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2010년 4월 21일] (밍후이왕 기자 허핑 스웨덴 보도) 11년 전 현재 스웨덴에서 살고 있는 리즈허(李志河)는 자신이 어느날 스웨덴에서 생활하고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며 친지들과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수련이 행복한 인생 가져와
당시 리즈허는 중국철도건축본사에서 근무했다. 부인 장구이룽(張桂榮)은 베이징시 하이뎬구(海澱區) 모 거리사무소(街道辦事處)에서 재정사무실 부주임을 맡고 있던 공무원이었다. 아들 리청(李成)은 베이징 11중학교(중점중학교) 학생이었다. 그들 가족은 부러움을 사는 가정이었다. 부부의 일자리도 안정되고 수입, 복지가 좋았으며 아들은 공부를 잘했다.
더욱 부럽게 하는 것은 그들의 건강이었다. 1997년 10월부터 그들은 보험증을 쓰지 않아 국가 의료비를 절약해 줬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병마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았고 생활도 화목하게 변했다. 97년 10월 이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리즈허는 18세에 군에 입대하여 철도병이 됐고 어려운 환경에서 7년을 보냈다. 젊었을 때는 몰랐지만 중년으로 접어들자 몸이 견디지 못했다. 요통, 다리 마비에다가 반신불수 증세까지 생겼다. 그는 베이징의 대형 병원과 전문가는 전부 찾아 다녔지만 효과가 없었다. 전문의는 요추디스크 3, 4개 돌출, 허리추간막 파열, 요근 손상이라며 조용히 요양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고 했으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마비가 올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매주마다 그는 3, 4일씩 치료를 받으러 나갔고 통증은 그의 직업과 생활에 큰 불편을 가져왔다. 그때 그는 어디서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만 들으면 얼마나 멀든지 돈을 얼마 쓰든지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찾아갔다.
부인 장구이룽도 건강이 줄곧 좋지 않았다. 또 심한 생리통이 있었는데 나중에 난소에서 종양을 발견했다. 수술 후 다른쪽 난소에서도 종양을 발견해 고통은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성격이 거칠어 걸핏하면 남편과 아이에게 화를 냈다.
97년 10월, 동료의 소개로 그들은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시험삼아 했는데 2주도 안돼 리즈허를 몇 년간 괴롭혔던 병이 모두 사라졌다. 장구이룽의 오랜 질병도 한달 안에 사라졌다. 그리고 장구이룽의 성격도 많이 좋아져 큰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파룬궁은 ‘쩐싼런(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매사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리즈허는 셰슈펀(謝秀芬)이라는 파룬궁 수련자를 아는데 피임수술이 잘못돼 침대에 16년이나 누워있었고 평생 마비상태로 있어야 했다. 파룬궁을 1년 남짓 수련해 그녀는 다시 일어나 정상인으로 변했다.
리즈허는 “나는 중공 당문화 교육을 받아서 무신론자였다. 자신의 경험과 주위에서 발생한 파룬궁 수련자의 신기한 일들을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신기한 공법은 나를 건강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도 더욱 화목하게 했습니다.”
4.25 도덕이 승화된 후의 감동
11년 전인 99년 4월 25일 새벽. 리즈허는 연공하는 장소에서 톈진(天津) 수련자 수십 명이 모 잡지사에 거짓된 보도를 알리러 갔다가 체포됐고, 현지 수련생들이 그들을 풀어달라고 갔을 때 경찰은 베이징에 가서 요구하라고 말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나는 그들에게 빨리 사람을 풀어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민원사무실에 가서 자신의 경험으로 그들에게 파룬궁이 어떤 것인지 알리고, 잘못된 것을 빨리 개변시키는 수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11년이 지났지만 리즈허는 당시의 상황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날 아침 6시 전에 나는 푸유가(府右街, 국무원 민원처리 사무실 소재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이미 많은 파룬궁 수련자가 모였습니다. 평소와 달리 나는 길목마다 경찰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무슨 준비를 한 것 같았습니다. 당시에 국내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많아서 민원처리 사무실 앞에 다 서지 못해 류부커우(六部口)와 베이하이(北海) 쪽으로 흩어졌습니다. 당시에 경찰도 많이 왔고 그들은 매우 긴장했습니다. 파룬궁 수련자는 자율적으로 경찰을 도와 질서를 유지하고 행인의 길을 비켜줬으며 교통에 영향주지 않았고 경찰이 어디에 서라면 어디에 섰습니다. 나중에 많은 경찰이 진상을 알고 마음 놓고 한쪽에 가서 잡담을 나누었습니다. 내 곁에서 한 행인이 경찰에게 ‘사람이 왜 이렇게 많습니까?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한 경찰이 ‘저 사람들은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인데 청원하러 왔다. 이 공법은 아주 좋다. 나의 장모님도 이것을 수련하는데 저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은 파룬궁 수련자들은 온다면 오고 간다면 갔는데, 평화로우며 조금도 시끄럽지 않았고 그들은 조직성과 기율성이 참 강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군인이었던 리즈허는 이것은 훈련이나 강제성으로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저는 군에 입대했던 사람입니다.(중국인은 일부만 군에 입대한다) 그날의 장면은 정확하게 말하면 훈련이나 강제로 해낼 수 있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쩐싼런(眞善忍)을 수련해 도덕이 올라온 일종 감동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서로 아는 사람도 있었고 모르는 사람은 더욱 많았습니다.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민원처리 사무실에 진실한 상황을 반영하러 갔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서서 담판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오래 서 있어서 힘든 사람은 뒤에 가서 좀 앉아 있었고 아무런 과격한 언행도 없었으며, 아무도 구호를 외치지 않았고 큰 소리로 떠들지도 않았습니다. 바닥은 깨끗했고 경찰이 던진 담배 꽁초마저 수련자가 주어서 쓰레기통에 버려 땅에는 휴지 조각하나 없었습니다. 카메라 차가 수시로 사람들 앞에서 왔다갔다하며 촬영했지만 수련자들은 담담히 받아 들였으며 시종일관 온화하고 이성적이었습니다. 참으로 사람을 감동케 했습니다.”
