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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세뇌반(洗腦班)의 “놀라운 불교예언”에 관하여

글 / 청적(靑笛)

【명혜망 2003년 9월 29일】 대륙당국은 法輪功(파룬궁) 수련생들을 협박하여 이른바 “전화반(轉化班, 또는 세뇌반이라고도 함)에 데려가서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의 신앙을 “전화(轉化)”시키려 하고 있다. 최근에 들리는 바에 의하면 “전화반”에서 고문이나 괴롭힘, 수면(睡眠) 박탈, 강제로 法輪功(파룬궁)을 비방하는 매체 보기 등 외에도 한가지 새로운 수단이 추가되었는데 이것이 곧 불교경전과 예언을 이용하여 法輪功(파룬궁)을 비판하는 것이다.

우선, 한 신앙의 경전을 가지고 다른 신앙을 공격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불교(佛敎)와 기독교(基督敎)의 경전을 예로 들면, 근본적으로 상호간에 조금도 섞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즉, 불교는 다불(多佛)신앙이며 여래(如來)를 최고의 경지로 여기므로 천지창조나 인간을 만든 일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이 없다. 반대로 기독교는 유일신(唯一神) 신앙이므로 명확하게 신이 우주를 창조했으며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들었다고 제출하고 있다. 불교는 사람과 짐승이 윤회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기독교는 사람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라고 본다. 불교는 육식(肉食)이나 파, 마늘등의 훈(葷)을 꺼리지만 기독교는 이런 계율이 없으며 예수가 물고기 5마리와 떡 2개(五魚二餠)로 천명을 배불리 먹인 일을 이야기한다.

이 두 종교의 일부 스님이나 목사들이 일찍이 자신의 경전과 이념을 가지고 상대방을 공격한 적이 있는데, 자기 종교에 나오는 나쁜 측면(負面)의 개념과 논술을 가지고 상대방의 등급을 매긴다(對號入座). 설령 같은 신앙체계 내부의 서로 다른 교파 사이에도–가령 불교중의 소승(小乘)과 대승(大乘) 및 밀종(密宗)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서로 다른 측면이 많이 있기에 설복(說服)시킬 방법이 없다.

자기 종교경전 중에 나오는 나쁜 측면의 예언을 다른 종교신앙에 대하여 등급을 매기고는 이른바 “놀랄만큼 정확하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무지하고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전에는 도를 수호(衛道)하기 위한 배타성(排他性)과 봉폐성(封閉性)이 있으며 필연적으로 종교중의 나쁜 측면의 개념들이 나오는데, 천마외도(天魔外道)니 외도사설(外道邪設)이니 하는 것에서부터 다른 종교의 신도들에게 ‘외도의 무리(外道徒衆)’라는 모자를 씌우는데 까지 이른다. 동시에 자기 종교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논술을 죄다 이단사설(異端邪設)이라고 판정한다.

예를 들어 대승불교 중에서는 여래를 최고의 경지로 보기에 자연히 세계를 창조한 신이라든가 부처에 남자부처 여자부처가 있다거나 부처에도 등급이 있다는 설법을 이단으로 배척한다. 대승불교는 육식과 훈을 계(戒)하며 출가할 것을 요구하므로 자연히 이런 계율이 없는 신앙을 사설(邪說)이라고 하는데 사실 소승불교나 티벳에서 유전되어온 불교에는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절대적으로 육식을 금지하는 계율이 없다. 불교는 줄곧 사원(寺院) 중에 전승되어왔기에 자연히 승려가 아닌 사람에게는 법을 전하는 것을 부정한다 (사실 티벳불교 중의 한 상사(上師)는 처자식이 있다).

이런 예언들은 시간이나 장소 인명이 명확하지 않으며 각종 이견(異見)들을 한데로 나열한 연후에 다른 신앙 위에 뒤집어 씌운 것인데 “놀랄만큼 정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정확하지 않다면 도리어 “사람을 놀라게 하는” 일일 뿐이다.

사실, 이런 예언은 단지 자기 개념 범위 내의 이른바 “이단(異端)”일 뿐이며 그 범위를 벗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한다. 이홍지(李洪志) 선생님께서는 미국에서 설법하실 때 모든 설법을 인터넷상에 발표하셨다. 불교 예언 중에 미국을 언급한 것이 있는가? 인터넷을 언급한 것이 있는가? 이홍지 선생님께서는 설법 중에서, 특히 최근의 설법 중에서, 아주 많은 수수께끼들을 드러내셨다. 불교 예언 중에 우주의 횡향(橫向)과 종향(縱向)구조를 설명한 것이 있는가? 표면공간(表面空間)을 언급한 것이 있는가? 소우주(小宇宙)가 형성되는 정황을 언급한 것이 있는가? 삼계(三界)가 왜 생겼는지 언급한 것이 있는가? 지구가 여러 차례 겪은 정황을 언급한 것이 있는가? 지구상 각종 물질의 연원(淵源)을 언급한 것이 있는가? 인류가 지금과 같은 형상을 갖게 된 내원(來源)을 설명한 것이 있는가? 인류의 역사, 민족, 문화, 예술의 근원을 언급한 것이 있는가? 과학이 생겨난 근본원인을 설명한 것이 있는가? 이런 사정들에 대해 말한다면 이런 “사람을 놀라게 하는 예언”은 사람을 놀라게 할지는 몰라도 정확하지는 않다.

