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윈와이(云外)
[밍후이왕]‘방장(方丈)’은 사원에서 주지에 대한 존칭어이다. 한 평 정도 되는 방안에 주지가 기거한다는 뜻으로 스님들의 검박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어휘는 석가모니시대에 집에서 수행하는 거사 ‘웨이모제(维摩诘)’ 의 방안을 비유한 것으로부터 생겨난 말이다. 웨이모제는 고대 인도사람으로 큰 재산가였으나, 그의 방안은 텅 비고, 오직 침대 하나뿐이었다. 즉 그가 수행하는 곳은 침대하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후에 그 방을 측량해 보았는데, 일장(一丈)이었다는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으로 놓고 말하면 당연히 세간의 일체를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거처 할 곳이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출가한 중들은 세간의 일체를 버리는데, 방장 역시 사원을 관리한다 해도 역시 출가승으로 한 칸의 방장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가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방장은 하나의 종교적인 명사로 그 특별한 내함이 있는 것이다. 방장이 간단한 것은 중들의 검소한 미덕을 반영한 것이다.
사실 절의 중들뿐만 아니라 품격이 고상한 사람들은 모두 물욕이 없이 재물에 담백하고, 흉금이 넓은 것이다. 처소는 아주 간단하고 소박하지만 그들의 품덕은 지극이 고상한 것이다. 당대의 문학가 류우석(刘禹锡)의 ‘누실명(陋室铭)’ 기록은, 그의 간결하고 소박한 집안으로 그의 덕성을 반영한 것이다. 누실명은 백 글자도 안되지만 중국인들에게 1천여 년 간 영향을 주었다. 이로 볼 수 있는 것은, 집이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주자의 품덕과 정신인 것이다.
당연히 역사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이 사람들은 하나의 명성을 남기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간단한 집을 건축한 것이 아니다. 집안이 아무리 간단해도 아름다운 내함이 없으면 전해지지 않는 것이다. 현재 우리 이 세상에도 바로 ‘작은 파란 집’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작은 파란 집은 너무나 작다. 일 제곱미터 정도로 침대는커녕 오직 한 사람이 가부좌하면 되는 곳이다. 작은 파란색 집은, 캐나다 밴쿠버 구란후(固兰湖)거리 중공 총영사관 앞에 있는데, 2001년에 건축한 집이다. 당시에 중국 마샨쟈(马三家) 노동수용소에서, 20일을 단식 중이던 130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을 긴급히 구원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북미와 구라파 파룬궁 수련생들이 동시에 동조 단식을 하면서,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참혹한 박해에 대해 강력히 항의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마샨쟈와 할르빈시의 만가、장림자(万家、長林子)등 기타 노동수용소 등에서 역시 단식을 하고 있는 파룬궁수련생들을 즉각 석방하라는 항의를 제기한 것이다. 멀리 벤쿠버에 있는 파룬궁 수련생들도, 중공 총 영사관 앞에서 매일 24시간의 항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 때 그들은 비바람을 막기 위하여 파란색의 작은 초막집을 만들어 사람들이 ‘작은 파란 집’이라고 불렀다.
벤쿠버 수련생들이 풍설과 눈비를 무릅쓰고 중공 영사관 앞에서 매일 24시간 연속으로 조용히 정좌
중공 영사관 부근의 파룬궁 수련생들은 그리 많지 않다. 매일 24시간 계속해서 항의를 하는 것은 상당히 큰 고난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발생한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참혹한 박해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고난의 처지를 고려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해외에서 중공의 폭력에 대한 항의와 폭로는 중공, 그것들의 잔혹한 행위를 유력하게 저지할 수 있으며, 또한 국내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인 것이다. 이리하여 모진 비바람과 설한풍 속에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적어도 한 사람은 견지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2년 그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견지하였다. 중공영사관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 캐나다 사람, 미국 사람, 구라파사람 등등은 물론이고, 당연히 중공영사관을 드나드는 많은 중국인들도 이런 파룬궁 특유의 견인정신을 보아서 알게 되었다.
