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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작은 이야기

나의 직업은 크리에이터(창작가)이다. 나의 작업실은 뉴욕 허드슨인데, 담배 공장을 개조하여 만든 곳이다. 다층 건물 안에는 4백여 명의 예술가들이 있다.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각양각색의 예술가들이 다 있다. 그 중 80%는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나는 뉴욕시에 살고 있다. 1998년 9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리버사이드 파크의 법륜대법 연공 행렬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법을 처음 접하는 것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중국인들과 알고 지낸다고 자랑하기를 좋아하였다. 당시 나는 ‘중국 사람들이 모두 법륜공을 연마하면, 중국 사회가 얼마나 좋게 변하겠는가’라고 생각했다. 얼마 되지 않아 1999년, 7‧20 사태가 발생했다. 연공장의 수련생들이 나에게 찾아와 소책자를 만들고 진상을 알리는 일을 시작했다. 당시 나는 정의감으로 일하였으나, 법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속으로 ‘또 천안문 사태인가? 그들이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법회도 적게 참가했다. 나는 책이나 보면서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게 되니 동수들도 나에게 법회에 참가하자고 묻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법회를 여는 곳이 항상 내가 일이 있는 곳이거나 전람회에 참석할 도시들이었다. 참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동수들의 심득체험을 듣게 되어 참으로 놀랐다. 그들과 너무나 먼 거리감을 느꼈다. 중국 정부가 법륜공을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진압한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대뉴욕 지구 수련생들이 진상을 알리는 활동도 더욱 많아졌다. 나는 다른 동수들과 함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여러 도시로 분주히 다니지 못하여 마음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이 법은 좋은 것이기에 경솔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사부님께서 >에서 그런 사람들을 지적하셨다. “많은 수련생은 사람의 관념으로 대법에서 같지 않은 인생 동경과 소원을 찾았다. 바로 이런 사람 마음의 집착에 사로잡혀 대법수련 중에로 들어왔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집착심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며 법에서 법을 인식하지 못함이다.”

나는 항상 ‘이렇게 지내면 안된다. 수련은 엄숙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때에 그칠 뿐이었다. 동수들은 나에게 찾아와 선전하는 작업을 하였고, 나도 돕느라 바쁘게 지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감을 느꼈으며, 또한 정법 일에 명확한 인식이 없었다. 하루는 법공부 중에서 수련생이 사부님께 여쭈어본 내용을 보게 되었다.

수련생 : “왜 불순한 목적을 품고 법을 배우러 온 사람도 능히 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히 할 수 있으며, 또한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사부 : “왜냐하면 이것은 대법이 가장 낮은 층차에서의 체현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주 대법은 사람에게 수련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는 부동한 층차의 생존환경을 창립해 주는 것이다.” >
나는 나의 활로를 찾았다.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기 내가 한 예술가에게 방문하려고 어느 주(州)로 갔다. 도망가는 심정이었다. 갈 때 미술도구, >, 연공 테이프만 가져 갔다. 그림 그리는 외에 아침마다 한 중국산 버드나무 밑에서 연공했다. 미국 각주에서 온 23명과 유럽에서 온 2명이 남쪽의 조용한 장원에 머물렀다. 나는 무엇을 하겠다는 마음도,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그저 그들이 대법을 모르기에 뉴욕의 동수에게 자료를 보내달라고 했다. 아침에 내가 연공할 때, 따라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점심 때 소개해 주었다.

3주가 지나자 장원에 머무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이 연공을 하게 되었다. 밥먹고, 창작하는 시간 외에는 ‘법륜공’이었다. 수련생이 부쳐준 자료가 도착했다. 나는 그것들을 라운지의 책상 위에 놓았다. 4주간의 방문 일정이 끝나고 돌아가기 하루 전날, 그 중국산 버드나무에는 법륜공을 지지하는 글로 가득차게 있었다. 그날 점심 때 우리는 같이 연공하였고, 연공하지 않던 사람들도 모였다. 어떤 사람은 옆에 서서 구경하였다. 글이 적힌 플래 카드는 바람에 나부끼고, 대법 음악은 언덕과 평원에서 울려퍼졌다. 그 정경은 정말로 상서로왔으며, 내가 알고 있던 예술가들의 마음과 영혼의 세계와는 완전히 달랐다.