불교 중의 어떤 경전 중에는 아주 강한 배타성과 봉폐성을 띤 것이 있는데 특히 판교(判敎)나 위도(衛道)방면의 논술은 대단히 엄격하여 각종 이견(異見)들을 대단히 상세하게 열거해놓았다. 많은 승려들은 이 때문에 경전을 믿고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불교경전은 모두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수 백년 후에야 문자로 정리된 것이며 그 후에 인도로부터 다시 번역된 것임을 망각한 것이다. 종교 내부의 각도에서 보자면 수련은 반드시 전일(專一)해야 하고 교의(敎義)는 반드시 순결해야 하므로 이런 배타성을 크게 비난할 수는 없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홍지 선생님은 수련은 전일 해야 함을 강조하셨고 서로 다른 종교를 섞어서 수련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한 종교의 신도가 자기 종교 경전의 배타적인 논술을 가지고 이단을 열거하는 유일한 목적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 예언”을 가지고 다른 종교를 훼멸시키려 하는 것이라면 너무나 천박하고 무지한 짓이다.

이른바 한 “불교도”가 일찍이 그가 등급을 매긴 “사람을 놀라게 하는 예언”을 인터넷상에 올려서 많은 사람들이 대량으로 法輪功(파룬궁) 수련생을 구원한다는 글을 전재(轉載)한 적이 있다. 필자도 전에 한 기독교도가 자신이 불교도를 이른바 “전화”한 대화록을 인터넷상에 올려 사람들이 “잘못하여 기로에 빠진(誤入岐路)” 불교도를 구원한 이야기를 전재하게 한 것을 본적이 있다. 사실 法輪功(파룬궁) 수련생 중에는 이전에 불교도로서 능엄경, 금강경 등을 숙독(熟讀)했던 사람이 나중에 法輪功(파룬궁)으로 전화한 예가 적지 않다.

송명(宋明) 이학(理學)의 대스승 중에 이학(理學)을 주창한 주희(朱熹)와 심학(心學)을 주창한 왕양명(王陽明)과 같은 경우 모두 젊은 나이에 불교에 빠져 들어간 적이 있다. 그러나 최후에 선(禪)을 벗어나 유교(儒敎)로 돌아와서는 유가의 공맹(孔孟)경전을 정종(正宗)으로 삼고 불교경전을 이단(異端)으로 배척하였다. 유교와 불교의 변론에서 불교의 “출가(出家)”와 “공적(空寂)”이라는 설법에 대한 비평은 더욱 강렬하여 심지어 유학과 불학의 구별을 공(公)과 사(私)의 의리(義利)로 구별하기까지 하였다.
필자는 유교와 불교의 고하(高下)를 가리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으며 단지 불교경전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사람은 응당 이런 사실을 정시해야 함을 알리고자 할 따름이다.

경전에는 분명히 진리성(眞理性)과 사실성(事實性)이 있지만, 단 경전이 진리의 최후(終極)를 대체할 수는 없고 또한 사실의 전부를 대체할 수도 없다. 경전을 인용하여 다른 사람의 사상과 논술을 공격하는 것은 사실상 경전 밖의 사실(事實)과 진상(眞相)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두려움으로 인해 그들은 비로소 사회 문화 중에서 전력을 다해 경전의 권위를 세우려고 하며 사람들이 권위를 경외(敬畏)하는 심리를 이용하여 경전으로 진리를 대체하고 경전으로 사실을 대체한다. 심지어는 과학을 숭상하고 미신에 반대하는 이른바 “유물주의자” 조차도 法輪功(파룬궁)을 비판할 적에 종교경전을 근거로 인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종교재판소는 일찍이 경전에 근거하여 천동설(天動說)을 증명하고 지동설(地動說)을 부정하였으나 이것은 사실 지동설을 두려워하여 나타난 현상으로 지동설이 사실임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비록 당신이 인용한 경전에서 명확하게 지동설을 마귀의 사설(邪說)이라고 하더라도, 당신이 다른 사람을 화형대 위에서 태워 죽인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지동설이 사실임을 부정할 방법이 없다.

