집행하라고 명령을 하달했다.

직접 받은 사람

문서1: 중국공산당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과 기타 지도자. 기타 지도자는 일반적으로 공산당과 국가 각급, 그 명령과 관련된 문제와 직접 상관된 책임자를 가리킨다. 만약 그들이 당시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아니었다면, 예를 들면 정법위원회 지도자 혹은 선전부 지도자, 종교부 지도자이다.

문서2: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상무위원 포함), 중앙서기처,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문서3: 중앙정치국회의(중앙정치국 위원과 상무위원 포함)

문서4: 중국공산당 성(省)위원회 책임자(자치구, 직할시) 위원회

간접적으로 받은 사람

문서1: 이것은 중국공산당 중앙에서 발표한 한 부의 문서로 모두 720부를 보냈다. 이것은 모든 공산당 중앙위원, 성(省)부급 관리, 만약 직접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두 간접적으로 받은 사람이다.

문서2: 이 문서 역시 공산당 중앙에서 발표한 것이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몇 부 보냈는지 모르지만 모든 성급 공산당 위원이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지령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전달한 전형적인 상황이며 우리는 아래에서 상세히 논술할 것이다.

문서3: 이 문서와 문서1은 극히 비슷하다. 역시 중국공산당 중앙에서 발표한 것이다. 간접적으로 받은 사람은 문서1은 똑같다.

문서4: 이 연설은 박해를 시작한 마지막 동원령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 전의 문서에 의존했으며 뿐만 아니라 정식으로 발표한 중국공산당의 문서라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간접적으로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정할 수 없다.

수신자 진일보 확대: 중국공산당 각 성(省)위원회에서 자신의 판본과 내부문서를 각 시(市)에 보냈다. 이 명령은 최종 현(縣) 구역 심지어 더욱 낮은 1급 지방까지 이르렀다. 아래의 사례 분석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기간 피고 뤄간(羅幹), 자칭린(賈慶林)과 우관정(吳官正)은 모두 중앙 정치국위원이며 이상의 문서 4개를 직간접적으로 수신한 사람이다. 보시라이(薄熙來)는 당시 다롄시 시장과 중국공산당 다롄시위원회 부서기로 역시 수신자다.

사례 분석: 어떻게 지휘체계를 통과해 직접 한 도시에서 박해를 조종했는가

문서2는 지휘체계가 어떻게 운영됐는지 밝히는 한 가지 극히 좋은 사례다.

배경

장쩌민의 이전 두 통의 편지(4월 25일과 4월 29일)를 받자 군부는 스스로 이미 파룬궁 박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5월 5일, 장만녠(張萬年), 당시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은 한 퇴직 장군, 인민해방군 총 병원 전임원장 리지화(李其華)가 쓴 문장을 보았다. 리지화는 파룬궁수련생이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고위층 관리에게 많은 편지를 썼고 파룬궁에 대한 자신의 적극적인 견해를 썼다. 장만녠은 그 문장에 자신의 선명한 비평의견을 표현하고 평어와 주해를 단 문장을 장쩌민에게 바쳤다.

장쩌민의 비망록

1999년 5월 8일, 장쩌민은 장만녠의 보고에 관한 비망록 한 부를 써서 정치국, 중앙서기처 사무실,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앙군사위원회에 보냈다. 이 비망록은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정부 측인 중국공산당 성(省)위원회 문서와 인민일보의 정부측 사이트에서 비망록의 일부 내용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장쩌민의 비망록이 중국공산당 중앙 정식문서가 되다

우선, 장쩌민은 중국공산당 당국에 지시해 퇴직 장군 리지화에게 강요해 ‘자아비평’ 편지(정치적 착오를 인정하고 중국공산당의 너그러운 용서를 애걸하다)를 쓰게 했다. 다음 중국공산당 중앙사무실은 장쩌민 비망록에 관한 통지를 중국공산당의 각급 조직에 발표했다.

이 통지는 지금까지 찾지 못했지만 적어도 하나의 중국공산당 성급(省級) 문서와 하나의 중공 성(省)위원회 상무위원회 회의는 그 통지에 근거해 진행됐다.

공산당 중앙의 문서는 각 성위원회에 전달됐고, 각 성위원회는 또 상응된 수속 기구에 자신의 문서를 보냈다.

1999년 5월 28일, 중국공산당 성위원회 상무위원회는 ‘중국공산당 중앙사무실 문서 [1999]19호’를 학습했다. 당시 이 문서는 모든 중국공산당 성급 상임위원회에 전달됐다.

1999년 6월 3일, 중국공산당 중앙사무청 통지를 전달하고 강화하기 위해 중국공산당 허베이 성위원회는 자신의 통지를 발표했다.

그 통지의 원본은 파룬궁수련자 쉬신무(徐新牧)에 의해 폭로됐다. 그는 일찍이 허베이성 정부의 한 직원이었다. 그와 그 문서 내용을 폭로한 파룬궁수련생은 각각 4년과 8년 유기징역형을 받았다.

성급 문서는 시(市)급으로 하달되고 시급 당위원회는 다시 자신의 문서를 추가했다.

1999년 6월 11일, 중국공산당 랑팡(廊坊, 허베이성의 한 도시) 시위원회는 허베이 성위원회 문서를 전달하고 강화하기 위해 특별히 정식문서 한 부 문서 [1999] 21호를 발표했다.

여기에 이르러 파룬궁 박해 지령은 장쩌민에서 한 점에서 출발해 중국공산당 각급 조직, 비 국가기관을 통해 중국공산당 각개 시(市)일급 당위원회까지 직통했다. ‘파룬궁 문제처리 지도자소조’와 ‘610사무실’이 설립된 후, 파룬궁 박해는 바로 각 급의 ‘파룬궁 문제처리 지도자소조’와 ‘610사무실’에서 감독과 실행을 했다. 특히 엄중한 것은 각 급 ‘610사무실’은 그 위의 1급 ‘610사무실’의 지령을 받았고 그 안전 담당자는 파룬궁 신앙자를 전향하고 세뇌, 학대와 고문을 포함해 강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 같은 서술에서 파룬궁 박해 지령은 중국에서 많은 경로를 통해 하달된 것이며 아래에서 서술하는 지휘체계는 그것의 중국에서의 운행을 종합했다.

•중국공산당 중앙과 중앙서기처에게 장쩌민이 지령을 하달

•중앙 ‘파룬궁문제처리 지도자소조’가 그 명령을 하달

•중앙 ‘610사무실’ 직접 혹은 중국공산당 중앙을 통해 그 명령을 하달

•성시(省市) 1급 당위원회와 비서처는 그 명령을 하달

•성시 1급 ‘파룬궁문제처리 지도자소조’는 그 명령을 하달

•성시 1급 ‘610사무실’은 그 명령을 하달

•노동교양소와 간수소 관리가 그 명령을 하달

•안전 담당자가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세뇌, 고문과 학대를 실시

그러므로 바로 본문 뒷부분에서 명백히 논술한, 장쩌민이 비록 직접적으로 구체적인 박해 행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가 내린 명령(구체적인 상해를 조성함)에 책임이 있다.

인권법률재단(Human Rights Law Foundation)

문장발표: 2015년 5월 2일
문장분류: 해외소식>법률기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5/2/3083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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