이후에 주룽지(朱鎔基) 총리가 청원자 대표를 만났고 파룬궁 수련자는 톈진 수련자를 석방하고 합법적인 연공 환경을 보장하며 파룬궁 수련서인 ‘전법륜(轉法輪)’을 정상적으로 출판하는 등 요구를 제출했다. 그날 저녁 9시가 지나서 톈진 파룬궁 수련자가 석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수련자들은 바닥을 깨끗이 청소한 후 모두 떠났다.
장구이룽은 출장으로 4.25 청원에 참여하지 못해 지금도 유감스러워 한다. 그녀는 자신이 만약 베이징에 있었다면 꼭 참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남편과 모든 4.25에 참여한 파룬궁 수련자가 취한 행동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제가 알았더라면 갔을 겁니다.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은 ‘문화대혁명’과 ‘6.4’를 겪어 공산당과 교제하는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몇 십 년간 형성된 공산당과 그것의 정치운동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헌법이 부여한 국민의 권리를 행사했으며 민원처리 사무실에 진상을 반영하러 갔습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난 좋은 사람이 되려고 했고 당국에 파룬궁 수련자에게 수련할 수 있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박해로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생활
당시의 평화적인 청원이 중공매체가 선전하는 ‘조직이 있고 목적이 있는 중난하이(中南海) 포위’가 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중공은 이유 없이 파룬궁 박해를 노골적으로 진행했다. 장구이룽은 말했다. “중공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는 완전히 불법입니다. 저는 당시에 정부기관에서 근무했으므로 이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각층 집행자도 불안해했으며 많은 것은 구두로 전달해 내려온 명령이었스니다. 그들은 파룬궁을 수련자가 모두 좋은 사람이고 선량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만 자신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해 (박해에 참여)했습니다.”
박해가 시작되고 리즈허는 회사에서 감시 대상이 됐다. 그는 청원할 길이 없어 천안문에 갔다가(역주-당시 파룬궁 수련자들은 천안문에 가서 ‘파룬따파는 좋다’라는 현수막을 펼치거나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고 외쳤다) 파출소, 주민위원회의 전화 감시와 미행을 받았다. 회사에서도 다른 눈길로 보았고 규정대로 일찍 퇴근하지 못하게 했으며, 그에게 세뇌반에 가라고 하고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라고 핍박했다.
리즈허는 그들의 배치에 협조하지 않으려고 보름간 집을 떠났다. 돌아온 후 회사에서는 무단결근이라며 월급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회사 지도자는 리즈허에게 수련을 포기하라는데 성공했다는 이유로 상사의 표창을 받았다. 알고 보니 회사의 공산당위원회 사무청 비서가 수련하지 않는 사람을 ‘세뇌반’에 리즈허 대신 보내고 수련을 포기했다고 한 것이었다.
장구이룽도 수련을 포기하지 않아 파룬궁을 전문 박해하는 ‘610’ 사무실에서 20여 년을 근무한 그녀를 다른 곳으로 전근시켰고 ‘610’은 또 그녀를 세뇌반에 잡아갔다.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리즈허 가족은 친구의 도움으로 러시아로 떠났다. 그들이 중국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가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절대 돌아오면 안 된다. 당신들 양쪽 회사에서 전담반을 설립해 도처에서 너의 가족을 잡으려고 사람을 풀었다. 경찰이 24시간 너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고 걸핏하면 친척과 친구집에 가서 소란을 피운다. 학교에도 아이를 잡으러 갔었고 마지막에 중국 출입국관리사무소까지 쫓아가서 당신들이 간 곳을 알아냈다.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이리저리 피난을 다니던 리즈허 가족은 현재 스웨덴에 살고 있다. 11년 전에 시작된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박해는 그들을 부득이 고향을 떠나게 했다. 그러나 수천만 박해 받아 가족이 파탄되고 사망한 기타 중국대륙 파룬궁수련자와 비교했을 때 그들은 그래도 행운이다. 그러므로 타향에서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경력을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리고 있으며, 파룬궁에 대한 박해가 하루속히 끝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문장완성: 2010년 4월 21일
문장분류: 해외소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4/21/22194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