필자는 일찍이 서양 의학계와 심리학(心理學)계의 일부 인사들이 윤회전세(輪回轉世)에 관해 연구한 내용을 문장으로 쓴 적이 있다. 이런 연구에서 발굴한 정신(精神)층면의 정보는 아주 명확한데 윤회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 전생의 세부적인 절차, 종교문화를 포괄한 인류문화, 고층생명의 상태 등에 관한 문제의 묘사와 서술이 불교의 인식과는 서로 같지 않지만 法輪功(파룬궁)의 서술과는 더욱 부합하였다. 이런 연구자들은 종교경전에 대하여 아주 선의(善意)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만 단 경전에 속박되지는 않는데, 이는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자신들이 연구하는 범위 내의 사실과 진상이기 때문이다. 비록 일부 교조주의(教旨主义)자들이 경전을 인용하여 그들에 대한 공격을 했으나 이것이 그들이 연구한 과학연구의 가치에 대한 평판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法輪功(파룬궁) 수련생 중에 아주 많은 사람들은 서양과학의 교육을 받았으며 명혜망이나 정견망 상에 정리하고 연구 토론(探討)한 매우 많은 현대과학과 초자연현상에 관한 연구를 받아들여서 그들은 사실과 진상을 담담하게 본다.

法輪功(파룬궁)에는 20여종의 서적이 있으며 사상(思想) 각도상 완전한 한 세트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또한 종교, 문화, 역사, 과학, 우주, 시공, 신체 등 각 방면에 걸쳐 논술하고 있으며, 도량이 넓고 원융(圓融)하며 심오하다. 그 영향은 짧디 짧은 수 년만에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퍼졌으며, 천만을 헤아리는 각개 각층의 사람들이 “모든 악을 행하지 않으며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게” 하였다. 지금 종교 신앙마저도 감히 더 이상 과학과 더불어 사실(事實)이나 진리(眞理)를 논쟁하지 못하는 시대이기에 사람들의 마음이 종교와 더 멀어졌으며 도덕은 급속히 미끄러져 내려가는 시대이다.

그러나 法輪功(파룬궁)은 능히 수많은 수련생들로 하여금 마음을 닦아 선을 향하게 하였고, 피비린내 나는 박해 속에서도 의연히 선(善)을 선택할 것을 고집하게 하였고 동시에 심태(心態)를 개방하여 과학, 문화, 역사, 예술과 토론하게끔 하였다. 이런 거대한 도덕 감화력과 이런 박해와 비방 속에서도 의연한 조용하고 자신있는 태도는, 마땅히 그런 진상을 박해하고 경전 속으로 숨어들어 간 사람들을 깊이 생각해 보게끔 한다. 그 해에 예수가 출현하여 유태교를 촉동(觸動)시켰을 때나 석가모니가 출현하여 바라문교를 촉동시켰을 때도 그런 신도들은 모두 일찍이 경전에 근거하여 비방과 모함을 하였을 텐데, 사실 마찬가지로 진리와 사실에 대한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다.

대륙의 “전화반”은 아무리 그 피비린내 나는 폭행을 엄폐할지라도, 역시 그들이 사설(私設)감옥을 만들어 국민이 가지는 신체와 신앙의 자유를 박탈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전화반”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불교의 신도가 아니라 폭력의 신도로서 곧 폭도(暴徒)임을 가히 긍정할 수 있다. 이런 폭도들이 태연히 불교경전을 가지고 法輪功(파룬궁)을 공격하는데 사실상 이것은 부처님에 대한 모독이다.

필자는 진심으로 부처님과 불교신도들을 존중하며, 동시에 불교경전을 존중한다. 그러나 일부 공산당의 비호를 받으면서 이 정당의 정치를 위해 경전을 인용하여 法輪功(파룬궁)을 공격하며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돕고 있는 이른바 “불교도(佛敎徒)”들을 말한다면 그들의 어디가 부처님의 신도인가? 부처님께서 어느 때에 재난에 처한 다른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가? 불교경전 중의 예언을 가지고 法輪功(파룬궁)에 대해 등급을 매기는 이런 사람들은 사실상 자기 자신들에 대해 등급을 매기고 있는 것이다.

불교경전에서도 말법시기에 일부 출가인 마저도 마(魔)로 변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대륙당국은 대량의 불법적인 “전화반”을 봉폐식으로 꾸리고 있는데, 이런 부처님의 얼도(蘖徒)들이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고 모함하는 장소를 제공하고, 도리어 法輪功(파룬궁) 수련생들은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대륙 민중들이 명혜망을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 자체가 바로 그들이 진상과 사실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표명(表明)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문 : 2003-9-28 발고 : 2003-0-29

문장분류 : 기실평론(紀實評論)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3/9/29/5814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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