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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 집단이 중국 교육계통에서 파룬궁 수련생을 박해하여 사망하게 한 사실

【명혜망 2004년 7월 24일】(명혜기자 팡훙[方洪]보도)장(江)씨 집단이 일으키고 추진한 法輪功(파룬궁) 박해 중에서, 중국교육부는 전국의 모든 대, 중, 초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속에서 “문화혁명”식으로 사람마다 태도 표시하여 고비를 넘게 하는 식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으며, 교사와 학생들을 강요하여 파룬궁을 박해하고 공격하는 드라마를 보게 하였다. 대, 중, 초등학교에서 강제로 파룬궁을 반대하는 “백만인 서명”운동을 추진함으로써 학생을 협박하여 소수 사람이 발동한 이번 박해에 참여하게 하였다. 교육계통을 통하여 파룬궁을 공격하고 모함하는 내용을 중, 초등 교재 및 각급 시험문제에 편집해 넣었으며 심지어 고등학교 시험과 연구생 시험문제 속에 넣었다. 파룬궁 공격에 참여하지 않고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 교사는 해임시키고 불법으로 감금시키며, 학생은 학교에서 제명되어 승급하지 못하고 졸업하지 못하며 강박에 의해 각종 유형의 “세뇌반”(장씨 집단이 파룬궁을 탄압하는 운동 중에 설립한 “준 수용소”에 보내지는데, 어떠한 법률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법집행기구가 아닌 기관이 파룬궁 수련생에 해 인신자유를 박탈한 정황 하에서 폭력적인 세뇌를 진행함) 노교소, 정신병원에 보내져 심지어 박해로 인하여 사망한다. 1999년 칭화대학에서만 300여명의 교수, 교사, 박사, 석사, 대학생들이 불법으로 수감되고 공직과 학업을 사직당하거나 혹은 직접 노교소에 보내졌다.

명혜망의 통계에 의하면, 2004년 7월 23일까지 최소한 1014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이미 박해로 사망하였으며 그 중에는 장쩌민의 손발인 천즈리(陳至立)가 지도하는 교육계통에서 72명의 직원과 학교의 학생들이 박해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가장 어린 학생은 17살의 자무쓰시 수런 중학교 고12반의 여학생 천잉이며 나이가 가장 많은 이는 하얼빈시 관리학원 교수 저우징썬(周景森)이다.

*재학생이 박해로 사망하다

천잉(陳英),여,17세,헤이룽장(黑龍江)성 자무쓰(佳木斯)시 수런(樹人) 중학교 고 12반 학생. 1999년 8월 16일 베이징에 가서 청원한 후 압송되던 기차 안에서 일부 공안요원은 천잉을 구타하고 위협하고 모욕을 주었다. 그녀의 수갑을 차의 난간에 채우고 빵 반절과 생수 반병만 주었다. 화장실에 갈 때도 문을 닫지 못하게 하였는데 천잉은 그들의 박해를 더 이상 받지 않으려고 화장실에 들어간 후 문을 닫고 점심 2시 34분경에 경태선 280킬로미터 부근에서 차에서 뛰어내렸다. 차는 20여리 길을 더 가다가 비로소 멈추었으며 자무쓰시 국가 공안간부 리(李) 정위(政委)와 제2차 칸의 열차 차장 등 사람들이 천잉을 펑룬(豐潤)병원에 보냈다. 그날 밤 6시가 조금 넘어서 리 정위가 “살수 없다면 산소를 빼라!”고 말하였는데 목적은 가족들에게 목숨이 있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그날 밤에 또한 펑룬 화장터에 직접 보내 냉동시켰다……

정쥔수(鄭君淑),여,24세,지린(吉林)성 옌볜(延邊)대학 학생,본 고향은 지린성 지린시 판스(磐石)현 얼다오강(二道崗)향 사람이다. 99년 8월 베이징에 가서 청원한 후 학교 정보과에 의해 압송되어 왔다. 길에서 그들에게 잡혀가지 않고 베이징에 가서 계속 관련부문에 대법의 진상을 알리기 위하여 핍박에 의해 열차에서 뛰어내렸는데 불행히도 사망하였다. 현지 공안기관은 그녀를 화장하였는데, 그녀의 호주머니에 수련생들의 3000위안 저금통장이 들어 있었지만(수련생들 스스로 모은 돈이며 여러 사람이 베이징에 있을 때 쓸 돈이었음)사라져 버렸다.

