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독일 파룬궁수련생
[밍후이왕] 십 년 전인 2002년 2월 14일, 그해 22세인 독일 파룬궁수련생 안드레 후버와 세 명의 스위스인, 한 명의 미국인, 한 명의 일본인 수련생들은 천안문광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중공의 파룬궁박해에 대한 평화적인 항의를 했는데 중국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납치 감금당한 후 송환됐다. 그 기간 중국경찰에 의해 폭행과 모욕을 당했다. 후버는 그때 경험했던 일을 생생히 기억했고 많은 장면들이 눈앞에 선했다.
독일 파룬궁수련생 안드레 후버가 천안문 광장에서 불법 납치를 당하는 장면
“내가 ‘파룬따파 하오’ 노란색 현수막을 하늘을 향해 들자…”
“2002년 2월 14일 오후 2시, 천안문광장에서 저는 ‘파룬따파 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는 노란색 현수막을 하늘을 향해 들고 높은 소리로 ‘파룬따파 하오!’를 외쳤습니다.” 조금 격동된 후버는 여기까지 말하고 멈췄는데 그의 생각은 마치 십 년 전 천안문광장의 그 장엄하고 신성한 한 역사적 장면에서 잠깐 정지된 것 같았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이어서 “과연 예상대로 10초도 안되어 저는 경찰복을 입은 경찰들과 사복경찰들에 의해 진압 당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매우 익숙한 행동으로 팔꿈치로 목과 머리부위를 강타한 경찰
후버가 현수막을 든 후 몇 초 사이에 그와 50여 미터 떨어진 곳의 몇 명 경찰들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그를 향해 달려왔고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넘어뜨리고 현수막을 빼앗아갔다. 그 다음 그를 경찰차에 끌어올리려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가 다시 일어났을 때 그를 에워쌌던 한 무리 경찰들 중 어떤 이는 그의 팔을 잡고 어떤 이는 다리를 잡고 그를 들어 또 다른 경찰차에 끌어 올렸다. 후버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경찰차 문 입구에서 저는 손잡이를 잡고 벗어나려 했지만 그들에 의해 저지당했습니다.” 그 후 그는 사진 속의 사람들을 세어 보았는데 당시 7명의 경찰이 그를 들어 경찰차로 향했다.
경찰차 안에서 경찰은 그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저는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머리는 두 다리 사이에 짓눌렸습니다. 그리고 경찰 한 명은 제 등에 앉아있기에 저는 움직일 수 없었으며 호흡마저 곤란했습니다. 떠나기 전 경찰차 기사는 아주 능숙하게 팔꿈치로 내 목과 머리부위를 맹공격했습니다. 그 다음 제 머리는 또 몇 번 맞았는데 여러 방향에서 여러 경찰들이 주먹으로 때렸던 것입니다.”
그는 천안문 파출소에 끌려갔고 경찰은 그의 옷자락을 잡고 그를 끌어내렸다. “이때야 저는 느꼈는데 제 발에는 신발 한 짝만 남았고 허리띠와 스웨터는 모두 찢어져 있었으며 배낭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15분 뒤 그는 옆방에 끌려가 사진을 찍혔고 신문 당했다. 이어서 또 다른 차에 끌려갔으며 약 15명의 공안 인원이 따라서 승차했고 그의 옆 좌석에는 한 명의 경찰이 앉았다. “내가 탄 차량은 출발했지만 어디로 가는지? 저를 왜 납치하는지? 또 어떤 일이 발생할건지?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알려주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경찰 “중국에는 국제법이 없다.”
후버와 기타 몇 명의 천안문광장에서 항의하던 외국인 파룬궁수련생들은 모두 베이징 공항 부근에 ‘보기에는 호텔 같았지만 안에는 텅 빈 건물’에 끌려갔다. 3명의 경찰이 그를 지키며 그에게 신문했는데 이름과 주소, 여권을 요구했다. 후버는 독일 대사관에 연락되기 전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겠다고 표시했다. 경찰은 만약 협조하지 않는다면 장기간 중국에 감금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후버는 이에 대해 “우리나라 대사관과 연락하는 것은 나의 권리이며 또한 국제법의 기본인권”이라고 성명했다.