올해 2월 달에 직업 상 Mt. Vermont Studio Ceer 예술촌에 한 달간 창작을 위해 머무르게 되었다. 2년 전의 경험이 있었기에, 떠나기 전 동수로부터 많은 자료와 동영상을 챙겼다. 매 한 장의 CD를 다 자세히 보았다. 때가 되면 개개인의 상황에 맞추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준비해 간 것이다. 그곳에 도착하여보니 날씨가 영하 10-20도였고, 예술가들은 23세에서부터 62세까지 각 계층의 사람들이 다 있었다. 또한 여러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이었고, 52명이었다. 매일 함께 세끼 밥을 먹었는데, 전문적으로 예술가들이 모여 조용히 가부좌하고 생각하는 방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수행에 있어서 다 일정한 인식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사람들은 대법을 받아들이기 더 힘들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은 경쟁심이 강했기에, 나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 또 내심, ‘뉴욕에 일이 많이 있는데, 내가 여기에 와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도 없어져서 동수에게 전화하여 이야기하였다. 그 수련생은 듣고서 그곳에 젊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나는 안일한 마음, 세속적인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나는 매일 정각 발정념을 하고 >을 읽고 가부좌를 하였다. 이상한 것은 아무리 저녁에 늦게 자도 아침 5시면 꼭 일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번은 여러 사람들과 연공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갑자기 한 사람이 나에게 태극권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현재 법륜공을 연공한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법륜공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뉴욕에서 온 한 젊은 여성은 좋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내가 조용히 “5시 30분에 도서관에서 연공하니, 와서 보세요.”라고 했다. 다음날 그녀는 정말로 왔다. 그 다음날도 왔고, 3일째 되는 날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법륜공은 특별하다.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 몸이 가벼워진다.”고 말했다. 그들이 흥미를 갖게 되어, 나는 일부 자료를 주었다. 이렇게 며칠동안 아침 연공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고,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들 나를 보면 법륜공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사실 나는 남의 이목을 끄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뉴욕의 동수들은 엄동설한이나 비바람 속에서 진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데 나는 문 앞에 가져다준 것도 도피하고 있었다. 사부께서 북미 순회 설법에서 말씀하신 세가지 일, 첫째는 법공부를 잘하는 것이고, 둘째는 진상을 잘 알리는 것이며, 셋째는 발정념을 중시하는 것. 나는 작년에 사부께 직접 듣고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귓가에 오랫동안 맴돌았다. “우리 대법제자들로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가슴아픈 문제만이 아니다. 잘 수련된 사람은 돌아가면 정말로 하나의 대원만(大圓滿)인 것으로 그에게 무한한 희망을 기탁한 중생들은 모두 그에 의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일부 수련을 잘 하지 못하여 돌아간 사람, 그의 우주는 불완전한 것이다.”>

어느 하루 중국에서 온 예술가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사업가적 기질을 갖고 있는 선량한 사람이었으나, 머리 속에는 나쁜 것이 담겨 있었다. 법륜공이 사회 불안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나는 일어나면서, “우리는 이론적인 것을 그만 이야기 합시다. 법륜공 수련자들이 ‘진,선,인’을 추구하는데 무슨 위협이 되겠습니까? 이곳의 예술가들만 이상한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연공한지 2주일도 안되는데, 모두들 중국이 왜 이 상서로운 공법을 탄압하는지 의문을 갖는다. 매일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요리사도 연공음악이 참 상서로우며, 듣고 나면 조용해지는 것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당신도 천안문 사건으로 해을 입은 사람이 아닙니까? 마음으로 마음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는 침묵하였으며, 그날부터 더는 논쟁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진상을 이야기할 때마다 내가 이전에 이론에 맴돌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론은 세인들이 사실을 똑바로 보고, 미혹당하지 않게 하기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이론은 다른 의도를 품은 사람에게 이용당한다. 이론으로 사적인 목적을 은폐하고 깊이 숨긴다. 국가나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말살한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당시에 사람의 소원을 품고서 대법에 들어왔다. 또 사람의 문화사상으로 수련하여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고려하였다. 수련은 신성하다. 오로지 순정한 마음으로만 수련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곧 도태된다. 세인에게 진상을 말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절실히 체험했다. 이전에 모순 속에서 헤맬 때는 정말로 고통스러웠다. 자신이 근본 상에서 법에서 법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지만, 한달 간 매시각 발정념하고 법공부를 하였던 그 결심이 주위 환경을 개변시켰다고 생각했다. 한달은 빠르게 지나갔다.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연공에 참가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떠나는 날까지 견지했다. 한 번 혹은 두 번, 몇 번이든 간에 오기만 하면 복이 있다. 나는 사람이 많고 적은 것을 생각지 않았고, 왔다가는 사람들에 대해 자책하거나 동요하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마지막 날 고별 연회에서 광주에서 온 도예가는 “이번에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법륜공이며, 매일 아침 연공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인터넷으로 책까지 주문하였다. 두 명의 젊은이는 마지막 날 연공을 해본 것이 매우 좋았으며, 안 했더라면 손해였을 거라고 했다. 연공을 하지 않던 사람들도 아주 점잖게 자료를 요청했다. 처음 가져갔을 때는 어떻하면 좋을지 몰랐는데, 마지막에는 경쾌하면서도 신중하게 자료를 나누어 주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내고 사려고 했다. 그 날 저녁 사부님의 >을 보고 소리내어 읽었다.