장전중(張震中),남,22세,산둥(山東)성 랴오청(聊城)시 선(莘)현 사람,산둥공업대학(산둥대학 남교구)관리학원 본과생임. 학교에서 성품이 우수하고 집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노인을 존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여 모든 이웃 사람들이 칭찬하며 모두 좋아하였다. 장쩌민이 파룬궁을 탄압한 후 베이징에 가서 청원했다는 이유로 학교 측에 의해 불법으로 수감되었다. 2001년 5월 그와 수련생 세 명이 파룬궁의 진상을 이야기할 때 경찰에 의해 불법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매질과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들은 단식으로 항의하였고 장전중은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당하다 사망하였다.

*중학교 초등학교의 교직원이 박해로 사망하다

위펑화(於鳳華),여,57세,집은 랴오닝(遼寧)성 펑청(鳳城)시 아이민서(愛民社)구에 있었고 펑청시 한모(翰墨) 초등학교의 음악교사였음. 위펑화는 1997년 파룬궁을 수련한 후 심신이 건강해지고 사람이 특별히 젊어졌는바, 50여세의 사람이 보기에 40이 갓 넘어보였다. 2001년 1월 어느 날 밤, 위펑화는 다롄(大連) 시내에서 “法輪大法(파룬따파)는 좋다”란 현수막을 걸 때 망을 보던 다롄시의 경찰에게 납치당하였다.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롄의 모 법원에 의해 8년이란 불법 판결을 받았다. 몇 달 후 선양(沈陽) 다베이(大北) 감옥으로 옮겨져 더 한층 잔혹한 박해를 받았으나 위펑화는 시종일관 파룬궁 수련을 견지하였다. 2004년 5월 5일 다베이 감옥에서 사람을 데려가라고 가족에게 알렸을 때 위펑화는 이미 괴롭힘을 당해 숨이 거의 끊어지려고 하였다. 가족이 가서 사람을 데려올 때, 위펑화는 사람들에 의해 들 것에 실려 나왔다. 집에 돌아온 후 5월 10일 위펑화는 억울하게 인간세상을 떠났다.

샤오양룽(肖揚龍),남,푸젠(福建)성 핑탄(平潭)현 둥샹(東庠)향 중학교 정치교사. 파룬궁 수련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또 그 학교의 학생 10여명에게 파룬궁을 가르쳐 주고 학교의 학생들에게 파룬궁 서적과 관련 자료를 전해주었다는 이유로, 국가 지도자에게 편지를 써서 실정을 반영하고 파룬궁을 공정하게 대할 것을 요구하며 또 베이징에 가서 법을 보호하려고 준비한 태도가 아주 단호하였다는 이유로 현지의 공안국과 인민법원에 의해 선후로 구류되고 4년 판결을 받았다. 2000년 7월 이후, 샤오양룽은 핍박에 의해 단식으로 항의하였고 7월 22일 단호한 이 남자 대장부는 신체가 지탱하지 못하여 사망하였는바,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루훙펑(陸紅楓),여,37세,원 닝샤(寧夏) 링우(靈武)시 1초등학교의 부교장 겸 교무주임. 교학이 우수하여 전 지역 우수교사라는 영광스러운 칭호와 전 지역 모범교사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았으며 또 수많은 시급의 선진 영예와 월계관을 받았다. 2000년 3월 양회(兩會)기간에 인대(人大, 번역자 주 : 전국 인민 대표 대회의 준말)에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멈추라고 상소한 공개장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현지 정부의 불법관원의 박해를 받았다. 시(市)교육국은 더 한층 나아가 루훙펑 부교장의 직무를 해임하였다. 2003년 6월 7일 루훙펑은 강제로 납치되어 링우 정신병원에 보내졌고 인간성을 말살한 50여 일간의 박해를 받았다. 사람의 중추신경을 파괴하는 대량의 약물을 주사, 주입 당하였다. 비인간적인 괴롭힘은 루훙펑이 제 정신을 잃게 하고 신체는 극도로 허약해지게 하였다. 정신적 짓밟음과 육체적인 괴롭힘은 루훙펑의 생명이 위태롭게 하였고 2000년 9월 6일 인간세상을 떠났다.