한 큰 문을 통과할 때 후버는 이곳이 감옥과 같다는 것을 인식했고 나중에 알게 됐는데 이곳은 한 구치소였다. 후버는 경찰에게 말했다. “나는 감옥살이를 하지 않으며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나를 감금합니까? 나의 행위는 국제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대답했다. “중국에는 국제법이 없다. 유엔은 국제의 것이지만 이곳에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당신은 곧 여기에 5년간 감금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감방은 매우 추웠고 대소변 냄새가 가득했다
후버와 스위스, 일본 수련생은 면적이 15평방미터도 안 되는 방에 함께 감금됐는데 이곳에는 원래 8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지만 10명을 감금시켰다. 감방의 벽면은 떨어져 있었고 천정에는 거미줄이 쳐 있었다. 감방에서의 일거일동은 모두 천정에 설치된 감시카메라에 의해 감시당했다. 바닥에는 구멍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화장실과 ‘샤워’ 하수구였으며 감방에는 하루 종일 대소변 냄새로 가득했다. 그의 기억으로는 매우 추웠고 잠 잘 때는 옆으로 누워 서로 붙어서 잘 수밖에 없었으며 자다가 늘 추워서 잠에서 깼다고 했다. 낮에는 밥 먹는 시간과 잠깐의 휴식시간을 제외하고는 반드시 장시간동안 남쪽 화장실 방향으로 ‘좌판(坐板-장시간 앉아 있게 하는 고문의 일종)’해야 했으며 밖에 나가 햇빛과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없었다.
‘서양 청년들’은 모두 매우 정상이었고 게다가 예의발랐다
후버는 그들의 출현이 같은 감방에 있는 중국 죄수들을 놀라게 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떻게 해외에 그렇게 많은 서양인들도 파룬궁을 수련하는지? 또한 만 리길을 마다하고 중국에 찾아와 용감하게 베이징 정부에 중국 파룬궁수련생들에 대한 박해를 항의하는 것이 궁금했다. 눈앞에 ‘서양 청년들’은 모두 매우 정상이었고 건강했으며 이성적이며 예의발랐고 게다가 성실했는데 TV에서 선전했던 것과 같지 않았다. 그들은 분명히 파룬궁에 헛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을 느꼈다. 때마침 한 젊은 죄수가 영어를 매우 잘 할 수 있어 후버와 수련생들은 감방 사람들에게 많은 파룬궁 진상에 대해 이야기 했다.
후버가 장쩌민을 언급하자 죄수들은 의견이 분분했는데 모두 장쩌민을 욕해서 번역하는 죄수가 합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는 것을 느꼈다. 장을 비하하는 적지 않은 우스갯소리 중에서 그는 현재까지 기억하는 한 가지가 있다. “장은 매일 일어나서 묻는 첫마디가 바로 ‘파룬궁이 또 어디에서 항의했어?’”라는 것이었다. 후버는 당시 파룬궁이 중국에서의 영향이 매우 거대했다는 것을 인식했으며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에 대해 두려워 죽을 것 같았고 게다가 민중의 웃음거리가 됐다는 것을 느꼈다.
단지 파룬궁수련생란 이유로 베이징 경찰에게 심하게 권리 박탈
후버는 베이징 구치소에서 3박2일을 시달렸다. 17일 그는 독일 대사관 대표를 만나게 됐고 이때서야 독일 영사는 그가 구치소에 감금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2월 18일,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다. 후버는 말했다. “베이징에서 저는 불법적으로 94시간 감금됐고 60시간을 포함해 구치소에 감금됐습니다. 중국경찰들은 나를 구타했지만 나는 예의 바르지 않는 말을 그들에게 하지 않았으며 폭력을 쓰거나 경찰들을 절대 모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경찰들에 의해 심하게 권리를 침범 당했는데 단지 내가 파룬궁수련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011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진선인(眞善忍)’ 미술전에서 후버가 참관자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있다
파룬따파 수련의 길에서 확고부동하여 조금도 흔들림 없이 걸어가다
후버는 어릴 때부터 중국의 라마교에 관심을 가졌고 나중에 파룬궁을 수련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1998년에 파룬따파 수련에 들어서게 됐다. 후버는 현재 이미 30세가 넘었다. 10년간 그는 파룬따파 수련의 길에서 시종 확고부동하여 조금도 흔들림 없이 걸었다. 그는 독일의 한 학교에서 교사직을 맡고 있다. 그는 학교 선생님과 학생들, 그가 거주하는 도시의 시장, 의원, 여러 매체 등에 진상을 알리고 대법을 널리 알렸으며 착실하게 수련해 더욱 높은 경지를 향해 노력 정진하고 있다.
문장발표: 2012년 02월 14일
문장분류: 해외소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2/14/25306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