여 래
여의진리 지니고 와
소탈하게 사해(四海)를 다니면서
법리를 온 세간에 뿌리네.
중생을 가득 싣고 법선이 떠나네.

처음으로 수련이 정말로 고생스럽지 않다고 느꼈다. 한번도 쓰지 않던 붓을 들고 몇 번이나 베껴썼다.

3월에 Vermont산에서 뉴욕으로 왔다. 그림 전람회가 있어서 비행기표를 사두려고 서두르는데 수련생이 제네바 법회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전람회가 열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 가자, 어차피 달아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제네바 법회에 참석하고 전람회장으로 돌아올 때, 동수 구출을 위한 서명운동 편지를 두 장 가지고 오면서 생각하기를, ‘예술가들을 만나면 서명을 받을 수 있겠지’했다. 전람회 기간 동안 마음에 자꾸 이 일이 생각나 어디에 가나 서명용지를 가지고 다녔다. 한 사람이 식사에 초청했는데, 그 사람은 현지의 건축가인 보라 6세였다. 그는 내가 제네바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적극적이지 못한 마음으로 서명용지를 보여주었으나, 그는 자세히 읽더니 서명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서명용지를 들고서는 식탁마다 다니며 서명을 받아주는 것이었다. 결국 독일 사람들 모두가 중국에서 핍박받는 수련생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보게되었다. 그날 저녁 ‘고요한 바블리야산 중의 술집’에서 식사를 한 사람들은 전부 서명을 하였다. 나는 빈 서명 용지가 한 장 남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제네바의 수련생에게 연락해서, 서명용지를 가지고 전람회에 와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친구에게 서명을 받아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친구는 바로 전람회의 책임자였다. 또한 2년전 중국산 버드나무 아래에서 연공을 하였던 사람이었다. 전람회가 개막되자 3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내가 제네바에서 온 수련생과 함께 회장을 돌아다니자,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되었는데, 나중에 보니 사람들은 수련생이 가슴에 달고 있던 “I Support Falun Gong”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큰 기둥 옆에 서 있게 되었는데, 한 사진사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그 수련생은 “우리를 작품으로 여긴다”며 웃었고, 나도 웃었다. 얼마 안있어 친구가 기쁘게 서명용지를 들고 오면서 서명을 전부 받았다고 하였다. 며칠 전 전람회장의 사무원은 서명을 받는 일은 적절치 않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두 장의 서명용지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수련에 참가하게 되어 이미 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매번 법회에서 동수들의 발언을 들을 때마다, 특히 1999년 7‧20 이후 반신반의하였던 내가, 이렇게 대법을 수련하게 되고, 이 법과 사부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보잘것없는 사람에서부터 겉으로나 속으로 정정당당한 대인으로 변모하게 된, 내가 지내온 이 경력은, 사실 이 법이 어떻게 원용하고 마음을 닦으며, 홍대한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나의 인식 수준에서 배회하고 있지만, 오늘 이곳에서 이야기한 세 개의 작은 이야기도 아름다운 꿈만 같다. 사부께서 >을 통해 말씀하신 “당신들이 한 그 일채는 사실 모두 당신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이 몇 년동안 동수들의 포용과 격려에 대해, 또한 자비하신 사부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신 것에 마음깊이 감사를 드린다.

2003/4/4 작성
(워싱턴DC 법회 발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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