리광전(李廣珍),여,52세,랴오닝성 젠핑(建平)현 마창(馬廠)향 중심 초등학교의 우수한 교사임. 그녀의 남편 저우시룽(周喜榮)은 마창진 중학교의 영어교사이며, 두 부부는 法輪大法(파룬따파) 수련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 불법요원들에게 집을 수색당하고 수감되고 혹독한 매질을 당하였으며 갈취당하고 벌금을 물었다. 2002년 10월경에 두 부부는 또 공안 불법요원에 의해 납치당해 수감되었고, 2003년 3월경 두 사람은 불법으로 3년 판결을 받았다. 리광전은 선양 다베이 감옥에 납치되었는데, 박해받아 나중에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는바, 피골이 상접하였다. 2003년 10월에 보석으로 나와서 치료하였지만 2004년 6월18일 불행히도 인간세상을 떠났다.

왕샤오둥(王曉東),여,연령을 잘 모름,선전(深圳)시 난터우(南頭) 중학교 교사. 2000년 왕샤오둥은 법에 의거하여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청원하였다. 2000년 4월 29일 선전 난산(南山) 구치소에 불법으로 수감되었다. 왕샤오둥은 그녀의 불법적인 수감에 대하여 항의하고 여러 차례 단식하고 죄수복 착용 등을 거절하여 감옥의 여러 방면의 박해를 받았다. 경찰은 재소자들이 왕샤오둥을 제멋대로 구타하고 모욕을 주게 하였다. 또한 구치소는 왕샤오둥에게 무기한으로 35kg에 달하는 족쇄를 채웠는데 거의 그녀의 체중에 가까웠다.

선전 610 관련요원이 폭로한데 의하면, 파룬궁 수련생 왕샤오둥은 2003년 7월 선전시 난산 구치소에서 4개월간 단식한 후 박해받아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는 2001년 파룬궁 수련생 선더밍(沈德明)이 박해로 사망한 후 선전 난산 구치소에서 박해로 사망한 두 번째 파룬궁 수련생이라고 하였다.

왕둥메이(王冬梅),여,30여 세,허베이(河北)성 헝수이(衡水)시 우이(武邑)현 어느 진(鎭)의 교사임. 2001년 현지의 시(市) 세뇌반에 의해 강제로 세뇌박해를 받은 후 또 스자좡(石家庄) 노교소 5대대에 보내져 불법으로 노동개조 당하였다. 그녀는 갖은 혹형의 시달림과 정신적 짓밟음을 받았다. 밧줄로 매달고 전기충격기로 감전시키며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오랫동안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악경은 각종 수단을 이용하여 그녀가 신념을 포기하도록 핍박하였는바,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 계속 약물로 괴롭혔다. 그녀가 보석으로 치료받으려고 집에 온 후 사람들은 그녀의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행동이 느리며 말 반응이 더디고 멍청하게 있는 것을 보았다. 아주 많은 일들을 이미 생각해내지 못하고 기억력이 감퇴되었다. 그녀에게 어찌하여 정신병원에 보내졌는가를 물었을 때, 그녀는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천천히 대답하였다. 그녀에게 병원에서 무엇을 하였는가를 물었을 때, 그녀는 약 먹고 주사 맞았다고 느릿느릿 말했다. 그녀에게 강제로 약을 먹이고 주사 맞게 한 것이 아닌가라고 묻자 그녀는 그렇다고 하였다. 그녀의 양 쪽 팔에는 밧줄로 매달았을 때의 상처가 있었는데 검은 자주 빛을 띤 한 가닥 한 가닥의 상처들이었다. 왕둥메이는 약물의 시달림을 받아 정신이 온정하지 않았는바, 2004년 3월 12일 저수지에 빠져 사망하였다.