명절 때가 되면, 항의에 참여하는 파룬궁 수련생은 더욱 많아지는데, 그들은 묵묵히 연공하고 조용히 정좌하면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제일 진실한 소식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들은 파룬궁 수련생이 국내외에서 박해를 받은 사진과 대법이 전 세계로 전해지는 정보를 전하는 보도 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어떤 사람은 예사롭게 여길 수도 있지만, 이렇게 장기간 동안 견의불굴의 완강한 행동이 계속 되면, 한번 또 한 번 보는 사람들의 양지를 묻게 될 것이다. 폭우와 폭설 등 사나운 날씨 때는 아마 더는 견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다가 보니 파룬궁 수련생들이 여전히 정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떠한 악조건하의 날씨라 해도, 혹한과 암흑의 밤일지라도 파란색 작은 집안에는 정좌한 파룬궁 수련생이 있는 것이다.
벤쿠버의 독특한 풍경인 작은 파란 집
특수한 사명을 지닌 작은 파란 집은, 중공의 눈 안의 가시로 되었다. 중공은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없애려고 날 뛰었다. 그러나 이곳은 캐나다고 중공이 마음대로 강제로 허물고 빼앗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공의 매수 등 온갖 술수로 결국 벤쿠버 시장이 이 파란 집 문제에 영문 모를 개입을 시작한 것이다.
이 작은 파란 집은 장장 5년간을 견지하고, 2006년8월 전 벤쿠버 시장 쑤리원(苏利文)이 “작은 파란 집과 파룬궁 표어는, 시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았고, 도시의 미관에 영향을 주고 있으니, 기한 내에 철거 할 것을 요구한다.” 며 각 언론 매체에 이 같은 사실을 발표했고, 또 법원에 철거를 신청, 2009년 1월 법원은 시 정부가 철거령을 집행할 것을 판결 했다. 이렇게 해서 평화적 항의의 글이 쓰여 있던 작은 파란색 집은 철거 되었다. 캐나다 사람들이 모두 이해하기 힘들어하였고, 중공은 배후에서 술잔을 들었다.
그러나 파룬궁 수련생들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고, 계속 평화적인 항의를 하면서 다른 한 방면으론 작은 파란 집 철거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쟁취해 나갔다. ‘작은 파란 집 철거안 건’ 을 상급법원에 상소하였다. 2010년 10월 9일 베이성 상급법원은 “벤쿠버 전 시장 쑤리원 정부가 도시 면모를 이유로 언론 자유를 제한 한 것은 헌법을 위반한 것이고, 동시에 파룬궁 수련생들이 사용한 작은 파란 색 집을 철거하라는 법원의 판결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1심 판결을 뒤집었다. 3명의 법관 전원 일치의 판결로, 이전의 파룬궁 수련생의 항의 표어와 작은 파란 집을 철거하라는 판결은 착오적인 것이고, 이는 항의를 표시하는 것이기에 캐나다 헌법이 보호하는 언론 자유에 속하는 것이라고 결정 판시했다.
이 같은 상급법원의 판결이 나자, 강제로 철거되었던 작은 파란 집은 재빨리 원래의 곳에서 재건축 되었다. 캐나다 인들의 눈에 1년 넘게 사라져 안 보였던 작은 파란집이 또 다시 출현한 것을 보게 되였다. 캐나다인들의 작은 파란 집에 대한 성원과 지지는 자유에 대한 성실하고 진실한 표시인 것이다! 중공이 더러운 손을 내밀어 간섭한 이 ‘작은 파란 집’ 은 이번의 경과를 거쳐 또 새로운 내함이 주입 되었다. 그는 하나의 역사 풍경으로 새롭게 중공 영사관 앞에 우뚝 서 있을 것이다.
‘작은 파란 집은 건립되는 것이고, 중공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는 전 세계 인민들이 공동으로 저지하는 시기인 것이다!’
문장발표 : 2010년 10월 29일
문장분류 : 해외소식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10/29/231620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