장수전(張淑珍),여,51세,집은 베이징시 하이뎬(海淀)구 석불사 39호에 있고 베이징시 하이뎬구 위안다(遠大) 중학교의 퇴직 교사임. 그녀는 1992년부터 파룬궁 수련을 시작하였는데, 2001년 파룬궁 진상자료를 배포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체포되어 칭허(靑河) 노교소에 보내졌다. 노교소에서 경찰은 연속 며칠동안 밤낮으로 잠을 자지 못하게 하였으며 전기충격기로 그녀를 감전시키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 벽에 부딪치게 하였다. 또한 잔인무도하게 항문에 이름 모를 약물을 주사하였다. 그리하여 장수전은 극심한 복통을 느꼈고 배는 임신한 부녀의 배처럼 부풀어 올랐다. 내막을 아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경찰은 후에 장수전에게 1년 6개월이라는 노동개조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장수전은 퇀허(團河) 노교소에 보내지던 도중에 복부가 극심하게 아팠는데, 후에 퇀허 노교소는 책임을 감당하기 두려워 가족이 데려가게 하였다. 2002년 10월 9일 저녁 7시에 하이뎬 병원에 보내졌지만 저녁 9시에 인간세상을 떠났다.

* 대학 교직원이 박해로 치사하다

리바이판(李白帆),남,40세 좌우,상하이 화둥(華東) 사범대학 강사임. 1999년 7월 이후 수련을 견지하여 한동안 장쑤다펑(江蘇大豐) 농장에 수감되었다. 후에 또 상하이 칭둥(青東) 농장에 보내졌으며 2년이 넘도록 가족들과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리바이판이 전향을 거절한다는 이유로 2001년 4월말에 칭푸(靑浦)에서 경찰이 빌딩에서 밀치는 바람에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경찰은 “내부규정”에 따라 외부에는 그가 자살하였다고 하였다.

베이징 상공업대학 젊은 여 교수 자오신(趙昕),1968년 6월 28일 출생이며 헤이룽장성 하얼빈 사람임. 심성이 착하고 사업실적이 우수하였다. 2000년 6월 19일 자죽원(紫竹院) 공원에 가서 연공할 때 경찰에 의해 하이뎬 분국 소속 구치소에 불법으로 수감되었다. 수감 기간인 22일 악경에 의해 구타당하여 경추 4.5.6절이 분쇄성 골절이 되었다. 후에 자오신은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전신은 불구가 되었는데, 머리 부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견강한 의지와 파룬따파에 대한 단호한 신념에 의거하여 6개월간의 병 통증의 괴롭힘을 겪었으며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오랜 시간의 고통을 참았다. 2000년 12월 11일 저녁 자오신은 불행히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는 단지 32세였다.

왕지궈(汪繼國),남 ,40세,헤이룽장성 무단장(牡丹江) 사범학원의 직원. 그는 2000년 3월 베이징에 가서 청원했다가 무단장시로 붙잡혀 돌아온 후 즉시 3년이란 노동개조 판결을 받았다. 같은 해 8월 왕지궈는 감옥에서 박해를 받아 생명이 위태로웠는데 간경화, 간경화복수, 합병간신 종합증이란 진단을 받았다. 노교소는 왕지궈가 핍박에 의해 보석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받는 데 대해 동의하였다. 무단장 사범학원의 관련요원은 2000년 12월 왕지궈가 퇴원한지 겨우 3개월 만에 그 당시 왕지궈가 혈뇨가 있고 두 눈이 거의 실명된 것도 고려하지 않고 다시 노교소에 보냈다. 왕지궈는 후에 판결을 받고 무단장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생명이 위태로워졌을 때 병원에 보내 구급치료를 하였지만 2003년 9월에 사망하였다. 왕지궈의 아내 역시 파룬궁 수련생이고 노교소에 보내졌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그들의 아이는 약 8세이다.

바이샤오쥔(白曉鈞),남,35세,지린성 동북사범대학 교수이며 철학 석사임. 그는 2000년 7월 베이징에 가서 청원했다는 이유로 불법으로 노동개조 1년이란 판결을 받았다. 2002년 1월에 기한을 초과하여 7개월 더 수감된 후,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창춘(長春)시 싱룽산(興隆山) 세뇌기지에 강제로 보내졌다. 후에 창춘시 차오양거우(朝陽溝)노교소에 보내져 불법으로 수감되었다. 바이쇼쥔은 2003년 6월초에 시작하여 박해로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먹기만 하면 토하였는데 굶어서 계속 비틀거렸다. 그리하여 2003년 7월 18일에 박해로 사망하였다.

문장완성 : 2004년 7월 23일

문장발표 : 2004년 7월 24일
문장갱신 : 2004년 7월 25일 9:43:33 PM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7/24/80230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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